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82)

32화

* * *

최종 보스와 다시 마주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내가 요 며칠을 어떻게 보냈냐면…….

‘그냥 집에서 틀어박혀서 보냈지, 뭐.’

핑계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나는 말에서 낙마할 뻔한 충격으로 며칠간 집에서 쉬는 걸로 되어 있었으니까.

‘며칠 잘 쉬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변명을 써먹기 어려운 때가 되었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사냥제’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냥제도 패스하고 틀어박힌다고 해서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내게는 이번 사냥제를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남주인공들과의 우정 이벤트!’

그렇다. 배드 엔딩을 보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첫 우정 이벤트가 이번 사냥제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직 몰타에서 최종 보스에 대한 정보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정 이벤트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리고 뭐, 최종 보스가 꼭 사냥제에 참여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원작 게임에서는 당연히 그가 사냥제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이번만큼은 제발 원작대로 일이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카시스 제국의 봄철 사냥제가 일반적인 사냥제처럼 남성들이 주로 나서서 사냥감을 사냥하는 행사였다면, 대공이 참석하거나 말거나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하지만 카시스 제국의 봄철 사교시즌 사냥제는 일반적인 사냥제와 달랐다.

우선 봄철은 일반적인 동물 사냥이 허가되는 시기가 아니다. 뇌조, 꿩, 여우 등 가치 있을 만한 사냥감들은 8월이 지나야 차례대로 사냥이 해금된다.

‘마물 사냥이야 사시사철 언제든 가능하지만.’

그건 사교 시즌의 이벤트로 진행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중무장한 기사와 마법사를 한 무더기 데리고 가서 벌이는 토벌전이라면 모를까.

동물도 안 되고, 마물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 사냥제에서 대관절 무엇을 사냥하는가?

그것은 바로…….

“……사냥감이 될 준비는 다 되신 겁니까?”

……인간, 정확히는 사냥감 제비를 뽑은 인간들이 사냥감 역할을 맡는다.

“칼릭스, 내가 꼭 사냥감 제비를 뽑는다는 보장은 없잖니.”

얘가 느닷없이 나를 찔러보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서, 이제는 좀 적응이 됐다.

나는 일단 생각을 정리하고, 느긋하게 보이도록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준비랄 게 뭐 있겠니? 그저 잠시간의 여흥일 뿐인데.”

“그 말은, 즉.”

칼릭스의 눈빛이 대번 뾰족해졌다.

“사냥감이 되신다면, 아무에게나 리본을 허락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내가 허락하고 말고가 중요할까?”

이 사냥제에서 여우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사냥감임을 표시하기 위해 잘 보이는 곳에 리본을 묶는다.

그러다 사냥꾼들에게 잡히면 리본을 내주는 게 규칙이었다.

간혹 상대가 마음에 들면 사냥감 쪽에서 먼저 사냥꾼에게 리본을 풀어서 내주기도 하지만…….

‘나한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지.’

단순히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냥제에서 우정 이벤트에 진입하는 조건이 있었다.

사냥꾼이라면 ‘리본을 사냥하지 않을 것’.

사냥감이라면 ‘리본을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사냥감이라면…….

‘누가 됐든 절대 못 줘. 난 우정 이벤트를 봐야 한단 말이야.’

단단히 결심한 속내와 달리, 나는 심드렁한 척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냥감이고, 누군가에게 잡힌다면…… 그 사람에게 리본을 주게 되겠지.”

내 말에 칼릭스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이지, 기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단순한 사고방식이로군요.”

“원래 사냥제라는 게 그런 거잖아?”

“…….”

칼릭스는 내 사고방식이 몹시 불만스러운 모양이었지만, 더 이상 할 말을 찾진 못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다수가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 이벤트 자체가 결혼 적령기 남녀들이 서로를 탐색하고 호감을 갖기에 적절한 구조였다.

평소보다 움직이기 쉬운, 보다 현대적인 원피스에 가까운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들이 서로 까르륵 대화를 하면서도 신사들 쪽을 흘깃거렸다.

남자들 쪽에서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척하면서도 평소보다 더 어깨를 펴고 있었다.

뭐랄까?

‘……공작새들 같아.’

“언니, 오라버니. 무슨 대화를 즐겁게 나누고 계셨나요?”

그때, 엘레니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칼릭스가 쌀쌀하게 대답했다.

“별로 즐겁지는 않았어.”

“아이, 참. 오라버니, 언니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흥.”

칼릭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냥 그 둘을 내버려 두었다.

‘나와 칼릭스의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걸 저쪽에서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이럴 때는 칼릭스의 까칠한 성미가 도움이 됐다.

“언니.”

그때, 엘레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만약 오늘 사냥감이 되신다면, 리본은 황태자 전하께 건네드릴 건가요?”

아직 사냥감 제비를 뽑은 것도 아닌데, 칼릭스도 엘레니도 모두 내가 사냥감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아닌 척하며 이쪽을 약간 흘겨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글쎄…… 어떻게 될까?”

“모쪼록 언니의 리본이 가치 있는 분의 손에 들어갔으면 좋겠네요.”

“알이 깨기 전에 병아리를 세면 안 되지.”

나는 대강 대답해 주고, 주변을 다시 훑어보았다.

황태자 에이드리언은 단상 바로 아래에서, 에스테반 후작도 멀지 않은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많은 레이디들이 그쪽을 향해 선망의 시선을 던지는 게 느껴졌다.

‘저 두 사람이 사냥꾼이라면, 굳이 사냥을 안 해도 리본이 쌓이겠는걸.’

그래 봤자 우승자는 못 될 테지만.

이 사냥제에서 사냥꾼이 모은 리본의 수로 승자를 결정하는 야만스러운 일은 없다.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리본을 독식하는 것도 평판에 썩 도움이 안 된다.

‘이벤트 내내 이 사람 저 사람 꽁무니만 따라다녔다는 뜻이 되니까.’

이 사냥제에서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은 매우 간단했다.

“자, 모두 이쪽으로 오십시오!”

황실의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제비를 뽑을 시간입니다!”

신사 숙녀들이 총총 몰려가 하나씩 제비를 뽑기 시작했다.

“어머, 난 올해 사냥꾼이네.”

“난 사냥감이로군.”

‘난…….’

사냥감 제비를 뽑았다. 옆을 보니 비앙카 영애도 같이 사냥감 제비를 뽑았다.

“자, 사냥감 제비를 뽑으신 분들은 따로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다시 제비뽑기를 하겠습니다!”

사냥감들만 따로 모아서 제비뽑기를 진행한다.

‘저 중에 하나, 우승 제비가 있다.’

사냥제의 승자는 우승 제비를 뽑은 사냥감의 리본을 얻어 낸 사람이며, 승자는 자기가 얻은 우승의 영광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바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 사냥제의 우승자가 탄생하게 된다.

포상도 있다. 당해 사냥제의 우승자에게는 황제에게 무엇이든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유리 공녀, 우리도 어서 가요!”

비앙카가 들뜬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뒤섞여 눈에 띄지 않게 제비를 뽑았다.

다들 남몰래 제비를 펼쳐 보는 분위기라, 나도 적당히 손으로 가리면서 제비를 펼쳐 보았다.

그러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설마 이 몇백 개 중에서 우승 제비가 내 것일 리가…….’

얼레리?

펼친 제비에 찍힌 붉은 점을 본 나는 잠시 대략 멍해졌다.

‘……있었네?’

“유리 공녀! 제비를 확인하셨나요?”

비앙카의 물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와그작 하고 손에서 제비를 구겨 버렸다.

“그게……”

“아, 결과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말 안 할 거니까요.”

“아, 하하. 네, 그렇죠. 비밀이죠…….”

망했다.

‘아. 이런…….’

누구에게도 리본을 내주어선 안 되는데, 하필이면 우승 제비를 뽑아 버리다니…….

뽑은 제비를 몰래 슬쩍 버려 버릴까, 잠시 고민한 그 순간.

“어머, 유리 공녀! 저길 좀 보세요!”

“네, 네?”

비앙카가 갑자기 내 소맷자락을 당겼다.

“저기요, 저분! 로엔 대공 전하가 아니신가요?”

뭐!

나는 깜짝 놀라 화들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신사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금발 머리가 금세 눈에 띄었다.

황태자일 가능성은 없었다. 대공의 머리에는 황가 특유의 금발과는 다른 특징이 하나 있었는데, 마치 타오르는 용광로 속 순금처럼 미묘하게 붉은 광택이 감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주변에 있는 다른 신사들보다 최소 반 뼘에서 한 뼘 정도 더 키가 커서 더 눈에 띄었다.

‘아니 저 사람이 대체 왜…… 여기까지……?’

게다가 리본을 받지 않은 걸 보니, 그는 사냥꾼이었다.

사태는 이제 우승 제비를 버리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잡히면 죽는다.’

그가 안 보일 때는 누구에게도 제비를 넘겨줄 수 없다는 의욕으로 충만했지만, 막상 여기까지 등장한 저 남자를 보니 전의가 꺾이는 느낌이었다.

‘원작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이 굳이 여기까지 나타난 이유가 뭐겠어!’

나.

이리 봐도 나, 저리 봐도 나, 모로 봐도 내가 틀림없었다…….

내가 절망에 빠지거나 말거나, 주변 영애들은 술렁거리며 속닥거리기 바빴다.

“과연, 황홀할 정도로 미남이시라더니…….”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개안하는 느낌이네요.”

바로 그때였다.

“어머, 이쪽을 보셨어요!”

마치 자신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혹은 내 기척을 감지한 것처럼…… 그가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쪽을 바라본 붉은 시선이 천천히, 가느다랗게 웃음을 머금었다…….

어머! 하는 영애들의 탄성 속에서 나는 절망적으로 확신했다.

‘누, 눈 마주쳤어.’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유리 공녀? 어디 안 좋으세요?”

“아, 네!”

그래, 차라리 몸이 안 좋은 척을 하자!

비앙카 영애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내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부우우우웅.

……뿔피리 소리가 타이밍 좋게 울렸다.

‘……아 나, 진짜!’

게임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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