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잠깐 들어갔다 올 테니, 밖을 지켜 주겠어?”
이시스 상단은 맨 처음 보석상으로 시작한 상단이었기 때문에, 호위들은 내 방문 목적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공녀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응, 그럴게.”
선선히 대답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 데스크로 추정되는 곳에 서 있는 여자가 나를 반겨 맞았다.
“어서 오세요! 이시스 상단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용무로 본점에 내방해 주셨을까요?”
“상단주를 만나고 싶어.”
“예? 상단주님을요?”
나는 대답 대신 살짝 웃으며 — 로브를 뒤집어쓴 탓에 그녀에게는 내 웃는 입모양만 보였을 것이다 — 끼고 있는 반지가 보이도록 오른손을 내밀었다.
로잔헤이어의 장미 문장이 선명히 새겨져 있는 반지를.
“시, 실례했습니다, 손님! 귀인을 몰라뵙고…….”
“쉿, 쉿.”
나는 여유롭게 그녀를 안정시켰다.
“사과를 할 필요는 없단다. 나는 그저 이 상단의 상단주를 만나러 왔을 뿐이니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곧장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시스 상단 건물은 총 5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건물 내부에 마법으로 만든 일종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걸어 올라갈 필요는 없어서 좋군.’
자세히 보니 ‘마동식 전층 이동기 — 설치/상담: 이시스 상단’이라고 적힌 글자가 보였다.
‘엘리베이터 설치라. 호오……. 제법 획기적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발을 디디자, 안내원이 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아, 넵! 벼, 별일 아닙니다. 손님들은 여기 오르기를 꺼리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셔서요……. 귀, 귀인께서는 안 그러시는 게 신기해서요.”
“마법을 믿지 않을 필요는 없잖은가?”
“하지만 저도 가끔씩은 이 통 안에 오르는 게 무섭답니다. 답답하기도 하고요.”
흠. 이 세계에서 아직 엘리베이터에 대한 인식은 그 정도인가 보다.
현대식 엘리베이터와 속도가 거의 비슷한 이동기는 금세 나와 안내원을 5층으로 데려다주었다.
안내원은 나를 손님맞이용 공간으로 추정되는 곳에 안내해 주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
잠시 후, 차가 나왔다. 나는 차향을 음미하며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손님. 여기까지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바로……”
“아니.”
“예, 예?”
나는 여유롭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이 아니야.”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이시스 상단의 상단주. 당신이 아니잖아?”
“음…….”
조금 당황했던 상대는 곧 노련한 상인답게 표정을 회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제 이름은 사무엘 발드, 손님께서 찾으시는 이시스 상단주가 맞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시간 낭비를 하러 온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왼손가락에 꼈던 반지를 뺐다.
그리고 꾹꾹 깊이 눌러썼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반짝이는 은발이 폭포수처럼 내 어깨 위로 물결치며 쏟아졌다. 자기가 상단주라고 주장한 남자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다, 당신은 대체……?”
“나는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유리 엘로즈. 일단은 공녀일세.”
“고, 공녀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지.”
나는 생긋 웃으며 배 위로 손깍지를 꼈다.
“나는 이시스 상단의 상단주, 황금 깃털을 가진 어린 쌍두 독수리를 만나러 왔다네.”
“!”
그제야 이 일이 제 선에서 해결할 일이 아님을 깨달은 듯, 자신을 상단주라 주장하던 남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알겠습니다. 공녀님께서 찾으시는 분께 연통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음.”
“다만, 만나실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글쎄.”
나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당신 같으면 이런 비밀을 알아낸 상대를 만나보고 싶지 않을까?”
화술이 10 오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든지.”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접대용으로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생각보다 훌륭한걸.’
그렇게 차를 마시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달칵.
소리를 내며 상단주 집무실 쪽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연히…….
“황태자 전하.”
내 예상대로, 황태자가 맞았다.
* * *
이시스 상단은 일찌감치 상업에 눈을 뜬 황태자가 비밀리에 설립한 상단으로, 황제조차도 그 존재를 모른다.
‘그런데 내가 정체를 눈치채고 찾아왔으니…….’
황태자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나는 그 웃는 얼굴 속에 스며 있는 서늘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놀랍군요. 공녀가 어떻게 내 비밀을 알 수 있었는지.”
하지만 지금 이 관계에서 칼자루를 쥔 쪽은 나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게 궁금하신 건가요?”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황태자가 눈은 웃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대답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업 비밀에 해당하긴 하지만, 약속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 죄가 있으니…… 전하께는 특별히 알려 드릴게요.”
“…….”
“로제타 의상실을 기억하시나요?”
“……우리 상단에서 이번에 수주한 개축 의뢰로군요.”
“전 그 의상실 절반의 소유주이자 투자자랍니다.”
“흠.”
그게 뭐 어쨌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우연히 이 상단의 평판이 좋아 공사를 맡길지를 고민했는데, 정말 믿을 만한 곳인지 그 전에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정보를 좀 샀답니다. 몰타의 노을에게서요.”
“……!”
황태자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가 거의 사라졌다.
“몰타의 노을이라면…….”
“최고의 정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죠.”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정보로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가긴 했지만, 몰타는 사실 지금까지 존재만 알지 그 누구도 꼬리를 잡지 못한 정보 조직이었다.
‘물론, 이 건과 관련해서 내가 몰타에게서 정보를 샀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모조리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하지만 어쨌든 게임에서 몰타가 황태자와 이시스의 연관 관계를 밝혀내긴 하니까, 완전히 거짓말인 건 아니다.
그리고…….
“몰타라면…… 나조차 찾지 못한 곳인데.”
결정적으로 황태자는 몰타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내 주장의 진위를 가릴 수 없다.
“공녀가 어떻게 그런 곳을 찾았는지 정말 알 수 없군요.”
“어머, 그거야말로 영업 비밀 아니겠어요?”
내가 부러 가볍게 대답하자, 그제야 황태자의 얼굴에도 가벼운 실소가 번졌다.
화술이 20 오릅니다.
황태자에게 한 거짓말이 무사히 먹힌 모양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내 존재를 눈치챈 거로군요.”
“네. 그래서 이시스 상단에 공사를 의뢰하기로 결정했답니다.”
“나 때문에?”
“전하 때문이라기보다…… 아시다시피 그 건에는 좀 골치 아픈 구석이 있잖아요?”
“아…….”
느린 감탄사를 내뱉은 황태자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리우 카민스키.”
“전하라면 분명 어떻게든 그 역경을 헤치고 반드시 로제타 의상실을 멋지게 완공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 순간.
삐로롱!
반가운 삐로롱 소리가 울렸다.
‘후으.’
나는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만, 이번 일로 호감도가 마구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했기 때문이다.
“겨우 그 문제 때문에 나를 이용했다고?”
마른세수를 하던 황태자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푸흐흐, 이거 정말, 기가 차다고 해야 할지.”
황태자는 어떻게 이런 게 다 있지? 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눈빛에 아까와 같은 날 선 서늘함은 없었다.
“어쨌든 공녀의 그 선택은 현명하기 그지없었다고 말해 주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전하.”
“여기까지 날 찾아온 것까지는, 글쎄,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저도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다면 전하를 찾지 않았을 거예요.”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그럼요.”
“어디 한번 들어 보도록 합시다.”
“어렵지 않은 부탁일 거예요.”
“들어 보고.”
황태자가 톡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만하고 본론을 말하라는 신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이번 투와르 축제를 기념하는 황실 무도회에서,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어요?”
“……무도회에서?”
“네.”
황태자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무슨 어마어마한 거라도 요구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가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부탁이라면야 ……냥 했어도…….”
“네? 잘 못 들었어요.”
“아니, 아닙니다. 별말 아니었습니다.”
황태자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가 궁금하긴 하군요. 왜 굳이 이렇게 해서까지 나를 파트너로 데려가려 하는 겁니까?”
“아, 그건요…….”
나는 방긋, 영업용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번 무도회에서 제가 우리 로제타 의상실의 첫 드레스를 입을 예정이거든요.”
“…….”
“아주아주 멋진, 신작이자 자신작인 드레스랍니다.”
“……그러니까…… 공녀의 말은 즉.”
황태자가 헛웃음을 반쯤 입가에 걸치고 내게 물었다.
“지금 날더러 의상실 홍보를 도와 달라는 겁니까?”
“정답입니다, 전하. 상품이 없어서 아쉽네요.”
잠시 후.
“하.”
황태자의 입술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 하하하하!”
삐로롱!
삐로롱!
삐로롱 소리가 바쁘게 두 번이나 울렸다.
‘대박. 두 번이나 호감도가 올랐어.’
이 황태자 전하, 뭐지? 무지하게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사람이 취향이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