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82)

14화

……찾았다!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죄, 죄송합니다.”

나는 일단 이 민망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잽싸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앗.”

“이런.”

다급한 마음을 몸이 따라와 주질 못했다. 남자가 휘청이는 내 손을 잡아 주어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을.”

그렇게 대답하며 남자도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나처럼 입구에서 나눠 준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저 금발.’

‘공위소’에서 황족만이 가질 수 있는 머리카락 색으로 묘사했던 짙은 금발이었다.

‘그런데 왜 계속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거지?’

시야 한구석에 나타난 제한 시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건 자신을 알아보지 말아 달라는 신호였으므로, 나는 모른 척하고 이렇게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남자의 눈이 가면 안에서 쓱 휘어졌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믿을 수 없었다. 원래 차 사고가 났을 때도 ‘괜찮으니 그냥 가시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혹시나 다리에 뭔가 이상이 생기셨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로잔헤이어 공작가로 연락을 주세요. 최선을 다해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라고 황태자가 말을 맺으려던 순간.

우당탕, 쿵!

무언가가 도서관 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뭐지?’

우리가 본능적으로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은 찰나.

“아아아, 자기…….”

문틈 사이로 교태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런.”

그와 동시에, 판단이 재빠른 황태자가 나를 끌고 황급히 서가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와 동시에 쾅!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아이, 참, 자기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괜찮아, 괜찮아. 설마 여기까지 사람이 있으려고.”

있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나는 황태자를 향해 ‘어쩌죠?’ 하는 눈빛을 보냈다. 황태자가 자기도 난감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서가 책들 사이로 빼꼼 눈을 내밀었다.

‘앗, 저 사람들은…….’

조금 전 여기 오는 길에 회랑에서 보았던 커플이었다.

‘본래 이벤트엔 없었던 인물들이 왜 등장했나 했더니, 나 때문이었구나…….’

아무래도 나한테 발견당한 후 사람 없는 곳을 찾다가 여기까지 들어오게 된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

깜짝이야.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려서 놀랐다.

흠칫 옆을 돌아보니 황태자가 고개를 숙여 나와 같은 높이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황태자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공, 범.’

그러면서 나와 자기를 손가락으로 한 번씩 가리켰다.

“큽.”

덕분에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황급히 틀어막아야 했다.

“!”

하지만 고요한 곳에서 새어 나온 웃음소리는 커플 중 한 사람의 귀에 닿고 말았다.

여자가 황급히 달려들려는 남자를 밀어내며 말했다.

“자기, 자기. 잠깐. 여기 누가 있는 것 같아.”

“뭐?”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로 황태자를 향해 눈을 굴렸다.

‘어떡해요?’

그렇게 묻는 내 눈빛에 황태자가 안심하라는 듯 토닥거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입술 앞에서 주먹을 쥐더니.

“큼, 크흠.”

헛기침 소리를 내며 서가를 똑똑, 두드렸다.

당연히 커플은 깜짝 놀라며 몸을 퍼드득 떨었다.

“어머, 어머. 난 몰라. 진짜 있었나 봐!”

“자, 잠깐, 나도 같이 가!”

왔던 때와 비슷하게 우당탕거리며, 순식간에 커플은 밖으로 도망쳤다.

“푸하.”

난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서가에 몸을 기댔다.

그러다가 문득, 황태자의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풋.”

“큼.”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아하하, 하하!”

우리는 와락 터져 나온 웃음을 막지 않고, 한참 배를 잡고 웃었다.

“……진짜, 세상에 별일도 다 있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한바탕 웃음 끝에 나른해진 시선이 오갔다.

나는 척, 하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시겠지만, 전 유리 엘로즈라고 해요.”

그러자 황태자가 씩 웃으며 내 손을 잡더니,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악수하자고 한 거였는데.’

“에이드리언 카시스라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그와 동시에, 맑고 고운 삐로롱 소리와 딩동 소리가 함께 울렸다.

‘그 손님’을 발견했습니다!

황태자, ‘에이드리언 카시스’와 조우합니다!

에이드리언의 영향으로 숨겨진 재능, ‘화술’과 ‘매력’이 발현합니다!

그 손님을 발견한 보상으로 화술이 10, 매력이 10 오릅니다.

시야 한구석의 제한 시간이 그제야 사라졌다.

‘아, 맞다!’

나는 그제야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 이 이벤트가 마무리되고 재능이 발현하는 순간이 ‘에이드리언으로부터 손등에 입맞춤을 받을 때’라는 걸 떠올렸다.

‘모로 가긴 했지만 어쨌든 서울로 왔군.’

“태자 전하께서 여기 계실 줄은 몰랐어요.”

“저도 공녀가 이곳에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 전 심부름을 하고 있었거든요.”

“심부름?”

“네. 시안티크 후작 부인이 말씀하시길,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손님을 찾거든 이렇게 말씀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부인이……?”

“네, 전하.”

나는 씩 웃으며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친구가 되는 첫걸음에 알맞은, 짓궂고도 친근한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대부인께서 이렇게 농땡이를 치면 안 된다고, 분명 말씀하셨을 텐데요?”

“…….”

황태자는 잠깐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하, 하하, 하하하하!”

……삐로롱, 소리와 함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니,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숨바꼭질 게임에 참여한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괜찮아요. 전하와 제 게임이 아니라 후작 부인과 제 게임이었거든요.”

“아, 저는 그럼 게임의 말이었던 거로군요.”

“죄송합니다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

그렇게 대답하자 황태자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말씀을 너무 재치 있게 하시는 바람에 자꾸 웃음이 나오는군요.”

“괜찮아요. 나오는 웃음을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남 웃기는 걸 좋아하기도 해서, 나는 불쾌감 없이 방긋 웃었다.

“…….”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어느새 조금쯤 다정해져 있었다.

‘엇.’

저 시선은 조금 위험한가? 싶은 찰나에.

“아, 이런.”

갑자기 황태자의 미소가 약간 흐려졌다. 그러더니 그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이만 가 보실 시간인가요?”

“말씀하신 대부인께서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걸 가장 싫어하시는지라…….”

황태자가 익살스럽게 끄응 소리를 냈다. 나도 푸 하고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럼 이만 가 보셔야죠.”

“……예, 그렇군요.”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 하고 물었다.

“가는 길에 모셔다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전 이제부터 농땡이를 피울 생각이거든요.”

“푸흐, 알겠습니다.”

마지막까지 황태자를 웃기는 데 성공한 나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마자…….

‘상태창!’

오랜만에 보는 상태창은 이렇게 변화해 있었다.

<성명: 유리 엘로즈>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마탑주의 임시 제자, 초보 협상가>

명성: 50

마나: 85/1000

지력: 73/1000

화술: 30/1000

매력: 20/1000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재능 발현도 둘이나 해치웠고.’

나쁘지는 않았다, 나쁘지는.

‘그럼, 이번엔 관계창.’

팔랑, 하고 반투명한 창의 페이지가 넘어가며 관계창이 나타났다.

나는 익숙한 메시지들 제일 밑에 있는 황태자의 이름을 찾아냈다.

에이드리언: “재미있는 아가씨네.”

빈번하게 그를 웃겼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해지는 한 줄 평이었다.

‘워낙 근본이 다정한 성격이라 그런지, 처음부터 그리 나쁘지 않네.’

처음부터 귀찮다느니 얘기하기 싫은 사람이라느니 했던 애들에 비하자면 말이다.

* * *

나는 적당히 시간을 보낸 다음, 다시 살롱이 열리고 있는 홀로 향했다.

“무와탄 대제 시절의 대문호였던 벨롭 선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은 언어라는 예술로 표현할 수 있는 지고의…….”

하지만 일부러 시간을 죽이고 돌아온 보람도 없게, 거기서는 여전히 대문호께서 열변을 토하고 계신 중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뭔가 교양 있는 척 “으음.”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나는 존재감을 죽이고 뒤편으로 걸어 들어가, 테이블에서 레모네이드 한 잔을 쏙 집어냈다.

그대로 벽에 기대어 레모네이드나 마시며 시간을 죽일 생각이었지만…….

“어머나, 아가씨. 거기 있었군요!”

시안티크 후작 부인의 밝은 목소리가 레모네이드를 들고 벽으로 가려던 내 발걸음을 잡아챘다.

“자, 자. 어서 이리로 와요.”

‘이런…….’

후방으로 빠지려던 난 다시 시안티크 후작 부인의 손에 이끌려 맨 앞줄에 놓인 좌석에 앉게 되었다.

“저와의 내기에 완벽히 성공하셨더군요. 비결을 묻고 싶을 정도로요.”

“어떻게……?”

내가 황태자를 찾아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의아해하는 내게, 시안티크 후작 부인이 반대편 앞줄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웬 고상해 보이는 노부인이 꼿꼿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어?’

약간 난처한 미소를 머금은 황태자가 이쪽을 향해 보이지 않게 손을 살짝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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