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나는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꼼꼼히 세수를 하고, 장미 향기가 나는 미용수로 피부 결을 정돈하는 등 평소에 하던 단장을 모두 마쳤다.
그리고 내가 드디어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이 기다렸니?”
초조한 듯 발끝을 튕기고 있던 칼릭스가 대번 내 쪽을 돌아보았다.
“……제법 그런 편입니다만.”
그러면서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12시군요. 좀 더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여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음, 안타깝게도 귀족 아가씨들의 평균 기상 시간에서 앞당길 생각은 전혀 없단다.”
나는 칼릭스의 맞은편에 앉은 다음, 시녀들에게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을까?”
“보주는 로잔헤이어의 역사 속에서 그 누구도 봉인을 풀지 못한 물건입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이었다.
“그리고 로잔 회의는 가주가 1년에 두 번 봉신들을 소집해서 벌이는 일종의 대회의입니다. 황제 폐하조차도 이 회의에서 논의한 의결 사항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평한 내 대답에, 칼릭스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지금 ‘그래서’라고 하셨습니까?”
“응.”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두 가지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
“넌 지금 내가 보주의 봉인을 풀지 못했을 때, 그 망신스러운 소문이 제국 전체에 퍼지게 될 거라고 경고한 거잖니.”
“하.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태평하십니까?”
“글쎄, 완전히 태평한 건 아냐.”
나는 찻잔을 손안에서 빙빙 돌리며 말했다.
“그 사실을 가지고 네가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거든.”
“…….”
침묵하는 칼릭스에게, 나는 일부러 웃으면서 물었다.
“역시 너, 나를 걱정하는 거 아니니?”
“……그러면 안 됩니까?”
“……어?”
열이 받아 펄쩍 뛸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방금 뭐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내가 이렇게 되물으려던 순간.
딩동, 소리가 연속으로 울리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에피소드 4: 칼릭스의 걱정’으로 진입합니다!
칼릭스의 영향으로 숨겨진 재능, ‘기품’이 발현합니다!
‘……응?’
이 에피소드가 이 타이밍에?
원래대로라면 한참 더 구르며 칼릭스의 호감도를 쌓아야 나오는 에피소드인데?
‘그러고 보니 칼릭스의 호감도를 이래저래 꽤 쌓았던 것 같기도 하고…….’
멍해 있는 내게 칼릭스가 재차 물었다.
“제가 당신을 걱정하는 거, 그러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따져 묻다시피 하는 칼릭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안…… 된다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이런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상대는 공략 대상인지라 차마 여기까지는 내뱉을 수 없었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요.”
앗. 그렇게 티가 났나?
칼릭스는 냉막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적장녀입니다. 따라서 후계자인 제가 당신의 행보를 염려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 그래?”
상대가 너무 당당해서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칼릭스가 다시 한번 힘주어 못을 박았다.
“후계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으응, 그렇구나…….”
내가 영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칼릭스가 다시 도끼눈을 떴다.
“여기까지 말씀드렸는데 움직이지 않고 뭘 하시는 겁니까?”
“?”
“당장 아버지께 가서 말씀을 드리십시오. 당신은 보주의 봉인을 푸는 데 실패할 거고, 그건 뜻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으니 부디 뜻을 거둬 달라고 말입니다.”
“그건…….”
“어머니는 어제 거기까지 생각지 못하신 모양이지만.”
여기서 칼릭스는 약간 확신이 없는 듯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어쨌든, 최소한 봉인을 푸는 건 가족들만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 하면 됩니다.”
“음.”
정확한 대답을 안 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칼릭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글쎄.”
나는 그제야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참 우리 로잔헤이어의 후계자로서 적당한 것 같다는 생각?”
“…….”
완전히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칼릭스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게 대체…… 무슨……?”
“말 그대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소공작으로서 네 자질과 역량이 충분하다고 말이야.”
“…….”
그 순간.
맑고 고운 삐로롱, 소리와 함께 칼릭스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무슨, 당신은, 그러니까…….”
얼레? 호감도가 왜 여기서 올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칼릭스를 빤히 바라보자, 칼릭스가 “젠장.” 하고 읊조리며 자리를 박찰 듯하다가…….
갑자기 이제까지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응? 그럼.”
개인적 감정은 제외하더라도, 카시스 제국의 상속법은 장남에게 상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친다. 그러니 그 외에 다른 누가 후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단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
칼릭스는 허탈하게 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럼 제가 후계자로서 충고할 테니, 아버지께 가서 부디 이번 일을 물러 달라고 하십시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
“……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가 봉인을 풀 수 없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니.”
그랬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보주의 봉인을 풀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칼릭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술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정말로 그 일에 도전하실……”
“응, 그럴 생각이야.”
나는 따뜻한 찻잔을 들고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께서도 생각을 많이 하고 내게 권하신 일 아니겠니? 그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특히 이번처럼.’
내가 이길 확률이 100%인 싸움에서는 말이다.
* * *
로잔헤이어의 보주(寶珠).
이것은 오래전 용제 봉인의 시대로부터 내려온 전설적인 보석으로, 소유하는 것만으로 마나 감응력과 행사하는 마법의 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신기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이 보주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이 보주가 원작에서 소개한 적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게임 중반부였나? 엘리야가 황제의 명령으로 이 보주의 봉인을 푼 적이 있었지.’
여주인공이 그런 엘리야를 도와주며 호감도를 쌓게 되는 이벤트였다.
“……녀님, 공녀님!”
“어?”
그때, 누군가 생각에 빠진 내 옷자락을 잡고 심하지 않게 흔들었다.
보니까 얼굴이 익숙한 시녀였다.
“왜 그래?”
“저, 밖에 손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손님?”
이 와중에 누구?
‘뭐 카민스키 경이 로제타 부인 배후에 내가 있는 걸 알기라도 했나?’
“엘리야 마라케시 경께서 오셨습니다.”
“아, 그 사람.”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된 그 사람 말이지.
“오늘 수업이 있다고 하시는데…… 일단 응접실에 모셔다드렸어요.”
“잘했어. 내가 내려가 볼게.”
어쨌든 아직 공작가의 서신이 공식적으로 간 것도 아니고, 내가 확정적으로 보주의 봉인을 못 푼 것도 아니니까.
‘오늘은 수업을 받아야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루라도 수업을 받아서 내가 마나 회로를 자각하고, 엘리야와 꼬였다는 것도 풀리게 될는지.
‘그런 방향으로 일이 해결되는 것도 재미있겠는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응접실로 내려갔는데…….
“……참으로 일찍도 내려오셨군요.”
품위 있게 찻잔을 든 엘리야가 익숙한 말투로 빈정거렸다.
그 분홍빛 눈동자가 위협적인 기색을 띠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았지만, 당연히 나는 쫄지 않았다.
“저도 반가워요, 엘리야 경. 오늘도 수업을 위해 절 데리러 오신 거죠?”
“그렇기야 합니다만.”
“두 번째 수업이 무척 기대되네요. 그런데 오늘은 수업을 받으러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서요.”
“할 일?”
엘리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생긋 웃으면서 안심하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가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신중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저희 어머니께서 경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
“네에. 어머니께서 딸아이의 수업을 맡는 분께 인사를 드리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시겠다지 뭐예요.”
“저는 그렇게 하하 호호 담소나 나누고 있을……”
“……시간 따위야 당연히 없으시겠지만, 경이 어머니께 인사드리지 않으면 오늘 제가 수업을 받으러 갈 수 없답니다.”
“어째서?”
“어머, 그럼 여기까지 와서 로잔헤이어의 적장녀를 부모님께 인사도 없이 데리고 가려고 하신 거예요?”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내 말에 엘리야가 “으” 하고 질린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알았어요. 인사드리러 갈 테니까, 그런 이상한 말투로 말하지 마십시오.”
“네에.”
“다시는.”
“네, 네.”
엄포를 놓는 말에 기분 좋게 대답해 줬는데도 엘리야의 심기는 맑아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냥 신이 나서 엘리야를 뒤에 매달고 새어머니의 응접실로 즐겁게 발을 놀렸다.
그리고 즐겁게, 시녀를 시키지 않고 내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지?”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머나, 유리 왔니? 어서 들어오렴.”
“네에.”
지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나는 문을 열었다.
“유리…… 아니, 그 뒤의 사람은 대체……?”
“엘리야 마라케시 경이랍니다, 어머니.”
그와 동시에 엘리야가 내 뒤편 그늘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자기소개를 했다.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엘리야 마라케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