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헉……!”
사람들이 숨을 삼켰지만, 보주를 쥐는 것만으로는 싱거울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양손으로 돌을 감싸 쥐고, 잠시 가만히 있어 보았다.
그러자 꿀꺽 침을 삼키며 침묵하던 사람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번져 나갔다.
“공녀님께서 왜……?”
“왜는 무슨. 대체 왜겠소?”
“보주의 봉인을 해제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기껏 마법사 혈족이 나타났다고 수선을 피우더니만, 사실 개화조차 못 한 건 아니겠지?”
“그럼, 공녀님이 거짓말을……?”
비방이 들어 줄 수 없는 수위로 넘어가려는 순간.
‘지금이다.’
심장을 감싸고 있는 옅은 고리를 회전시켜, 손바닥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곧 손바닥이 따뜻해지는 느낌과 함께…….
‘해주(解呪)의 진(일회용)’을 사용합니다!
“저, 저기! 저걸 보시오!”
“허억!”
보주를 감싼 손 틈새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쓸모없는 불순물들이 내 손안에서 힘없이 바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이때다!’
내가 양손을 천천히 벌리자,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는 보주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저게…… 세상에!”
“진짜 보주의 봉인을 푼 거요?”
내 양손 손바닥 사이 허공에 떠올라 있는 보주는 점점 더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보주를 중심으로 마류가 거세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거센 마류.
그런 마류가 소용돌이치자, 보주를 중심으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으, 으악!”
고작 내 머리카락이나 날리는 바람 가지고 주변에서 수선을 피우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보주에 시선을 집중할 뿐이었다.
손바닥 위에 새긴 해주의 진이 제 할 일을 다해 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제 곧!’
그리고 마침내…….
톡.
빛이 사그라든 붉은 보석이 내 손으로 톡, 하고 굴러떨어졌다.
아니, 빛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은은하게, 비교하자면 무드 등 정도의 밝기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디리링, 하며 여러 개의 시스템 메시지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보주의 봉인을 푸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전설적인 업적에 모두가 경악합니다.
명성이 5000 오릅니다.
칭호, ‘보주의 해방자’가 부여됩니다. 칭호의 효과: 마나 +100, 지력+100, 매력+20.
해주(解呪)의 진(일회용)이 파괴됩니다.
‘대, 대박이네.’
전설급 아이템의 봉인을 풀어서인지, 부가적으로 능력치가 폭등하다시피 올랐다.
하지만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오, 오오…….”
“보주의 형태가 완전히 바뀌었소……!”
“게다가 빛나고 있어!”
……음, 이만하면 됐겠지?
나는 봉인을 푼 보주를 손에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공작, 그리고 칼릭스.’
엘레니와 새어머니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아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기보다 너무 놀라 못에 박힌 듯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먼 거리였지만, 나는 새어머니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보란 듯이 그쪽을 향해 빙긋,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곧바로 시선을 올려, 공작을 향해 정중하게 궁중식 절을 올렸다.
“로잔헤이어의 적장녀 유리 엘로즈, 가문의 보물인 보주의 봉인을 해제하였음을 감히 아룁니다.”
누가 뭐랄 수 없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대체 어떻게……?”
“다 제 스승님이신 마탑주, 엘리야 마라케시 경 덕분이죠.”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엘리야가 내 스승이라는 걸 아예 선포해 버렸다.
“엘리야 마라케시?”
“마탑주께서 공녀님을 가르치시는 겁니까?”
“대체 그 안하무인인 작자를 어떻게……!”
예상대로 다들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선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작 각하, 제가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청을?”
“예.”
청이라는 말에 의자 팔걸이를 쥔 새어머니의 손에 마디가 하얘지도록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되지.’
나는 무엇을 예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말해 보거라.”
“보주의 봉인을 푼 혈족의 명분으로 청합니다.”
비누 거품 하나 터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한 장내에.
“제게 이 보주의 소유권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 *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긴요!”
생각 외로 맞장구를 쳐 주는 상대의 반응에, 나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말했잖아요. 딱 제가 처음에 보주를 잡고만 있었을 땐 사람들이 저거 당연히 못 풀 거라고 뭐라고 막 했는데.”
“했는데?”
“근데 제 손바닥에는 막 위대하신 대마법사님이 새겨 주신 해주의 진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랬죠.”
“그래서 신나게 비웃음을 좀 즐기다가 딱! 하고 봉인을 풀었다, 이 말이죠.”
“흠, 흠.”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무표정한 듯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음, 그러니까 진짜 자세히 보면 1mm 정도……?’
하지만 내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가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냥 안 나오고 한마디를 더 했잖아요.”
“?”
“어떻게 봉인을 풀었냐길래, ‘이게 다 제 스승님이신 엘리야 마라케시 경 덕분이랍니다.’라고 말했죠.”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사실이잖아요?”
“……과연.”
엘리야의 한쪽 입꼬리가 스윽 올라간 순간, 맑고 고운 삐로롱 소리가 울렸다.
“거짓말은 안 했다 이거로군요.”
“그럼요, 그럼요.”
아부를 아주 한 바가지 퍼부어서 겨우 따낸 호감도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뭐, 당연히 해낼 줄이야 알았습니다만, 그래도 스승으로서 이 말을 안 할 수는 없겠죠.”
“?”
“잘했습니다.”
“아, 네…… 네?”
“못 들었습니까? 잘했다고요.”
“아니…….”
너무 뜻밖의 칭찬이라 말문이 막혔다.
엘리야 마라케시가 당신을 칭찬합니다!
화술이 10 오릅니다.
매력이 5 오릅니다.
거참, 얼마나 칭찬에 짜디짜면 고작 이걸 가지고 화술이랑 매력이 올라?
“……그……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사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는데.”
“압니다. 그래도 내 해주의 진을 당신만큼 잘 써먹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아, 그런 의미에서라면 칭찬 인정합니다.”
“…….”
엘리야가 픽, 하고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아주 약간 온기가 깃들어 있었는데, 비유하자면…….
‘뭔가 기특한 짓을 한 애완 햄스터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인데.’
응. 딱 그거다, 그거.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초반에 버러지를 보는 것 같았던 무심한 눈빛에 비하자면 장족의 발전이긴 했다.
“아무튼 그래서, 이거요.”
나는 조그만 주머니를 꺼내 손바닥에 톡 하고 내용물을 털어 냈다.
여전히 은은한 빛으로 빛나고 있는 붉은 보주였다.
“…….”
“뭐 하세요?”
나는 물끄러미 보주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엘리야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바닥 위에 보주를 놓아 주었다.
엘리야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렇게…….”
“?”
“……쉽게 건네줘도 되는 겁니까? 이거,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물건인데.”
“예? 알고 있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 알고 있었다.
‘시스템 창을 통해 볼 수 있거든. 이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이 보주의 자세한 스펙은 다음과 같았다.
<로잔헤이어의 보주>
-등급: 전설
-소지 효과: 마나 40% 증가
-모든 종류의 마법 사용 시 위력과 효과가 증폭됨.
-속성: 마의 지배자. 전설 등급 이하 마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음.
‘음. 다시 생각해 봐도 엄청난 물건이야.’
하지만 엘리야는 알고 있다는 내 말을 못 믿는지, 못 미더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공작가에서 순순히 소유권을 넘겨주긴 한 겁니까?”
“그건…… 절반 정도는요.”
아무리 내가 혈족이고 봉인을 풀었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카시스 제국에서 여자는 결혼하는 순간 남편의 가문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보주의 소유권이 엉뚱한 가문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로잔 회의에서는 때아닌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논쟁의 결과.’
나는 이 보주를 죽을 때까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죽음과 동시에 보주는 로잔헤이어 가문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제약이 붙었다.
‘사실 제약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
나 죽은 다음의 일이야, 내가 알 게 뭐람?
“어쨌든 제가 죽을 때까지 이 보주는 제가 알아서 하는 걸로 결론 났어요.”
“그렇군요.”
“그러니까 마음껏 연구하셔도 돼요.”
“…….”
엘리야가 침묵에 빠진 그 순간, 삐로롱 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어이쿠.’
마음껏 연구하시라는 말에 호감도가 오르다니.
‘중증이구나, 중증이야.’
완전 마법 분야에 진심인가 봐. 내 머리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상이었다.
“고맙……습니다.”
그와 살짝 거리를 두고 싶어진 내 마음과 달리, 엘리야는 놀랍게도 약간, 아주 약간 감동이란 걸 한 눈치였다.
“아뇨, 뭘요. 약속이었는데요.”
이 이상 가까이하다가는 나한테도 옮을라.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경이 마음껏 연구에 몰두하실 수 있게요.”
“……그런 배려를!”
삐로롱!
‘미치겠네, 여기서 호감도가 왜 또 올라?’
새롭고 흥미로운 연구 주제에 캣닙을 만난 고양이처럼 나사가 하나 빠져 버린 엘리야는 서둘러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럼, 이만.”
“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아련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저 사람을 보기 힘들지 싶다.
‘그나저나 호감도가 꽤 올랐는데.’
관계창의 멘트가 변하지 않았을까?
궁금한 마음에 관계창을 켜 보니…….
엘리야: “골치 아프지만은 않은 임시 사제 관계.”
음…… 확실히 변하기는 했다.
‘골치 아프지만은 않다, 라.’
이거 사실 엘리야 마라케시 입장에서는 한 인간을 형용하는 최선의 표현인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