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82)

45화

칼릭스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파트너라는 게 황태자 전하셨습니까?”

“음…… 보시다시피?”

나는 약간 난처하게 황태자의 손을 잡으며 속닥거렸다.

“아버지께 허락을 구했어. 괜찮으시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 잔소리 시작 신호다.

“미안, 칼릭스. 나는 이제 전하와 함께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엘레니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으니, 네가 신경을 좀 써 줄래?”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칼릭스가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사라졌다.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남동생의 경계심이 대단하군요.”

“제가 태자 전하께 실례되는 행동을 할까 봐 걱정이 되나 봐요.”

“……그건 아닌 것 같던데.”

“네?”

“아니, 아닙니다. 그나저나, 저희는 위로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네, 전하. 이쪽으로.”

사람들이 곧장 홀로 들어가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는 우리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역시 전하와 함께 있으면 이목이 쏠리네요.”

“좋은 입간판이라는 뜻입니까?”

“그렇게는 말 안 했지만, 전하께서 인정하신다면야…….”

오늘 무도회가 열리는 그레이트 홀은 복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위층에서 양쪽으로 둥글게 내려오는 계단이 홀의 전면부를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계단 중앙에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대체로 잘 꾸며져 있는데, 저 가림막은 대체 뭘까요?”

“설마 보수 공사 중?”

“아무리 그래도 공사 중인 홀을 무도회를 위해 개방했을 리가요.”

“모르죠. 공녀가 그레이트 홀에서 꼭 무도회를 열고 싶다고 떼를 썼을 수도 있잖아요?”

“그나저나 공녀는 어디 갔죠?”

“입구에서 핸드릭 경이 봤는데, 태자 전하와 위쪽으로 향하더래요.”

명성이 3 오릅니다.

명성이 4 오릅니다.

나는 또다시 실시간으로 오르는 명성을 보며 짐작했다.

‘다들 엄청 떠들고 있구나…….’

그래, 뭐. 소문이 안 나는 것보다는 나는 게 낫지. 원래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그랬다.

마침내, 우리는 문을 열고 위층에 도착했다. 다만 가림막에 가려져 우리가 도착한 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후읍.’

오늘의 메인이벤트를 앞둔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그런 기색을 귀신같이 알고 황태자가 자기 팔짱을 낀 내 손등을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준비를 잘했지 않습니까?”

“걱정은 안 해요. 긴장을 했을 뿐이지.”

“다소 망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공녀를 나무라진 않을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차라리 좀 나무라 주시는 게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 더 좋지 않을까요……?”

긴장을 풀기 위해 아무 말이나 속닥거리면서, 나는 악단을 향해 신호를 주었다.

지휘자가 팔을 휘저음과 동시에, 현악기와 피아노의 협연이 시작되었다.

“어머.”

“음악이 왜 벌써……?”

사람들의 이목이 홀 정면으로 쏠렸다.

그와 동시에.

촤악!

가림막이 걷혔다.

“어머!”

“깜짝이야. 방금 뭐였죠?”

“저게 뭔가요, 대체?”

“세상에…….”

가림막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건, 전체를 유리와 금으로 만든 엘리베이터였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샹들리에의 빛을 받은 유리 엘리베이터는 마치 빛의 기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가실까요?”

문이 스르륵 열리고, 나는 황태자의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전하, 미소요. 미소.”

“그보다 공녀, 치맛자락이 끼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아차차.”

혹여 새어머니에게 들킬까 연습도 해 보지 못해서, 우리는 조금 버벅거렸다. 하지만 다행히 아래쪽에서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기, 저 안에 사람이 들어가고 있어요!”

“엘로즈 공녀랑 황태자 전하 아니신가요?”

‘명성 잘 오른다.’

부드럽게 문이 닫혔다. 황태자가 직접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하고 엘리베이터가 하강을 시작했다. 아마 밖에서 보기엔 우리가 빛의 기둥을 타고 지상에 강림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아…….”

사람들의 탄성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리는 각 잡힌 미소를 유지하며 내렸다. 그리고 나는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히는 것으로, 황태자는 팔을 휘저어 궁중식 인사를 올렸다.

잠시간의 적막 후.

짝, 짝, 짝짝.

산발적으로 터져 나온 박수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번져 천둥 같은 소리가 되었다.

누군가 “브라보!”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황태자의 에스코트로 인해 당신의 명성이 100 오릅니다!

‘완벽한 입장’을 선보였습니다. 매력이 20, 기품이 30 오릅니다.

‘서, 성공이다.’

나는 황태자에게 흘깃 눈짓하며 씩 웃었다. 황태자도 미소를 돌려주었다.

“아주 멋져요, 제가 방금 본 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주 멋져요!”

“대체 저 장치는 뭡니까?”

“엘로즈 공녀님, 태자 전하! 이쪽도 좀 봐 주세요!”

나는 최대한 환하게, 방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들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저 장치는 마동식 전층 이동기인데, 간단하게 엘리베이터라고 부른답니다.”

“아아……!”

뭐든지 신선한 거라면 다 좋은 사교계 인사들은 벌써부터 선망 어린 시선으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황태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공녀의 말은…… 이동기를 무도회장의 놀이 기구로 만들자는 말입니까?”

“단순한 놀이 기구가 아니에요. 화제를 모을 놀이 기구죠.”

나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생각해 보세요, 태자 전하. 무릇 유행이라는 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급류와 같은 거예요. 먼저는 이동기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야 해요.”

“과연, 그러니까 신기한 놀이 기구처럼 소개를 하자는 거군요.”

“신기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워야죠. 지금처럼 창살 달린 감옥 같은 꼴로는 안 돼요.”

“전체를 유리로 만들고 황금으로 장식이라도 할까요?”

“그거 좋겠네요.”

처음엔 놀이 기구겠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니 이 장치의 유용성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저택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올라가는 걸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참고로 엘리베이터라는 이름도 내가 제안했다. 마동식 전층 이동기는 꼭 어마어마한 마도구 같은 무서운 인상을 준다고 박박 우기면서.

아마 당분간은 우리처럼 무도회장에 멋지게 등장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주문이 주를 이룰 것이다.

그다음엔 설치를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반 이동용 엘리베이터 설치를 제안하고…….

그러다 보면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 되는 것도 금방이다.

“마음에 드신다면 타 보셔도 괜찮아요.”

“정말요?”

“올라가는 것도, 아래로 내려오는 것도 가능하답니다. 유리로 만들었지만, 마법사들이 일일이 다 강화 마법을 걸어 놔서 무척 안전해요.”

사람들이 반색을 하고 선망에 찬 시선으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시종이 내 쪽으로 샴페인 잔을 받쳐 올렸다.

무도회를 시작하기 위한 잔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주변의 시종들로부터 잔을 하나씩 건네받고 있었다.

나는 주의 깊게 그 모습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괜찮아. 대비는 완벽했어.’

혹시나 샴페인에 독을 타거나 할 때를 대비해서 샴페인의 밀봉 상태를 철저히 확인했고, 잔 역시 검수를 확실히 한 상태였다.

바로 그때.

“언니!”

발그레한 뺨, 삶은 노른자처럼 연한 노란색 드레스. 엘레니였다.

“엘레니.”

“등장하시는 모습이 무척 멋졌어요. 역시 언니는 좋은 생각을 많이 가지고 계시네요.”

“과찬이야.”

엘레니가 웃는 얼굴로 시종으로부터 잔을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흘긋, 곁눈질로 내 잔을 살폈다.

‘……?’

이상했다. 엘레니의 잔보다 내 잔 속의 샴페인이 더 노란빛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응? 어디서 굉장히 좋은 향기가 나요.”

그때, 엘레니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향기?’

확실히 엘레니의 말대로 짙은 꽃향기 같은 게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샴페인인가?”

엘레니가 제 잔의 향기를 맡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엘레니를 따라 샴페인의 향기를 맡았다.

“!”

……잔에서 꽃향기가 인위적일 정도로 짙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요, 언니? 뭔가 이상한가요?”

엘레니가 그런 내 쪽을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 하고 깨달은 듯한 눈빛을 했다.

“언니 잔에서 나는 향기였네요! 세상에, 신기해라…….”

엘레니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향기가 너무 좋아요. 언니만 따로 다른 샴페인을 준비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었다. 나는 내 축배만 따로 준비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었다.

‘이건 아마도…….’

나는 그간 공위소에서 보았던 새어머니의 행적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공위소에서 새어머니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주인공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최후에 사용하는 수단이 있었다.

‘독.’

공위소에서는 그녀가 사용하는 독의 출처까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므와쟁 남작 부인…….’

새어머니의 제일가는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므와쟁 남작 부인은 약초 산지로 유명한 지역 출신이었다.

그리고 무릇 약이라는 건 무지와 악의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내 새어머니께는, 무지라면 몰라도 악의는 확실하게 있지.’

나는 부엌에서 넌지시 확인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이 와인의 빈티지는 189년산이 유명한 걸로 아는데, 193년산과 어떤 차이가 있나?”

“그해 포도의 당도나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땐 189년산을 좀 더 좋은 와인으로 치긴 하지만, 향기는 193년산이 보다 화려합니다.”

내가 원래 고른 것보다 보다 향기가 좋은 와인으로 바꾼 것은 아마 여기에 탄 독의 향기를 감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평소 잘 동행하지 않는 시찰에 동행한 것도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 잔 속의 샴페인에 날 죽일 정도의 독약이 들어 있진 않을 확률이 높았다.

안 그래도 내게 이목이 쏠려 있는 무도회에서 독살을 시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천천히 음독시켜 시들시들하게 만들어서 죽인다면 모를까…….’

아마 무도회를 망치고 말 정도의 가벼운 독을 쓰겠지.

무도회장 한복판에서 토악질을 하게 만들 수도 있고…….

어쩌면 기절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머리를 잽싸게 굴리고 있는데, 엘레니가 말했다.

“언니, 혹시 저랑 잔을 바꿔 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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