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82)

4. 로잔헤이어의 보주

시간이 흘렀다.

다음 이벤트가 벌어지려면 시간이 좀 남아서, 나는 한동안 로제타 의상실의 일에만 몰두했다.

의뢰를 맡긴 이시스 상단과의 치열했던 견적 내기와 의견 조율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그 결과 얼마 전 막 공사에 착공했다는 보고도 들었다.

그사이에 카민스키가 거품을 물고 쓰러져 밀려 있는 드레스 제작에 차질을 빚었다나 뭐라나, 그런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다.

듣자 하니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 몇몇이 그에 실망하여 돌아섰다는 풍문도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한동안 이래저래 말 상대가 되어 주던 로제타 부인도 의상실에 들일 가구를 둘러본다며 나갔고, 나는 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맞이했다.

‘이토록 한가한 시간이라니…….’

그동안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던 탓일까,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만 봐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한가하면…….’

……왠지 조금 불안해지는데.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 난 김에 마나 회로 탐색 연습이나 해 볼까?’

지난번 수업 결과가 워낙 형편없어 손을 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한가한 날에는 다시 한번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혼자서 연습하지 말라는 경고도 없었고.’

별로 위험할 건 없을 것 같았다.

‘좋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잡았다.

‘분명히 처음엔 마류를 느끼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지.’

나는 다시 한번 엘리야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주변을 감도는 마류로부터 마나를 받아들여, 심장까지 이어진 회로에 쌓는 게 마법사로서의 첫걸음이다.’

때마침 날이 고요하고 화창했다. 나는 눈을 감고 내 감각을 다른 데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마류, 마류…….’

그때 엘리야가 일으켰던 작은 돌풍을 생각하며 산들바람 정도라도 느껴 보려고 애를 쓰는데.

‘엇.’

무언가 팔을 슥, 간질이며 지나가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아주 한순간의 느낌일 뿐이었다.

‘……착각인가?’

아님 문을 열어 놔서 진짜 바람이 불었나?

긴가민가했지만 나는 일단 그게 마류라고 믿어 보기로 하고, 그 흐름을 내 안으로 끌어당기는 상상을 했다.

‘음…….’

그리고 잠시 후.

마나 회로 탐색에 실패했습니다.

“어휴.”

마류는 무슨.

그저 너무나 익숙해진 시스템 메시지가 나를 반길 뿐이었다.

‘하긴, 엘리야가 수련에 도움이 될 곳이라고 데려갔던 마탑에서도 불가능했던 게, 갑자기 여기서 가능해질 리가 없지.’

후우.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털썩.

‘그나저나…… 진짜 조용하네.’

비단 지금 내 주변 환경만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분명 내가 살롱에서 돌아오면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어머니 얘기였다.

‘한동안 의상실 일에 몰두하느라 신경을 못 썼는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출발하기 전에 엘레니에게 한 소리 해 둔 것도 있어서, 돌아오면 분명 뭐가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동안 만만하게만 생각해 왔을 내게 몇 번 뒤통수를 맞아서 몸을 사리는 걸까?

내가 막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공녀님.”

“응?”

“오늘 공작님께서 남동부 시찰에서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네. 그래서 마님께서 오랜만에 다 같이 정찬을 들자고 전갈을 보내셨어요.”

아.

‘드디어.’

올 게 왔구나.

* * *

새어머니와 엘레니, 그리고 칼릭스, 공작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

썩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새어머니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보다 이렇게 움직이시는 게 외려 더 안심이 된달까.’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계속 찜찜한 것보다는 낫다는 소리다.

나는 아버지께서 돌아오신다는 시간에 맞춰 몸단장을 했다.

그리고 때맞춰 만찬장에 가기 위해 나가 보니…….

“어머, 유리야. 너도 나왔구나.”

새어머니가 널따란 계단 아래에서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

엘레니도 환히 웃는 얼굴로 나를 따스하게 반겼다. 그 옆에는 미간을 좁힌 칼릭스가 제 여동생에게 팔을 내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가족이 다 같이 모이니 정말 좋아요, 여보.”

“음.”

“그럼, 우리 다 같이 만찬장에 들어갈까?”

그렇게 말하며 새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앞서자, 칼릭스와 엘레니도 그 뒤를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나는 가장 늦게, 그것도 혼자서 가족들을 뒤따라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휴.’

예전 유리라면 혼자서 소외감을 삼키며 자기 자신을 달랬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이런 공격이 아프지도 않았다.

‘어디 한번 많이 해 봐라, 이런 느낌?’

아무튼 잠시 후, 우리는 만찬장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는 예전 오찬에서처럼 아버지가 제일 상석에 앉고, 새어머니와 칼릭스가 아버지의 오른편에, 나와 엘레니가 왼편에 앉는 배치 그대로였다.

“…….”

엘레니를 자리에 에스코트해 준 칼릭스가 제 자리에 앉기 전에 불편한 기색으로 이쪽을 한 번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나만 식구 중 유일하게 에스코트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아무렇지 않게 시종이 의자를 빼 준 내 자리에 앉으며, 냅킨을 폈다.

“…….”

그제야 칼릭스도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자,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만찬장의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애피타이저를 서빙하기 시작했다.

“고마워.”

나는 시종이 덜어 준 새우 살에 복숭아즙 소스를 곁들인 냉채 샐러드를 조금씩 맛보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식사를 진행했을 무렵.

“있잖아요, 여보. 좋은 소식이 있답니다.”

새어머니가 와인을 한 모금 맛보며,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

“네에.”

잔을 내려놓으며, 새어머니가 애교 있게 대답했다.

‘무슨 소식이길래 이렇게까지?’

나는 코스로 나온 밤 수프를 한 입 떠먹으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 엘레니가 이번에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받았지 뭐예요?”

“……흠.”

공작이 짧게 알아들었단 소리를 내며 다시 음식을 썰기 시작했다.

새어머니는 밝은 목소리로 자랑을 이어 갔다.

“그것도 봄의 투와르 축제를 기념하여 황제 폐하께서 친애하는 이들만 부르시는 사적인 무도회에요. 우리 엘레니는 갓 데뷔한 어린아이인데도 폐하께서 직접 초청을 해 주셨답니다.”

황실 무도회라…….

‘확실히 갓 데뷔한 아가씨가 황실 무도회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자랑을 해도 된다기엔, 무도회는 살롱과는 성격이 좀 달랐다.

살롱은 주인에게 교양이든 학식이든, 무엇인가를 인정받아야 참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무도회는 개개인이 어떤 능력을 지녔는가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는 가문의 이름값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행사였다.

‘게다가 엘레니는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공녀일 뿐 아니라, 황제의 육촌 누이인 새어머니의 딸이기도 하지.’

미미하기는 하지만 황가의 피가 흐르는 아이다. 황실 무도회에 초대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혈통과 이름값을 태어날 때부터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수저 잘 물고 태어난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유리, 어떻게 생각하니?”

아, 이런 타이밍에 날 지명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다니까.’

나는 심드렁하게, 하지만 태도는 상냥하게 가장해서 새어머니가 원하는 대답을 읊어 주었다.

“금번 황실 무도회라면 저도 초대장을 받지 못했어요. 엘레니가 눈에 잘 띈 모양이네요.”

단순히 눈에 잘 띈 거 아냐? 라는 작은 가시를 숨긴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 새어머니도 만만치 않았다. 그 정도로는 얼굴에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라고 뻔뻔하게 대답할 뿐.

“여보, 엘레니가 황실 무도회에 참여하려면 준비가 필요할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는 당신이 알아서 잘하리라 믿소.”

“고마워요, 여보. 최선을 다해 준비할게요. 엘레니?”

새어머니가 딸을 재촉했다.

“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해야지.”

“고맙습니다, 아버지.”

엘레니가 사랑스러운 홍조를 띠며 보송보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때만 해도 난 오늘 정찬의 본 목적이 여기까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보, 그런데 좋은 소식이 그것뿐만이 아니네요.”

“무슨 말이오?”

“우리 유리 말이에요.”

새어머니가 활짝 핀 장미처럼 웃으며,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장미처럼 가시를 숨긴 아름다운 미소였다.

“이렇게 늦은 나이인데도 마법사로 개화(開花)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음.”

아버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

“그래서 말이에요, 여보.”

“…….”

나는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라고 직감했다.

“무엇이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 내가 섣불리 끼어들 틈은 없었다.

“우리 유리에게 보주(寶珠)를 선물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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