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 *
“…….”
“…….”
반면, 유리와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 레티샤와 엘레니의 마차는 그렇게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아니, 찬바람이 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계집이…….”
레티샤가 으득, 하고 이를 악물며 부채를 움켜쥐었다.
“어머니, 손이 상하시겠어요.”
엘레니가 레티샤를 향해 달래듯 말했지만, 레티샤는 도무지 진정하지 못했다.
‘실수했어.’
차라리 이렇게 될 거였다면, 같이 황태자를 맞이하러 나가 엘레니와 눈도장이라도 한 번 더 찍어야 했다.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최소한의 할 일도 하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심호흡을 하듯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엘레니.”
“네, 어머니.”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 계집애는 분명 우리 모녀를 농락하고 있는 거야.”
레티샤가 기억하기로, 이제까지 유리는 순종적이고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 재빨리 눈치챌 수 없었다.
유리가, 감히 그 멍청할 정도로 착하기만 했던 계집애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이제까지 다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이 나를 속이다니……. 사갈 같은 계집 같으니라고!”
“어머니, 언니를 꼭 그렇게 나쁘게 생각해야 할까요?”
엘레니가 슬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언니가 한 행동에 틀린 점은 없었잖아요. 며칠 전 로잔 회의에서 저를 뒤에 세운 것도 적장녀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고요.”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딸의 말에 잠깐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린 레티샤가 이를 좀 더 꽉 악물었다.
그러는 사이에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마차는 무도회가 열리는 여름 별궁에 도착해 있었다.
‘저 안에 들어서면 웃어야 하겠지.’
유리 엘로즈, 그 계집애가 당당히 황태자의 손을 잡고 들어올 때도 웃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질시 어린 칭찬에 겸손한 태도로 감사를 표해야 하겠지.
‘사람들은 내가 진심으로 그 계집애를 아낀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건 레티샤가 수년 동안 노력해서 만들어 낸 견고한 가면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 낸 가면이 이리도 답답하게 느껴진단 말인가?
스스로 만든 올무에 걸린 것처럼, 레티샤는 자신이 무력하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가자꾸나, 엘레니.”
“네, 어머니.”
두 사람은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 같은 날 공작과 칼릭스의 에스코트라도 받을 수 있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공작은 로잔 회의로 인한 격무 때문에 황실 무도회에 참석할 겨를이 없었다.
칼릭스 역시 후계자로서 공작의 일을 따라다니며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
레티샤는 하나뿐인 아들, 칼릭스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언제가 됐든 시간이 흐르면 칼릭스가 로잔헤이어 공작이 될 것이다.
칼릭스야 마음 착한 엘레니와 달리 유리, 그 계집애를 싫어하고 있으니…….
‘그 애가 공작이 되면, 그년의 딸 따위는 로잔헤이어에 발붙일 곳 하나 없게 될 거야.’
그런 여러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레티샤는 딸과 함께 무도회장에 입장했다.
입구에서 시종이 우렁차게 알렸다.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과 엘레니 공녀님이 드십니다!”
두 사람이 입장하자, 자연스럽게 이 지체도 높고 아름다운 모녀에게 시선이 쏠렸다.
레티샤는 드러나지 않게 자신들을 둘러싼 인파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없지?’
분명 레티샤와 엘레니보다 먼저 출발했을 유리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레티샤를 엄습했다.
* * *
농담으로 시간을 때우는 동안, 드디어 우리가 탄 마차는 황도 외곽을 빙 돌아 황성으로 가는 길에 진입했다.
늦게 도착해서인지, 주변에 다른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황제가 주최한 무도회에 늦게 도착한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할 사람이 황태자 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검문조차 받지 않고 당당히 황성 안으로 진입하는 동안, 나는 느긋하게 부채를 팔락이며 상단주님의 서비스를 누렸다.
그리고 마침내 여름 별궁 앞에 도착한 순간.
황태자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공녀. 손을.”
“네.”
나는 황태자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사라락, 하는 드레스가 내 뒤로 사뿐히 내려앉자, 황태자도 감탄을 표했다.
“당신의 재단사, 누구인지 몰라도 솜씨가 굉장한 것 같군요.”
원래대로라면 그가 발굴했을 재단사였다.
‘그리고 마네킹 역할을 하는 것도 내 쪽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로제타 부인은 이미 내 전속 재단사로서 계약을 맺었고, 내가 아닌 황태자가 나를 빛내 주기 위해 이렇게 옆에 서 있었으니까.
우리가 천천히 손을 잡고 여름 별궁에 들어서자, 문가에 서 있던 시종이 외쳤다.
“황태자 전하와 유리 엘로즈 공녀님께서 드십니다!”
일순, 무도회장의 사람들이 행동을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 에이드리언은 이제까지 사촌 이내의 가족만을 에스코트하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의 에스코트로 인해 당신의 명성이 100 오릅니다!
황실 무도회에 참석합니다. 명성이 100 오릅니다.
‘완벽한 입장’을 선보였습니다. 기품이 20 오릅니다.
나는 무도회장을 한 번 슥 훑어보았다.
‘저쪽이군.’
새어머니가 엘레니의 손을 꼭 움켜잡은 채,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부러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치 빠른 황태자가 내 미소에 미소로 화답하며 이렇게 속삭였다.
“제 서비스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로군요.”
“무척이요.”
황실 무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고위 귀족들이었다.
재력과 신분으로 꿀릴 것 없는 여자들은 거의 다 각자가 가진 가장 좋은 옷, 즉 카민스키의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개별적으로 봤을 때는 확실히 아름다운 드레스지만.’
이렇게 한데 모아 놓고 보니 여기가 무도회장이 아니라 카민스키 의상실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채로운 색상과 금박 장식, 보석의 향연.
그 속에서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유리 엘로즈 공녀라면, 사교 활동에 소극적인 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황태자 전하의 에스코트를……?”
다들 의아해하면서도 한 가지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기는 하네요.”
“그러게요.”
“그나저나 유리 공녀가 입은 저 드레스, 디자인이 카민스키 경의 것 같지는 않은데요.”
“누가 만들었을까……?”
‘그렇지.’
정확히 의도한 곳에 관심이 쏠리자, 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이쪽으로 다가오려던 사람들이 황급히 비켜서며 길을 열어 주는 게 보였다.
급하게 만들어진 길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
“이안! 이 녀석, 웬일로 지각인가 싶더니. 이런 아리따운 아가씨의 손을 잡고 오느라고 늦은 것이로구나!”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서 뒤로 넘긴 중년의 사내.
나이를 감안하고도 준수하고 잘생긴 얼굴을 한, 이 제국의 황제 폐하였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잘했다, 잘했어.”
황제가 힘을 준 손으로 황태자의 어깨를 꾹 쥐며 칭찬했다.
그리고 곧 그의 관심은 내 쪽으로 돌아왔다.
“유리 공녀! 내 너에 대한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지.”
“황제 폐하…….”
“아니, 그렇게 딱딱하게 예의를 다 차릴 필요는 없단다.”
황제가 막 인사를 올리려는 나를 만류하며 말했다.
“듣자 하니 공녀가 이번에 로잔헤이어가의 보물인 보주의 봉인을 풀었다고 하던데.”
이쪽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번졌다.
나는 그 술렁임을 못 본 척하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로잔헤이어 공작가에서 무려 200년 만에 개화에 성공한 마법사라지.”
“…….”
내가 조용히 웃고만 있자, 황제가 껄껄 웃으며 “너 같은 인재가 있어 제국의 미래가 밝구나!” 하고 크게 치하했다.
바로 그 순간.
“황제 폐하.”
아름답고도 다정한 목소리.
바로 내 새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오, 레티샤!”
황제가 굉장히 반가운 듯 내 새어머니를 반겼다.
“엘로디도 있구나.”
하지만 엘레니의 이름은 틀렸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황제의 실수를 바로잡는 대신, 곱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존안을 뵙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리 강건하신 모습을 보니 제 마음도 흡족하군요, 폐하.”
“그래, 그래. 레티샤, 너도 별고 없는 것 같구나. 그나저나 내 누이야.”
육촌지간인 것치고 황제는 퍽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네가 어미로서 큰일을 했으니 내 칭찬을 안 할 수가 없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폐하……?”
“유리 공녀 말이다.”
황제가 시종으로부터 잔을 넘겨받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네 가르침과 보살핌이 있었으니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 보주의 봉인을 푸는 위업을 달성한 것 아니냐?”
새어머니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게 기쁜 웃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저 아이가 잘 자라 준 것을 이리 치하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자, 자. 이럴 것이 아니지. 이만 무도회를 시작하자꾸나!”
황제가 넘겨받은 잔을 들어 올리며 뒷말을 크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은은하게 들려오던 오케스트라의 음률이 소리를 높였다.
황제가 유쾌하게 말했다.
“첫 번째 춤곡이로구나! 아들아, 네가 유리 공녀와 첫 춤을 여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황실 무도회에서 첫 춤을 리드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명성이 500 오릅니다.
매력이 50 오릅니다.
기품이 30 오릅니다.
그와 동시에 삐로롱, 하는 소리가 울렸다.
본능적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니, 그가 평소처럼 웃는 낯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넌지시 속삭였다.
“……어쩐지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즐거워지는군요.”
나는 이 말을 대충 이렇게 해석했다.
‘매력 능력치가 벌써 100을 넘겼구나.’
“자, 그럼. 공녀님?”
“네, 황태자 전하.”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사람들이 물러나서 생긴 중앙 공간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을 지나가던 중, 누군가가 새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딸아이를 정말 잘 키우셨어요, 공작 부인. 정말로 부럽네요.”
“……아직은 부족한 아이를 어여삐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그 앞을 지나쳤다.
우리는 금세 홀 중앙에 다다랐다.
“자, 그럼.”
나는 황태자의 리드를 받으며, 보란 듯이 황실 무도회의 첫 스텝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