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82)

37화

황제 역시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용의 피라? 허, 정녕 짐에게 그것을 원하느냐?”

“황제 폐하께서도 아시지만.”

나는 방 안에서 남몰래 준비해 온 핑곗거리를 댔다.

“저는 최근에 마법사로 개화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마법사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저도 희귀하고 마법적 연구 가치가 있는 물건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겼답니다.”

“…….”

내가 애교를 부리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황제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공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마법 연구라……. 좋다!”

그가 마지막 말을 쩌렁쩌렁하게 외친 덕에,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흔쾌한 목소리를 들었다.

“내 유리 공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여봐라! 황성의 내실 창고를 맡은 셀로먼 후작에게 일러 용의 피를 한 병 가져오도록 해라!”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시종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앞장서 나갔다.

황제가 내 어깨를 치하하듯이 두드렸다.

“제국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자세가 보기 좋구나. 늦게 깨친 만큼 학문에 정진하거라.”

“폐하의 말씀을 삼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음! 자! 이제 모두들 연회를 즐기거라!”

그와 동시에, 관현악기들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다.

오늘은 자유로운 행사인 만큼 댄스를 리드하는 커플 없이 누구나 나서서 곧바로 춤을 즐길 수 있었다.

조용했던 회장이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잠시 후.

“분부하신 용의 피를 가져왔습니다, 폐하.”

숨찬 기색도 없이 달려온 시종이 공손하게 용의 피를 황제에게 받쳐 올렸다.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귀중한 용의 피를 본 내 감상은…….

‘경매장에서 본 거랑 똑같이 별거 없네.’

그때보다 좀 더 값비싸 보이는 크리스털 병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큼 붉은 액체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자, 공녀. 여기 있느니라.”

황제는 그 병을 내게 하사했다. 나는 무릎을 굽혀 가며 더없이 황송하게 그 작은 병을 받아 들었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 달성률이 40% 상승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인사는 됐느니라. 공녀의 당연한 권리이니.”

그렇게 말하고, 황제는 “참으로 흐뭇하구나, 흐뭇해.” 하고 중얼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하긴.’

제국의 일로도 바쁘신 황제 폐하께서 고작 젊은이들의 유희를 끝까지 지켜볼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용의 피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그가 가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크리스털 병을 조심스럽게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깜짝이야. 칼릭스?”

“…….”

왠지 부루퉁하게 보이는 무표정을 한 남동생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니?”

“연회장의 모두가 당신을 별나다고 얘기합니다.”

“그래?”

그럴 만도 했다. 대체 어느 영애가 황제에게 소원을 비는 자리에서 용의 피 같은 그로테스크한 물건을 요구한단 말인가?

‘내가 생각해도 좀 심했지.’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별수 없었다.

‘그것도 지키지 않았을 때 내 목에 칼이 들어올 가능성이 농후한 약속일 때는!’

“큼.”

칼릭스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 소원을 빌 수 있다고 하나 공적인 자리. 너무 사소한 것을 말하면 황제 폐하의 위신을 무시한 셈이니 흠이 되고, 너무 과한 것을 요구한다면 그 역시 흠을 잡히게 됩니다.”

“음,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칼릭스가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적절하게 처신하셨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아, 그래…….”

얘한테서 칭찬 비슷한 걸 들어 본 적은 처음이라, 얼떨떨한 반응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는 차치해 두고.”

“?”

입술 앞에 주먹을 쥐고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한 칼릭스가 내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이쪽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

뭐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잠시 그 손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자, 칼릭스가 다시금 인상을 썼다.

익숙한 표정을 하고, 그가 말했다.

“잡지 않으실 겁니까?”

잡으라는 거였나?

나는 나도 모르게 “아, 어.” 하고 대답하며 홀린 듯이 그 손을 잡았다.

“그럼…….”

“!”

칼릭스가 내 허리에 손을 두르고, 나를 홀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칼릭스?”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단지 무언가를 참는 듯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춤추는 남녀 사이에 끼워 넣었다.

‘혹시 설마 이거 춤을 추자는 건가?’

표정을 읽었는지, 칼릭스가 하아 한숨을 쉬며 답했다.

“정답입니다.”

“!”

부드럽게 나를 인도하는 손짓을 따라, 나는 몸에 익은 대로 핑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그와 동시에 관현악기들이 보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보다, 몸에 익은 대로 칼릭스의 리드를 따라 춤을 추었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진다.

다시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을 때…….

“네가 나한테 춤을 추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당신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남자 형제인 제가 춤 한 곡 신청하지 않아서야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아, 그래…….”

뭐, 하긴. 그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짐작은 했다.

‘얘가 나한테 이러는 건 가문의 체면과 위신에 관계될 때뿐이니까.’

상처받은 건 아니었다.

‘공략 안 한 남주인공이 다 그렇지 뭐.’

게다가 칼릭스는 가족인 주제에 다른 공략 대상보다 공략하기가 더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유리의 몸에 익은 기술을 사용할 때면 으레 그랬듯이, 나는 마치 내 발이 저절로 움직여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한 발 한 발이 모여 스텝을 이루고 음악에 어우러지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라는 걸.

댄스에 열중하는 동안, 스쳐 지나가면서 본 칼릭스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 비스무리한 것이 스친 것도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칼릭스와 왈츠를 추었습니다!

완벽한 춤을 선보여 기품이 30 오릅니다.

춤이 끝났는데도, 칼릭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우물거리듯 진심을 토해 냈다.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요.”

‘아.’

드물게 호의적이고 솔직한 그 반응을 통해 나는 눈치챘다.

‘기품 수치가 100이 넘었나 봐.’

그때, 한 사람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오라버니, 언니.”

엘레니였다.

“정말 아름다운 춤이었어요. 미리 약속하신 건가요?”

“아니.”

칼릭스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게 했던 설명을 한 번 더 되풀이했다.

“우승자인데 가족과 춤 한 번도 추지 않으면 뒷말이 나올 거다.”

“오라버니도 참.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엘레니는 칼릭스를 나무라는 듯하면서도 천진하게 웃었다.

“그럼, 이번에는 저와 춤을 춰 주세요. 그러실 수 있죠?”

“……너와?”

불현듯 칼릭스의 시선이 나를 스쳤다.

‘뭐지?’

지금 뭔가 대단한 사고뭉치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드는데. 착각인가?

하지만 그의 시선은 정말 찰나간에 나를 스쳐 지나가서, 불쾌한 느낌을 확인해 볼 틈은 없었다.

“그래, 엘레니. 춤을 추자.”

“기뻐요, 오라버니.”

엘레니가 활짝 웃으며 제 오라버니의 손을 잡았다.

“그럼 언니, 다녀올게요.”

나는 대답 대신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자 이제.’

뭘 한담?

비앙카 영애를 비롯한 친구들도 각자 무도회를 즐기러 흩어졌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갈까?’

한가하게 생각하며 티 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윽, 잠깐!”

“!”

걸음이 당기는 느낌이 들어서 보니 부주의한 신사의 발끝이 내 드레스 끝자락을 지익, 하고 짓밟고 있었다.

“세상에. 어쩜 좋아! 바론 경, 다치지 않으셨어요?”

“네,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내 옷을 살펴보는 남자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공녀님의 드레스가 찢어져 버렸군요!”

……뭐지 얘는?

‘이거 설마 시비를 거는 건가?’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잠깐 멈칫한 내게,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발라 납작하게 단장한 남자가 굉장히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아, 이런 실례를 범하다니.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공녀님.”

주변에 있던 영애가 혀를 차며 호들갑을 떨었다.

“뭘 하고 계세요, 바론 경! 어서 공녀님을 파우더 룸으로 모셔다드리세요!”

“아아, 네! 당연히 그래야지요!”

묘하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공녀님, 저와 함께 가시지요. 무례를 사과하는 의미에서, 아주 정중히…….”

아하.

‘수작 거는 거구나, 이거.’

아마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영애도 한패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지극히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파우더 룸이라면 저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몰골로 혼자 돌아다니실 순 없어요!”

호들갑 전문 영애가 또다시 호들갑을 떨었다.

바론 경이 곧바로 “그렇습니다!” 하고 외쳤다.

“이런 모습이 되신 공녀님을 절대로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아니, 저는……”

한 번 더, 보다 단호하게 거절을 하려던 그때.

“뭘 난처해하고 있어?”

“!”

스며드는 듯한 낮은 목소리.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눈빛에 일제히 놀라움이 번졌다.

뒤를 돌아보니, 뜻밖의 사람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었다.

“……로엔 대공 전하?”

최종 보스님의 등장이셨다.

“대, 대공 전하?”

그는 갑작스러운 자신의 등장에 놀란 사람들에게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나를 향해서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다음 춤곡은 나와 추기로 한 거, 잊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