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82)

46화

……응?

“잔을?”

“네, 너무 향기가 좋아서…… 언니의 샴페인을 마셔 보고 싶어요. 허락해 주실 수 있나요?”

나는 순진무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엘레니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엘레니는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내 와인과 똑같은 와인이 마시고 싶다면 나중에 석식 때 준비하도록 이를게, 엘레니.”

“어, 언니.”

“미안.”

나는 깔끔하게 엘레니를 외면하고, 사람들을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모두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저녁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랄게요.”

사람들이 웃으며 다 같이 잔을 들어 보였다.

여기저기서 잔을 부딪치는 소리를 배경 삼아, 나는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독주를 마셨습니다!

효과: 의식 불명.

아, 역시 예상대로…….

곧바로 나른하게 몸에 힘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중화제를 복용하고 있습니다.

독의 효과가 중화됩니다.

나는 까무룩 잠기려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 수 있었다.

아찔한 머리로 간신히 생각했다.

‘……대비하길 잘했어.’

와인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챈 순간부터, 나는 여러 가지 대비책을 준비했다. 중화제 역시 그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다수의 손님들보다는 내가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기에, 회장에 오기 전에 미리 중화제를 복용해 두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중화제로는 독의 효과를 다 막을 수 없었고,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고 말았다.

“어머, 공녀님이 왜 저러시죠?”

“술이 너무 독했나?”

휘청거리는 내 이상을 눈치챈 황태자가 나를 붙들려는 순간.

“엘로즈 공녀.”

순간, 명료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세드릭 경?”

“정신을 차릴 수 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독의 효과가 중화되기는 했지만, 반듯하게 정신을 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휴게실로 모시겠습니다.”

“잠깐, 후작. 공녀는 내가……”

황태자가 나서려고 했지만, 나는 간신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전하께서는…… 하실 일이…….”

내가 말하는 바를 깨달은 황태자의 표정에 순간 기가 막힌 기색이 스쳤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세드릭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좀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어지럽네요. 저는 휴게실에서 잠시 쉬다 올게요.”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 길을 터 주었다. 나는 가물가물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쓰며 걸었다.

다행히 손님들의 만족도는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공녀.”

휴게실에 도착하자, 세드릭이 소파에 나를 비스듬히 기대게 했다.

“지금 당장 부를 수 있는 치유 마법사가 저택 내에 대기하고 있습니까?”

“괜찮아요,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

가물가물한 눈을 떠 세드릭을 바라보니, 그는 무섭도록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공녀는 지금 음독을 하셨습니다.”

“…….”

……그걸 얘가 어떻게 알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독을 마셔서일까, 나도 모르게 절제 없이 본심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세드릭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알고 마신 겁니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 입에서 나온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이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알고 마신 거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방법이 없다.

“……아, 갑자기 기절할 것 같은 느낌이…….”

눈을 감고 힘없이 소파 위로 늘어지자, 세드릭이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토했다.

“지금 당장 마법사를 부르셔야 합니다.”

“안, 돼요.”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 말에 기가 막힌 세드릭이 뭐라고 하기 전에,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법사를 부르면…….”

아직 숨이 가빠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제가 음독을 했다는 걸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없어요.”

“그럼 안 됩니까?”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복용한 중화제 덕분인지, 아직은 어지럽긴 했지만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명료해지고 있었다.

“경, 이번 무도회는 제 이름을 내걸고 개최한 무도회예요.”

“…….”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게 당신의 생존보다 더 중요합니까?”

“!”

세드릭이 보란 듯이 내 손을 잡아 올려 내게 보여 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손톱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중독의 증거였다.

순간 섬찟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의연히 마음을 다잡았다.

‘중화제도 먹었고, 죽으려면 진작 죽었어야 해. 별거 아냐.’

나는 세드릭의 손에서 식은땀으로 차갑게 식은 손을 빼며 말했다.

“보기만큼…… 그렇게 지독한 독은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미리 중화제도 먹었어요.”

세드릭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그러니까 공녀의 말은…….”

“…….”

“독인 줄 알고 마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 상황을 예측까지 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제 와서 뭘 숨기랴?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네.”

“하…….”

“제가 이 무도회를 망치는 게 독을 먹인 분의 목적이에요, 경.”

“…….”

나는 차갑게 식은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 세드릭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지 않아요. 부탁이에요.”

“…….”

세드릭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 * *

간절한 부탁을 마지막으로, 유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불안해진 세드릭이 유리를 부르려는 찰나, 그녀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기절하거나 자는 게 아니에요. 어지러워서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5분 뒤에 알려 주세요…….”

그 말과 동시에, 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세드릭은 마른세수를 하고 싶어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유리는 자신에게 독을 먹인 사람이 누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세드릭은 범인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전에 그는 유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집안에서 소외당하고 계십니까?”

그때 자신은 이 집안의 묘한 기류를 ‘눈치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멍청한 질문은 없었다.

‘소외당하고 있냐니…….’

단순히 무도회 하나 여는 것도 독을 먹여서까지 방해하려고 할 정도였다.

‘소외’라는 단어로 이 상황을 설명할 순 없었다.

증오라면 모를까.

“…….”

머리가 아팠다.

축제 날에 허술한 로브 하나만 덧입고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던 공녀를 떠올렸다.

그때는 귀족 아가씨의 철없는 일탈 정도로만 치부했지만,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거나 부리는 게 당연해야 할 사람이, 굳이 변장을 하고 도시의 거리를 홀로 떠돌았던 것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소외당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가볍게 미소 띤 얼굴로 “어떻게 알았냐”고 되묻던 유리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소외’라는 단어 속에 우겨 넣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서늘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 안에서조차 보호받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만큼 익숙하다는 건가……?’

세드릭이 복잡한 속내를 쓸어내리고 있던 중에, 단정한 노크 소리가 휴게실을 울렸다.

“누구십니까?”

“……칼릭스 로잔헤이어입니다.”

“…….”

세드릭은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걸 느꼈다.

잠들지 않겠다던 유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들어오라고 해도 되는 건가?’

칼릭스 로잔헤이어 소공작이라면 유리의 이복동생이 아닌가?

‘그도 공녀를 해하는 데 가담했을지도 모른다.’

세드릭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상대방은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에스테반 후작, 문을 여십시오. 누이를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완벽한 타인이었고, 칼릭스가 가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유리를 보고자 한다면 막을 수는 없었다.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지켜보는 수밖에…….’

그렇게 결심하고, 세드릭은 문을 열었다.

“…….”

휴게실 밖에 서 있던 소공작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마치 세드릭이 제 누이를 해코지하려는 불한당이라도 된다는 듯한 투였다.

“비켜 주시지요.”

“…….”

세드릭이 문에서 말없이 비켜 길을 열어 주자, 칼릭스가 어깨로 그의 가슴팍을 치며 — 분명히 고의였다 — 안으로 들어갔다.

휴게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기대어 있는 누이를 본 소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세드릭을 향해 물었다.

“의사를 부르셨습니까?”

“공녀께서 원치 않으셨습니다.”

“뭐?”

칼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쌍심지를 돋웠다.

“에스테반 후작, 설마 아픈 사람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여태 의사조차 부르지 않은 겁니까?”

“…….”

언성이 높아지려던 그때.

“칼릭스.”

연약한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드릭 경께서는 내 부탁을 들어주셨을 뿐이야.”

유리가 찌푸린 미간을 끙, 하고 문지르며 일어나려고 했다.

세드릭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칼릭스가 좀 더 빨랐다.

“천천히 일어나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고마워…….”

과연. 중화제를 먹었다더니, 잠깐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독 기운이 많이 중화된 듯 유리의 창백했던 낯에 약간의 혈색이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취기가 이렇게 심하게 들 줄 몰랐어.”

세드릭은 편치 않은 심정으로 거짓말을 하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방에 돌아가서 쉬시는 게……”

“오늘 오신 분들은 내 손님들이야. 그럴 순 없어.”

“…….”

칼릭스는 제 부축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유리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름을 걸고 주최한 만큼, 유리에게 중요한 행사라는 걸.

게다가 단순한 취기였다니, 말릴 명분도 부족했다.

휘청거리던 누이의 모습은 취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독이라도 마신 것 같았지만…….

‘설마.’

대체 누가 로잔헤이어의 날개 바로 아래서, 적장녀에게 독을 먹이려고 한단 말인가? 칼릭스는 의혹을 지워 버렸다.

그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아까 엘레니와 잔을 바꾸지 그러셨습니까?”

“…….”

유리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칼릭스가 의아해진 순간, 그의 누이의 얼굴에 허물어지듯 피식 웃음이 번졌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칼릭스.”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비를 걸려고 한 건 아니야. 잊어버리렴.”

유리가 고개를 저으며, 세드릭을 향해 말했다.

“경, 다시 회장으로 저를 에스코트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세드릭이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로 유리를 에스코트하는 걸, 칼릭스는 석연찮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유리가 한 말이 계속 떠돌고 있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칼릭스.”

대체 그건 무슨 말이었을까?

불길한 예감이 혈관을 좀먹으며 심장을 파고들었다.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아무래도 뭔가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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