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나머지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이미 그도 지겹도록 들은 말이었다.
사냥꾼 셋을 대동하고 다니면서도 리본을 사냥당하지 않은 유리 공녀.
대부분 사람들은 세 사람이 동시에 공녀의 리본을 원했고, 그에 난감해진 공녀가 누구에게도 리본을 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그 기현상을 해석했다.
소수의 악의적인 사람들은, 뭐. 세 사람 중 아무도 공녀의 리본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떠들어 대기도 했지만…….
“…….”
그 무례한 지껄임을 떠올린 칼릭스의 손아귀에 부쩍 힘이 들어갔다.
‘대체 로잔헤이어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그 인간들의 악의적인 주둥이를 쭉 째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생각은 오로지 가문의 명예와 체면만을 생각한다고 보기에는 좀 지나치고 과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 사실을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반쪽짜리 누이에게 지나친 관심을 쏟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그 누이의 행동이 가문에 미칠 영향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
……그래야만 했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반쪽 누이에게 기꺼운 존재가 아니었듯이, 그 자신에게도 누이는 별것 아닌 존재여야만 했다.
……물론 심정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세간의 사람들이 쉽게 떠드는 것처럼 그가 공작이 되었을 때 손위 누이의 일에 안면을 몰수하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반쪽이라도 어쨌든 피를 나눈 혈족이다.
고로 그는 누이의 사는 형편과 평판을 돌보아 줄 책임과 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앞으로 죽는 날까지, 일평생 동안.
사람들이 뭐라고 찧고 까불든지 간에, 칼릭스는 그 고귀한 권한과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었다. 전혀.
……설사 누이 본인이 그런 그의 책임감에 대해 전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마음에 안 들어.’
청년이라기엔 아직 소년에 가깝고, 소년이라기엔 또 지나치게 청년에 가까운 남자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자신의 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주기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누이는 자신이 그런 책임감을 지고 끼어들 때마다 ‘네가 별일이네’ 하는 투로 대수롭잖게 반응할 뿐이었다. 그로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칼릭스는 초조하게 테라스의 난간을 두드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참 우리 로잔헤이어의 후계자로서 적당한 것 같다는 생각?”
“말 그대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소공작으로서 네 자질과 역량이 충분하다고 말이야.”
그래, 그때 누이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나를 후계자로 인정한다고 했으면서.’
그렇다면 후계자로서 그의 책임감 또한 인정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감정을 다스리려고 해도 속에서 자꾸만 부아가 불쑥 치밀었다.
어떨 때 보면 그의 반쪽 누이는 칼릭스를 소공작은커녕, 한 사람의 어른이라고도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누이는 분명 자신을 소공작으로서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 말까지 의심하고 싶진 않았다.
……거기까지는 생각하면서도, ‘반쪽 누이의 인정’ 따위가 왜 그토록 자신에게 중요한지는 생각지 못하는 게 칼릭스다운 점이었다.
‘그만 생각하자.’
일단 지금 중요한 건 누이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누이가 그를 인정하든, 인정치 않든.
이것은 그의 책임과 의무였다.
착한 여동생인 엘레니는 그의 손이 닿지 않아도 어머니에게 교육받은 대로 ‘안전하게’ 행동하는 아이였다.
그러니 오늘 밤은 엘레니가 아니라…….
“유리 엘로즈 공녀님께서 드십니다!”
……저 사람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 * *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내게로 쏠렸다.
비슷비슷한 원피스를 벗어 던지고 각양각색으로 색다르게 치장한 레이디들.
점잖은 척하면서 이쪽을 흘긋대는 신사들.
‘……완전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의연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유리 공녀!”
비앙카와 또래 영애들이 다행히 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벌써 그녀들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모면한 게 두 번째라, 나는 고맙게 그 배려를 받아들였다.
“비앙카 영애, 그리고 모두들,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
“뭘요.”
“공녀께서 이렇게 일찍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요. 오늘의 우승자신데. 조금 더 늦게 참석하셨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하…….”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대놓고 뭐라고야 못 했겠지. 다만 내가 올 때까지 얼마나 눈치를 보지 않고 떠들어 댈지가 문제였다.
‘벌써 명성이 200이나 올랐다고…….’
이쯤에서 사람들의 과한 상상력에 제동을 좀 걸어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순 없으니, 나는 다른 적절한 핑계를 댔다.
“황제 폐하보다 연회에 늦을 수는 없잖아요.”
“하긴, 그건 그래요.”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지 않아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홀에서, 우리는 그 외에도 이것저것 잡다한 화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눴다.
“그나저나 유리 공녀, 저번에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대체 드레스를 어디서 맞추시나요?”
“그래요, 분명 카민스키 경의 드레스는 아닌 것 같은데.”
“아직 소식 못 들으셨어요?”
비앙카 영애가 도토리를 잔뜩 꿍쳐 둔 자신만만한 다람쥐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유리 공녀에게는 다른 전속 재단사가 있어요. 카민스키 경이 아니라요.”
“어머, 그럼 제가 맞힌 거네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제 드레스는 모두 전속 재단사인 로제타 부인이 만들고 있어요.”
“로제타 부인이요?”
“이름은 처음 들어 보지만, 솜씨가 무척 좋은 것 같아요. 공녀께서 오늘 입으신 옷만 해도…….”
사람들의 안목은 다 똑같다.
카민스키의 드레스는 분명히 아름다웠다. 그는 언제나 최고급 원단과 자재만을 고집했고, 도저히 옷 한 벌에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화려한 장식들을 한 벌 안에 녹여 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명확했다.
‘처음에야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 그의 옷은 뭐라고 해야 할까, 입는 사람보다 만든 사람의 예술 세계가 좀 더 강조되었다고 해야 하나?
분명 아름다운 드레스임에도 입는 사람을 짓누르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에 반해 로제타 부인의 드레스는 입는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만든 태가 확실하게 났다.
여기 영애들도 그 차이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
‘뭐. 다 둘째 치더라도 카민스키는 너무 오래 군림했어.’
이제 슬슬 한물갈 때도 됐다. 내가 그때를 조금 앞당길 뿐이다.
나는 너그럽게 미소를 지으며 슬쩍 제안했다.
“제 전속 재단사이긴 하지만, 제가 온종일 로제타 부인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니에요. 원하신다면 부인을 소개해 드릴게요.”
“어머! 정말요?”
“그래 주시면 저희야 좋죠.”
“안 그래도 좀 색다른 느낌의 새 옷을 갖고 싶었어요.”
당신의 전속 재단사, 로제타 부인의 의상실이 조금 더 유명해졌습니다!
명성이 50 오릅니다.
화술이 20 오릅니다.
‘좋아, 좋아.’
오르는 능력치와 명성을 뿌듯하게 바라보면서, 나는 느긋하게 부채를 팔랑였다.
바로 그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때까지 점점이 흩어져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일제히 양옆으로 갈라져 중앙에 길을 텄다.
속속들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만든 길 사이를, 황제가 사람 좋게 웃으며 지나갔다.
그리고 상석에 이르러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벙긋 웃었다.
“젊은 제국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홀이 다 환해지는 것 같구나.”
다들 입을 모아 “폐하의 은덕입니다” 하고 합창하듯 대답했다.
황제가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짐이 무에 한 일이 있다고 다들 그러느냐? 짐이 오늘 밤 그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축배 한 잔뿐이니라.”
그렇게 말하면서 황제가 시종이 받쳐 올린 잔을 들어 올렸다.
“먹고, 마시고, 즐기게! 오늘은 그대들의 날이다.”
모두가 다시 한번 궁중식 절을 해 보였다.
“폐하, 우승자를 축하해 주셔야 합니다.”
황제가 잔을 내려놓고 뒤돌아서려다가 시종의 말에 “아차차” 하고 다시 상석에 섰다.
“어흠, 짐이 예전 같지가 않도다. 그래, 올해의 우승자가 누구라고?”
“유리 엘로즈 공녀님이십니다.”
“뭐?”
내 이름을 들은 황제가 눈을 번쩍 뜨더니, 곧이어 “와하하!” 하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재미있구나, 엘로즈 공녀. 또 그대로구나. 좋다!”
그가 관대하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연단 아래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나는 황제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그러자 황제가 날 연단으로 끌어 올렸다.
“…….”
조금 놀랐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연단에 올라서니 반짝이는 홀 전체가 발아래 있는 것처럼 훤히 보였다.
황재가 인자한 미소로 그런 날 바라보며 말했다.
“공녀, 오늘의 우승을 축하한다. 1년에 한 번뿐인 사냥제의 우승자로서, 짐에게 무언가 소원이 있다면 말해도 좋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
약속을 지킬 준비를 하면서, 나는 연단 아래를 눈짓해 보았다.
하지만 최종 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그 사람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무엇이든 괘념치 말고 말해 보아라.”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무릎을 굽혀 다시 한번 절을 해 보인 다음, 입을 열었다.
“제게 오늘 한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거든, 감히 요청컨대…… 용의 피를 하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너무 의외의 요구였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잠시 감히 술렁거리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