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82)

20화

“300골드! 300골드! 다른 금액 없으십니까? 400골드! 현재 400골드입니다!”

경매는 이미 떠들썩하게 진행 중이었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나는 입구를 지키고 선 경비원에게 초대장을 확인시켜 주었다.

“특별 우대 손님이군요.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몰타의 레이첼이 구해 준 특별 우대 초대장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박스 형태로 된 좌석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음료도 대접받았지만, 무슨 음료일지 몰라 손을 대진 않았다.

“1000골드! 1000골드입니다! 더 이상 없으십니까?”

경매가 진행될수록 더 희귀한 물건들이 나오면서, 가격대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구경하는 맛이 있긴 하군.’

그러고도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이번 경매의 하이라이트!”

“우오오오오!”

“용들의 시대, 용족을 지배하던 잔혹한 황제! 용제의 피가…… 오늘 경매에 드디어 나왔습니다!”

“와아아아악!”

사람들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주최 측에서 준비해 준 오페라글라스를 통해 단상을 확인하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겨우 저거야?’

단상 위에 놓인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유리병에 정말 찔끔, 절반도 안 되게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뭔가 했더니 진짜 그냥 피네.’

약간 실망한 나와 달리, 이미 경매는 불이 붙어 있었다.

“5000골드! 5000골드입니다! 네, 1만 골드로 올라갑니다!”

‘흠.’

나는 일단 경매가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기다리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5만 골드! 5만 골드입니다! 더 이상 없으십니까?”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만이 남아 의기양양한 미소를 머금은 그때.

“10만 골드.”

나는 지체 없이 두 배를 불렀다.

* * *

그 뒤로도 몇 번 정도 호가를 주고받긴 했지만, 결국 용의 피는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막강한 자금력을 등에 업은 내 소유가 되었다.

“손님, 여기 있습니다.”

주최 측에서는 따로 화려한 독방으로 나를 부른 다음, 정중하게 상자 안에 포장한 용의 피를 건네주었다.

“저희 경매장의 호위가 암흑가 중간까지는 손님을 호위해 드릴 겁니다.”

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인즉.’

경매장 주변을 벗어나면 죽든지 살든지 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물건을 건네받고, 앞뒤로 나를 호위하는 사람들을 따라 경매장을 벗어났다.

“저희 호위는 여기까지입니다, 손님.”

“음.”

나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안쪽 깊이 숨겨 둔 텔레포트 스크롤을 언제든 찢을 수 있게 손에 쥐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야.’

여기서 바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면 추적을 당할 수도 있으니, 조금 멀어진 다음에 사용해야 했다.

‘분명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고 있을 거야.’

나는 아까처럼 인파 속에 섞여 들어, 호위를 속였던 방식대로 반지를 뺐다.

순식간에 내 갈색 머리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어…….”

그런 나를 목격하고 놀란 사람도 인파에 휩쓸려 사라졌다.

하지만 인파의 보호를 받는 것도 언제까지나 가능한 건 아니었다.

‘암흑가와 야시장을 잇는 길목.’

그쪽에는 외려 사람들이 적었다. 야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암흑가에 발을 디디지 않으려 주의하고, 암흑가 사람들은 야시장 쪽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까.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스크롤을 찢을 타이밍을 쟀다.

“저기야, 저기!”

“저 은발 머리를 잡아!”

“!”

들켰나!

호위를 속여 먹은 수법이었지만, 이런 곳에서 약은 꾀에 도가 튼 놈들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인적이 드문 거리 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추적을 당하더라도 스크롤을 써야겠다.

‘추적을 해서 로잔헤이어 공작가가 나오면, 제깟 것들이 어쩔 건데!’

그런 식으로 일이 복잡해져서 공작에게 걸리면 경을 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스크롤을 찢으려는 순간.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쪽으로 날아들던 검을 막아섰다!

“!”

짧게 자른 흑발에, 제복에는 금실로 새긴 황실의 쌍두 독수리 문장이 눈에 띄었다.

‘황실의 기사!’

하지만 그것보다 날 놀라게 한 건…….

‘……에스테반 후작이잖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는 스크롤을 찢으려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장님!”

곧이어 우르르 황실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젠장, 물러나라!”

결국 나를 쫓아왔던 이들이 다시 암흑가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단장님!”

“쫓지 마라.”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우리가 할 일은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축제 날에는 이런저런 분쟁이 많다. 그런 걸 하나하나 쫓아다녀서는 이 밤의 전체적인 치안을 유지할 수 없다.

스릉, 하고 그가 검집에 검을 꽂았다. 나는 기사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돌아선 그와 눈이 마주쳤다.

“……!”

에스테반 후작의 회색 눈이 커졌다.

‘망했군.’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나는 일단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안녕하세요, 에스테반 후작님.”

“유리 엘로즈 공녀……?”

그 순간.

펑! 퍼벙! 펑!

커다랗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에피소드 5: 에스테반 후작과 축제의 밤’으로 진입합니다!

세드릭의 영향으로 숨겨진 재능, ‘정신력’이 발현합니다!

숨겨진 재능이 모두 발현했습니다!

칭호, ‘다재다능’이 부여됩니다. 칭호의 효과: 전 능력치 10 상승.

‘드디어……!’

모든 재능이 발현했다!

생각지도 못한 호재 앞에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화려한 불꽃의 그림자 속에서, 에스테반 후작이 내게 물었다.

“대체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그게…… 야시장에서 인파에 휩쓸려 길을 잃었어요.”

에스테반 후작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혼자서 야시장을 구경하러 나오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호위들하고 같이 있었는데…….”

상황을 알겠다는 듯, 에스테반 후작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인사를 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별로 놀라신 것 같진 않군요.”

“그게…….”

정신력이 20 오릅니다!

무어라고 변명하려던 순간, 정신력 수치가 올랐다.

‘얼레, 이게 웬 떡?’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에스테반 후작이 딱딱한 어투로 변명 비슷한 말을 했다.

“추궁하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알아요.”

에스테반 후작의 성격이야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래서 가볍게 대답했는데,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아닌가?

‘아차.’

우리 이제 처음 만난 거나 다름없는 사이였지.

하지만 이미 대답해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뻔뻔하게 생긋 웃어 보였다.

“어쨌든,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두 번씩이나 감사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덕분에 살았는걸요. 후작님이 아니었다면 이 밤에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잖아요?”

“그런 가정은 불필요합니다.”

“…….”

으응 그러니……?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어 나는 웃기만 했다.

‘철벽 같으니라고.’

에스테반 후작뿐만이 아니었다. 이 게임 남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초반에 다가가기 힘든 — 그러니까 사람을 열 받게 하는 — 스타일이었다.

엘리야와 칼릭스는 대놓고 까칠한 사람들이었고, 황태자는 겉으로 보기엔 다정한 것 같지만 웃는 얼굴로 은근히 철벽을 치곤 했다.

‘그리고 여기, 에스테반 후작은 그냥 대놓고 에누리 없이 철벽을 치는 사람이고.’

아무튼 갈 길이 먼 건 네 사람 다 마찬가지다. 나는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에 에스테반 후작은 기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장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자택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앗.”

정말?

“괜찮을까요? 저 이거 엄연한 공무 집행 방해 같은데.”

“…….”

에스테반 후작이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지?’

시선이 좀 부담스러운데, 싶은 순간.

……삐로롱.

‘엥?’

뜬금없이 호감도가 올랐다.

믿을 수가 없어서 에스테반 후작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호감도가 올랐는지도 모를 정도로 감쪽같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요 인사를 보호하는 것도 공무에 해당합니다.”

대답 또한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런가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오러 마스터인 그가 호위를 해 준다면, 굳이 아까운 스크롤을 낭비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여러모로 죄송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에스테반 후작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에스테반 후작의 호감도가 두 번 오르는 요행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또 은근히 궁금하단 말이야.

‘관계창!’

분명 첫 만남 이후에는 ‘잘 모르겠군.’이라는 한마디만 떨렁 적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에스테반 후작의 이름이 세드릭이니까…… 아, 여기 있다.’

기껏 찾아낸 그의 이름 옆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세드릭: “……잘 모르겠다만.”

……나랑 장난하나, 지금?

여전히 변한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는 한마디로 나를 농락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됐고.’

나는 빛나고 있는 화살표를 눌러 상태창으로 넘어갔다.

<성명: 유리 엘로즈>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마탑주의 임시 제자, 초보 협상가, 다재다능>

명성: 160

마나: 115/1000

지력: 93/1000

화술: 40/1000

매력: 30/1000

기품: 10

정신력: 30

모든 재능이 발현한 상태창이 나를 반겼다.

‘후우, 드디어.’

여기부터 본격적인 시작인 셈이었다.

다재다능 칭호를 획득했다는 건 내가 배드 엔딩의 초입에 도달했다는 긍정적인 신호였다.

‘즉.’

적어도 내가 여기까지는 네 명의 공략 대상의 호감도를 균형 있게 발전시켰다는 신호였다.

……그나저나.

‘근래 들어 알 수 없는 포인트에서 호감도가 오르는 일이 잦단 말이야.’

게임에서처럼 정해진 타입대로 정해진 반응만 되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그 때문일까?

자연스럽게 ‘아, 이건 게임이 아니고, 저 사람들도 캐릭터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정말 다른 세상에 온 거 맞네.’

이불 속에서 모로 누워 괜히 나오지도 않은 콧물을 킁 했다.

‘……뭐, 일단 자자.’

여기가 정말 진짜 세상이라면.

이 모든 게 가짜가 아니라면.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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