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82)

25화

한참을 웃던 황태자가 눈가에 고인 눈물까지 훔치며 말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요청이로군요. 의상실 홍보라……. 어떻게 하면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뭐…….”

원작에서는 당신이 나를 홍보용 마네킹으로 써먹었는데, 나라고 못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나는 그냥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황태자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공녀. 이번 황실 무도회에서 당신을 에스코트하도록 하죠.”

“그럼 전 그 대가로 이시스 상단과 황태자님에 대해 죽음까지 영원한 침묵을 약속드리겠습니다.”

“푸하하!”

부러 엄숙하게 대답하자 황태자는 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 이 거대한 약점을 잡아 놓고 원하는 게 그것뿐이라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저야 뭐, 제 의상실이나 잘되는 게 목표인 소박한 사람인걸요.”

“하신 일에 비해 목적이 너무 소박해서 도리어 의심이 가는데.”

“그렇다고 저를 믿지 않으실 수는 없잖아요?”

개국 공신 가문의 적장녀를 죽여서 입을 막을 수도 없고 말이다.

“공녀는…….”

“내 생각보다 똑똑하고 위험한 사람이었군요.”

뭐지? 그럼 여태까지는 나를 멍청하고 무해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 표정이 미묘해지자, 황태자가 큼! 하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좋습니다. 공녀의 요구 조건을 전적으로 수용하도록 하죠.”

뭐, 그래. 이쯤에서 넘어간다.

“감사합니다. 그럼 거래 성립이네요.”

나는 황태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황태자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입을 맞추는 대신 힘 있게 내 손을 맞잡았다.

“신의와 생명을 걸고?”

“……신의와 생명을 걸고.”

물론, 걸라니까 거는 거지 나한테 뭐 그렇게 거창한 진심은 없었다.

* * *

그리고 이로부터 이틀이 더 지났다.

“공녀님, 로제타 부인이 왔습니다.”

최근 로제타 부인은 내가 칼라일 거리 쪽에 구해 준 다른 건물에 임시 의상실을 차렸다.

‘계속 부인을 타운 하우스에 두었다간 새어머니 눈에 띌 수도 있고.’

그곳에서 로제타 부인은 내가 초기작을 보았던 그 드레스, ‘여름의 정령’을 마무리했다.

“공녀님, 완성한 드레스입니다.”

드레스를 공개하자, 시녀들이 일제히 옅은 신음성 같은 탄성을 냈다.

드레스는 가장 얇게 원단을 짜기로 유명한 지방에서 공수한 새하얀 실크였다.

흔히들 시폰이라고 많이 부르는 원단처럼, 살결이 비칠 것 같은 천을 여러 겹 잡아 길게 늘어뜨리고, 굴곡진 몸의 선을 따라 물결치는 러플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레이스며 장식은 꼭 필요한 곳에만 우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위로 비취처럼 푸르고 반투명한 숄을 어깨에 걸치는 디자인이었다.

“저, 공녀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로제타 부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이 드레스는 요즘 제국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화려한 드레스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참 동안 계속된 유행에 질린 사람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 줄 때도 됐죠.”

나는 그제야 씩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게다가 오늘 무도회가 벌어지는 곳은 황실의 여름 별궁이라고 들었다.

여름 별궁은 고대 신전처럼 새하얀 기둥을 세우고 정원을 좀 더 야생에 가깝게 길러 내 비밀의 화원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이라고 했다.

‘딱이야, 딱.’

내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타 부인이 “공녀님……!” 하고 몹시 감동받은 눈빛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우리 둘은 최근 의상실 신장개업을 위해 여러 차례 의견을 주고받은 데다가, 드레스 디자인에 대해서도 함께 토의를 해온 사이였다.

그 덕에 로제타 부인은 이제 나를 투자자로서 뿐만이 아니라 디자인적 안목이 있는 사람으로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자, 그럼. 난 준비됐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드레스를 보고 눈을 빛내고 있던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시작했다.

쇼 타임이었다.

* * *

“유리? 이제야 나오는구……”

나는 잰걸음으로 메인 로비의 계단을 총총 내려가, 사뿐히 무릎을 접으며 인사했다.

“엘레니, 그리고 어머니. 아직 출발하지 않고 계셨네요.”

“네가 도착하지 않았잖니. 그나저나 그 드레스는…… 아니, 아니다.”

새어머니가 약간 마른 것 같은 뺨에 힘주어 미소를 자아냈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지. 얼른 출발하자꾸나.”

“아,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고?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은 설마 아니겠지?”

그건 당신의 희망 사항이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는 데리러 오실 분이 따로 있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유리 공녀님.”

타이밍 좋게 집사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밖에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공녀님을 불러 달라고 하시더군요.”

“대체 누구의……?”

집사가 크흠, 하고 한 번 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한 발음으로 고했다.

“황태자 전하의 전언이라고 하셨습니다.”

“!”

새어머니의 부채질이 뚝 멈췄다.

“뭐라……고?”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오늘, 황태자 전하의 에스코트를 받기로 약속했거든요.”

“어떻게 그런…….”

새어머니의 입술이 약간 파들, 하고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노련하게 자신의 동요를 감추었다.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유리, 넌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잖니.”

“하려고 했어요.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기회를 놓쳤지만요.”

“……그랬구나.”

“저한테라도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언니.”

그때, 엘레니가 맑은 초록색 눈동자로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소식을 갑자기 알게 되다니. 축하해 드릴 기회를 놓쳐서 너무 서운해요.”

서운함이 담뿍 밴 그녀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가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거창하게 축하할 것까지야 있겠니? 그저 에스코트 한 번일 뿐인걸.”

“……어머나, 그렇다면 이건 한여름 밤의 꿈같은 것이로군요.”

엘레니가 보드랍게 미소를 지으며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말에 묘하게 강세를 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를 스쳐 문으로 다가섰다. 내가 문 근처로 다가가자, 집사가 바로 신호를 보내 문을 열게 했다.

“이따 황궁에서 보자, 엘레니.”

그 말에 엘레니는 악의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네에. 언니, 좋은 꿈 꾸고 오세요.”

* * *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습니까?”

“아.”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

나는 황태자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황태자가 빙긋 웃으며 뼈 있는 말을 날렸다.

“파트너께서 한눈을 팔고 계시니, 좀 외롭군요.”

“어머나.”

나는 부러 놀란 척을 했다.

“전하께서 잠깐도 혼자 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네요.”

“실례. 철이 안 든 남자라서요. 파트너의 관심을 끌고 싶군요.”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말에 내가 먼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황태자의 입가에 부드럽게 승리자의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이렇게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니 속이 시원하신가요?”

“직성은 풀렸다고 해야겠죠. 어느 정도는.”

나는 잠깐 이 남자가 철이 안 든 부분은 이렇게 담소를 나눌 때도 조금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말버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보기와 다른 사람이야. 여러모로.’

넷 중에서는 그나마 다정남 콘셉트를 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이 사람이 정말 다정해서가 아니라, 비교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에 내가 멋대로 착각했던 거 아닐까?’

엘리야 마라케시, 그리고 칼릭스와 에스테반 후작 사이에 두면 그 어떤 남자라도 조금쯤은 다정해 보일 것이다.

“또 다른 생각.”

“앗차.”

“슬프군요.”

황태자가 부러 한숨을 쉬며 말했다.

“파트너께서 내게 온전히 집중해 주실 생각이 전혀 없으신 모양이니.”

“파트너라고 해서 서로한테만 집중해야 한다는 법칙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먼저 파트너 신청을 하신 분의 말치고는 제법 냉정하군요.”

“저희 관계는 오늘 하루만의 꿈같은 파트너십이 아니잖아요.”

마치 보이지 않는 말로 체스를 두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제가 태자 전하를 저희 의상실의 홍보 수단으로 기용한 기념비적인 날인걸요.”

“…….”

건방진 말이었는데 황태자의 대답 대신 삐로롱, 하는 소리가 곱게 울렸다.

‘허.’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힌 황태자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 취향, 정말 알 수 없군.’

하긴, 호감도 오르는 시점이 당황스러운 건 이 게임의 남주인공 네 명 다 마찬가지였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던 내 시선이 창문을 잠깐 스쳤다.

‘으응?’

그런데 이상했다.

‘공작저에서 황도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잠깐 방심한 사이에 우리를 태운 마차는 시내 도로를 벗어나 외곽 쪽으로 순회를 하듯 돌고 있는 게 아닌가?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읽는 것처럼, 황태자가 말했다.

“제가 지시한 일이니까요.”

“설마 절 영원히 입 다물게 할 생각으로?”

“파트너의 의리를 못 믿는 겁니까?”

“전하와 신뢰 관계라고 하기엔 아직 좀 이르죠.”

삐로롱!

‘또 호감도가 올랐네.’

이 정도면 정말 점입가경이 아닌가 싶다.

속으로 조용히 어처구니없어하고 있는 내게, 황태자가 팔짱을 끼고 설명했다.

“마차를 일부러 외곽 쪽으로 돌아가게 한 건, 도착 시간을 조절하기 위해서입니다.”

“……아하.”

그런 거였어?

“이왕이면 그 드레스를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선보이고 싶을 거 아닙니까?”

늦게 등장해서 주목을 더 끌어 보자는 말이었다.

‘맞아,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이 사람이 내가 놓친 걸 챙겨 줄 줄은 몰랐는데.

얼떨떨한 기분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자, 그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님을 위한 특별 서비스라고 생각하세요.”

오……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하의 상업적 재능에는 정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시답잖은 농담 비슷한 말을 계속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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