소설리스트

51화 (51/182)

47화

* * *

이제야 하는 생각이지만, 엘레니가 독을 마시지 않아서 다행이다.

중화제를 먹지 않은 그 애였다면 분명히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 테고, 불려온 마법사나 의사는 중독되었다는 진단을 내렸겠지.

무도회는 당연히 망쳐졌을 것이고, 주최자인 나, 직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엘레니와 잔을 바꾼 나는 의심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확신했다.

‘엘레니는 알고 있었어.’

아마 새어머니의 계획은 내게 독을 먹이는 데서 끝이었을 거다. 그녀는 자신의 딸까지 이 일에 끌어들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즉…….

‘잔을 바꾸자고 한 건 엘레니의 자유 의지야.’

……나를 보다 완벽한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말이다.

“……녀, 공녀!”

“!”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뒤늦게 부르는 소리를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회장에 들어가는 복도에서, 황태자가 숨을 가쁘게 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일 아니었던 겁니까? 의사는?”

“단순한 취기였어요.”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드릭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놀라기야 많이 놀랐습니다만.”

“그런데 전하, 엘리베이터는요?”

황태자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당연히.”

“사람들은 알아서 잘 놀고 있습니다. 공녀는 공녀의 몸만 걱정하면 됩니다.”

하긴, 만족도 게이지 바를 보면 완전히 꽉 차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대중으로 가늠하기에 80% 정도는 차 있었다.

그때 황태자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뻗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아직도 파트너와 춤 한 곡 추지 못했다니, 믿어지질 않습니다.”

“……그러게요.”

나는 세드릭의 팔에서 손을 빼고 황태자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드릭의 반대쪽 손이 내 손을 붙잡는 게 더 빨랐다.

그가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후작, 무슨 짓이지?”

황태자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물었다.

“설마 내 파트너를 빼앗으려는 건가?”

“그럴 리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세드릭의 팔에서 손을 뺐다. 이번에는 세드릭도 막지 않았다.

“세드릭 경은 저를 걱정하실 뿐이에요.”

“이런, 그사이에 세드릭 경이 된 겁니까?”

황태자가 자연스럽게 팔을 내주며 키득키득 웃었다.

“내게도 애칭이 있습니다만, 공녀. 한번 불러 보실 생각은?”

“신하 된 자에게 그리 어려운 일을 시키시다니요. 말이 안 됩니다.”

내 일축에 황태자가 하하 웃었다. 세드릭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의 시선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쓰러지거나 혹은 그럴 기미만 보이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다시 휴게실로 끌어갈 거란 뜻이지, 이거…….’

나는 걸음을 조심하며, 평소보다 더 멀쩡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홀에 도착했다.

“공녀! 컨디션은 좀 괜찮으신가요?”

“좋아졌어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해요.”

“에스테반 후작 각하께서 공녀를 다시 모셔 오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태자 전하께서 납시셨군요.”

“하하…….”

나는 멋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작 부인을 위시한 사람들은 묘한 웃음을 머금은 눈길로 우리 셋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럼 세드릭 경, 저는 전하와 함께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야죠.”

나는 부러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세드릭의 표정은 여전히 편치 않은 기색이었다.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공녀.”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나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저를 지켜보시다가 경께서 무도회를 즐길 기회를 놓치신다면, 주최자로서 참 슬플 것 같아요.”

“……그렇다면.”

세드릭이 속을 알 수 없는 회색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무도회를 즐길 수 있게, 다음 춤은 저와 함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에스테반 후작.”

느긋하게 우리 둘을 지켜보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 파트너와 춤 한 곡도 추지 않은 사람을 벌써부터 낚아채려는 건가?”

어쩐지 아까보다 장난기가 많이 빠진 목소리였다.

세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겠습니다.”

“아, 네…… 좋아요.”

* * *

얼떨결에 승낙해 버린 나를 황태자가 채근하듯 잡아끌어 한 곡을 추고.

정말로 기다리고 있던 세드릭과 두 번째로 춤을 췄다.

그렇게 보란 듯이 연달아 두 번 춤을 춘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담소까지 나누었다.

그 결과…….

퀘스트 완료: ‘완벽한 무도회’를 개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오늘 무도회는 신기한 볼거리와 여흥을 충분히 제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사교계의 신성’ 칭호를 획득합니다.

칭호의 효과: 화술 +30, 매력 +30, 기품 +30. 당신의 이름이 카시스 제국 사교계에 긍정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합니다.

……해냈다.

중독 상태로 꿋꿋하게 버틴 보람이 있었다.

이제는 정말 몸이 한계에 달한 듯 현기증이 핑 돌았지만,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배웅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공녀. 정말 멋진 밤이었어요.”

답례품을 받아 돌아가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참 이상한 일이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방금 공녀의 모습이 참 매력적이지 않았니?”

“그러게요. 사람이 기품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저만하면 말도 제법 하고, 똑똑해 보이기도 했어요.”

“쉿, 어머니. 이모님. 들리겠어요.”

……나는 못 들은 척하면서, 상태창을 불러내 보았다.

<성명: 유리 엘로즈>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마탑주의 임시 제자, 베테랑 협상가, 다재다능, 보주의 해방자, 평화의 수호자, 사교계의 신성>

명성: 6405

마나: 288/1000

지력: 273/1000

화술: 270/1000

매력: 225/1000

기품: 190/1000

정신력: 140/1000

정화력: 40/????

어쩐지. 방금 칭호를 얻으면서 매력이 200을 넘었구나.

‘매력적이라니. 슬슬 능력치를 올린 효과가 나타나긴 하는군…….’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녀, 공녀?”

“아! 태자 전하.”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기에?”

“별거 아니었어요.”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어 상태창을 지워 버렸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렇게 말하면서, 황태자가 갑자기 내 양쪽 팔꿈치를 살며시 감싸듯이 잡는 게 아닌가?

“……?”

그리고 다음 순간.

“전하……!”

황태자가 내 뺨에 가볍게 뺨을 맞대며 몹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녀의 성공적인 ‘홍보 활동’에 경의를 표하며.”

뺨은 가볍게 맞닿았던 것처럼 다시 가볍게 떨어졌지만,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미처 갈무리하지 못했다.

당연히 침범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적인 거리감을 거리낌 없이 좁힌 황태자가 그런 날 보며 후후 웃었다.

“그럼 공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아까까지 그렇게 친근하게 굴었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깔끔한 인사였다.

‘거참, 곤란한 사람이네.’

괜히 싱숭생숭해지려고 하잖아. 그나마 사람들이 거의 다 돌아가서 다행…….

“……응? 칼릭스, 날 왜 그렇게 바라보니?”

“……그걸 몰라서 물으십니까?”

“?”

칼릭스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치 이 한심한 사람을 어쩌겠냐는 투다.

“인사나 마저 하시죠.”

“누가 또 남았어? 아, 에스테반 후작님.”

“세드릭입니다.”

왜일까? 그렇게 대답하는 세드릭의 표정이 묘하게 어두워 보였다.

‘……기분이 안 좋은가?’

“세드릭 경,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단조로운 대답과 달리, 그는 금방 돌아가 버리지 않고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경?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아까 내가 음독을 한 게 신경 쓰이나 봐.’

하기야, 나였어도 신경이 쓰여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쯤이야 별일 아니라는 듯이.

“전 이제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경.”

“…….”

“그렇게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면 다행인 겁니까?”

“매번 이렇진 않으니까……요?”

“…….”

세드릭은 굳은 얼굴로 침묵할 뿐이었다.

결국, 보다 못했는지 칼릭스가 옆에서 나섰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후작, 이제는 돌아가 보실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

“제 누이는 제가 돌보도록 할 테니까요.”

“……하.”

그 순간, 세드릭의 얼굴에 비웃음 비슷한 미소가 스쳤다.

“!”

그를 눈치채지 못할 칼릭스가 아니었다.

“지금 무슨……”

이런, 안 되겠다.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세드릭 경,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저도 그렇고 칼릭스도 이제 쉬러 들어갈 시간이거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 정말 괜찮아요.”

“…….”

잠시 침묵하던 세드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집은 팔그란츠 1가에 있습니다. 이후로 에스테반 후작가의 문은 상시 공녀를 위해 열려 있을 겁니다. 무슨 일이든, 찾아 주십시오.”

“…….”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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