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 *
“해주의 진을 새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별한 재료가 필요합니다.”
거래가 성립되자, 엘리야는 내게 몇 가지 사항을 일러 주었다.
“최상급 마나석을 비롯한 기타 재료는 제가 조달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재료가 모자랍니다.”
“……용의 피 말씀이시죠?”
“정답입니다.”
용의 피.
200여 년 전에 마지막 용이자 최흉최강의 용이었던 용제(龍帝)가 봉인될 때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공급이 끊긴 물건이다.
하지만 200여 년 전 당시 용족이 남긴 피들은 아직까지도 약간 남아 있었고, 그중 극소수가 간혹 암흑 시장에서 유통되곤 했다.
‘원작에서는 황제가 봉인을 풀라며 용의 피를 내주었지만.’
지금은 꼼짝없이 내 손으로 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다행히 내게는 정보가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투와르 축제가 시작되지.’
로맨스 판타지 게임에서 빠질 수 없는 축제 이벤트. 공위소에도 당연히 축제, 그중에서도 야시장 관련 이벤트가 존재했다.
‘바로 에피소드 넘버 5, 무려 세드릭 에스테반 후작 관련 이벤트지.’
원작에서 유리가 신분을 감추고 몰래 축제 야시장에 놀러 갔다가, 치안을 단속하던 에스테반 후작의 도움을 받고 그와 함께 불꽃놀이를 구경하게 되면서 이벤트는 마무리된다.
그때 분명, 에스테반 후작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곤란합니다. 올해는 특히 용의 피를 구하러 온 거친 자들이 많습니다.”
……라고 말이다.
투와르 축제 야시장 첫날에는 암흑가에서 비밀 경매가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즉, 용의 피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암흑가의 비밀 경매에 참석해야 한다는 말인데…….’
문제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슬슬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는 설렁줄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공녀님?”
“외출 준비를 할 거야.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뒤이어 이어진 내 말, 오늘은 약간 부유한 상인의 딸처럼 보이고 싶다는 말에, 시녀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호위 기사를 데리고 갈 거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러시다면…….”
석연치 않아 하면서도 시녀들은 이유를 묻진 않았다.
왜냐면 유리에게는 간혹 이런 식으로 신분을 숨기고 잠행을 하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행이라고 해 봤자, 평소보다 자유롭게 상점가를 구경하는 정도에 그치는 놀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공녀님, 여기 반지를 가져왔습니다.”
“음, 고마워.”
바로 이렇게, 잠행을 할 때 모습을 바꿔 주는 마법 반지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평소보다 조촐하고 그래서 더 움직이기 쉬운 옷을 입은 뒤, 반지를 챙긴 나는 호위 기사를 데리고 황도의 거리로 나섰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반지를 낀 나는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평범하게 생긴 소녀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으로 노점의 좌판을 흥미롭게 구경하기도 하고, 길에서 파는 음료수를 사 마시기도 하면서 천천히 목적지로 향했다.
이윽고 내가 멈춰 선 곳은, 한 고급 디저트 가게 앞이었다.
“안에서 살 게 있으니까 잠시 기다려 줘.”
“예, 아가씨.”
딸랑, 하는 소리가 나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서 오세요! 라메르입니다!”
경쾌한 점원의 음성이 날 반겼다.
나는 쇼 케이스를 흥미 있게 구경하는 척하면서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인상 좋은 종업원이 이렇게 물었다.
“디저트 선택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
“초콜릿 쪽을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면 제과 쪽을?”
“둘 다 좋지만…….”
가게 안에 다른 손님은 없었지만, 나는 혹시나 해서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이왕이면 몰타의 다섯 번째 산호섬에서 바라보는 노을을 잔에 담아 줬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손님. 그쪽이라면 안에서 안내를 도와드려도 될까요?”
다행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점원이 카운터를 열고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나는 점원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겠습니까?”
디저트 가게에서 먹고 가려는 손님을 위한 곳처럼 생긴, 특색 없는 공간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주문하신 산호섬의 노을입니다, 손님.”
문이 열리며, 노을처럼 붉게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육감적인 미인이 등장했다.
“무엇을 알고 싶어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절 찾아오셨을까요?”
바로 정보 길드 몰타의 수장인, 레이첼 콘스탄스였다.
“글쎄.”
나는 씩 웃으며 원작에서 본 그녀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정보 길드가 밤에만 영업한다는 건 편견 아닌가?”
“어머나.”
레이첼의 입술이 붉은 호선을 그렸다.
“재미있는 아가씨께서 오셨네요.”
“칭찬으로 듣지.”
“칭찬 맞아요. 흐음, 그럼 우리 아가씨께선 무엇을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오셨을까요?”
“어려운 일은 아니야.”
나는 종업원이 대접하는 차로 입술을 조금 적시고 말했다.
몰타의 레이첼에게는 특이한 손님 판별법이 있어서, 자신이 대접한 차를 마시는 손님에게 좀 더 점수를 주기 때문이었다.
‘정보상도 결국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자신을 믿어 주는 손님이 좋다고 했지.’
과연, 내가 차를 마시자 레이첼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뭘까요?”
“이번 투와르 축제 때 암흑가에서 열리는 비밀 경매에 참석하고 싶어.”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이 정도라면 당신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투와르 축제의 암흑 경매라…….”
흐음, 하고 레이첼이 데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확실히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런 편이지.”
“좋아요. 축제가 시작하는 날까지 초청장을 구해 놓도록 하죠.”
레이첼이 시원스럽게 장담했다.
“대금은 300골드지만, 아가씨가 퍽 마음에 드니 200골드만 받을게요.”
“칭찬 고맙지만.”
나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세지도 않고 그대로 툭 올려놓았다.
“정보 상인을 상대로 값을 깎고 싶지 않아.”
“이건…….”
주머니를 확인한 레이첼이 되물었다.
“값을 안 깎는 정도가 아니군요?”
“더블로 대금을 지불하면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있잖아. 그걸 주문하고 싶어.”
“…….”
더블 가격의 서비스라면, 정보상에게 ‘내가 여기 왔던 사실에 대해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고 요청하는 뜻이 된다.
‘폴리모프 반지를 끼고 있지만, 내가 누군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몰타를 너무 얕보는 거지.’
레이첼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잘 알겠습니다, 손님.”
이번에도 거래 성립이었다.
* * *
그리고 며칠 후.
투와르 축제가 예정대로 개막했다.
다행히 새어머니는 요즘 엘레니의 황실 무도회 참석을 준비하느라 바빠서인지 나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뭐, 내게 이미 크게 한 방을 먹였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나는 며칠 동안 방해 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준비는 완벽해.’
나는 라메르에 사람을 보내 찾아온 디저트 상자 밑바닥을 열어 보았다.
상자 밑바닥에는 곱게 접은 검은 봉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좋았어.’
나는 변신용 반지, 그리고 좌표를 공작저로 설정한 호신용 텔레포트 스크롤을 하나 챙겼다.
이걸로 경매에 참석할 준비 완료였다.
노을이 지고 푸르스름한 저녁이 찾아오자, 나는 평소처럼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와.’
본격적으로 야시장이 열리는 현장에 도착하자, 인파가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했다.
가로수마다 줄줄이 등불이 걸려 있었고, 거리 양쪽으로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본 나의 감상은…….
‘……일러스트에서 본 거랑 똑같네.’
심지어 인파가 버글버글한 것까지 일러스트와 똑같았다.
“아가씨,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무 많은 인파에 호위들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파 속을 파고들었다.
호위들도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라 밀려드는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와.”
나는 마치 목적이 쇼핑인 사람처럼, 길 양옆에 깔린 노점상들을 이곳저곳 오가며 구경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호위들을 정신없게 만든 뒤, 이번에는 한 노점상 앞에서 멈춰 서서 오랫동안 구경을 했다.
“좋은 물건들이 많아요, 아가씨! 이쪽은 서쪽 지방에서 들여온 비단이랍니다.”
흥미 있게 비단을 구경하기 시작한 뒤 5분여가 흐르자.
호위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좋았어.’
눈치를 살피던 나는 비단 좌판에 다른 손님이 몰린 틈을 타, 조심스럽게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그리고 갈색 머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호위들 사이를, 은발 머리를 한 채 쏙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됐어!’
이때 갑자기 뛰거나 하면 더 눈에 띌 것이다. 나는 얌전히 인파 속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호위들과 멀어졌다 싶어졌을 때 다시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탈출 성공.’
나는 레이첼이 보내 준 검은 봉투 속 약도를 떠올리며, 인파 속에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야시장의 여파 때문인지, 암흑가에도 환히 불이 밝혀져 있고 제법 평범한 사람들도 많이 오가고 있었다.
‘파는 물건들은 아까랑 좀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호객 행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입고 온 로브의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찾았다, 주점 미란다!’
주점 안은 평범하게 술을 마시는 손님들로 왁자지껄 붐비고 있었다.
곧장 바 쪽으로 다가가자, 바텐더가 친절하게 응수했다.
“음료를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나는 조용히 작고 검은 카드 형태의 초대장을 내밀었다.
내 초대장을 확인한 바텐더가 옆문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얼큰하게 취한 척 옆문을 막고 서 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리고 옆문을 통과하자마자…….
‘와.’
열기에 휩싸인 거대한 지하 경매장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