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카민스키 경은 이 가게를 왜 사려고 하는 거죠?”
“저희 가게의 대지를 사서 새로 건물을 단장하고 모자 가게를 만든다고…….”
아하. 낯설지 않은 이야기로군.
떠듬떠듬 대답하던 로제타 부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공녀님, 왜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도와주시려는 건가요?”
“말했잖아요, 당신의 드레스가 마음에 든다고.”
“…….”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그럼……?”
“내가 카민스키 경한테 갚아 줘야 할 조그만 빚이 하나 있거든요.”
“빚……이요?”
“그게 카민스키 모자 가게가 생기는 걸 방해할 만큼은 돼요.”
나는 자, 하고 가볍게 손뼉을 쳤다.
“어떻게 할래요?”
로제타 부인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곧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공녀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의상실의 절반을 소유하시겠다는 말씀도 제게는 생소하기도 하고요…….”
‘끙.’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사실 이 반응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화술이나 매력 같은 설득에 도움이 되는 능력치들이 아직 개방이 안 됐거든.’
다행히 로제타 부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녀님께서 내밀어 주신 손을 붙잡지 않기엔 제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군요.”
“그렇다는 건……?”
“네. 공녀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로제타 부인이 당신의 전속 재단사가 됩니다!
명성이 10 오릅니다.
훌륭한 설득의 대가로 ‘초보 협상가’ 칭호를 얻습니다. 칭호의 효과: 지력 +20, 화술 +20, 매력 +10.
됐다! 성공했어!
‘칭호까지 얻다니.’
지력, 화술, 매력을 동시에 올려 주는 꽤 좋은 칭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처음으로 명성 수치가 올랐다는 점이었다.
명성 수치는 내 평판을 종합해 사교계와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을 숫자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 명성이 높지 않으면 아예 이벤트 진입이 불가능할 때도 있었다.
당연히, 명성도 배드 엔딩의 달성을 위해 골고루 높여야 하는 수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명성 수치와 칭호보다도 더 반가운 건, 로제타 부인을 내 전속 재단사로 맞이하게 됐다는 거였다.
“훌륭한 선택이에요.”
내가 손을 내밀자, 로제타 부인이 얼떨결에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럼, 이 가게를 개축하는 건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네? 개축이요?”
“이제까지 당신의 훌륭한 디자인 실력이 빛을 보지 못한 건 솔직히 말해 가게의 외관 문제도 커요.”
“그, 그건…….”
로제타 부인은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으리라. 화려한 황금빛 외관을 갖춘 카민스키의 의상실 앞에서 제 의상실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는 걸.
“앞으로 몰려들 손님을 소화하려면 건물을 더 쓰기 좋게 구조를 변경할 필요가 있어요.”
“손님이 몰려들까요……?”
“날 믿어요, 로제타. 당신의 디자인 실력은 진심으로 훌륭해요.”
“공녀님…….”
그리고 나, 유리 엘로즈가 투자자 겸 모델이 될 예정이기도 하지.
‘이제 보면 황태자의 수완이 정말 대단해.’
이런 뛰어난 재단사를 발굴한 걸로도 모자라, 나를 모델로 내세워 홍보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알고 있었지만…….
‘상업적 감각이 정말 뛰어난 사람이야.’
“저, 하지만 공사를 시작하려면 돈이 많이 들 거예요.”
“아, 그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팔랑거리며 꺼내 로제타에게 보여 주었다.
“어…… 음?”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어음을 보유한 이에게 위의 금액을 어음과 상환하여 지급하도록 한다.
로잔헤이어 공작,
프레데릭 리노마드 로잔헤이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위의 금액란’은 비어 있었다.
백지 수표나 다름없는 어음을 확인한 로제타 부인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손에서 다시 어음을 넘겨받으며 웃어 보였다.
“이 정도면 공사 대금은 걱정할 필요 없겠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로제타 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곧이어, 그녀의 눈빛에 결연한 빛이 서렸다.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앞으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별말씀을. 자,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계약서부터 작성할까요?”
로제타 부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계약서에 도장까지 용의주도하게 받아 낸 나는 뿌듯한 미소를 참지 못했다.
‘새 옷이 아니라 아예 의상실을 장만해 버리는 데 성공했다.’
아버지 찬스란 이렇게 쓰는 것이다.
* * *
새 의상실이 완성되기까지, 로제타 부인은 당분간 내 옆에서 기거하며 내 옷을 만들기로 했다.
“아 참, 그리고 개축 공사는 ‘이시스 상단’에 의뢰하도록 해요.”
나는 로제타 부인을 앞세워 내가 로제타 의상실 절반의 주인이 된 사실을 당분간 비밀에 부칠 작정이었다.
“이시스 상단이요?”
잘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인지 로제타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렇게 해 달라고 할 뿐이었다.
왜냐면…….
‘거기가 바로 황태자 전하께서 비밀리에 설립한 상단이거든.’
이대로 공사를 시작하면 카민스키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 방해를 시작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의 상단에서 공사를 진행한다면?’
카민스키 경 따위가 방해를 할 여지는 아예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되는 거고.
만족스럽게 일을 마친 나는 마차를 타고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로제타 부인은 짐을 싸고 개축 공사를 의뢰하는 일을 마치면 내가 따로 마차를 보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마침 집사가 로비에서 은쟁반을 받쳐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돌아오셨군요, 공녀님.”
“응, 집사.”
은쟁반 위를 스치던 내 시선을 빨간 봉투 하나가 사로잡았다.
‘붉은 봉투…… 뭐였더라……?’
아!
벼락같은 깨달음이 일순 뇌리를 덮쳤다.
‘시안티크 살롱 초대장이잖아!’
“집사.”
“예, 공녀님.”
“혹시 그것들, 초대장인가?”
집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그렇습니다, 공녀님.”
“그중에 저 붉은색 초대장은 나한테 온 거고?”
“…….”
집사가 대답 대신 주름진 얼굴로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온 초대장이라면, 내가 먼저 가져가도 별일 없겠지?”
“노구의 소견을 말씀드려야 할까요?”
“……아니.”
나는 씩 웃으면서 은쟁반에서 붉은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나도 한참 전에 성인이 되었으니까, 내 초대장 정도는 내가 관리해야지. 어머니께만 맡겨 두면 면목이 없으니까.”
집사가 허리를 숙여 보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공녀님.”
* * *
시안티크 후작 부인의 살롱.
마탑주 에피소드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였다.
‘무엇보다 이 에피소드가 중요한 건…….’
이 에피소드가 바로 두 번째 재능 발현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이 에피소드를 놓치면 진행이 어마어마하게 뒤틀릴 수 있어.’
물론, 새어머니가 아무리 심사가 꼬인 인물이라 해도 내게 온 초대장을 끝까지 넘겨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 집안에서 최선을 다해 자애로운 공작 부인을 연기하는 중이지 않은가?
‘초대장 따위로 큰소리가 나서는 연극에 도움이 안 되지.’
하지만 저번처럼 귀찮게 설전을 벌이기 전에 초대장을 구출해 왔다는 사실이 뿌듯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얼른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적어, 신뢰할 수 있는 인편 — 집사 — 의 손에 넘겨주었다.
‘됐어.’
이걸로 새어머니가 내게 시안티크 후작가에서 온 초대장에 대해 알게 되어도 날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뭐 원래도 없지만, 아예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뒤.
“오늘 시안티크 후작 부인의 살롱에 참석할 거야.”
나는 당일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시녀들에게 알렸다.
혹시나 새어머니에게 그 전에 말이 새어 나가 귀찮아질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네? 시안티크 후작가의 살롱이라고요?”
“살롱 중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곳인데!”
시녀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니, 시안티크 후작가의 살롱이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곳인 모양이었다.
“문인들과 배우들도 많이 초청하고, 자선 연주회나 연극을 준비하기도 한대요.”
“그뿐인가요? 황가의 시녀장이셨던 시안티크 대부인께서도 자주 얼굴을 비치신다잖아요.”
“시안티크 대부인은 황태자 전하의 대모이기도 하시잖아요?”
“세상에, 공녀님. 정말 축하드려요.”
하지만 다들 칭찬도 잠시.
“이걸 지금에서야 말씀하시다니! 사흘 전에 알았더라면 좀 더 철저히 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어휴, 공녀님!”
영혼 없는 사과에 시녀들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네들은 꿀벌처럼 분주히 움직이며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물결치는 머리카락에 윤이 나도록 오일을 발라 빗질을 해서 늘어뜨리고, 오늘을 위해 로제타 부인과 함께 비밀리에 손을 본 드레스를 입었다.
가녀린 몸에 하늘하늘 맞는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렸다.
‘봐도 봐도 적응 안 되는 미모야, 정말…….’
그렇게 완성된 모습을 점검하고, 방 밖으로 나선 그때.
“……언니?”
“아, 엘레니.”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엘레니에게 유쾌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차림은……? 오늘 어디 가시나요?”
“응, 다녀올 곳이 있단다.”
“어머니께 듣기로 언니에게 온 초대장은 없는 걸로 아는데…….”
당황한 엘레니가 중얼거리다가 흠칫 입을 가렸다. 말실수를 해서 자기도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인배처럼 그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럴 거야. 오늘 초대장은 내가 직접 받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