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82)

30화

‘어째 늦게 집에 돌아올 때마다 얘랑 마주치는 거, 우연만은 아닌 것 같은데.’

칼릭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어딜 이렇게 다녀오신 겁니까?”

“의상실에 좀…….”

칼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의상실에서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가족 정찬 시간에는 늦지 않게 돌아오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오늘 정찬이 있었어?

……라고 말하면 칼릭스의 성질을 건드릴 게 뻔해서, 나는 “어쩌다 보니…….” 하고 살살 얼버무리기만 했다.

“외출이 늘어난 것도 그렇고…… 요즘 당신의 행보에는 수상한 점이 많습니다.”

뜨끔.

“어, 어떤 점이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요.”

칼릭스가 훅, 하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

어린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니 생각 외로 키도 크고 나름 위압감도 있었다.

토끼처럼 놀란 나를 두고 칼릭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혹시…….”

“혹시……?”

“……비밀스럽게 연애라도 하고 계신 겁니까?”

“……뭐?”

너무 뜬금없는 말에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칼릭스는 제가 물어 놓고도 그런 내 반응에 놀랐는지 이렇게 외쳤다.

“설마 정말인 겁니까!”

“그, 그럴 리가 있겠니!”

“로잔헤이어의 공녀로서 비밀을 지켜야 하는 연애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칼릭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아니라고 한사코 손사래를 쳐야만 했다.

“맹세컨대 그런 건 진짜 아니야.”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만…….”

믿겠다고 하면서도 칼릭스, 이놈 자식의 눈빛에는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 그래. 믿어 줘서 고마워.”

나는 할 수 없이 필살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매번 이렇게 내가 돌아올 때마다 마주치는 것 같은데…….”

“……?”

“칼릭스, 너 혹시…….”

나는 한 발짝, 칼릭스에게 다가가며 슬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칼릭스가 당황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날 기다렸니?”

“무, 무, 무,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삽시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큰 소리를 치는 칼릭스를 보며, 나는 천연덕스럽게 하하 웃었다.

“아님 말지 왜 그렇게 큰 소리를 치고 그래?”

“다, 당신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붉게 달아오른 채로 더듬거리던 칼릭스는, 암만 해도 안 되겠다고 느낀 모양인지 입술을 악물었다.

“……됐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버럭 소리를 치는 칼릭스에게, 나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 그래. 잘 가.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이익…….”

이를 악물면서도 부정은 없었다. 대신 칼릭스는 홱 하고 돌아서서 쿵쾅거리며 멀어질 뿐이었다.

‘재미있다니까,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나도 쟤가 정말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생각은 안 한다.

그런 희망적인 관측을 하기엔 아직 우리 사이에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아무튼 놀리기 쉬운 성격인 건 분명해.’

나는 멀어지는 칼릭스를 향해 메롱, 하듯 작게 혀를 내밀어 보였다.

* * *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온 내게 시녀가 작은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예의 황실 무도회 초대장의 충격이 컸던 걸까?’

새어머니께서는 이제 내가 받는 초대장에 관심을 끊으려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걸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게는 사사로운 수고를 덜 수 있어 잘된 일이었다.

“다우렌 백작 영애께서 보내셨어요.”

“그렇구나.”

다우렌 백작 영애라면 예전에 시안티크 후작 부인의 피크닉에서 만났던 비앙카 영애를 말하는 거였다.

초대장의 내용은 별것 아니었다.

-친애하는 유리 엘로즈 공녀에게.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일 오후, 그레이스 파크에서 진행하는 승마 모임에 참석해 주시지 않을래요?

분명히 저번 피크닉의 일을 만회하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어요.

비앙카 다우렌 보냄.

“티 파티인가요?”

“아니, 승마 모임이란다.”

첫 승마 기억은 멧돼지를 만나면서 처참하게 마무리됐지만, 공원에서라면 그런 일이 반복되지는 않을 터였다.

‘비앙카 영애는 애초에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니까, 쓸 만한 정보를 줄 수도 있어.’

참석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나는 시녀에게 초대장을 정리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나절에는 비가 약간 왔지만, 점심때를 기점으로 날이 다시 맑아졌다.

로제타 부인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지어 놓은 승마용 스커트와 짧은 벨벳 상의를 차려입고, 나는 모임 장소인 그레이스 파크로 향했다.

“유리 공녀! 안녕하세요!”

“오셨군요, 유리 공녀!”

비앙카 영애를 중심으로 한 영애들이 나를 반겼다.

호위 기사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다음, 가볍게 말 위에 올라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기다리고 있었네요.”

“별말씀을요. 저희도 금방 도착했어요.”

길을 따라 심은 가로수에 새 잎사귀가 울창하고, 꽃들이 만발해 있어 싱그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천천히 말을 몰면서 영애들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침에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날이 다시 좋아져서 다행이에요.”

“비가 내려서 그런지 공기가 더 상쾌한 것 같아요.”

날씨 이야기로 시작한 화제는 금방 사교계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 갔다.

“그러고 보니 저번 황실 무도회에서 유리 공녀님이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로 참석하셨다고 들었어요.”

꺄악, 하는 작은 비명이 아가씨들 사이에 퍼졌다.

“저 그 얘기를 듣고 잠도 못 잘 지경이었어요!”

“저도요, 저도요!”

“유리 공녀, 어떻게 된 건가요?”

……아하, 그게 궁금하겠구나.

“별일은 아니었어요. 그저 태자 전하께 작게나마 도움을 드린 게 있어서, 전하께서 보답 차원으로 제 손을 잡아 주신 것뿐이랍니다.”

“아아, 그래요…….”

“저희는 두 분께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했어요.”

“설마요.”

바로 그때,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비앙카를 비롯한 이 아가씨들, 꽤 정보력이 좋지 않았던가……?’

화제도 전환할 겸,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고 보니 그날, 로엔 대공 전하께서도 무도회에 참석하셨어요.”

“네?”

“로엔 대공…… 전하요?”

“네.”

비앙카 영애가 정보 전달 역답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 분이신데, 황실 무도회라서 특별히 참석하셨나 보네요.”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혹시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분인가요?”

내 말에 영애들이 차례대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대공 전하께서는 워낙 두문불출하셔서요.”

“그분이 사교 시즌에 나타나셨다는 게 신기할 정도인걸요.”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이신데도 상당히 알려진 게 적네요.”

“굉장한 미남이시라고는 들었는데…… 유리 공녀, 사실인가요?”

외려 나에게 다시 질문이 돌아올 정도였으니, 이들도 정말 아는 게 없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대충 이렇게 둘러댔다.

“글쎄요, 저는 먼발치서 뵈었는데 훤칠하신 분인 것 같긴 했어요.”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셨으니, 다른 사교 모임에도 얼굴을 내미실까요?”

비앙카 영애가 어머, 하고 박수를 쳤다.

“다른 사교 모임 하니 생각났는데, 이제 곧 봄 사냥제가 시작되겠어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이번 시즌이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 벌써 그럴 때가 됐나?’

봄 사냥제.

투와르 축제가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이벤트였다.

사교 시즌의 귀족들이 벌일 법한 이벤트였지만, 이번 봄 사냥제는 일반 사냥제와 다르게 동물이나 마물을 사냥하지 않는……

히히히히힝!

“!”

갑자기 내가 타고 있던 말이 거세게 콧김을 뿜어내며 몸서리를 쳤다.

“타시!”

마구간지기에게 전해 들은 말의 이름을 강하게 부르며 고삐를 죄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머, 어떡해!”

“벌에 쏘였나 봐요!”

“다들 물러나요!”

“유리 공녀!”

나는 몸에 밴 모든 승마 기술을 총동원해서 말을 진정시켜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갑자기 미친 것처럼 날뛰기 시작한 말은 진정하기는커녕 푸르르 몸을 한 번 더 떨더니, 냅다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런!’

나는 이를 악물고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쥐었다.

바로 그때.

“몸을 낮춰!”

누군가 강한 목소리로 내게 명령했고, 나는 판단할 새도 없이 말의 등 위로 바싹 몸을 낮추었다.

나뭇가지가 그런 내 등을 와스스 스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모, 몸을 안 숙였으면…….’

언급하기조차 싫은 큰일이 날 뻔했다.

하지만 아직 위기 상황은 끝난 게 아니었다.

말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고, 내 능력으로는 그 잔등에 매달려 있는 게 고작이었다.

“엘로즈 공녀!”

그때, 아까 내게 몸을 낮추라고 명령했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나는 그제야 이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최……, 로, 로엔 대공?”

최종 보스인 로엔 대공이 말고삐를 쥐고 나와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경악이 뒤섞인 내 표정을 보며, 그가 짧게 명령했다.

“고삐를 놔.”

“뭐, 뭐라고요?”

상식선에서 벗어난 명령에 놀란 게 아니었다. 나는 이미 한 번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는 것보다, 저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명령과 반대로 고삐를 흠칫 움켜쥐자, 그의 붉은 눈동자에 흥미 어린 이채가 돌았다.

“재미있군. 그대로 죽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에라이, 모르겠다.

‘설마 자기 체면도 있는데, 다 보는 데서 날 내팽개치지는 않겠지……!’

과연, 고삐를 놓자마자 공중에서 허리를 확 채는 느낌이 났다.

‘억!’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강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딸려 갔다.

세탁기 속에 들어간 빨래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 순간을 견뎠다.

잠시 후.

“꽉 잡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최종 보스님의 가슴팍에 안정적으로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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