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 *
이틀 후.
드디어 로잔 회의가 열리는 날이 밝았다.
이 중요한 날 아침에, 나는…….
“……이게 그 고친 드레스인가?”
“그렇습니다, 공녀님.”
확실히 유행이 한참 지나 있던 드레스가 로제타 부인의 손을 거치자, 고전적이면서도 최신 유행의 맛이 살아 있는,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드레스로 탈바꿈해 있었다.
현대의 디자이너인 내 눈에도 과장된 부분이나 촌스러운 부분 없이 아주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예정대로 이 드레스로 하지.”
모름지기 전투에 나갈 땐 전투복을 입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레스는 아주 훌륭하다고 볼 수 있지.’
오늘도 시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꾸며 준 모습을 거울로 흡족하게 체크한 다음, 나는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는 타운 하우스라기보다 거의 한 성을 포함한 장원에 가까운 규모를 지닌 곳이었다.
위에서 보면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형상을 한 건물 동편을 이스트 윙, 서편을 웨스트 윙이라고 불렀다.
이스트 윙은 주로 공작과 그 직계 혈족이 생활하는 생활 공간이 모여 있었고, 웨스트 윙은 손님맞이용 객실을 포함하여 좀 더 공적인 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오늘 로잔 회의가 열리는 그레이트 홀도 웨스트 윙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웨스트 윙으로 향하기 위해 건물의 메인 로비로 향했다.
그리고 당연히…….
“유리, 다행히 시간에 맞춰 나왔구나.”
같은 경로를 이용하는 선객과 필연적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어머니. 그리고 엘레니, 안녕.”
“……안녕하세요, 언니.”
엘레니는 평소처럼 내게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카민스키 경의 샛노란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참으로 어여뻤다.
“그런데 유리, 네 드레스가 못 보던 옷인 것 같구나.”
“아, 이거요?”
나는 푸른빛이 전체적으로 스며 있는 진주 같은 색의 옷자락을 펼쳐 보였다.
“알아봐 주셔서 기뻐요.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옷을 고쳐 입은 거랍니다.”
“!”
새어머니의 미소 띤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녀가 떠듬거리며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그……랬구나. 전 공작 부인께서 남긴 유품을…….”
“네. 옷감이 너무 예뻐서 고쳐 봤어요. 어떤가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참 어여쁘지만, 유리.”
하지만 새어머니는 강적답게 굳은 표정을 한순간에 말끔히 지워 냈다.
“나는 마음이 조금 아프구나. 네가 카민스키 경에게 조금만 부드럽게 대해 줬더라면, 오늘 같은 날 고친 옷이 아니라 새 옷을 입고 나올 수 있었을 텐데.”
매번 들먹이는 그 대단하신 카민스키 경이 곧 한물간 재단사가 될 예정임을 알고 있는 나에겐 아무 타격도 주지 못하는 말이었다.
나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쳤다.
“괜찮아요. 로잔 회의는 제가 새 드레스를 자랑하기 위해서 있는 회의가 아니니까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천만다행이구나.”
하하, 호호. 우리 사이에 잠시 서늘하고 예쁜 웃음이 오갔다.
바로 그때였다.
경합! 엘레니와 당신의 매력 수치를 비교합니다.
경고! 당신의 매력 수치가 모자랍니다.
엘레니가 경합에서 승리합니다.
‘이런.’
현재 내 매력 수치는 30. 그걸로 엘레니를 이기기엔 부족한 게 당연했다.
뒤이어…….
‘패널티 이벤트: 서열 정리’에 진입합니다!
엘레니보다 그레이트 홀에 먼저 입장해야 합니다.
실패 시 당신의 매력 수치가 30 하락합니다.
……여기서 30 하락이면 매력 수치는 제로가 된다.
‘젠장…….’
나는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새어머니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볼까, 유리야?”
나도 일단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어머니.”
우리 셋은 마치 사이좋은 모녀와 자매지간인 것처럼 일행이 되어 그레이트 홀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가문의 기사들이 홀을 지키고 있다가, 우리가 다가가니 문 앞에서 X 자로 교차하고 있던 장창을 열어 길을 내주었다.
“그럼…….”
‘지금이다!’
바로 그때, 나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잠시만요.”
습관처럼 제 어머니 뒤를 따라가던 엘레니와 새어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니, 유리?”
“마음이 앞서는 건 이해하지만, 엘레니.”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못을 박았다.
“내 뒤에 서야지.”
“…….”
그랬다. 아무리 같은 공녀라고 해도 우리 둘 사이에는 확실한 서열이 존재했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그런 차서가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새어머니의 녹색 눈동자가 일순 아주 차갑게 번뜩였다.
“……그래. 적장녀의 권한을 잊어선 안 되지. 엘레니, 네 언니의 뒤에 가서 서렴.”
“네…….”
엘레니는 조심스럽게 내 뒤에 자리를 잡았다.
“저, 실수해서 죄송해요, 언니. 기분이 많이 상하신 건 아니죠?”
“전혀.”
나는 부드럽게 대답하며 엘레니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잘 듣는데, 내가 화가 날 이유가 뭐가 있겠니?”
그러자 엘레니가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을 천천히 접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정말.”
그와 동시에 장미 넝쿨이 양각된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외쳤다.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과 유리 공녀님, 그리고 엘레니 공녀님께서 드십니다!”
완전히 문이 열리자, 마치 대학교의 강의실을 연상시키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레니보다 먼저 그레이트 홀에 입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패널티 이벤트를 무사히 통과합니다.
기품이 10 오릅니다.
단차를 둔 좌석에 관할령을 가진 로잔헤이어의 봉신들과 그 외 봉토가 없는 가신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공작과 칼릭스는 정중앙에 마치 판사들의 자리처럼 배치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부인도 오셨군.”
공작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아마 안살림만을 주관하는 새어머니는 평소대로라면 로잔 회의에 굳이 배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요.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요.”
“…….”
나는 자리에 앉으며 홀 중앙에 놓인 단상과, 그 위에 놓인 작은 보석에 흘긋 시선을 주었다.
공작과 가신들이 얼마간 논의를 한 결과, 나는 이렇게 로잔 회의의 개회식 날에 봉인을 해제하는 일에 도전하게 되었다.
‘가장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말이지.’
이유는 있었다. 앞으로 있을 치열한 회의 중간에 내가 끼어들기보다 그게 더 모양새가 좋을 것 같다는 거였다.
그렇게 결정이 난 데에는 봉신 중에서도 멜튼 자작이 목소리를 높인 덕이 크다는 풍문이었다.
‘멜튼 자작이라면 엘레니의 시녀, 로아나의 아버지였지.’
아무래도 그는 확실히 내 새어머니의 수족 중의 수족인 모양이었다.
“공작 각하.”
그때, 자리에 앉아 있던 봉신 중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미 몇 번 말씀드렸지만, 공녀님께서 꼭 보주의 봉인을 푸셔야 하는 겁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뒤이어 다른 사람도 목소리를 냈다.
“사실 우리 중에 보주가 어떤 물건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공녀님이 위험하실 수도……”
“어허, 아렌델 자작. 지금 설마 공작 각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사항에 반기를 드는 거요?”
나는 그 앞에 놓인 명패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이 멜튼 자작이로군.’
몇몇 사람들이 그에 동조했다.
“그렇소. 유리 공녀님께서 보주의 시험에 도전하시기로 한 것은 각하의 뜻이오.”
“이미 시험대는 준비되었소. 공녀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시험에 도전하셔야 하오!”
“하지만……!”
“어허 이 사람 정말!”
다들 언성이 높아지려던 찰나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일순간 회의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다들, 이 사람의 일로 열을 올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
“저는 이미 공작 각하의 뜻을 받들어, 보주의 봉인을 풀기 위해 도전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 말에 새어머니와 멜튼 자작을 비롯한 사람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거보시오!”
“공녀님께서 옳은 말씀을 하시는구먼!”
“아니…….”
내 편을 들던 사람들의 말문이 막혔다.
“……유리.”
그때까지 묵묵하게 있던 공작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도중에 위험해질 것 같으면 얼마든지 그만두어도 좋다.”
“네, 아버지. 그렇게 할게요.”
나는 천천히, 아래쪽에 놓인 단상으로 내려갔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후우.’
나는 단상 앞에 서서, 그 위에 놓인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보석이라기엔 이건 좀…….’
각지고 모난 모양에, 여기저기가 돌로 뒤덮여 있어 보석보다는 원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안에서 깊은 붉은 빛이 일렁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류를 느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서일까?’
뭔진 몰라도 이 안에 엄청난 힘이 웅크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확연하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엘리야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해주의 진을 발동하는 조건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당신 안에 내재해 있는 마나 회로를 기동해, 손바닥에 새긴 진에 마나를 불어넣어 주면 됩니다. 열쇠가 될 정도로, 아주 조금만 말이죠.”
“잠깐.”
들어 보지 못한 조건에 나는 이의를 제기했다.
“마나 회로라니, 처음에 그런 조건은 말한 적 없잖아요?”
“그야 당신이 정말로 용의 피를 구해 올 줄 몰랐으니까요.”
당당하게 그렇게 선언한 엘리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당신이 정말로 해주의 주문을 사용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
“오늘 안에, 이 자리에서 마나 회로를 자각하는 데 성공할 것.”
‘……참 성격 좋은 사람이야.’
어쨌든 엘리야는 약속대로 내 손바닥에 해주의 진을 새겨 주었다.
남은 문제는 내가 과연 마나 회로를 자각했느냐, 하는 문제뿐이었다.
‘그야.’
죽을 각오로 임해서 성공해 주는 게 당연하잖아?
나는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머금고, 거침없이 로잔헤이어의 보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