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유리가 엘레니의 옷을 따라 입는다는 소문이 퍼져 한차례 망신을 당한 후, 황태자는 유리에게 자신이 발굴한 신예 재단사 한 명을 소개해 준다.
그렇게 유리가 자신만을 위해 새로 디자인한 옷을 입고,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은 뒤로 그 신예 재단사는 단숨에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나는 이참에 그 신예 재단사를 직접 발굴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외출이다!
행선지를 숨기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내게는 카민스키 경을 대신할 새 재단사를 찾아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공녀님, 외출을 하시게요?”
“응. 새 재단사가 필요하잖니.”
“아, 새 재단사요…….”
시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들은 내가 카민스키 경의 옷을 입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꼭 재단사를 구하러 외출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이 필요하시면 저희가 대신 나가서 살펴보고, 저택으로 부르시는 게…….”
“오랜만에 기분 전환 삼아 외출이 하고 싶어서 그래.”
시녀들에게는 대충 그렇게 둘러대고, 단장을 마쳤다.
유리 엘로즈가 된 뒤 첫 외출이었기 때문에, 나는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마차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외출을 하십니까?”
“아 깜짝이야!”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파드득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칼릭스…… 너였구나.”
“흠.”
칼릭스가 여전히 편치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과도하게 놀라시는 것 같습니다만.”
“응? 그야 진짜 놀랐으니까.”
“…….”
“그나저나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니?”
“……네, 뭐. 약간.”
평소와 달리 간편한 훈련복에 허리에는 검을 찬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훈련장이 이 근처에 있나?’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나는 다녀올게. 올 때 뭐 필요한 거라도 있다면……”
“없습니다.”
응 그래. 없겠지.
여전히 태도 정말 끝내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발판을 밟았다.
‘읏차.’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문 옆 손잡이를 잡고 한 번에 마차에 올라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에구구.’
푹신한 자리에 앉자마자 살짝 걷어 올렸던 드레스 자락을 사샥사샥 정리하는데…….
“……칼릭스?”
마차 밖에서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순수하게 궁금한 마음에 나는 물었다.
“거기서 뭘 하고……”
“실례하겠습니다.”
하지만 칼릭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손을 거두며 냉정하게 돌아설 뿐이었다.
‘왜 저래?’
그 뒷모습에 잠깐 눈길을 주다, 나는 호위에게 눈짓을 했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했다.
* * *
몬테나 지구는 제국 수도 최대의 상업 지구였다.
그중에서도 칼라일 1가부터 3가까지는 귀족들을 위한 상점들이 모여 있었는데, 1가는 유독 의상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나중에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둘러 봐야지.’
나는 눈을 빛내며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의상실인 것 같은데.’
멀지 않은 곳에 원단 상가도 있겠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이 골목에서 제일 화려한 것 같은 건물이 하나 눈에 띄었다.
‘음. 보아하니 바로 저 건물이 카민스키의 의상실이겠군.’
금빛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건물 앞에 마찬가지로 호화로운 마차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척 봐도 돈을 쓸어 담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흐음…….’
카민스키의 의상실이 저기라면, 내가 찾는 곳도 이 근방에 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내가 찾는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카민스키의 의상실 앞에 주차되어 있던 호화로운 마차들의 행렬이 살짝 앞으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마차들의 존재감에 묻혀 보이지 않던 조그만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기 있다!’
“저 건물 앞에 내려 줘.”
“알겠습니다, 공녀님.”
“그리고 한 시간 정도 마차를 몰고 다니다가 다시 날 찾으러 오면 돼.”
“예, 공녀님.”
마차가 멈춘 곳은 5층짜리 소박한 붉은 벽돌 건물 앞이었다.
조그만 간판에 적혀 있는 ‘로제타 의상실’이라는 상호를 보고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됐다!’
호위가 가게 문 앞의 종을 울렸다.
“…….”
“…….”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무, 문을 닫았나?’
살짝 당황하려는 순간, 안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만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벌컥, 문이 열렸다.
“소, 소, 손님, 손님이셨군요.”
턱 끝까지 숨을 몰아쉬며 등장한 여자는, 다행히 내가 아는 그 로제타 부인이 맞았다.
나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나가다가 이 의상실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서요.”
“네, 네?”
“들어가 봐도 될까요?”
“아, 그, 그럼요, 물론이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무래도 이 의상실에 손님이 찾아오는 건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인지, 로제타 부인은 몹시 허둥지둥하며 나를 맞이했다.
“저, 저희 드레스 중에 어떤 드레스가 손님의 마음에 드셨을까요……?”
로제타 부인이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일단 자리에 좀 앉고 싶은데요.”
“아, 어머! 네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는 양산을 접으며 의상실 안을 쓱 둘러보았다.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모든 집기가 깨끗이 닦여 있고, 가구들도 아주 센스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값비싸고 화려해 보이진 않았지만, 주인이 신경 써서 가꾸는 공간이라는 태가 대번 났다.
“쇼, 쇼윈도에 걸린 드레스를 보여 드릴까요?”
“그래 줄래요?”
일단 그 로제타 부인이 맞긴 맞는 것 같지만, 실력 확인차.
“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로제타 부인이 쇼윈도로 향하던 그 순간.
쾅쾅쾅! 쾅쾅!
누군가 의상실 문을 주먹으로 힘차게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로제타 부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소, 손님, 잠시만……”
“거참! 이 의상실은 사람이 왔는데!”
그와 동시에, 아주 무례한 방식으로 문이 벌컥 열렸다.
“…….”
나는 거의 저도 모르게 검을 뽑으려는 호위들을 조용히 눈짓으로 말렸다.
“커험, 컴! 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구먼!”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가 목에 힘을 주며 등장했다.
로제타 부인이 잔뜩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찾아오지 마시라고 했을 텐데요!”
“나도 이렇게 찾아오는 게 지겹소. 하지만 부인이 제안을 수용하지 않으니 별수 있나?”
쾅! 하고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 의상실은 칼라일 1가의 흉물이오, 흉물! 그것도 카민스키 경의 의상실 옆에서 이렇게…… 부끄럽지도 않소?”
“제가 제 건물을 소유하고 영업을 하는 게 왜 부끄러울 일이죠?”
“누가 장사를 하지 말라고 했소?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하면 될 것 아니오, 다른 데! 카민스키 경께서 값을 잘 쳐주신다고 할 때 생각을 고쳐먹는 게 좋을 거라고 내 말하지 않소?”
“제발, 로버트!”
“경고하는데 카민스키 경은 아주 인맥이 많소. 이 의상실 같은 건 내일이라도 당장 없어지게 할 수도 있단 말이야.”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오늘은 손님이 계시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손님? 하, 이 초라한 의상실에도 손님이라는 게 있나?”
“응, 있는데.”
나는 그쯤에서 여유롭게 손을 반짝 들어 주었다.
“뭐……?”
“참고로 내 이름이 궁금할 것 같아서 말해 주는데, 나는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유리 엘로즈란다.”
“……로, 로잔헤이어 공작가!”
화들짝 놀라는 남자를 향해 호위들이 위협적으로 검집을 달칵거렸다. 그들이 입은 기사복의 장미 문장을 확인한 남자가 “흐업!”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저, 저, 정말로, 로, 로잔헤이어 공작가…….”
로잔헤이어 공작가는 개국 공신이자, 초대 가주가 시황제를 도와 용을 봉인한 공로로 ‘용봉공(龍封公)’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은 가문이었다.
또한 현 가주인 공작 역시 그 핏줄을 짙게 이어받아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기사 중의 기사였다.
길게 말하자면 그렇고, 짧게 말하자면 우리 가문이 황가 빼고 제일 세다는 뜻이다.
사색이 된 남자를 앞에 두고, 나는 “흐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모처럼 옷을 사러 왔는데 기분을 망쳤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그, 저, 정말 죄송합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사색이 된 남자는 내가 흥미를 잃었다는 듯 “나가 봐.”라고 손짓하자, 연신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구르듯이 우당탕탕 의상실을 뛰쳐나갔다.
“로, 로잔헤이어 공녀님이셨군요…….”
로제타 부인이 혼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만했다. 보통 고위 귀족들은 자존심이 세서 카민스키의 의상실 정도가 아니면 직접 발걸음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겁먹지 마세요. 난 정말 이 가게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서 온 사람이니까.”
“정말……이신가요?”
“하지만 드레스만 사러 온 건 아니에요.”
“……그럼 무엇을……?”
“아까 그 무례한 남자의 말을 듣다 보니 좋은 생각이 났거든요.”
“?”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 의상실, 절반만 나한테 팔면 어때요?”
* * *
한차례 설명이 이어진 후.
“그러니까 공녀님 말씀은…… 제가 공녀님의 전속 재단사가 되고, 향후 의상실 수입의 절반을 나눠 드리는 대가로 저를 곤경에서 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로군요?”
“곤경에서 구해 주는 게 아니라, 투자를 하겠다는 거죠.”
내가 찾아왔을 때 타이밍 좋게 카민스키의 심부름꾼이 찾아와서 여러 말을 하는 수고를 덜었다.
“…….”
로제타 부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쇼윈도에 걸린 드레스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확실해.’
이 옷이 바로 유리가 황태자와 함께한 무도회에서 입고 나왔던, ‘여름의 정령’이라고 불렸던 그 드레스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드레스의 초기작, 이라고 해야 할까.’
디자인은 아름다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미묘한 부분이 달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단이 저급 원단이라 디자인의 매력이 반도 살지 않는군요.”
아마 로제타 부인의 상황에서는 이런 원단이 최선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