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82)

18화

“어머나…….”

새어머니의 눈빛이 얕게 흔들렸다. 나는 모른 척 생긋 웃었다.

“어머니께서 엘리야 마라케시 경에게 꼭 한번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모셔 왔답니다.”

“아, 그래서…… 그래서 그랬구나.”

새어머니가 다급히 표정을 수습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 어서 오세요, 마라케시 경.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아, 예…….”

“자, 자리에 앉으시겠어요?”

새어머니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이렇게 엘리야와 마주한 게 손해는 아니란 것을 곧 깨달은 듯, 표정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소문의 마탑주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너무 반갑네요. 차를 한잔 대접해 드릴 테니 앉으시겠어요? 마침 저택에 다른 아이들도 있으니……”

“아니, 아닙니다. 차를 마실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거절하는 엘리야의 태도에 새어머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어째서요?”

“수업을 빨리 시작해야 해서.”

“그렇군요. 그렇다면 수업이 끝난 다음에 티타임을 가질까요? 경과 할 이야기가……”

“죄송합니다만 공작 부인, 저는 제 소개 이외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왔다. 엘리야 마라케시를 유명하게 만든 안하무인 태도.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여기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겁니다.”

“……여기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요?”

“네, 어머니.”

나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엘리야 대신 대답했다.

“엘리야 경께서 수업은 마탑에서 하는 게 좋다고 하셔서, 거기로 갈 예정이거든요.”

“어머나, 하지만 마탑은……”

“거기까지는 당연히, 엘리야 경께서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 주실 거예요.”

“…….”

“전에 어머니와 약속할 때는 제가 그 사실을 그만 ‘깜빡’ 잊고 말았지 뭐예요.”

“그래, 그랬구나…….”

그제야 엘리야를 여기까지 끌고 온 내 의도 — 당연히 그녀의 속을 긁기 위한 자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가 무엇인지 깨달은 새어머니의 얼굴에 잠시 굳은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곧 그녀는 어젯밤, 나를 완벽하게 찍어 눌렀던 순간을 기억해 낸 듯 후, 하고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구나. 마탑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

“잘 다녀오렴, 유리. 그 수업이 정말 즐거웠으면 좋겠구나.”

……그게 네 마지막 수업이 될 테니까, 라는 환청이 들릴 것만 같은 어조였다.

나는 지지 않고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어머니.”

긴말은 하지 않았다. 방심하고 있을 때 예상을 깨 주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인 법이니까.

* * *

두 번째 수업이 종료되었습니다!

수업 목표 이행률: 30%

마나의 흐름, 마류를 감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나가 20, 지력이 10 오릅니다.

“헉, 헉…….”

기진맥진해서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드디어 마류를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성과는…….

‘마나가 드디어 100이 넘었어!’

“……이제 조금 봐 줄 만한 꼴이 된 것 같군요.”

그와 동시에 맑고 고운 삐로롱, 소리가 울렸다.

‘됐어.’

이 게임에서는 남주인공들과 관련한 능력치를 일정 수준 이상 올렸을 때, 호감도가 소폭 오른다.

‘호감도 올리기가 쉽지 않은 이 게임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설정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설정이 아직 유효함을 확인한 나는, 가느다랗게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칭찬 감사해요.”

남의 입에서 ‘봐 줄 만한 꼴’ 운운하는 소리가 나왔으면 당연히 욕이지만, 엘리야의 입에서 나왔다면 칭찬이 맞았다.

내 예상대로 엘리야가 “흥.” 하고 짧게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뭐,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좋긴 하군요.”

‘거봐. 칭찬 맞았다니까.’

하여간 성격 참 멋져.

“아무튼, 이만 일어나도록 하시죠.”

“네에, 네.”

나는 성의 없이 대답하며 팔을 위로 뻗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엘리야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뜻입니까?”

“손. 안 잡아 줘요?”

빤히 그를 바라보며 뭐 하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엘리야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토했다.

“……제법 뻔뻔한 면이 있군요.”

언뜻 들으면 불쾌하게 들리는 말투였지만, 말과 달리 그는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위에 내 손을 얹자, 엘리야가 예상외로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

키만 컸지 마른 체형이라 책상물림 마법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다 싶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고, 고마워요.”

얼떨결에 딸려 오다시피 일어선 내가 감사 인사를 전하자, 엘리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별말씀을.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라고 말하며, 그가 손가락을 튕기려 했다.

‘앗, 안 돼.’

오늘의 용건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잠깐만요!”

“!”

나는 너무 다급했던 나머지 엘리야의 두 팔을 손으로 덥석 붙잡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엘리야가 당황해서 나를 떨쳐 내려고 팔을 움직이는 바람에, 그 팔에 매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나는 휘청, 하다가…….

“……윽.”

그대로 엘리야의 품에 얼굴을 박고 말았다.

‘안 돼!’

그대로 밀쳐져서 우당탕탕 바닥을 구를 줄 알고 눈을 꼭 감았지만…….

‘……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빨리 떨어지지 않고 뭐 합니까?”

“앗. 넵.”

엘리야의 음산한 목소리에 나는 후다닥, 엘리야의 품에서 떨어졌다.

“후우.”

엘리야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화가 난 건지, 얼굴까지 약간 붉은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죄송……”

최대한 면목이 없다는 투로 사과하자, 그가 “됐고.” 하며 말을 끊었다.

“뭐 때문에 그런 겁니까? 설마 집에 가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엘리야의 한쪽 눈썹이 휙 하고 올라갔다.

“부탁?”

“어쩌면 ‘거래’라고 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요.”

“흐음.”

거래라는 말에 엘리야는 흥미가 동했는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의자 두 개가 미끄러지듯이 나와 그에게 다가왔다.

그중 하나에 다리를 꼬고 앉으면서 엘리야가 말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죠.”

“제 손바닥에 해주(解呪)의 진을 새겨 주세요.”

“!”

로잔헤이어의 보주는, 일단 소문대로 로잔헤이어의 혈족, 그중에서도 마법사 혈족만이 봉인을 풀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원작에서 엘리야는 보주의 봉인을 풀기 위해 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손바닥에 해주(解呪)의 진이라는 복잡한 마법진을 새겼고, 내가 그 마법진을 이용해 봉인을 푸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보주의 봉인을 푸는 데는 어떤 특별한 방법도, 장치도, 막대한 양의 마나도 필요치 않았다.

엘리야가 내 손바닥에 해주의 진을 새겨 주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당당하게 요구하는 나를 무슨 골칫덩이처럼 바라보며, 엘리야가 물었다.

“해주의 진이 뭔지나 알고 하는 말입니까?”

“당연히 알죠. ‘가장 깊은 봉인도 푸는 마법의 열쇠’잖아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대마법사 엘카 아낙사 님의 ‘봉인학 개론’을 안 읽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버러지죠.”

“…….”

원작 에피소드에서 엘리야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돌려준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삐로롱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게 아닌가?

‘엥?’

대체 왜 호감도가 올라?

어리벙벙한 나를 바라보며, 엘리야가 천천히 턱을 매만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당신이 엘카 아낙사 님의 저서를 읽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저와 비슷한 견해까지 가지고 계시는군요.”

“하하…… 어쩌다 보니.”

“뭐, 내 임시 제자가 적어도 버러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이기는 합니다만…….”

항상 생각하지만, 성격 참 끝내준다.

“어쨌든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대체 당신에게 왜 해주의 진이 필요한 것인지.”

“아, 그건.”

비밀로 숨길 필요도 없다. 어차피 로잔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봉인을 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제가 로잔헤이어의 보주(寶珠)의 봉인을 풀어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보주의 봉인을?”

“네.”

보주의 봉인을 풀어야 하는 경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그러자면 우리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댁을 의심스러운 작자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할 판이니까.’

그래서 나는 진실 대신 이렇게 설명했다.

“로잔헤이어의 마법사 계보가 끊어진 지 200여 년 만에 나타난 마법사 혈족이니까요. 저한테 거는 기대가 크신가 봐요.”

“거참…… 아직 어린 마법사한테 그렇게까지.”

엘리야가 마뜩잖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 일말의 동정심 비슷한 게 스며든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엘카 아낙사 님의 ‘봉인학 개론’을 읽어 본 것이로군요.”

“네, 뭐…….”

나는 정확한 대답을 흐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참신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모범적이기는 하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엘리야가 잠시 특유의 로제 와인 같은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처음에 분명 내게 ‘거래’라고 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의 진을 새길 수 있는 건 당대 마법사 중에 엘리야 마라케시뿐이야.’

가문의 마법사를 시키지 않고 굳이 엘리야에게 대가 운운한 이유였다.

엘리야가 느긋하게 손깍지를 끼며 내게 물었다.

“이게 거래라면, 내게 무슨 대가를 지불할 겁니까?”

“이제부터 경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할게요.”

“기각.”

농담이었는데 칼같이 차단당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이번에는 진지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저는 봉인을 푼 혈족의 명분으로 아버지께 보주의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에요.”

“…….”

“그렇게 되면, 경에게 로잔헤이어의 보주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할게요.”

어때, 구미가 좀 당기지?

여우처럼 가늘어진 눈빛으로 엘리야를 바라보자, 엘리야가 탐탁지 않다는 듯 “끙” 소리를 내면서도 시인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됐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원작 에피소드에서도 그는 봉인을 푼 보주가 황제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내 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영악하기는.”

“오늘 절 여러 번 칭찬하시네요.”

거래 성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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