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82)

43화

준비할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지만, 공작 부인은 공작저의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하여 그럴싸한 만찬을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귀족원 회의가 끝나고, 로잔헤이어 공작과 에스테반 후작이 나란히 들이닥쳤다.

“안내하겠습니다.”

노집사가 그들의 코트를 받아 들고, 메인 홀에서 가장 가까운 응접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공작 각하, 그리고 후작 각하께서 드십니다.”

“어서 오세요!”

레티샤가 가장 먼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 뒤에서 엘레니도 수줍은 미소로 아버지와 손님을 맞이했다.

“…….”

그러나 세드릭 — 에스테반 후작 — 의 시선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유리 엘로즈를 가장 먼저 스쳤다.

정찬회의 격에 맞으면서도 다소 얌전한 차림새로 갖춰 입은 그녀에게서, 그 언젠가 축제며, 길거리를 들쑤시고 다녔던 말괄량이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유난히 신기하면서도, 눈에 밟혔다.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해요, 후작.”

공작 부인의 두 번째 환대에, 세드릭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어머,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우리 집은 언제나 손님을 향해 열려 있으니까요. 그렇죠, 여보?”

“음, 슬슬 만찬장으로 이동해야겠군.”

공작 부인이 자연스럽게 공작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어쩐지 도끼눈을 뜨고 있는 칼릭스를 향해 말했다.

“칼릭스, 오늘은 네가……”

“평소처럼 네가 엘레니를 에스코트하도록 해라, 칼릭스.”

그런데 공작이 먼저 그녀의 말허리를 석둑 자르는 게 아닌가?

공작 부인의 입매가 순간 굳었다.

“여보……?”

“엘레니는 수줍음을 타니 그게 좋을 거요.”

“……알겠습니다, 아버지.”

세드릭은 가느스름한 눈으로 어쩐지 저를 눈여겨보는 로잔헤이어의 소공작과,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있는 유리 엘로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말없이 유리에게 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유리가 세상 그렇게 음전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세드릭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가지.”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만찬장으로 출발했다.

만찬장은 더없이 만족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모든 준비가 완벽한 상태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석의 공작을 중심으로 칼릭스와 세드릭이 우편에, 여자들은 반대편에 나란히 앉았다.

“유리, 조심해서 앉으렴.”

“네, 어머니.”

공작 부인은 제 옆에 앉는 유리 엘로즈를 더없이 따사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세드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식전주를 드세요, 에스테반 후작. 우리 집 음식이 부디 입에 맞으셔야 할 텐데.”

“무엇을 대접해 주시든 광영입니다.”

“세상에, 무던하기도 하셔라.”

“크흠.”

공작의 헛기침과 함께, 만찬이 시작되었다.

요리를 서빙하는 동안 공작 부인은 분위기를 편안하게 주도하며 세드릭에게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만, 그때마다 세드릭은 “예, 그렇습니다.” 혹은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애초 말주변이 없기도 했거니와, 지금은 다른 곳에 시선이 팔려 있기도 해서 그랬다.

그가 한눈을 팔고 있는 주인공은 당연히 유리 엘로즈였다.

두 번의 사적인 만남이 워낙 자유분방한 인상으로 남았기 때문일까? 세드릭의 눈에 저토록 조용하게 예법을 정확히 지키는 유리의 모습은 대단히 신선하게 와닿았다.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꼼짝없이 얌전하고 조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군.’

소매가 손목까지 내려오는 유리의 얌전한 옷을 보고 있자니, 세드릭의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다른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햇살 가운데 비산하는 물방울.

종아리가 반절쯤 보이도록 걷어 낸 흰 모슬린 드레스 자락.

물에 반쯤 잠긴 채로 찰랑거리던 작고 하얀 발…….

‘……이런 맙소사.’

불경스러운 장면을 뇌리에 되살려 낸 세드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후작,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아니, 아닙니다.”

세드릭은 황급히 부정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머,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다니 기쁘군요.”

다행히 공작 부인이 선선히 웃으며 그의 실수를 넘어갔다.

“후작께서 지금 드시는 그 요리는 사실 우리 엘레니가 아이디어를 낸 거랍니다.”

“어머니.”

엘레니가 수줍은 듯 볼을 붉혔다.

“엘레니는 손님을 잘 대접하는 데 관심이 아주 많거든요.”

레티샤는 조금 뻔뻔하게 보일 것을 무릅쓰고 마지막까지 제 딸을 칭찬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세드릭의 반응은 무뚝뚝했지만, 레티샤는 그것만으로도 흐뭇한 눈치였다.

그때, 공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유리, 무도회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느냐?”

“……네, 아버지.”

세드릭은 그런 부름을 예상치 못했다는 듯, 유리의 나이프를 쥔 손이 살짝 멈칫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공작은 세드릭보다 더한 태도로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음 순간.

“내 딸애가 얼마 후에 무도회를 열 거요, 후작.”

“그렇습니까?”

“음.”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테이블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잔을 내려놓으며, 공작이 유리를 향해 말했다.

“후작에게도 초대장을 보내 주는 게 어떻겠느냐, 유리야?”

“그야 저로서는 후작님께서 참석해 주신다면 당연히 감사하겠습니다만…….”

유리가 살짝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후작님께서 시간이 되실는지……”

“시간을 내겠습니다.”

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드릭이 대답했다.

……세드릭의 옆에서 조용히 칼질을 하던 칼릭스의 나이프가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이 식탁을 둘러싼 그 누구도 그 이변을 감지하지 못했다.

세드릭은 거듭 말했다.

“초대장을 보내 주신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겠습니다, 엘로즈 공녀.”

“아, 네…….”

유리가 어색하나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렇다면, 우리 모두 그 무도회에서 재회하겠군요.”

공작 부인이 나긋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그날 후작이 내 딸들과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그렇지 않나요, 여보?”

“초대장을 받은 이로서 주최자에게 춤을 신청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 외에는 후작이 알아서 할 거요.”

“……그래요, 물론 그렇겠죠.”

레티샤가 가만히 미소를 악물었다.

그렇게 만찬은 마무리되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신사들은 잠시 신사들만의 시간을 가진 뒤 응접실로 이동했다.

응접실은 정원으로 향하는 발코니를 열어 두어 청량한 저녁 공기와 정원의 풀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여기 앉아서 음료를 좀 드세요.”

레티샤가 세드릭에게 음료를 권했다. 엘레니는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고, 유리는 조금 떨어진 소파에서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있었다.

……잠시 상황을 살핀 후, 세드릭은 입을 열었다.

“유리 공녀.”

“……네?”

“혹시 제게 정원을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후작님께 정원을요?”

무례할 수 있는 되물음에도 세드릭은 흔들림 없이 “예.” 하고 대답했다.

유리는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좋아요.”라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다녀오너라.”

“잠깐만요, 저도……”

칼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공작이 체스 판을 가져오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칼릭스, 너는 남아서 이 아비의 상대를 하거라.”

* * *

결국, 응접실에 네 식구만을 남겨 둔 채, 나는 에스테반 후작과 정원을 거닐게 되었다.

“죄송해요, 후작님. 아버지께서 원래 저런 분이 아니신데…….”

만찬장에서 발언도 그렇고, 공작은 왜인지 나와 에스테반 후작을 붙여 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우셨다면 대신 사과드릴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테반 후작이 무뚝뚝한 태도로 답했다.

“왜 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원을 산책시켜 달라고 부탁드린 건 접니다, 공녀.”

“…….”

하긴 그랬다.

‘그래, 정말로 싫었다면 나한테 산책을 하자고는 안 했겠지…….’

이쯤에서 이 대화는 끝내는 게 좋겠다. 나는 대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님께서 불쾌하지 않으셨다면 됐어요.”

“세드릭이라 불러 주십시오.”

“…….”

얘가 진짜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우리 집 만찬에 뭔가 사람의 정신을 빼놓는 독이라도 들어 있었던 건가?

내가 에스테반 후작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찌를 듯이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유리 엘로즈 공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네?”

“그것이…….”

후작이 불길할 정도로 뜸을 들였다.

‘대체 뭔 말을 하려고?’

나는 약간 공포에 떨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세요.”

“……혹시 집안에서 공녀가 소외되어 있습니까?”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그만 살짝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게 무슨……”

“실례가 되는 질문인 줄은 압니다만.”

그가 회색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공녀께서 불편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

나는 잠깐 머리를 굴렸다.

이걸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도 없고…….

“……보시다시피 아버지는 제게 잘해 주세요.”

“제가 말한 건 공작 부인의 일이었습니다.”

“…….”

이쯤 되니 나도 당혹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 눈치가 얼마나 빠른 거야?’

그런 내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인가 보군요.”

“후작님, 그건……”

“세드릭입니다.”

“세드릭 경, 그러니까…….”

오해하신 거라고 말하려던 나는 잠깐 멈칫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해야 하지?

공작가의 치부를 들켰기 때문에?

하지만 공작가의 치부야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게다가 세드릭 에스테반은 이런 내용을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인사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 비에 맞아 떨고 있는 작은 동물 같은 것에 약했지…….’

나는 하고자 했던 말을 고쳤다.

“……어떻게 아셨어요?”

바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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