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82)

38화

“그게…….”

딴에는 도와준다고 하는 짓 같은데, 나는 바론 남작과 파우더 룸에 갈 생각이 없는 만큼 그와 춤을 출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같은 말로 최종 보스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랬죠……. 그런데 제 드레스가 보시다시피 이렇게.”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면서 바론 남작이 찢어 먹은 내 드레스 자락을 들어 보였다.

“이런.”

그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투로 미간을 구겼다.

“누가 이런 짓을 했나?”

“히익.”

지레 찔린 바론 남작이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이미 찢어져 버렸는데.”

“흠.”

“아무래도 파우더 룸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아쉽지만……”

춤은 나중에, 라고 미루려는 내 말을 최종 보스가 스산한 미소로 막았다.

“내가 데려다주도록 하지.”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얍삽하게 꾀를 써서 나를 어떻게 해 보려고 한 바론 남작보다는 최종 보스 쪽이 더 나은 선택지이긴 했다.

‘굳이 고르자면 말이지.’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 * *

연회 초반이라 그런지, 파우더 룸으로 가는 길에는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공 전하의 에스코트를 받는 모습을 광고하고 싶진 않았던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전하.”

나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럼…….”

“아니지, 공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대공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해야지.”

“그 말인즉슨…….”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여기서 절 기다리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왜?”

그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안 되나?”

“……안 될 것까지는 없지만…….”

“그럼 기다리도록 하지.”

그는 내가 마치 잠깐 눈만 떼면 도망갈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이긴 하지만.’

뭐, 이번에는 그에게 줘야 할 물건이 있으니 차라리 잘된 셈 치자.

다행히 아직 아무도 없는 빈 파우더 룸에 들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서둘러 치맛자락을 꿰매 주었다.

하녀의 손이 재빠르기는 했으나 찢어진 부위가 워낙 넓어 시간이 좀 걸렸는데, 그동안 아무도 파우더 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뭐지?’

옷을 다 꿰맨 후, 마지막으로 발자국까지 털어 내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전하?”

최종 보스께서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나른하게 눈을 뜨며 물었다.

“이제 나왔나? 잠들 뻔했어.”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서 계속 이러고 계셨던 거예요?”

그가 무슨 문제냐는 투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쩐지 사람이 아무도 안 들어오더라니.’

무려 대공 전하께서 저렇게 서서 수문장 노릇을 하고 계시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내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이유는 뭐, 보나마나 자명했다.

‘용건이 있을 뿐인 거지.’

“일단 여기서 말고……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하죠.”

“아, 방금 그 말 좋았어.”

그가 붉은 눈을 새치름하게 뜨며 말했다. 이상하게 듣는 사람 얼굴이 붉어지게 하는 그런 말투였다.

……거슬리긴 했지만 거기까지 지적할 기운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원으로 나가시죠.”

죄를 짓는 건 아니지만, 내가 우승 상품으로 얻어 낸 용의 피를 고스란히 대공에게 넘겨주는 장면을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무슨 소문이 퍼질지는 자명한 문제였다.

대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파우더 룸 왼쪽 길을 따라 마찬가지로 인적이 드문 황궁 정원으로 나섰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어. 아무도.”

최종 보스가 확신에 찬 어조로 장담했다.

“정말요?”

“정말로.”

……뭐, 하긴. 최종 보스시니까 믿어도 되겠지.

나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크리스털 병을 꺼냈다.

“여기, 전하께 약속드렸던 용의 피예요.”

“…….”

그의 붉은 눈이 크리스털 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말 없는 시선이 길어지자, 나는 조금 초조해져서 아무 말이나 덧붙였다.

“황궁 내실 금고에서 꺼내 오신 거니까 가짜는 아닐 거예요.”

“알고 있어.”

최종 보스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여 내 손에서 작은 병을 빼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 진행률이 100%를 달성합니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를 완수합니다.

보상으로 전 능력치가 30 오릅니다!

보상으로 카미엘의 호감도가 오릅니다.

카미엘의 영향으로 ‘숨겨진 봉인’이 풀립니다!

‘봉인?’

빠르게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눈길이 심상찮은 단어를 만나 멈칫했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각성 능력치, ‘정화력’이 개방됩니다.

‘각성 능력치라고……?’

정화력이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이야?

하지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와르르 떠오른 메시지 뒤에서, 최종 보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약속을 지켰군, 공녀.”

나는 일단 시스템 메시지에서 시선을 떼고 대답했다.

“저도 목숨이 소중한 줄은 알거든요.”

가벼운 웃음소리.

“이런, 설마 약속을 안 지켰다고 내가 공녀를 어쩌기라도 하겠어?”

할 거잖아.

……라고 솔직하게 대꾸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냥 하하 웃으면서 대충 이렇게 말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죠.”

“그렇게까지 신뢰를 주지 못했다니 슬프군.”

최종 보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심장을 부여잡는 척을 했다. 가증스러운 연기력이었다.

나는 이참에 확실하게 못을 박아 두기로 했다.

“어쨌든, 저와 대공 전하의 거래는 여기까지인 거예요.”

“그래,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대공은 내 앞을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붉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공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

“내가 싫은 건가?”

“……네?”

너무 예상외의 질문이었다.

경계하고 있던 내 표정이 놀람으로 허물어졌다. 대공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아니, 그게 말이야.”

대공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는 척했다.

“나는 공녀만 보면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는데, 공녀는 나만 보면 질겁을 하고 도망가려고만 하질 않나…….”

‘귀신일세.’

나는 속으로만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잡아떼기를 시도했다.

“딱히 질겁을 하진 않는데요.”

“거짓말.”

‘화술’ 능력치가 부족합니다!

……이런 씨.

내가 숨기지도 못하고 표정을 구기자, 최종 보스가 즐겁게 웃으면서 말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시도하는 게 취미인가?”

그 말을 들으니 불쑥 무언가가 치미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는 해 봐야죠.”

“…….”

미약한 웃음기를 머금은 붉은 눈이 고요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용의 피의 대가로 나는 공녀의 리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지.”

“…….”

“하지만 그게 앞으로 공녀의 앞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비화할 수는 없어.”

부드럽게 타이르는 낮은 목소리가 마치 농도 짙은 크림처럼 귓가에 천천히 스몄다.

“그걸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경고였다.

* * *

경고를 끝으로, 로엔 대공은 연회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뒤로는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연회가 끝나고, 나는 칼릭스, 그리고 엘레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린 칼릭스가 손을 내밀자, 엘레니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즐거웠어요, 오라버니.”

“그래, 좋은 꿈 꿔.”

사이좋은 남매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치맛자락을 챙기며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읏차.’

“……뭐 하시는 겁니까?”

“?”

혼자서도 잘, 마차 앞에 놓인 발판에 발을 디디려던 내게 칼릭스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중인데……?”

“…….”

칼릭스가 미간을 구겼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그는 넓은 보폭으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도움을 줄 남성이 곁에 있는데도 혼자서 행동하시는 건, 그 남성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춤을 신청할 때와 비슷한 논조였다.

무시당하느니 차라리 나를 에스코트하겠다는 그 말이 참으로 칼릭스다웠다.

어쨌거나 고마운 일이었다. 혼자서 마차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고마워.”

손을 잡으며, 내가 인사하자 칼릭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만 내리십시오.”

“응.”

말 잘 듣는 척하면서 순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칼릭스가 불편하지 않도록,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 애의 손을 놔주었다.

“그럼, 난 이만.”

“잠깐, 당신…….”

“?”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칼릭스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침착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사실 좀 급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나는 그렇게 칼릭스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재촉해 방으로 돌아왔다.

‘분명 아까.’

숨겨진 봉인이 풀리면서, 정화력이라는 게 개방됐다고 했다.

‘상태창!’

<성명: 유리 엘로즈>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마탑주의 임시 제자, 중급 협상가, 다재다능, 보주의 해방자, 평화의 수호자>

명성: 6298

마나: 245/1000

지력: 253/1000

화술: 220/1000

매력: 155/1000

기품: 130/1000

정신력: 140/1000

평소와 같은 상태창 밑에, 없었던 게 생겨나 있었다.

정화력: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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