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뭐?”
대공에게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위기에 몰리기 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니까.’
대공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열심히 항변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건 보면 알아.”
어이구. 당연히 그러시겠지.
“용의 피라……. 이건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턱을 매만지며 요구하는 최종 보스에게,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주머니 속에서 꺼낸 우승 제비를 보여 주었다.
“……그게 뭐지?”
역시나.
‘잘도 사냥꾼의 권리 운운하더니, 게임 룰도 모르고 참가한 거잖아!’
“이번 사냥제의 우승 제비예요.”
그게 뭐 어쨌냐는 듯한 심드렁한 시선이 돌아왔다.
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사냥제가 끝날 때까지 리본을 지키면, 제가 우승자가 될 수 있어요.”
정석은 제비 소유자의 리본을 손에 넣은 사냥꾼이 우승의 영광을 원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거지만, 만일 우승 제비를 손에 넣은 사냥감이 끝까지 리본을 지키면 그 사냥감이 우승자가 된다.
“우승자는 상품으로 황제 폐하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요.”
“즉, 공녀의 말은……?”
“소원의 권한으로 황제 폐하께 용의 피를 요구할게요.”
“…….”
최종 보스의 눈빛에 아까까지와는 다른 이채가 돌았다.
진심으로 흥미로워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매력적인 제안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해서 공녀가 얻는 게 뭔질 알 수가 없군.”
“그것까진 비밀이고요.”
“……재미있군. 좋아. 공녀의 제안에 따르도록 하지.”
카미엘을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 달성률이 20% 상승합니다!
훌륭한 설득의 대가로 ‘초보 협상가’ 칭호가 ‘중급 협상가’로 승급합니다.
칭호의 효과: 지력 +50, 화술 +50, 매력 +30. 사람들이 당신의 설득에 조금 더 귀를 기울입니다.
서, 성공했다.
나는 치밀어 오르려는 안도의 한숨을 다시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 이제 그만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
“……그러는 게 좋겠어요.”
이 모든 게 피를 질질 흘리는 마물 대가리 옆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저건 어떻게 처리하죠?”
“이따 마법사들을 보내서 처리하게 해야지. 아마 실험 재료가 생겼다고 좋아할걸.”
“!”
실험 재료라고?
“잠깐만요!”
“응?”
최종 보스가 귀찮은 듯 내 쪽을 돌아보았다.
‘용건 끝났다 이거지.’
저래 놓고서 어떻게 나랑 친해지고 싶다는 말을 믿으라는 걸까?
내 거짓말에 능력치가 부족하다면 최종 보스님의 거짓말에는 성의라는 게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밀어 넣으며 본론을 말했다.
“저 마물 대가리……가 아니라 자른 머리의 소유권 말이에요, 저한테 넘겨주시면 안 되나요?”
“뭐?”
대공이 혀를 찼다.
“공녀, 저런 걸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나?”
“그게 아니라…….”
일일이 성질 돋구네!
“모르셨겠지만 저도 일단 마법사거든요.”
이제 막 마나 회로를 자각한 햇병아리 ‘어린 마법사’이기는 하지만, 나도 넓게 보면 마법사의 범주에 들긴 했다.
“……실험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뭐, 좋을 대로 해.”
“감사합니다!”
내가 실험을 할 생각은 물론 없다.
난 저 대가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조금도 모를뿐더러, 웬만하면 저걸 바라보고 싶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저게 마법사들이 환장한다는 귀한 실험 재료라면, 엘리야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호감도도 오르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방긋 피어났다.
“…….”
최종 보스의 시선이 그런 내 얼굴에 물끄러미 머무르는가 싶더니, 곧 그가 뒤돌아섰다.
“따라와.”
엥?
“저희 같이 가나요?”
“당연하지.”
아니 어째서 그게 당연해?
내가 노골적으로 미간을 좁히자, 대공이 “이것 봐라” 하며 헛웃음을 토했다.
“공녀, 그대 혼자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리본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나?”
“아…… 그건…….”
“장담할 수 없겠지. 그러니까 내가 게임이 끝날 때까지 공녀를 지켜 주겠다.”
……네?
로엔 대공 카미엘이 당신의 임시 호위가 됩니다!
명성이 100 오릅니다.
아니…… 이게 웬 달갑지 않은…….
“대공 전하의 그 말씀은……?”
“게임이 끝날 때까지, 어디 한번 친목을 다져 보도록 할까?”
최종 보스가 화사하게 웃었다. 무서우리만치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군.”
“하하, 하, 하…….”
울고 싶었다.
* * *
논리로도, 힘으로도 이길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최종 보스를 꽁무니에 달고 다니게 되었다.
‘이 상태로도 우정 이벤트, 발생하려나……?’
나는 초조하게 방향을 가늠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공녀?”
눈치 한번 귀신같다.
“개울을 찾고 있어요.”
“개울을?”
“피가 튀었잖아요.”
나는 괜히 불만스러운 척 내 치맛자락과 구두를 보여 주었다.
특히나 심각한 건 신발 쪽이었다. 밑창에 피가 꾸덕꾸덕하게 들러붙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이 꼴을 하고 돌아가면 다들 놀랄 테니, 어느 정도는 씻어 내고 싶다고요.”
물론, 그런 이유만이 아니라 이벤트가 발생할 장소를 찾고 있는 거기도 하지만.
최종 보스가 흐음, 하더니 말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나?”
“네?”
“개울가라면 지금 공녀가 향하는 그 방향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 해. 다행히 거리는 멀지 않군.”
“어떻게……?”
물소리 하나 안 들리는데, 어떻게 저런 걸 아는 거지? 사람이 아닌가?
최종 보스가 예의 눈을 접어 웃는 여우같이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밀이야.”
“아, 네…….”
“공녀만 비밀을 가지라는 법은 없지 않나. 나도 하나쯤은 비밀이 있어야지.”
“그러세요…….”
뭐,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는 순순히 대공이 가르쳐 준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자 대공이 뒤에서 약간 놀란 어조로 중얼거렸다.
“흠, 순순히 믿는 건가?”
“…….”
이 사람이 진짜.
“자꾸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구실 거예요?”
“아니, 딱히 의미심장하게 군다기보다…… 그대가 순순히 내 말을 믿는 게 좀 신기해서.”
“별게 다 신기하시네요.”
“신기하다기보다…….”
그가 손을 내저어 내 머리 근처에서 왱 맴도는 벌을 쫓아내 주며 말했다.
“……경계심이 많은 것치곤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있다 싶어서?”
“……저 먼저 갑니다.”
팩 돌아서자 뒤에서 남자가 조그맣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휴.’
사사건건 내 행동을 재미있어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를 아예 안 하는 게 답이다.
나는 거대한 참나무 둥치를 지나쳐 개울이 있다는 방향으로 향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귀에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이네.’
이런 사소한 걸로 거짓말은 안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멀리서 물가를 찾아내는 능력이 신기하긴 했다.
조금 더 걸어, 우리는 개울가에 도착했다.
“와.”
개울가 특유의 조금 더 서늘한 바람과 물 냄새가 기분 좋게 끼쳤다.
맑은 물을 보자 어서 이 냄새나고 불길한 액체를 씻어 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저기서 기다리다 보면 이벤트가 발생할 테니, 그때까지 옷이랑 신발을 좀 수습하고 있어야…….’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가 개울가로 가까이 발걸음을 재촉한 순간.
“잠깐, 공녀……”
“우와, 앗, 잠깐……!”
신발을 디딘 돌 위에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기 때문일까?
미끌, 하고 발이 미끄러졌다.
‘아, 안 돼!’
서둘러 균형을 잡아 보려고 했지만…….
첨벙!
“읍푸!”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공녀, 괜찮나?”
멀찍이서 따라오던 대공이 서둘러 내 쪽으로 접근했다.
나는 얼굴에 튄 물을 닦아 내며 대답했다.
“안 괜찮아요…….”
다행히 얕은 개울가여서 다치지는 않았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치마 아래쪽이 흠뻑 젖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휴…….”
누굴 탓하랴? 내 잘못이지.
게다가 넘어지면서 구두에 자글자글한 흙이 굴러들어 와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치마를 조금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었다.
“잠깐, 공녀……”
“보기 싫으면 잠깐만 뒤돌아 계세요.”
말리려는 최종 보스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신발을 마저 벗었는데…….
“……유리 공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앗, 벌써?
‘이벤트: 개울가에서의 만남’으로 진입합니다!
사냥 게임 종료 시점까지 세 사람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시 ‘평화의 수호자’ 칭호를 얻습니다.
칭호의 효과: 정신력 +50, 화술 +30.
고개를 들어 보니 에스테반 후작과 황태자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유리 혼자서 개울가에서 쉬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나타난다는 전개였지만…….
“……공녀, 그 모습은 대체……?”
치맛자락을 붙잡고 허연 맨발을 드러낸 나를 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가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괜찮아요.”
나는 젖은 치맛자락을 쥐고, 신발에 발끝을 걸쳐 넣고 살살 흔들어 물살에 모래를 흘려보내며 에스테반 후작의 질문에 대답했다.
‘두 사람 다 리본을 안 묶은 걸 보니 사냥꾼이군.’
설마 저 두 사람이 내 리본을 노리진 않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다.
“카미엘, 당신은 여길 왜?”
민망한 장면에서 고개를 돌린 황태자가 그제야 대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안.”
대공이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황태자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연히 마주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