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82)

29화

여기다 대고 곧이곧대로 “정보 길드에 비밀스럽게 의뢰를 하러 가느라 호위를 떼어 놓고 나왔답니다.”라고 대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약간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둘러댔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하지만 에스테반 후작은 그쯤에서 추궁을 그치지 않았다.

“로잔헤이어의 공녀께서 호위를 두고 혼자서 외출할 만한 사정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게 그의 잔소리를 피해 뒷걸음질을 친 바로 그때였다.

“비켜요! 거기!”

더그덕 더그덕 말들이 달리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잽싸게 인도 안쪽으로 몸을 피했지만, 마차의 날카로운 장식이 내 팔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공녀!”

팔을 감싸 쥐고 신음하는 나를 다급히 다가온 에스테반 후작이 부축했다.

“쉿…….”

나는 아픔으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말했다.

“사람들에게 내가 공녀인 걸 다 알게 할 셈이에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용모 변형 마법이 걸린 반지, 꽤 비싸단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무용지물로 만들 수는 없다.

정신력이 30 오릅니다.

이를 악물고 상처를 견딘 대가치고는 꽤 괜찮았다.

일단, 나는 내 발로 땅을 디디고 서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발목에 힘이 풀려 재차 넘어질 뻔한 나를 에스테반 후작이 한 번 더 부축해야만 했다.

나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

“그럼 전 이만…….”

“상처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에스테반 후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뭐지?’

한숨을 쉬는 후작의 얼굴이 잘생기긴 했지만, 면전에서 한숨 소리 듣는 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데…….

“상처에서 피가 납니다.”

“네? 정말요?”

그 말에 깜짝 놀라 다친 쪽 팔을 내려다보니, 정말이었다.

마차 장식에 걸려 찢어진 옷이 피에 젖어 나풀거리는 걸 보아하니, 찢어진 건 옷만이 아닌 듯했다.

“이런, 난감하네.”

집에 가서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한담?

“……놀라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난처해하는 나를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후작이 조용히 물었다.

나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대답했다.

“놀란 건데요?”

“보통 이 정도 상처를 입으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곤 하던데…….”

그건 뭐, 일반적인 귀족 영애들 이야기고.

“그렇게 곱게 자라지는 않아서요.”

“…….”

정신력이 20 오릅니다.

침묵 속에서 조용히 정신력 수치가 추가로 올랐다.

반가운 일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걱정이 앞섰다.

‘그나저나 이 상처를 정말 어찌해야 한담?’

이대로 집에 가면 난리가 날 텐데…….

난감해하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후작이 내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니, 이게 웬 뜬금없는 호의람?

‘그럴 필요까지…… 있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내 머릿속을 스치는 사실이 있었다.

‘아, 정신력 수치!’

내 기억이 맞는다면 오늘 에스테반 후작을 만나기 전까지 내 정신력 수치는 50이었고, 방금 연달아 30과 20이 올랐다.

즉.

‘정신력 수치가 100이 넘으면서 나오는 호감도 상승 반응이구나.’

……그러고 보니 공략 대상들 중에 에스테반 후작하고 가장 마주친 횟수가 적었다.

원래대로라면 첫 장면에서 같이 춤을 추면서 눈도장을 찍고 호감도를 쌓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럴 틈이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이참에…….’

삽시간에 교활한 흉계를 꾸민 나는,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그렇게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요?”

“……이대로 공녀를 보내는 게 더 꺼림칙할 것 같으니 괜찮습니다.”

“그럼, 사양치 않을게요.”

“…….”

“아, 잠깐만.”

길가에 나뒹굴었지만, 그래도 상태가 나쁘진 않은 애플파이 박스를 주워 드는 나를 침묵하며 바라보던 후작은, 곧 지나가던 삯마차를 잡았다.

* * *

에스테반 후작의 타운 하우스는 거의 장원 규모에 달하는 로잔헤이어의 타운 하우스보다는 약간 작았지만, 그래도 나름의 멋이 있었다.

‘정원도 그렇고, 뭔가 로잔헤이어보다는 약간 딱딱하고 더 정돈되어 있는 느낌…….’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창문을 내다보는데, 에스테반 후작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앗.’

지금은 유리 엘로즈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소녀 모습이라 에스코트를 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런 고뇌가 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테반 후작은 이쪽을 향해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본인의 저택이니 만에 하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그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나는 에스테반 후작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각하, 그분은 대체……?”

“유리 엘로즈 공녀의 시녀다.”

“예?”

놀란 집사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지만, 에스테반 후작은 그 이상의 설명을 해 줄 의향이 없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각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는 로잔헤이어의 유리 엘로즈 공녀님의 시녀 로잘린이라고 합니다. 공녀님의 심부름을 나왔다가 이렇게 다치는 바람에…….”

“저런!”

집사가 생각보다 큰 내 상처를 확인하고 탄식했다. 나는 머쓱하게 말을 맺었다.

“그래서 각하의 신세를 지게 되었답니다.”

화술이 10 오릅니다.

거짓말이 성공했는지, 화술 수치가 올랐다.

“숙녀분의 몸에 큰 상처가 났군요. 이리 오시지요. 곧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나는 에스테반 후작과 함께 그의 집 응접실로 향했다.

곧이어 의사가 들어와 상처를 진찰했다.

“다행히 꿰매야 하는 상처는 아니군요. 피가 많이 나기는 했지만,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포션을 사용해라.”

“예?”

꿰맬 필요조차 없는 상처에 포션을 사용하라는 말에, 의사는 깜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가주님, 포션을 사용하기에는 상처가…….”

의사의 말이 맞았다. 이런 상처에 사용하기엔 포션은 너무 귀한 약이었다.

하지만 나는 난처한 척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

‘후작의 배려니까.’

이대로 상처를 입은 채로 집에 돌아갔다가는, 상처의 원인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로 변명하기가 복잡해질 것이다.

결국 에스테반 후작의 말없는 의지대로 — 혹은 고집대로 — 내 상처 위에 포션이 부어졌다.

“와…….”

부글거리는 거품이 일었다가 사그라든 자리엔 상처 하나 남지 않은 깨끗한 피부가 날 반겼다.

신기해하는 내게 의사가 설명했다.

“포션을 이용해 상처를 치료하긴 했지만, 부상의 충격 자체가 다 나은 건 아니니 한동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의사는 나와 후작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아무래도 우리 둘 사이를 의심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만 돌아가 보도록.”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 천만의 말씀을요. 그럼…….”

의사가 물러간 뒤, 나는 둘만 남은 응접실에서 “음…….” 하고 어색하게 숨을 삼켰다.

‘일단 인사는 해야겠지.’

“저기, 에스테반 후작님.”

“부르셨습니까?”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 인사에도 불구하고 후작이 한차례 한숨을 쉬었다.

‘거참.’

삐로롱 시스템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공략 대상들의 기분을 캐치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니까 영 모르겠다.

아무래도 모르겠어서 빤히 그를 바라보자, 에스테반 후작이 입을 열었다.

“……공녀가 이렇게 남몰래 돌아다니는 걸 도우려고 한 건 아닙니다.”

“아…… 물론 그렇겠죠?”

딱딱하게 선을 긋는 말이야 예상했다.

나는 “음…….” 하고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감사해요. 아니었으면 정말 난감한 꼴을 당할 뻔했어요.”

“…….”

“돌아다니는 것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후작님의 충고를 반영해서 조금 더 조심하도록 해 볼게요.”

“…….”

내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에스테반 후작이 눈가를 좁혔다.

나는 뭐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직한 약속이에요.”

“……그런 것 같긴 하군요.”

‘?’

착각인가?

‘방금 저 사람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게 스친 것도 같은데…….’

확신할 순 없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마자 에스테반 후작은 다시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갔으니까.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머쓱해서 쓱 한 번 주변을 둘러보는데, 애플파이 상자가 딱 눈에 띄었다.

“아, 후작님.”

“?”

“이거 말이에요.”

나는 애플파이 상자를 끌어다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는 길에 확인을 해 봤어야 하는데, 잠시만요…… 아. 무사하네.”

다행히 애플파이는 귀퉁이만 약간 찌그러졌을 뿐, 그 외에는 무사했다.

“?”

“별건 아니지만, 우리 이거 같이 먹을까요?”

“…….”

“많이 안 망가졌는데…….”

멋쩍어서 배시시 웃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후작의 입가에도…….

“……하.”

이번에는 확실한 웃음이 번졌다.

웃음이라기보다 헛웃음에 가깝기는 했지만, 뭐.

‘어쨌든 웃은 건 웃은 거지.’

“맛있을 거예요.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거거든요.”

* * *

거절할 거라는 섣부른 예상과는 달리, 에스테반 후작은 집사를 시켜 애플파이를 먹을 만한 상태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밀크 티와 귀퉁이가 조금 뭉개진 애플파이 한 조각을 먹었고, 다 먹은 다음에는 에스테반 후작의 배웅을 받아 의상실로 돌아왔다.

“로제타, 다녀왔어.”

“공녀님!”

뒷문으로 살금살금 들어가자, 바느질을 하고 있던 로제타 부인이 반색을 하며 나를 맞이했다.

“안 그래도 좀 늦으시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했어요.”

“호위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닐 거예요.”

나는 로제타 부인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 “세상에! 옷은 왜 찢어진 거예요? 게다가 피가 묻어 있는데…….”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문으로 나섰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늘도 늦으셨군요.”

……칼릭스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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