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82)

31화

“고, 고맙……”

“빨리.”

“아, 네.”

나는 황급히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반쯤 끌어안았다. 팔 안에서 대공의 등 근육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대담한데?”

“네? 뭐라고요?”

“아니.”

대공은 서서히 말을 달리는 속도를 늦췄다. 마침내 평지를 다그닥거리며 걷는 정도가 되자, 그제야 나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내 말은 언제 날뛰었냐는 듯 저쪽 앞에 멈춰 서서 고개를 푸르르 털고 있었다.

“말이…….”

마치 내가 뛰어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번 얌전해진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에 집중할 때가 아닐 텐데.”

“!”

흠칫 놀란 순간.

“유리 공녀! 괜찮나요?”

저쪽에서 영애들이 다가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괘, 괜찮아요!”

큰 소리로 외치고 보니, 갑자기 이 남자와 내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기, 대공 전하.”

“음?”

“도와주셔서 감사한데…… 저는 이만 제 말로 옮겨 타는 게…….”

“…….”

대공의 얼굴에 눈으로만 웃는 의미심장한 웃음이 번졌다.

“괜찮겠나? 또 날뛸지도 모르는데.”

“…….”

뭐지?

‘기분 탓인가?’

‘또’ 날뛸지도 모른다는 말에 미묘한 강세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이왕이면 공녀에게 도움이 된 김에 끝까지 도움이 되고 싶군.”

수상하다…… 수상해.

하지만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유리!”

“아버지?”

저쪽에서 말을 탄 공작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얼레, 혼자가 아니네.’

자세히 보니 그 뒤에 칼릭스도 따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귀족원 회의에 칼릭스도 함께 참관한다고 했지.’

귀족원 회의가 벌어지는 외궁에서 공작저로 돌아가려면 여기 그레이스 파크를 지나서 가야 했다.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던 두 사람은 황급히 이쪽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영애들도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순식간에 머릿수가 많아졌다.

공작이 황급히 물었다.

“유리, 괜찮은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로엔 대공……께서 도와주셨거든요.”

공작의 날카로운 시선이 로엔 대공을 향했다. 딸을 도와준 은인을 바라보는 것치곤 너무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게다가 공작뿐만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칼릭스의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왜지?’

둘 다 내가 그대로 곤경에 처하기를 바랐나?

“……딸아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겨우 튀어나온 감사 인사에, 대공이 해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는 됐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

……화사하게 웃고 있는데도 왠지 요사스러운 마물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인 걸까?

“……아버지, 누님께서 많이 놀랐을 테니 서둘러 집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다행히 그렇게 느낀 건 나만이 아닌 듯, 칼릭스가 잔뜩 경계심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구나.”

바로 뒤이어 대공이 말했다.

“마침 내 집이 이 근처인데.”

설마 쉬고 가라고? 아니지?

화들짝 놀란 내가 턱밑에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조금 웃는 듯한 진동이 맞닿은 몸을 통해 느껴졌다.

그가 느긋하게 말했다.

“마차를 빌려주도록 하지.”

……이거 왠지 내가 농락당하는 기분이 드는데, 착각이 아닌 것 같다.

* * *

대공저에서 빌린 마차를 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

멀쩡히 제 발로 마차에서 내리려는 나를 먼저 내린 공작이 막아섰다.

그가 팔을 이쪽을 향해 뻗으며 말했다.

“조심해서 이쪽으로 오너라.”

“네……?”

나는 나를 향해 벌린 팔과 냉담해 보이는 공작의 표정을 혼란스럽게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단순한 에스코트가 아니라 부축을 해 주겠다는 뜻인 것 같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나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제안이었다.

“아버지, 저 혼자 내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눈치가 없는 사람처럼 칼릭스가 끼어들었지만, 공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엄한 눈빛으로 이렇게 명령할 뿐이었다.

“어서.”

“…….”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미적미적 몸을 움직이며 최후의 반항을 했다.

“무거우실 텐데…….”

“흥.”

공작은 코웃음으로 내 최후의 반항을 물리쳤다.

‘하긴.’

로잔헤이어 공작가는 무가(武家)로, 수장인 공작은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검사 중의 검사였다.

장성한 딸아이 하나 정도 부축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실례할게요.”

공작은 내 어깨를 감싸고, 완전히 나를 자기에게 기대게 했다.

“공작님, 오셨…… 아니, 공녀님?”

점잖게 공작 부자를 맞이하려던 집사가 거의 공작에게 기대다시피 들어오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의사를 부르도록 해라.”

“아,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 저 정말 다친 곳이 없는……”

공작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메인 로비 옆에 딸린 응접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난감한데.’

난감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칼릭스가 냉담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아버지와 나를 뒤따라 응접실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쟤는 대체 왜……?’

공작은 응접실 소파 위에 나를 마치 깃털을 내려놓듯 조심스럽게 앉혔다.

“아버지.”

“기대 있어라.”

그 목소리에 실린 묘한 위압감에, 나는 찍소리도 못 하고 소파 등받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표정이 심각한 공작, 칼릭스. 그리고 나.

상성이라고 해야 할지, 조합이 안 좋았다.

‘어색하다, 어색해.’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주치의와 함께 허둥지둥 들이닥쳤다.

주치의가 너무도 멀쩡히 서 있는 공작과 칼릭스, 나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음……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공작 각하?”

“내가 아니다.”

공작이 흘긋 나를 눈짓했다. 옆에서 칼릭스가 대신 대답했다.

“낙마하실 뻔했습니다.”

“…….”

말 그대로 ‘낙마할 뻔’한 거지 실제론 아무 사고도 겪지 않은 나는 주치의를 향해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무리 나를 살펴봐도 외관상 외상이랄 걸 발견하지 못한 주치의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큼. 실례지만 공녀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글쎄요…… 저도 잘…….”

“예?”

굳이 말하자면 대공의 팔에 격하게 잡아채인 허리 쪽이 조금 욱신거리긴 했지만, 이거야 하루만 지나도 느낌조차 남지 않을 터였다.

‘경험해 봐서 알지.’

어쨌든,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나를 두고 주치의는 흘긋,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그도 이 촌극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어흠, 특별히 다친 곳은 없으시다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낙마를 하실 뻔했다면 하루 정도 후에 근육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를 위해 바르는 약을 처방해 드리도록 하지요.”

아주 적절한 처치였다. 나는 그가 내미는 연고를 고맙게 받았다.

“혹시 어딘가가 특별히 아파진다면 다시 불러 주십시오.”

“음. 이만 돌아가 보도록.”

주치의를 물린 뒤, 공작이 나를 향해 물었다.

“주치의의 말대로 한동안 몸이 아플 수 있으니, 사냥제 전까지는 일정이 있더라도 집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네, 아버지. 그렇게 할게요.”

얌전히 대답했는데도 공작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두 번이나 말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되다니.”

“고생이라기엔 별거 아닌걸요…….”

“…….”

머쓱하게 대답하는 나를 내려다보던 공작은, 곧 집사 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아, 예, 각하.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칼릭스, 너도.”

“예?”

칼릭스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알겠다고 고개를 숙이며 방에서 물러났다.

‘왠지 이쪽을 바라본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유리.”

공작이 나를 부르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말씀하세요.”

“……혹시 대공 전하와 함께 외출을 한 것이냐?”

“네?”

설마 이 부분을 물어볼 줄은 몰랐다.

‘내가? 최종 보스랑? 내 발로?’

그럴 리가!

나는 곧장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보셨다시피 비앙카 영애를 비롯한 다른 영애들과 산책을 나간 거예요.”

“그럼 대공 전하께선……?”

“모르겠어요. 근처에 계시다가 제 말이 난동을 부리는 걸 보신 것 같은데…….”

“……흠.”

공작의 표정에 마뜩잖은 기색이 스쳤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깜빡였다.

잠시 후, 공작이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근래 들어 네가 황가의 신사들과 자주 엮이는 것 같구나.”

“……아, 네…….”

“물론 오늘 일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지만, 사교계의 소문은 그런 사정을 봐주지 않는 법이다.”

“네…….”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칼릭스도 염려하더구나. 네가 황실과 필요 이상으로 엮여 곤란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제야 공작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황실의 일원과 염문이 나는 걸 주의하라는 말씀이신가요?”

“황가는 격이 높고, 격이 높은 만큼 미묘한 알력 관계와 정치적 이해가 얽혀 있는 곳이다. 한번 엮이게 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거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빙빙 돌려 말했지만, 공작의 말을 요약하자면 로잔헤이어의 명예를 위해 내 행실을 주의하라는 뜻 같았다.

‘내가 황태자와 자주 붙어 다니면, 자연스럽게 로잔헤이어가 황태자를 지지하는 걸로 인식할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파트너 한 번에 좀 이른 걱정이 아닌가 싶지만, 그만큼 가문의 명예가 공작에게는 중요한 모양이라고 생각하자.

‘좀 딸 같은 대접을 받나 했더니, 이 말을 위해서였나……?’

속이 약간 비틀리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겉으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실을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작이 약간 미간을 좁혔다.

“행실이라기보다…… 네 평판을 생각하자는 말이었다.”

그게 그거랑 뭐가 달라?

……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굴 수는 없는 법.

나는 생긋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아버지. 로잔헤이어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처신할 테니까요.”

“…….”

내 확언에도 불구, 공작은 무언가 미진한 표정이었다.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의 잔소리를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이 사람보다는…….’

왜 오늘 최종 보스가 그토록 공교롭게 내 앞에 나타났을까?

그게 더 중요한 난제였다.

‘일부러 내가 곤경에 빠지도록 유도해서 적절한 시점에 도움을 주었다……라고 생각하면 너무 과한 거겠지?’

하긴, 그 사람이 내게 얻어 낼 게 뭐가 있어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용의 피도 내가 홀랑 써 버린 마당에…….

……아, 설마?

‘로잔헤이어의 보주에 관심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짚이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뭐가 어떻다고 확신하기에는 단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단 보주는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최연소 대마법사의 손에 있고, 그 사실을 아는 것도 나뿐이니까. 일단은 안전하다고 해도 되겠지.

나는 최소한 몰타에서 정보가 도착할 때까지는 최종 보스와 다시 접촉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