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꿀꺽.
‘이게 웬…… 횡재야!’
장부를 조금 부풀려서 작성하면 내 개인 사재도 조금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려는 내게, 공작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
“사용처에 대해 내게 보고하거나, 장부를 보여 줄 필요는 없다.”
“!”
내 못된 꿍꿍이를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었다.
“저, 정말요?”
나도 모르게 되묻자, 공작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로잔헤이어의 공작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 정말 최고예요…….”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으며 감동하자, 공작이 “큼,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런 걸로 최고라고 할 필요까지야.”
무뚝뚝하게 말하는 공작의 귀가 붉어져 있었다.
‘아부가 통하나 보다.’
“아니에요. 제가 그동안 깜빡 잊고 살았는데, 역시 아버지께서는 제국에서 최고로 좋으신 아버지라고 생각해요.”
“…….”
그 말에 공작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부가 지나쳤나?’
나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버지, 전에 말씀하셨던 황족 신사분들에 대해서 말인데요…….”
“유리, 그건…….”
공작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어렸다.
“아버지, 전 황가의 일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이번 무도회는 내가 황태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홍보하는 자리가 될 예정이었다.
‘당연히 내 파트너는 황태자가 될 테고…….’
그러자면 공작에게 미리 변명을 해 두는 게 좋았다.
공작이 직접 경고한 사안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꼴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말이에요.”
나는 부러 씩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사교계에서 어떤 남성들은 여성을 빛내 주는 최고의 액세서리가 되곤 한답니다.”
“…….”
감히 황족을 액세서리 운운하는 내 말에, 공작의 눈빛이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푸흐, 이것 참.”
공작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고 말았다.
‘잘못 본 거 아니지, 방금?’
“그래, 네 말대로 그치들이 정말 훌륭한 액세서리이기는 하지.”
공작이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흐뭇한 표정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저, 아버지…….”
“내가 전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말거라. 내가 너무 과민했던 것 같아 안 그래도 네게…….”
“…….”
“……어쨌든, 황가 신사놈들이 네 액세사리가 되어 준다면 나도 반대는 하지 않으마.”
“행동은…… 조심하도록 할게요.”
“그럴 필요 없다, 유리.”
공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넌 로잔헤이어 공작의 딸이야. 너는 그 무엇도 조심할 필요가 없다. 너를 보호하는 게 내 역할인 한은.”
“…….”
“그걸 명심하도록 해라.”
* * *
“무도회를 열겠다더구나.”
어느 날씨 좋은 날,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 레티샤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유리 엘로즈가 무도회를 열겠다고 제 아비를 찾아가서 청을 드렸단다.”
엄지손가락이 장부에 꾹 눌린 자국이 남을 정도로 새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하긴, 그 애도 그럴 때가 되긴 했지.”
하지만 평소와 같이 품위 있는 어조에는 요만큼의 뒤틀림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어미로서 먼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부족했어. 그 애가 먼저 제 아비를 찾게 만들다니.”
“마님께서는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어머니이십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이 대답했지만, 레티샤는 그 대답이 아예 들리지 않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안주인인 나를 건너뛰고 그렇게 건방지게 굴 수는 없지…….”
“…….”
므와쟁 남작 부인은 이번에는 현명하게 침묵을 지켰다.
노화를 애써 참으려 했지만, 레티샤의 뺨에는 부자연스럽게 억눌린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본심을 숨기고 자애로운 척하는 데 도가 튼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새어 나오는 분노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트 홀을 내주었다지.’
그레이트 홀은 엘레니의 데뷔 무도회를 치를 때도 차지해 보지 못한 곳이었다.
로잔 회의의 개회식을 포함해도 1년에 세 차례 이상 열리지 않는 굳건한 문이었다. 그걸로 레티샤도 어느 정도 아쉬움을 달래고 있던 차였다.
한데 공작이 제 장녀에게는 순순히 그 성역을 허락해 주었다.
‘장녀, 장녀…….’
그년의 딸.
전 공작 부인, 아멜리아를 쏙 빼닮기까지 한 딸이었다.
레티샤는 항상 생각했다. 전 공작 부인은 멍청하게도 아들 하나 살려 놓지 못하고 이 땅을 비명횡사하듯 떠난 사람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떤가?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칼릭스를, 뒤이어 엘레니를 낳았고 그 아이들을 장성하도록 길렀다.
누가 보아도 승리자는 그녀 자신인데.
하지만 레티샤는 문득문득, 아멜리아를 닮은 그녀의 딸을 볼 때마다 까닭 없는 열패감에 시달리곤 했다.
레티샤가 차마 밀어내지 못한, 전 공작 부인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명이나 다름없는 딸.
엇비슷한 나이의 엘레니가 서열에 밀려 유리의 뒤에 서야 할 때, 레티샤가 낳지도 않은 계집애를 언니라고 불러야 할 때마다…….
근원 모를 패배감이 가슴을 채웠다.
그 옛날 아멜리아에게 밀려 공작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마님, 진정하십시오. 어차피 무도회를 개최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
맞는 말이었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그 무도회를 망칠 방도를 생각하시는 게……”
짜악!
레티샤의 손이 므와쟁 남작 부인의 뺨을 갈겼다.
“주제도 모르고. 네 상전이 네년도 생각한 걸 정말 몰라서 이러는 줄 아느냐?”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행히 레티샤는 수족의 뺨을 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았다.
하긴, 므와쟁 남작 부인 말은 뺨을 맞을 정도로 정확하게 정곡을 찔렀다.
이름을 걸고 무도회를 주최하는 건 카시스 제국 고위 귀족 여성의 당연한 권리였다.
그 응당 가져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방해할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간 쌓아 온 ‘자애로운 공작 부인’의 이미지마저 제물로 바쳐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아무도 모르게 그 무도회를 망칠 준비나 하는 게 신상에도 이롭다.
“듣자 하니 그 아이가 실내 장식인가 뭔가를 한다며 홀을 헤집고 다닌다던데.”
“…….”
“난 준비하는 과정에서 뭔가 실수가 있기를 바라지는 않아.”
참으로 진심이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공든 탑이 오르기도 전에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길 원하지.”
그 어떤 치장도, 꾸밈도 없는 날것의 진심 그대로였다.
* * *
그날 이른 저녁.
황궁에서는 귀족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럼, 게디스 지구 군수 공장 설립 안건에 대해서는 부결된 것으로…….”
로잔헤이어 공작 프레데릭은 의장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아니, 생각한다기보다 한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에스테반 후작.’
지금까지 저 잘생긴 놈에 대한 공작의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벽창호 같은 아버지에게서 벽창호 같은 아들이 났다.
하지만 적령기의 딸을 가진 입장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니, 뜯어볼 구석이 아주 많았다.
‘저놈이 황태자, 대공과 함께 내 딸에게 붙어 있었다고 했지.’
공작도 사냥제의 일을 칼릭스에게 전해 들어 대충 알고 있었다.
‘세 명……이라…….’
아비 된 심정으로서 솔직히 황태자 쪽은 제외하고 싶었다.
권리보다도 짊어질 의무가 많은 자리.
죽은 전처의 성품을 닮은 딸아이는 제게 주어진 책임을 올곧게 감당해 내려고 할 게 뻔했다.
다행히 지금 유리는 건강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제 어미의 쇠약했던 기질이 그 아이를 덮칠지도 모른다.
‘게다가 황실은…….’
공작은 침음과 함께 떠오른 기억을 삼켰다. 지금 이 자리는 그런 기억을 떠올리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대공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은 어쩌면 딸을 황실로 들여보내는 것보다 더 최악의 경우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저놈뿐인데.’
허우대 멀쩡하다. 검술도 그럭저럭 쓸 만하다.
방만한 놈들과 달리 성실하고, 뒷소문도 깨끗하다.
‘지나치게 무뚝뚝한 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지금까지 딸에게 들이댄 놈들 중에 저놈이 가장 낫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공작은, 회의 중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에스테반 후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다.
“자네, 오늘 우리 집에 올 생각 없나?”
“예?”
급작스럽고 충동적인, 딸 가진 아버지의 초대였다.
* * *
그날 이른 저녁.
황궁에서 있었던 귀족원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공작저에 심부름꾼이 먼저 도착했다.
심부름꾼으로부터 공작의 편지 — 사실상 편지라기보다 전보에 가까운 — 를 받아 든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의 얼굴에 오랜만에 사심 없는 경악이 번졌다.
“이런 맙소사. 에스테반 후작을 대접하시겠다는구나. 그것도 바로 오늘 저녁에!”
그 한마디로부터 전쟁이나 다름없는 ‘준비’가 시작되었다.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준비해야 할 것은 산더미였다.
노집사는 정찬 자리에 나가야 할 은식기를 세어서 내놓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가 만찬장을 완벽하게 쓸고 닦도록 감독해야 했고, 주방의 셰프들은 할 수만 있다면 영혼까지 요리할 기세로 만찬 준비에 돌입했다.
“대체 무슨 변덕이신지 모르겠구나. 평소에는 이렇게 돌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분이신데…….”
그렇게 한탄하면서도 레티샤는 오랜만에 남편이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에스테반 후작이라면,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신랑감 중 하나…….’
젊은 나이에 이룩한 오러 마스터의 경지, 황제의 기사단을 지휘하는 명예, 잘생긴 얼굴에 재산까지 적지 않은데 여자관계마저 깔끔한.
그야말로 온 제국을 다 통틀어도 세 명 이상 나오기 힘든 그런 신랑감, 대어 중의 대어가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엘레니를 선보일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에 유리 엘로즈 때문에 상했던 기분마저 모조리 잊을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