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보주?”
그 말에 나보다도 칼릭스가 먼저 반응했다.
“초대 가주이신 용봉공(龍封公)께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보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거란다. 지니기만 해도 마법의 위력이 올라간다던 그 보물.”
달콤한 목소리로 새어머니가 아버지께 말했다.
“초대 용봉공께서는 신성력까지 발현한 마법사셨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이 로잔헤이어에 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이는 명맥이 끊어졌잖아요.”
“…….”
“그런데 기쁘게도 우리 유리가 마법사로 개화했으니, 그 보주의 주인이 될 자격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언뜻 들으면 새어머니가 나를 위해 하는 말로 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보주의 주인이 될 자격은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오.”
때마침 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기록에 따르면 보주는 주인이 될 사람을 시험하는 보물이라고 하였소.”
로잔헤이어의 보주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그 봉인을 풀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숱하게 많은 마법사가 보주의 소유권에 도전했지만, 그중 아무도 주인이 된 자는 없었소.”
“어머, 하지만 유리도 마법사잖아요. 그럼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한 거 아닐까요?”
“…….”
“로잔헤이어의 보물이니, 로잔헤이어의 혈족만이 봉인을 풀 수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도는 물건이기도 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억지나 다름없는 논리 전개였지만, 그게 어느 정도 먹힐 만하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래도.’
우리 새어머니께서는 내가 혈족 자격으로 보주의 소유권에 덤볐다가 처참히 실패해서 망신을 당하는 꼴을 꼭 보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이쯤에서 나서는 게 좋겠지.’
“어머니.”
“유리.”
“여러 가지로 저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물건은 제게 아직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내 목적은 보물을 가지고 씨름하는 게 아니다.
“…….”
새어머니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좋은 보물이라도 내가 사양한다는데, 어쩔 거야?’
나는 눈을 내리깔며 다시 식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 순간.
“……사실 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여보.”
“무엇이오?”
“당신이 전에 우리 유리가 마탑주를 사사하게 되었다고 하셨잖아요?”
공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 그게 마음에 걸려요.”
새어머니가 금방 걱정스러운 표정을 꾸며 내며 말했다.
“아무리 마탑주라고 하지만, 젊은 남자인 데다가 출신도 분명하지 못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우리 유리를 맡기는 게 영 마뜩잖아요, 전.”
“…….”
공작이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논지의 말이었다.
‘이런.’
아무래도 새어머니는 보주 건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공작이 이렇게 받아쳤다.
“나도 기껍지는 않소. 하지만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사정도 내가 얘기하지 않았소?”
“알아요, 여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마탑주에게 마법을 배워야 할까요?”
“!”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믿을 만하고 안전한 선생을 구하는 게 어떨까 해요. 어차피 유리가 마법을 배우는 게 그렇게 시급한 일도 아니잖아요?”
시급한 문제였다.
아무래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물로 입안을 헹구며 입을 열었다.
“마탑주께서는……”
하지만 내가 막 대화에 끼어들려는 순간, 공작이 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유리, 너는 이 대화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그와 동시에 딩동, 하고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화술’ 능력치가 부족합니다!
‘이런.’
막 개방된 화술 능력치가 부족한 나머지, 둘의 대화에 끼어드는 게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가 보주를 선물하자고 한 거예요.”
내 말문이 막힌 사이, 새어머니가 설계한 함정은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보주의 봉인을 못 풀면 그것 때문에 ‘자질이 없는 아이를 맡기기엔 너무 송구하다’는 핑계로 마탑주에게 정중히 거절 서신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흠, 그건…….”
새어머니의 농익은 화술은 거의 아버지를 끌어들이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속셈이 무엇인지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나 회로도 자각하지 못한 풋내기 마법사인 내가 그 보주의 봉인을 푸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되면 공작이 엘리야에게 공식 서한을 보낼 것이다. 더는 날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이 계획이 성공하면, 난 엘리야에게 마법을 배울 수 없게 된다.
흐음. 나는 속으로만 옅게 감탄을 흘렸다.
‘……머리를 제법 썼는데?’
엘리야에게 마법을 배우지 못하는 건, 단순히 그와 깊은 친분을 쌓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호감도야 이번 히든 에피소드가 아니라 정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문제는 능력치였다.
그는 회로가 꼬인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마법을 배우면 습득 속도가 현저히 떨어질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엔딩 시점까지 필요한 능력치를 채우지 못할 수도 있어.’
그리고 능력치를 채우지 못하면?
‘죽겠지.’
에피소드 3편 만에 죽음의 위기가 찾아온 건, 원작에 없던 일이긴 했다.
원작에 없던 일이 이렇게 발생한 건, 아마…….
‘그동안 내가 우리 새어머니를 너무 놀려 먹었구나.’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하나, 이거?
‘거참, 사람이 악에 받치면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거였군.’
나는 새어머니의 말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가 준비한 게 고작 나와 엘리야의 수업을 방해하는 정도일 리가 없었다.
‘예를 들어, 보주는 로잔헤이어의 혈족만이 봉인을 풀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물건이지.’
그런데 만약 로잔헤이어의 적장녀가 그 보주의 봉인을 풀지 못한다면?
소문이 더럽게 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에 아주 충분한 촉발제였다.
이 촉발제를 새어머니가 어떻게 활용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고.
내 예상대로, 새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참, 그렇지. 이번 달 말에 로잔 회의가 있었죠?”
로잔 회의라 함은, 로잔헤이어 가문의 가주가 봉신들을 모두 소집해서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대한 행사였다.
“이왕이면 유리가 로잔 회의에서 보주의 봉인을 풀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공적인 자리일수록 마탑주에게 내세울 명분이 커질 테니까요.”
‘……판을 크게 키우려고 하는군.’
그냥 사적인 자리에서 봉인 해제에 실패하면 쉬쉬하며 덮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봉신들이 모두 모인 로잔 회의에서 보기 좋게 봉인 해제에 실패한다면?
공작의 선에서도 덮을 수 없는 망신거리가 생기는 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그때, 엘레니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니가…… 보주의 봉인을 풀 수도 있잖아요?”
“글쎄, 그때는…….”
새어머니가 부채를 팔랑이며 곱게 미소를 지었다.
“……유리가 그렇게나 뛰어난 자질을 가진 걸 기뻐하면 되지 않을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미소였다.
* * *
초승달이 떠오른 맑은 밤.
레티샤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잠들기 전 마시는 허브티가 이렇게 달 수도 있었구나.”
허접한 말재간으로 감히 대화에 끼어들 기회를 얻지 못해 당황하던 계집애의 얼굴을 생각하노라면…….
‘아아.’
숙면을 위한 허브차가 아니라 절절 끓는 용암이라도 웃는 얼굴로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밤, 그 계집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
반면에 자신은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게 될 것이다.
기분 좋게 레티샤가 허브티를 다 비웠을 때, 갑자기 엘레니가 레티샤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머니.”
“응? 왜 그러니, 사랑스러운 내 딸?”
레티샤가 즐거운 얼굴로 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엘레니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즐거워하질 않는구나. 이건 다 네가 로잔헤이어의 보주를 생각해 낸 덕인데, 왜 웃질 않니?”
“저는…… 그냥…….”
엘레니가 자그맣게 망설이며 대답했다.
“언니가 그 보물을 가졌으면 했어요.”
평소라면 크게 경을 칠 말이었지만, 유리를 이긴 기쁨에 취한 레티샤는 벌컥 성을 내지 않았다.
“아아, 가엾은 내 딸 엘레니. 진심이었구나.”
“네, 어머니…….”
“하지만 엘레니, 그 계집애 따위에게 마음을 주면 안 된단다. 엄마가 이미 충분히 말했잖니.”
부드러운 타이름 속에 시커먼 독기가 스며 있었다.
“이 로잔헤이어의 적장녀는 바로 너라고 말이다.”
“…….”
“이 어미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란다. 기필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이지.”
레티샤가 품에 안았던 딸을 살짝 밀어내며, 그 아름다운 녹색 눈망울을 바라보고 달콤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 어미 앞에서 그년의 딸을 언니라고 부르는 버릇은 이제 슬슬 고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어머니…….”
“그래, 괜찮아, 내 딸. 괜찮단다. 너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레티샤는 마음 약한 딸을 다시 품 안에 끌어안느라 차마 보지 못했다.
“…….”
품에 안은 딸아이의 입가에 가느다랗게 번지는 미소를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말똥하니 깔끔하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간밤에 푹 잤더니.’
눈을 뜨는 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았다.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날아다니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쭈욱 기지개를 시원하게 켜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공녀님, 어쩌죠?”
세숫물을 준비하던 시녀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밖에 응접실에…… 칼릭스 공자님이 오셨어요.”
“응? 칼릭스가?”
걔가 왜 이 아침부터 나를 만나러 왔지?
‘캐붕 아냐?’
……라고 생각은 했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준비하실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괜찮아. 그럴 거 없어. 하던 대로 하자.”
일찍부터 말도 없이 찾아온 사람은 자기니까, 기다릴 건 기다려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