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82)

33화

* * *

울고 싶은 심정을 참으며, 나는 일단 다른 사냥감들 사이에 섞여 숲으로 향했다.

숲이라고 해 봤자 황궁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인 데다, 이번 사냥제를 위해 2주 전부터 대대적인 소탕 작업을 해서 위험 요소는 없었다.

……아마도?

‘뭐, 있거나 말거나!’

지금 내게는 이 숲속에 미처 쫓겨나지 못한 멧돼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히 10분 뒤에 시작될 추격전에서 최종 보스가 날 못 찾는 게 더 중요했다.

최소한 그의 손에 걸려 원작보다 일찍 유명을 달리하는 사태는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날 죽일 마음이 없다고 해도, 조만간 이 제국에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가진 사람과 얽혀서 좋은 꼴을 볼 리는 없었다.

그런고로.

‘도망친다!’

다른 사냥감들이 은근히 리본을 사냥당하길 기다리며 숲 어귀에서 어슬렁거리는 동안, 나는 원피스 위에 걸친 가운을 단단히 여미며 깊은 숲속으로 향했다.

무작정 도망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를 좀 했지.’

나는 주머니 속에서 마나석을 하나 꺼냈다.

바로 ‘정령의 친구’라는 마법을 새긴 마나석이었다.

‘정령의 친구’는 기척과 모습을 자연물 수준으로 감춰 주는 그런 마법이었다.

나는 마나석을 꼭 쥐고, 천천히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나석이 곧 빛을 발하며, 따뜻한 기운이 내 몸을 감쌌다.

‘된…… 건가?’

안타깝게도 기척이 정말로 사라졌는지 내 입장에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설마 사기를 당한 건 아니겠지?’

어쨌든 뭔가 마법이 시전된 건 맞았으니까, 된 걸로 치자.

마법을 시전한 나는 조금 마음을 놓고 — 어쨌든 상대는 무려 최종 보스였으므로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 아까보다 조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숲속은 울창하기는 하지만, 아직 여름은 아니라 잎사귀들이 여려 햇빛이 어느 정도 들었다.

길은 없었지만, 나무뿌리만 주의하면 그럭저럭 걸을 만했다.

‘미리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오길 잘했지.’

여러모로 준비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응?’

그런데 바로 그때.

‘뭐지? 주변이 좀 술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쏴아아아,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등을 서늘하게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소리나, 기타 다른 오감을 건드리는 자극이 아니었다.

‘이건…….’

마나.

마나의 흐름이 뭔가 구물거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느낌이 안 좋아.’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바로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끼긱, 끼익, 끼기기긱…….

녹슨 문을 억지로 여는 것 같은, 혹은 아주 천천히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뭐, 뭐지?’

눈앞에서 공간에 시커먼 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감지됩니다!

‘균열’의 흐름이 거세집니다!

‘균열’ 너머에서 미지의 존재가 감지됩니다!

그와 동시에 다급하게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균열이라고?’

균열 너머의 미지의 존재라면 당연히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마물!’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원작 이벤트에서는 당연히 없었던 일이었다.

이 게임의 장르는 어디까지나 연애 시뮬레이션. 균열이니 마수니, 설정은 있었지만 그게 게임 내에서 본격적으로 대두한 적은 없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확실하게 망했다.

기척을 죽이는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었다는 것도 잊고, 나는 천천히 숨을 죽여 가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내가 물러서는 것보다 공간의 금이 벌어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쩌억, 하고 입을 벌리듯이 균열이 크게 벌어진 순간.

“윽!”

때마침 나는 뒷굽이 뿌리에 걸려 주저앉고 말았다.

‘안 돼……!’

급히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균열에서 나온 거대한 앞발이 균열의 틈을 더 벌렸다.

쿠웅.

파충류 같은 눈동자에 늑대 같은 머리, 사자 같은 앞발…….

더 볼 것도 없었다.

‘마물이잖아!’

‘균열의 괴수’가 출몰합니다!

균열의 영향으로 ‘정령의 친구’의 가호가 엷어집니다.

시스템 메시지로 굳이 알려 줄 필요도 없었다. 균열 속에서 등장한 마물의 금빛 눈이 정확히 나를 감지했으니까.

쿠워어어어어!

때를 맞춘 듯 마물이 괴성을 질렀다.

‘윽……!’

하울링.

마물의 울부짖음은 그 자체로도 공격 수단이 되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번 판은…….

‘데드 엔딩이구나!’

닥쳐올 고통에 대비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눈을 질끈 감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때.

“……이런 곳에 있었나?”

“!”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내가 눈을 번쩍 뜬 순간.

‘자, 잠깐!’

마물의 거대한 앞발이 후우웅, 공기를 찢으며 내게 쇄도하고 있었다!

동시에 스릉, 하는 발검 소리가 옅게 공기를 울렸다.

그리고…….

콱, 콰지지직!

내게 쇄도하던 마물의 앞발 위를 검이 거침없이 내려찍었다!

“크어어어억!”

“시끄러워.”

마물의 비명을 단조롭게 일축한 목소리의 주인이 검을 뽑아낸 순간.

푸악, 하며 치맛자락까지 피가 튀었다.

그냥 피가 아니라 타르처럼 검고 찐득찐득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액체였다.

하지만 혐오스러워할 틈은 없었다.

“그만 사라져.”

급박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나른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폭이 넓고 거대한 검이 마물의 목 줄기로 쇄도했다.

와드득, 콰득!

거대한 검은 목을 벤다기보다 목을 찢고 목뼈를 부수듯이 뭉개며 마물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쿵!

잘린, 아니 목이 으깨진 마물의 머리가 그대로 땅에 철퍽 떨어졌다.

채 눈을 감지도 못해, 세로 동공이 선명한 노란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가공할 정도의 힘의 소유자…….’

달리 말할 것도 없었다.

“괜찮아 보이는데, 공녀.”

최종 보스, 로엔 대공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평에 나는 더듬거리면서도 반박했다.

“그다지 괜찮지는…… 않은데요…….”

화술이 20 오릅니다.

정신력이 10 오릅니다.

“입은 살아 있군. 일어나.”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제까지 이 사람을 피하던 중이었다는 것도 잠깐 잊고, 그 팔 위에 내 팔을 얹었다.

괴물을 찢어발긴 팔이 손쉽게 나를 끌어당겼다.

일어나 보니 새삼 그가 처치한 마물의 거대함을 알 것 같았다.

‘머리 높이가 내 허리까지 와…….’

“이걸 대체 어떻게……!”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대공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균열’의 흐름이 잦아듭니다.

키이이잉……. 소리를 내며 균열이 닫혔다.

“윽.”

아이러니하게도 안전해졌다는 확신이 들자, 그제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하울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정신력 수치: 110

정신력 수치가 기준치 100을 넘겨, 기절하지 않습니다.

다, 다행이다.

‘여기서 기절까지 했으면…….’

다행히 대공이 휘청이는 내 몸을 단단하게 지지해 주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햇살이 비치는 연초록색 잎사귀들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일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아차, 나도 모르게 본심이.

“저기, 그게……”

“뭐, 감사를 바라고 그대를 구한 건 아니니까 상관없긴 한데.”

“그럼 대체 뭘 바라고 저를……?”

“…….”

대공의 눈에 예의 그 요사스러운 눈웃음이 어렸다.

“눈치가 빨라서 좋군.”

‘역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용의 피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건 정말로 제 수중에 없어요.”

“알고 있어. 보주의 봉인을 푸는 데 사용했다고 했지. 그게 거짓말이 아니란 건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글쎄.”

대공이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공녀와 친해지고 싶어서?”

뭐!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냉큼 거짓말을 하는 작태가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요.”

내 즉답에 대공의 한쪽 눈썹이 ‘이것 봐라?’ 하듯 쓱 올라갔다. 그가 재미있다는 투로 말했다.

“무슨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단언하는 거지?”

“그게…….”

당신은 근 2년 내에 반역을 저질러 내 목숨을 앗아 갈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저도 거짓말쯤은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어요.”

“글쎄.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

“공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러니까 오늘은…….”

“!”

대공의 손이 내 어깨 위로 길게 내려온 분홍색 리본을 잡았다.

그 리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가 말했다.

“……이 리본을 얻어 내는 걸로 그 관심을 표현하고 싶은데.”

“아, 안 돼요!”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자연히 그의 손에서 리본이 빠져나와 도로 내 어깨 위에 안착했다.

나는 리본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대공을 경계했다.

그러자 대공의 눈썹이 의외라는 듯 쓱 올라갔다.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는 거지?”

“그…….”

말문이 막혔다.

“……리, 리본을 주고 싶은 다른 상대가 있어서.”

“거짓말.”

경고! ‘화술’ 능력치가 부족합니다.

귀신이 따로 없네, 진짜!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숨기며 우겼다.

“진짠데요.”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면 그 실력 가지고는 안 될 거야.”

마치 내 상태창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듯한 단호한 말투였다.

“아, 아무튼 리본은 안 돼요.”

“안 된다고 할 수 있나?”

스윽, 내가 한 걸음 물러나면서 멀어진 거리를 그가 다시 메꿨다.

“오늘 나는 사냥꾼이고…….”

그의 붉은 눈빛을 마주한 순간, 내가 정말로 피식자가 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공녀는 사냥감인데.”

공기 중을 떠도는 짙은 피비린내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승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리본은 안 돼요.”

이거 없으면 우정 이벤트 못 본단 말이야!

“이것 참.”

내 필사적인 거부에, 대공이 가식적으로 팔자 눈썹을 그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대단히 난처해진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나나 공녀가 어린애도 아니고. 자꾸 그렇게 안 된다고만 하면 어떡하나? 게임에 참여한 이상 규칙에 따라야지.”

“아니…….”

미치고 팔짝 뛰겠네, 진짜.

‘이걸 어쩌지?’

뭔가…… 리본 말고 저 사람의 신경을 돌릴 만한 뭔가가 없을까?

‘……아!’

궁지에 몰린 그 순간, 주머니 속 아직 버리지 못한 우승 제비에 퍼뜩 생각이 미쳤다.

“거래! 거래를 해요.”

“흠?”

“그러니까 저한테 지금…….”

우승 제비부터 설명하려다가, 그러기엔 너무 다급했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본론을 질러 버렸다.

“용의 피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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