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세드릭은 잠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제 아버지도 한 아이만을 집요하게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세드릭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수혜자는 제가 아니었습니다만.”이라고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를 공략할 때 언뜻 그런 얘기를 본 적이 있었다.
‘과연. 그런 사정이 있다면…….’
우리 사이에 떠도는 미묘한 공기, 약간의 말씨만으로도 정황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은 없었으리라.
세드릭이 물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
어차피 내 어머니도 아니고, 상처받을 건덕지도 없다. 그저 조금 귀찮다 뿐이지.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고.
“새어머니도 사람이시니까요. 저보다는 친혈육에게 맘이 기우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납득하신 겁니까?”
“경도 아시잖아요?”
나는 그가 내게 충분히 동질감을 가져 주길 바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같은 입장에서 납득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다는 것을요.”
“…….”
나는 바닥을 의미 없는 발짓으로 툭툭, 쳤다. 세드릭의 시선이 잠시 그 위에 머무는 것도 같았다.
“바람이 찬데, 이만 내실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 박자 뒤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를 뒤돌아보며 씩 웃어 보였다.
“오늘 나눈 대화는 저희 둘만의 비밀이에요, 경.”
“……그 역시 새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 * *
세드릭: “한 가지만은 알겠군.”
“음…… 요번에도 역시 미묘하긴 한데…….”
맨 처음에 봤던 잘 모르겠다는 말보다 발전한 건 맞는데, 한마디 뒤에 숨은 마음이 알쏭달쏭한 그런 말이었다.
‘……아니야, 이 정도면 됐어.’
한마디가 변했다는 건 어쨌건 호감도가 올랐다는 뜻이었다.
‘새어머니께 감사해야겠군.’
그녀가 날 경원시해 준 덕분에, 세드릭 에스테반과 동질감을 쌓을 수 있었으니까.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분통을 터트릴지 궁금하긴 했으나, 당분간 호기심은 참아야겠지.
‘그 외에도 관계창 한마디가 변한 사람이…….’
아, 있다.
칼릭스: “책임과 의무는 내 권한이야.”
‘……얘도 잘 모르겠네.’
그래, 뭐. 얘도 호감도가 올랐다는 건 확실하니까. 나는 그렇게 찝찝한 마음을 달랬다.
더 훑어보니 황태자 쪽에도 변화가 있었다.
에이드리언: “공녀는 재미있는 파트너지.”
그나마 황태자 쪽이 제일 알기 쉬웠다.
‘실제로는 의뭉스러운 면이 있는 사람인데 말이야.’
나는 얕게 한숨을 쉬며 관계창을 지웠다. 어쨌든 한 사람만 두드러지게 호감도를 쌓은 게 아니라, 골고루 오르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의미 없이 테이블을 몇 번 두드렸다.
그레이트 홀 쪽 실내 장식 공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주로 마법사들이 하는 일이라 그런지 공사 속도는 몹시 빨랐다.
‘역시 마법이 최고야.’
특훈 이후 엘리야 마라케시를 원망했던 마음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오래오래 그의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 마법을 익히기로 다짐했다.
후에 페르가나 아카데미에 취직할 때도 ‘마탑주 엘리야의 제자’임을 공식적으로 내세워야지.
내 검은 속내는 그렇게 흐뭇하게 무르익어 갔다.
* * *
그로부터 정신없이 며칠이 더 지나, 마침내 무도회 전야가 되었다.
나는 체크 리스트를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점검을 시작했다.
‘준비는 대충 다 끝났는데, 문제는…….’
하나 걸리는 점이 있었다.
‘새어머니.’
그녀가 무엇이든 방해를 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잠잠한 게 마음에 걸렸다.
이번 무도회는 내 역량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시험받는 자리였다.
이 무도회를 망치면, 내 평판도 그만큼 타격을 입게 된다.
그 사람이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 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준비 과정에서 방해가 없었다는 건…….’
……아마 무도회 당일에 수를 쓸 생각인 거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체크 리스트와 실제 준비 상황을 비교하고 있는데.
‘……응?’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축배를 들 와인이 바뀌어 있는데……?’
분명 내가 주문한 건 솔비야르 189년산 백포도주였는데, 193년산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지?’
물량이라든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빈티지가 바뀌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게 양해를 구하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단순한 착오……일 가능성이 높긴 한데.’
혹시 축배를 들 와인에 장난질을 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다시 189년산 와인을 준비시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인 것 같았다.
‘와인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챘다고 드러내면, 상대방 쪽에서 다른 예측하지 못한 부분으로 공격을 시도할 수 있으니까.’
차라리 눈치챘다는 걸 숨기고, 와인을 이용해서 벌일 수 있는 수작질에 최대한 방비하는 쪽을 택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체크 리스트에 확인했다는 뜻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 * *
그리고 마침내, 무도회 당일.
드레스를 차려입고 방문을 나서자…….
“……칼릭스?”
생각지 못한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라고 보기엔 너무 잘 차려입은 채로 내 방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날 보며, 칼릭스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기대도 안 하긴 했습니다만.”
“응?”
“아니, 아닙니다. 제 일방적인 한탄일 뿐입니다.”
칼릭스가 여전히 얼떨떨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을 에스코트하러 온 겁니다. 아버지께서도 안 계시니까…….”
아버지는 오늘 몇 달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영지 시찰 건으로 자리를 비웠다. 참고로 새어머니도 함께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이렇게 묻고 말았다.
“엘레니는?”
“……명색이 무도회의 주최자인데, 에스코트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손님을 맞이하면 꼴이 우습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 있는데, 파트너…….”
“……뭐라고요?”
칼릭스의 눈빛이 대번 사나워졌다. 나는 어깨만 으쓱할 따름이었다.
“배려는 고맙지만, 이미 파트너가 있어서 괜찮아. 그러니까 너는 평소처럼 엘레니를 에스코트해 주는 게……”
“그럼 어디 있습니까?”
“응?”
“당신의 그 파트너라는 놈팡…… 아니, 남자 말입니다.”
“그야…… 오시는 중 아닐까?”
칼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로잔헤이어의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다니, 최악이군요.”
“아니 그건…….”
그분이 공사다망하신 황태자 전하셔서 어쩔 수 없는 건데…….
“시작 시간이 되기까지 회장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덩그러니 혼자 서 계실 작정이었습니까?”
그럴 생각이었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은…….”
“로잔헤이어의 위명과 네 체면에 문제가 생기니까?”
“……누이를 문 앞에 혼자 세워 두는 놈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진 않군요.”
뭐, 좋다. 혼자 서서 손님을 맞아도 별문제는 없지만, 그가 함께해 준다면 적잖이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 좋아. 함께 가도록 하자.”
“……배려에 설득까지 해야 한다니, 젠장…….”
칼릭스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며 — 아마도 불평일 것이다 — 내 쪽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인 것 같네, 이 애의 에스코트를 받는 건…….’
잡아먹을 듯 굴던 처음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레이트 홀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발생!
당신의 이름으로 무도회가 열립니다. 당신은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과연 손님들은 무도회에 얼마나 만족할까요?
‘완벽한 무도회’를 성공할 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익숙한 퀘스트였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완벽한 무도회’ 개최 조건이…….’
초대 응답률 80% 이상, 손님 만족도가 70%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였던 걸로 기억한다.
바로 뒤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초대 응답률을 산정합니다.
현재 명성 수치: 6298
초대 응답률: 85.2%
‘앗, 성공했다.’
그레이트 홀을 채우기 위해 꽤 많은 손님을 초대했는데, 응답률이 85%가 넘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보는 시야 한구석에 ‘만족도 수치’라는 초록색 게이지 바가 떠올랐다.
잠시 후, 손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유리 공녀!”
비앙카는 약혼자와 함께 참석했고.
“오늘도 드레스가 참 아름답네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시안티크 후작 부인도 기꺼이 초대에 응해 주었다.
그 외에도 사교계의 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젊은이들 짝지어 주기를 즐기는 귀부인들도 꽤 눈에 띄었다.
나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면서, 곁눈질로 칼릭스를 흘긋 살폈다.
“제 누이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외로…….’
딱딱한 얼굴로 겨우 자리나 지켜 주면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칼릭스는 적당한 미소까지 띤 채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래 봬도 소공작이라 이건가?’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칼릭스가 이쪽을 향해 흘긋 시선을 주었다.
“……뭘 보십니까?”
“아니, 의외로 꽤 많이 도움이 된다 싶어서?”
“그야 당연히…… 아니, 아닙니다. 저기 사드락 백작이 옵니다. 인사부터 하시죠.”
우리는 얼추 시작 시간이 될 때까지 밖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태자 전하!”
“늦지는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공녀.”
“너스레는요. 시간에 딱 맞춰 오셨는데요.”
“중요한 날이니까요.”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우리 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