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82)

27화

* * *

황태자와 첫 춤을 춘 다음, 나는 제국의 인재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황제와도 한차례 춤을 추었다.

그렇게 황가의 남자들을 독식한 덕분에, 내 드레스는 사람들의 뇌리에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

춤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내게 몰려든 사람들이 하는 말만 들어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녀, 드레스가 정말 예쁘더군요.”

“특히 턴을 할 때 퍼지는 모양이 참 아름다웠어요.”

나는 활짝 웃으며 그 모든 칭찬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칭찬 감사해요. 오늘 제 드레스는 ‘로제타 의상실’에서 지어 주었답니다.”

“로제타 의상실이요?”

위치를 설명하는 건 아주 쉬웠다.

“카민스키 경의 의상실 바로 옆에 공사 중인 건물이에요.”

그렇게 말하자, 카민스키의 가게를 오갔던 귀부인들이 곧바로 “아아!” 하며 알아들었다.

“공사를 크게 하길래 무슨 상점이 들어설까 궁금했는데, 의상실이었군요.”

“제 전속 디자이너인 로제타 부인의 의상실이에요. 지금은 공사 중이라 다른 곳에 임시 의상실을 차려 영업 중이니, 궁금하시면 주소를 알려 드릴게요.”

“그래 주시면 고맙겠어요, 공녀. 세상에, 이 원단 좀 봐…….”

나는 저도 모르게 내 드레스를 만져 보는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도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한동안 로제타 의상실을 열심히 홍보했다.

당신의 전속 재단사, 로제타 부인의 의상실이 조금 유명해졌습니다!

명성이 50 오릅니다.

화술이 30 오릅니다.

홍보 활동의 결과로 명성이 오른 것도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그렇게 대충 한차례 홍보 활동이 끝나고, 나는 황태자와 함께 차가운 음료를 마시러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나보고 상업적 재능이 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공녀도 만만치 않은 것 같군요.”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내게 음료를 건네주면서, 황태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뭘요?”

“공녀는 정말 내게 사심이 조금도 없이 드레스를 홍보할 생각뿐이었다는 걸.”

“세상에.”

나는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

“그럼 지금까지는 일말이나마 사심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셨단 말인가요?”

“자의식 과잉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자의식 과잉이세요.”

“또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까 변명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같고…….”

우리 둘은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정원 쪽을 향해 나갔다.

멀리서 축제 마지막 날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 게 보였다.

“이번 투와르 축제도 이렇게 끝나 가네요.”

그 순간, 가볍게 바람이 한차례 일었다.

봄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찼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자, 황태자가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걸칠 만한 것을 받아 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사그라드는 밤하늘의 불꽃을 계속 바라보았다.

‘……어?’

문득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니, 밤바람이 쌀쌀했던 탓인지 대부분의 사람이 안으로 돌아가고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나도 들어갈까?’

하지만 그랬다간 걸칠 것을 찾아오겠다던 황태자와 길이 엇갈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뭐. 금방 올 테니 기다리자.’

바로 그때.

“……찾았다.”

“!”

깊은 동굴 속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 같은 목소리.

‘……!’

뒷덜미를 사악 스치는 찬 기운에, 듣자마자 몸이 딱딱하게 어는 느낌이었다.

나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누구……?”

“달처럼 빛나고 진주처럼 화사하다고 했지.”

흠칫, 등골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남자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용의 피를 가져간 은발 머리.”

“!”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키가 큰 남자가 내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나를 내려다보는 웃음기 어린 눈빛이 보주(寶珠)처럼 붉었다.

단순히 잘생긴 게 아니라, 얼굴을 이루는 단 하나의 선마저 사람을 홀릴 것처럼 생긴 우아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다른 의미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왜냐하면…….

‘최종 보스가 왜 여기서 나와……?’

* * *

최종 보스, 로엔 대공.

그는 대부분의 엔딩에서 여주인공을 죽여 버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왜냐면…….’

고작해야 막판에 잠깐 등장하는 최종 보스 주제에 어느 남주 못지않은…… 아니, 솔직히 말해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스탠딩 일러스트와 보배로운 목소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공위소 플레이어들의 단골 요청 사항 중 한 가지가 ‘이럴 거면 차라리 최종 보스 루트도 만들어 달라’였다.

물론, 그 요구 사항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지금 여기에?’

게임 막판에나 날 죽이러 오는 거 아니었어?

‘꿀꺽.’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스탠딩 일러스트로 볼 때도 압도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곧바로 날 죽여 버릴 것 같으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가지고 놀 것 같은 이중적인 잔혹함이 짙게 풍겼다.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사실인가 본데.”

“……!”

그제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람은 최종 보스.’

그리고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용의 피를 찾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용의 피는?

‘내가 써 버렸지. 홀랑.’

아니 세상에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나는 경악했다. 하지만 경악한 것과 별개로 내 입은 살기 위해 착실하게 입놀림을 시전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그래, 이 상황은 잡아떼는 것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순간.

경고! ‘화술’ 능력치가 부족합니다!

‘뭐……!’

익숙한 경고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최종 보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그의 입가에 느릿한 미소가 번졌다.

“로잔헤이어의 딸,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던가?”

“…….”

“거짓말을 하면 여기랑.”

그가 검지로 내 눈동자 바로 앞을 쿡 짚었다.

“여기가…….”

그리고 그 손가락 끝이 목울대에 닿았다.

꿀꺽, 하고 절로 침이 넘어갔다.

“……떨린다고.”

틀렸다. 나는 남자의 붉은 시선에 완전히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

이 망할 최종 보스께서 딱딱하게 굳은 내 손을 잡고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그의 엄지가 정확히 내 손바닥의 오목한 부분을 문질렀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 여기에서, 용의 냄새가 진동을 해.”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참았다.

정신력이 20 오릅니다.

시스템 메시지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그저 직감했다.

‘……잘못하면 오늘 여기서 죽겠는데?’

그렇다면…… 나는 빠르게 진로를 바꿨다.

“사, 사실 용의 피는 제가 가져간 게 맞습니다.”

“…….”

최종 보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사실을 시인했다는 게 그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한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입을 놀려야 하지?’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입을 막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게 없어요.”

“어째서?”

“사용했거든요.”

“어디에?”

“보주의 봉인을 풀었습니다.”

거짓말을 할 여유도, 능력도 없어서 그냥 다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주라면…….”

“…….”

“로잔헤이어의 보주를 말하는 건가?”

나는 이 순간, 어쩐지 이 대답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리라는 걸 직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네.”

그 순간.

대공, ‘카미엘 시 로엔’과 조우합니다!

‘히든 퀘스트: 로엔 대공과 용의 피’ 발생!

로엔 대공은 용의 피를 찾고 있습니다. 로엔 대공에게 용의 피를 전달 시 퀘스트 성공.

‘?’

공략 대상도 아닌 최종 보스와 조우했다는 메시지가 왜 뜨는 거지……?

‘게다가 히든 퀘스트라고?’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호감도 상승 시 알림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

‘지금 뭐라고……?’

안 그래도 종잡기 힘든 이 게임의 한 줄기 빛이었던, 삐로롱 시스템!

‘그 시스템이 사라진다는 말을 본 건가, 내가 지금?’

아니 대체 왜?

내가 잔뜩 당황해 버린 바로 그때였다.

“카미엘?”

천만다행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최종 보스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황태자였다.

나는 남자의 붉은 눈에 급속도로 빛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안 카시스.”

나를 몰아붙일 때와 확실히 다른, 열없는 목소리였다.

황태자가 아무래도 버릇 같은 특유의 서늘함을 품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친애하는 사촌이 내 파트너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글쎄.”

최종 보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붉은 눈을 접어 가며 웃는 미소가 어쩐지 요염했다.

“아무것도?”

그리고 흘긋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 공녀?”

내가 여기서 뭐라고 하겠는가?

“아, 네…… 통성명을 좀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통성명을 말이지.

황태자 역시 내가 생략한 말을 어느 정도 짐작한 것 같았다.

“어깨에 소름이 돋았는데요.”

“날씨가 추워서…….”

“…….”

황태자가 코끝으로 한숨을 쉬며, 내게 다가와 어깨 위에 도타운 숄 같은 것을 둘러 주었다.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공녀.”

“아, 네…….”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최종 보스 쪽을 향해 무릎을 굽혀 인사를 남겼다.

‘인사도 안 하고 갔다가 무슨 후환을 당할지 몰라.’

“그럼, 로엔 대공 전하.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엘로즈 공녀.”

최종 보스의 입가에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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