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82)

40화

“그러니까 이 마수가 스스로 균열을 찢는 듯한 양상을 보였단 말입니까?”

“제가 볼 때는 그랬어요.”

“흠…….”

엘리야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뭐, 일단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이상은 나 같은 마법 일자무식인 무지렁이랑 대화할 수 없는 내용인 모양이라고.

“……그나저나.”

“네?”

엘리야가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이번 일에서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오히려 기특한 짓을 한 거 아닌가?

하지만 엘리야가 지적한 부분은 아주 뜻밖의 부분이었다.

“죽을 뻔했다는 건 알고 있는 거죠, 당신?”

“네? 뭐, 그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날 최종 보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곧바로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엘리야 마라케시의 제자가 마수 앞에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죽을 뻔했다는 말이죠.”

“그야…….”

나는 이제 막 마나 회로를 자각했을 뿐이니까 별수 없지 않나?

하지만 엘리야는 이런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저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경, 저는 아직 어린 마법사라 그럴 수도 있는데요.”

“용납할 수 없단 말입니다.”

아니, 내 실력이 모자란 걸 니가 용납하지 않으면 어쩌실 건데요?

……아 설마?

두려운 예감에 사로잡힌 내가 떨며 물었다.

“설마 경, 그건 아니겠죠?”

“네, 맞습니다.”

엘리야가 평소에는 억만금을 줘도 짓지 않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특훈에 들어가겠습니다.”

“…….”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 * *

“아고고, 삭신이야…….”

엘리야로부터 특훈을 빙자한 고문을 당하고 난 후,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죽여…… 죽여 버릴 거야…….”

입으로는 악담을 쏟아 내고 있었지만, 정작 몸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상태창을 확인하고 욕설을 뱉을 뻔했다.

‘마나가 43이나 올랐잖아!’

대체 사람을 얼마나 굴리면 이게 가능한 거야?

나는 나올 뻔한 욕설을 겨우 삼키며, 화살표를 눌러 관계창으로 넘어갔다.

예상대로 관계창의 멘트가 변해 있었다.

엘리야: “자질은 부족하지만 기특한 면이 없지는 않아.”

……뭐지, 이거? 관계창 한마디라기보다 생활 기록부 같은데.

‘에라이, 뭘 기대하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을 지웠다.

오늘 엘리야는 정말 ‘혹독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나를 독하게 굴렸다.

“마류를 느낄 수 있다면서 그 굼벵이처럼 느린 마나 축적 속도는 뭡니까?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엄살 그만 부리지 못합니까?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꼼작 않고 죽을 생각입니까?”

……다양하고 창의적인 욕설과 겁박 끝에, 나는 오늘 1서클이라고 부르는 고리 하나를 겨우 심장에 두를 수 있게 됐다.

‘진도 미친 거 아닐까?’

비교 대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 수업 속도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이고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늘어져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침대에 푹 잠겨 있던 몸을 끙끙거리며 간신히 일으킨 다음,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내가 아까 보다 만 로제타 의상실의 실내 장식 시안이 있었다.

이시스 상단에서 보낸 시안은 세 가지였는데, 세 가지 모두 괜찮긴 했지만 내가 마음에 든 건…….

“이 중앙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세 번째 시안이 제일 마음에 드는데…….”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5층짜리 건물을 매번 오르락내리락하는 수고도 덜 수 있고 말이다.

‘괜찮을 것 같은데.’

좋아, 결정했다. 나는 펜을 들어 세 번째 시안에 낙점 표시를 해 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예에? 세 번째 시안이요?”

로제타 부인이 당황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세 번째 시안을 고른 이유를 설명했다.

“이 엘리베…… 아니, 마동식 전층 이동기가 있으면 5층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수고를 덜 수 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로제타 부인이 매우 껄끄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지 말해 주지 않으면 몰라.”

“……공녀님, 저는 그 마동식 전층 이동기라는 게 좀…… 껄끄러워요.”

“껄끄럽다고?”

“네, 네.”

로제타 부인이 시안을 짚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생긴 것도 창살 달린 작은 감옥 같고, 이 감옥 같은 공간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는 데다…….”

“내키지 않는 데다?”

“호, 혹시 이게 높은 곳에서 똑 하고 떨어지면 어떡하죠?”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오히려 마나를 동력으로 작동하는 기계라, 부품이나 점검 소홀로 사고가 날 확률도 현저히 적다고 이시스 상단 측에서는 충분히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로제타 부인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공녀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야 따르겠습니다만, 저는 여러모로 마음에 걸립니다.”

“흠…….”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굴복시키고 싶진 않았지만, 이 엘리베이터는 설치만 하면 여러모로 꽤 유용할 터였다.

‘실제로 의상실에서는 이것저것 짐 나를 일도 많은데.’

하지만 로제타 부인의 반응도 그렇고, 저번에 이시스 상단을 방문했을 때 안내 직원도 이 엘리베이터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눈치이긴 했다.

“아, 넵! 벼, 별일 아닙니다. 손님들은 여기 오르기를 꺼리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셔서요……. 귀, 귀인께서는 안 그러시는 게 신기해서요.”

“하지만 저도 가끔씩은 이 통 안에 오르는 게 무섭답니다. 답답하기도 하고요.”

‘분명 그렇게 말했지…….’

이 유용한 상품이 시장에서 그렇게나 냉대를 받고 있다니, 돈 들여서 이 물건을 개발했을 황태자도 속깨나 타겠는…….

‘……잠깐.’

어떤 생각이 번뜩,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오히려 잘된 상황일지도?’

* * *

쇠뿔도 단김에 빼라.

나는 그 길로 이시스 상단을 방문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상단주 사무실에 쳐들어가, 용건을 말했다.

“어린 황금 독수리를 뵈러 왔네!”

“예에? 또요?”

나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주는 울상을 짓더니,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저도 모른다”며 연락을 취하러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연락이라도 하고 오신다는 생각은 없으셨던 겁니까, 공녀?”

피로한 웃음을 머금은 황태자가 문 뒤에서 등장했다.

나는 해맑게 답했다.

“연락을 받고 오신 거잖아요?”

“과연,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겁니까.”

황태자는 헛웃음을 토하면서 미간을 문질렀다. 그리고 내 앞 소파에 앉더니 물었다.

“좋습니다. 내 약점을 잡고 계신 공녀님, 오늘은 또 무슨 용건이신지요?”

어이쿠. 이분이 무서운 소릴 하시네. 나는 얼른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약점이라뇨, 전하. 그 부분은 저희 저번 거래로 다 청산한 부분인데요.”

“흐음.”

“사람이 신의라는 게 있죠. 저는 앞으로도 전하의 비밀에 대해 발설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제국에서는 상업에 종사하는 걸 천하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비밀이 밝혀지면 황태자라도 곤경을 피할 수 없을 터.

‘아니, 오히려 황태자라서 더 곤란해질 수도 있지.’

나는 신뢰감을 주기 위해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 보였지만, 지퍼가 없는 세계에서 내 제스처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요, 뭔진 모르겠지만 공녀가 약속을 꼭 지킬 작정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황태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만하라는 듯 손짓했다.

“그래서 협박이 아니라면 오늘의 용건은 뭘까요?”

“전하와 사업상의 아주 중요한,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랍니다.”

“사업상의?”

황태자의 눈빛이 약간 가늘어졌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마동식 전층 이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요.”

“!”

“어쩌면 제가 전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내 고민이라…….”

“전하, 먼저 저는 마동식 전층 이동기야말로 우리 시대의 혁명 같은 발명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아부를 날렸지만, 황태자는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쉽지 않은 남자 같으니라고.’

“하지만 너무 혁명적인 발명인 덕분에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게 문제인 거죠.”

“……공녀의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은 칭찬해 둬야겠군요.”

황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말이 맞는다는 뜻이었다.

“틀림없이 막대한 투자금을 들였지만, 회수까진 요원한 상황이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도 정답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진단하고 싶습니다.”

“?”

“‘홍보 부족’이라고요.”

사실 물건이라는 게 포장하기 나름이 아닌가?

“저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안해 드릴 수 있답니다.”

“과연…….”

황태자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공녀는 무엇을 요구할 건가요?”

역시, 황태자다. 알아듣는 속도가 빨랐다.

“이 마동식 전층 이동기 사업권 지분의 3할이요.”

“9 대 1.”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나무라는 것보다 더 강력한 거절의 말이었다.

웃는 얼굴로 그가 단호히 말했다.

“조언에 대한 대가로는 이것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 제가 조언만 해 드릴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나요?”

“……조언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이 움직일 거란 말입니까?”

“물론이죠. 7 대 3!”

“9 대 1. 이 이상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저는 지금 제국에서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에요.”

로잔헤이어의 공녀라는 신분에, 200년 만에 보주의 봉인을 풀었다. 게다가 황실 무도회에 황태자의 파트너 자격으로 참가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냥제의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저를 기용하시려면 조금 더 부르셔야죠.”

황태자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채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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