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우연히, 말입니까……?”
어휴, 얼추 됐다. 나는 철퍽거리는 신발을 신고 물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신중하게 걸음을 디뎠다.
“……잡으십시오.”
“아, 고마워요.”
나는 사양하지 않고 에스테반 후작이 내민 손을 잡았다.
“읏차.”
기우뚱하며 걸음을 옮기는 불안한 나를 그가 거뜬히 지지해 주었다.
“…….”
“…….”
“…….”
마침내 물가에서 빠져나온 나를 기다리는 건, 세 남자의 어색한 시선이었다.
‘음…….’
“자기소개라도 하실래요?”
“……이미 서로 아는 사이입니다.”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공녀, 옷이 젖었으니 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앗, 지금은 안 돼요.”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나는 어색하게 내 머리에 묶여 있는 리본을 가리켰다.
“저, 아직 리본을 빼앗기지 않았거든요.”
“예?”
나는 볕이 드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서 치맛자락을 펼치며 말했다.
“게임이 아직 안 끝났으니, 지금 돌아가면 누군가는 제 리본을 노릴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이 상태로…….”
“어쩔 수 없죠. 전 오늘 리본을 빼앗기기 싫거든요.”
무려 최종 보스께서 지켜 주신다고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시선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최종 보스께서 가느다랗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하는데.”
황태자는 대답 대신 이마를 짚었다. 에스테반 후작이 나를 향해 경고했다.
“……공녀, 그 상태로 있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제 고집의 결과니 어쩔 수 없죠.”
“…….”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에스테반 후작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불이라도 피우겠습니다.”
황태자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군.”
“그렇게까진 안 하셔도 되는데.”
“아무것도 안 하기엔 저희 마음이 불편합니다.”
뭐, 그러시다면야.
넘어져서 옷이 축축하긴 했지만 마물의 피가 신발 밑창에서 끈적거리며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게다가 무사히 이벤트에 진입하기도 해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셋이서 싸우지만 못하게 하면 돼……!’
잠시 후, 두 남자가 마른 가지를 주워 와 내 앞에 늘어놓고 불을 피웠다.
나는 불을 쬐며 배시시 웃었다.
“따뜻하네요.”
황태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웃으면서도 단호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성에 돌아가면 좀 더 따뜻한 환경에서 쾌적하게 계실 수 있습니다만.”
“잔소리는.”
황태자에 말에 대공이 쯧,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그냥 내버려 둬. 알아서 하게. 어른이지 않나.”
“카미엘, 당신은 여전히 배려라는 걸 모르는군요.”
황태자가 웃는 얼굴로 제법 가시 돋친 소리를 했다.
‘원래대로라면 에스테반 후작과 황태자만 등장하는, 난이도가 낮은 이벤트인데…….’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그만하세요. 제 고집 때문에 두 분이 다투시면 제가 불편하잖아요.”
“하지만 유리 공녀……”
“그래도 계속 언쟁을 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죠. 저랑 에스테반 후작님이 함께 자리를 비켜 드리는 수밖에요.”
“……알겠습니다.”
강수를 두자, 황태자가 단념하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두 분, 리본은 좀 사냥하셨나요?”
“…….”
“음, 그게…….”
에스테반 후작의 침묵과 황태자의 난처한 어깻짓 속에서, 나는 진상을 대충 짐작했다.
“두 분 다 리본을 주겠다는 영애들을 피해 도망쳐 오신 거군요.”
에스테반 후작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황태자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렇게 불경한 짓은…….”
“하셨죠?”
황태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추측에 맡겨 두겠습니다.”
바로 그때.
피유우웅…… 펑!
성 쪽 방향에서 쏘아 올린 신호탄이 터지며, 분홍빛 연기가 하늘로 퍼졌다.
“끝났네요.”
기다리고 있던 게임 종료 신호였다.
‘이벤트: 개울가에서의 만남’이 무사히 마무리됩니다.
종료 시점까지 세 사람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지 않아 ‘평화의 수호자’ 칭호를 얻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툭툭 털었다. 이제 이 어색한 모임을 해산할 때였다.
“성으로 돌아가죠.”
“듣던 중 반가운 말이로군요.”
누가 할 소릴. 나는 겉으로는 하하 웃고 속으로는 혀를 내두르며 생각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셋과 동시에 한자리에 있지 않겠다고 말이다.
* * *
그러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임을 시작했던 정원으로 돌아온 후였다.
“저길 좀 보세요!”
“어머…….”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네 명의 등장은 꽤 — 아니 사실 엄청나게 —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황태자 전하에 대공 전하, 거기다 에스테반 후작 각하까지…….”
“저기 가운데 계신 영애는 유리 엘로즈 공녀님이 맞죠?”
“기묘하네요. 어쩌다 저 네 분이 함께 돌아오게 되었을까요?”
명성이 5 오릅니다.
명성이 3 오릅니다.
소소하게 명성이 올랐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저기요. 다들 지금이라도 떨어져서 걸어 주실 순 없을까요?”
“내 생각엔 이미 늦었어, 공녀.”
알면서도 해 본 불평에 최종 보스로부터 얄미운 대꾸가 돌아왔다.
‘……짜증 나.’
그나마 오는 길에 내 치맛자락이 많이 말라서, 여전히 축축하긴 해도 물 자국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위안이었다.
점점이 튄 핏자국도 팔랑거리는 옷자락에 묻혀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흙탕물이 좀 튀었겠거니 하고 말 정도였다.
‘물에 빠진 흔적까지 역력했으면 대체 무슨 소문을 엮어 낼는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바로 그때, 수군대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누군가가 등장했다.
“당…… 아니, 누님!”
“칼릭스?”
얘가 대체 왜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내 물음에 칼릭스가 기가 찬다는 듯 하! 하고 숨을 뱉었다.
“그거야말로 제가 누님께 묻고 싶은 말이로군요.”
“나?”
나야…… 그렇게 물어보면 좀 많은 일이 있기는 했는데…….
대답을 망설이는 내 기색 속에서 무슨 수상함을 발견한 건지, 칼릭스의 표정이 대차게 일그러졌다.
“숲속에서 세 분을 우연히 만났을 뿐이야.”
뒤늦게 시도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체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아니, 됐습니다.”
칼릭스는 간신히 화를 참는 눈치였다. 그가 이를 악물고 빠른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여기서는 보는 눈이 많으니 이쯤 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응…….”
이건 분명히 나중에 잔소리를 거하게 하겠다는 신호인데.
칼릭스는 놀리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한번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하면 쉽사리 말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번에는 저번에 써먹었던 ‘그래서 걱정했니?’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잔뜩 화가 났으면서도, 칼릭스는 보는 눈을 의식했는지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자 전하, 대공 전하, 그리고 에스테반 후작.”
로잔헤이어의 소공작답게, 끓어오르는 노기를 훌륭하게 감춘 인사였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제 누님을 안전하게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
세 남자가 잠깐 애매한 시선을 교환했다. 결국 나선 사람은 — 개중에서 사회성이 가장 멀쩡한 — 황태자였다.
“신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소공작까지 나서서 감사 인사를 할 필요는 없네.”
“그렇습니까? 그럼.”
칼릭스는 냉큼 자기가 내뱉은 감사 인사를 도로 주워 담았다. 그 빠른 태도 전환에 황태자가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유리 공녀!”
다행히 그때, 비앙카를 비롯해 나와 어울리는 영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한참 찾았는데, 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적절한 질문이다. 나는 들으란 듯이 대답했다.
“숲에서 길을 잃었어요. 어쩌다 보니 여기 세 분을 전부 만나 버렸네요.”
“어머나, 세상에.”
“당황하셨겠어요.”
다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눈치껏 내 말을 믿어 주는 티를 내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때마침 잘되었다는 투로 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예. 이따가 연회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서글서글하게 대꾸하는 건 황태자 뿐, 에스테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고, 최종 보스께서는 나를 향해 의미 있는 눈짓을 한 번 해 보이고는 그대로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참.’
올 때나 갈 때나,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 * *
저녁이 되어, 연회장에 불이 밝혀졌다.
춤곡이 아닌 선율이 잔잔하게 흐르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회장으로 등장했다.
화사한 부채들이 조용히 파닥거리는 가운데, 은밀한 대화가 오갔다.
“소식 들으셨어요?”
“유리 엘로즈 공녀 이야기 말인가요?”
“네에. 아까 전에 공녀께서 두 분 전하와 후작 각하와 함께 숲에서 나온 건 보셨지요?”
“그 광경을 어떻게 못 봤겠어요? 기절할 만큼 놀랐는걸요.”
기절할 뻔했다라.
참으로 과장스러운 표현력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놀랐다 하더라도 그만큼은 놀라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그 광경에 정말로 기함했던 사람, 칼릭스는 현재 커튼 뒤에 몸을 숨긴 채 레이디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꼴사나운 짓을 하고 있었다.
기척을 죽인 기사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아가씨들은 마음 놓고 수다를 이어 나갔다.
“주목할 일은 엘로즈 공녀의 리본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는 거예요.”
“맞아요, 그 덕분에 사냥제의 우승자가 되셨잖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소문에는…….”
소곤소곤소곤.
귓가에 전해진 이야기를 다 들은 영애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긴, 뭐가!
퍽 튀어 나가서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칼릭스는 그쯤에서 테라스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