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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182)

10화

“스물다섯에 마탑주를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않겠습니까?”

“하아…….”

“큼, 너무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엘리야 경, 당신은 괜찮아요?”

나는 꼼짝 않던 깃털을 주워 올리며 물었다.

“나하고 꼬인 회로를 빨리 풀어야 이 ‘귀찮은 일’을 면할 텐데 말이에요.”

‘귀찮은 일’이라는 말에 슬쩍 힘을 주며, 나는 말했다.

“내 진도가 빠르지 못하면 당신도 실망스러울 것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엘리야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잠시 말이 없었다.

“?”

왜 그런담?

내가 빤히 눈으로 묻자, 엘리야가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닙니다. 오늘은 일단 이쯤 하고, 집으로 데려다주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세요.”

생각보다 이상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첫 수업이 종료되었습니다!

수업 목표 달성률: 0%

수업에 집중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마나가 5, 지력이 3 오릅니다.

우울하게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는 내게, 엘리야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 참. 돌아가기 전에 당신에게 한 가지 더 경고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진명(眞名)에 관해서입니다.”

“…….”

“마법사에게 진명이라는 건 생애 최초로 부여받은 것으로서 구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게임의 마법사들 — 마법사로서 개화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 은 모두 진짜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진짜 이름 대신 유리 엘로즈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신 같은 귀족 출신 마법사들은 성이 알려져 있기에 저 같은 평민 출신 마법사들보다 시작이 불리한 편이긴 합니다.”

그렇다. 내가 아무리 진명을 감추려고 해도 나의 성, 로잔헤이어는 너무나 유명했다.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진명만큼은 가르쳐 주어선 안 됩니다.”

“……만약에 진명을 알려 주었다가, 불상사가 생긴다면 어떻게 되나요?”

“…….”

엘리야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진명은 마법사의 근원적 약점입니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 * *

별다른 성과 없이 살벌한 경고만 남기고, 마탑주와의 첫 수업이 끝났다.

다행히 시녀들은 내가 잠시 사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계획대로 오늘 수업이 취소되었다고만 말했다.

그나저나…….

‘관계창!’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관계창을 열어 보았다.

‘엘리야 마라케시, 엘리야 마라케시…….’

엘리야: “골치 아픈 것 같은, 임시 사제 관계.”

……바뀐 건가, 아닌 건가?

하긴, 호감도가 올랐다고 해서 다 관계창 메시지에 반영되는 건 아니긴 했다.

‘폰트 정렬 높이가 좀 다른 것 같긴 한데, 확신할 순 없군.’

관계창에서의 별다른 변화는 없는 것 같고, 실제로도 호감도를 올리는 게 꽤 어려워서 지금 할 걱정은 아니지만…….

이대로 남주인공 한 명과만 계속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는 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일단 단독 엔딩 루트로 빠지는 걸 방지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어.’

첫 번째, 연애 관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거야 내가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되는 문제니 어려울 건 없지만, 문제는 두 번째였다.

두 번째, 남주인공들의 호감도를 비슷한 수준으로 골고루 올리도록 한다.

남주인공들의 호감도를 비슷한 수준으로 올리면 ‘우정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 우정 이벤트를 볼수록 개별 연애 루트로 갈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즉, 그렇다는 건.

‘최대한 빨리, 엘리야랑 칼릭스 말고도 다른 남주인공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 쉽진 않겠지만, 칼릭스를 자주 만나서 어떻게든 친목을 도모해야 했다.

“공녀님.”

“……응?”

그때, 시녀가 내 상념을 일깨웠다.

“공작 각하께서 귀가하셨습니다. 그리고 공녀님을 따로 보자고 부르셨다고 해요.”

……응?

‘이렇게 갑자기?’

* * *

“…….”

“…….”

공작의 집무실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부르니까 오긴 했는데, 영…….’

용건이 있어 사람을 부른 당사자인 공작이 말이 없으니, 나도 무슨 말을 꺼내기가 어색했다.

“……귀족원 회의는 잘 다녀오셨어요?”

시도해 볼 수 있는 거라곤 이런 상투적인 안부 인사 정도가 다였다.

“음, 그래.”

“피곤하실 테니 쉬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일단 집에 돌아온 공작을 먼저 나서서 맞이하지 않은 이유를 슬쩍 가져다 붙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공작은 무뚝뚝하게 답할 따름이었다.

“그리 피곤하지는 않구나.”

“그러셨군요…….”

아, 한계다. 이 이상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감하네.’

내심으로만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바로 그때였다.

“공작 각하, 말씀하신 차를 준비했습니다.”

“들이거라.”

‘차?’

문이 스르륵 열리고, 집사가 직접 왜건을 밀며 등장했다.

‘이 향기는……!’

집사가 차를 따르며 넉살 좋게 말했다.

“공작 각하께서 오늘 돌아오시는 길에 직접 구매하신 캐모마일 차입니다, 공녀님.”

“큼. 필립.”

“어이쿠, 예. 늙은이가 쓸데없이 말이 많았습니다.”

차와 다과를 모두 직접 차린 뒤, 집사가 정중하게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란다”며 사라졌다.

“……향기가 좋네요.”

캐모마일이라면 유리의 어머니가 좋아했던, 그리고 내가 저번에 공작을 만날 때 대접했던 차였다.

하지만 공작은 알은척을 하거나 내색하는 대신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들거라.”

“네.”

나는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공작이 뜬금없이 말했다.

“필립에게 듣자 하니, 네가 새 드레스를 맞춘 지 오래되었다고 하더구나.”

“!”

설마, 어제 카민스키 경을 그렇게 돌려보낸 게 공작의 귀에도 들어갔나?

혹시 새어머니가 또 부정적인 식으로 내 행동을 속살거렸나 싶어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공작은 의중을 읽기 힘든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샅샅이 살펴보는 느낌에 어깨가 움츠러들 것 같았지만, 참았다.

“지금 있는 드레스로 충분한 것 같아서요.”

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는데,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소한 것도 좋지만 넌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공녀다.”

“……크흠, 큼.”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나타난 집사가 공작의 뒤에서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공작이 불편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애써 보탰다.

“네가 정도를 넘어서 검소하게 굴어야 할 정도로 공작가의 살림은 궁벽하지 않다.”

“크흠!”

집사의 헛기침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공작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떼지 못했다.

결국 집사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 공작 각하께서는 ‘지금이라도 필요한 물건을 갖추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아…….”

그런 뜻이었어?

‘자칫 잘못 들었으면 나무라는 말인 줄 알았겠네.’

어쨌든 돈 쓰라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나는 가느다랗게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잘됐어.’

공작의 배려는 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은 계획에 협조를 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말씀해 주신 대로 조속히 새 옷을 마련하도록 할게요.”

“……음. 대금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도록 해라.”

오호라, 정말?

나는 활짝 웃으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흠, 크흠!”

공작이 헛기침을 한 순간.

삐로롱, 하는 반가운 소리가 울리는 게 아닌가.

‘앗, 호감도!’

“그럼, 이만 돌아가 봐도 좋다.”

하지만 공작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나조차도 ‘방금 잘못 들은 건가?’ 하고 헷갈릴 정도였다.

‘나중에 관계창에서 확인해 보지, 뭐.’

“그럼, 이만 물러날게요, 아버지.”

나는 일단 가볍게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어머나, 유리야. 여기서 보는구나.”

방으로 향하는 도중에, 어느새 익숙해진 자애롭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새어머니의 음성이었다.

“듣자 하니 오늘 엘리야 마라케시 경이 저택을 방문한 적이 없다던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니?”

이런. 마주치자마자 아픈 구석을 찌르려 들다니.

나는 일단 너그럽게 새어머니가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오늘 수업은 취소되었어요.”

“어머나, 그래……?”

새어머니가 부채를 살랑이며 입술을 가렸다. 그 안에 숨어 있을 미소가 예상되는 동작이었다.

“마탑주께서 바쁘신 분이라 너와의 약속에 차마 신경을 쓸 여유가 없으셨던 모양이구나.”

“네, 개인적으로 신경을 쓸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에요.”

“저런. 많이 상심한 건 아니지?”

“전혀요.”

나는 방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다음 약속이 있는걸요. 그냥 수업이 기대될 뿐이에요.”

“그래, 다음 약속…… 그게 있겠구나.”

새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차.” 하고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마탑주님께서 오시는데 맞이하지 않는 것도 결례 같구나. 유리, 네 수업이 끝나고 다 같이 티타임을 가질까? 엘레니도 함께 말이야.”

속이 빤히 보이는 말이었다.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지금 여기서 거절하는 것보다는…….

“그럼요. 시간이 되면 칼릭스도 함께하도록 해요.”

……수업 당일이 되어, 엘리야가 저택이 아니라 나를 마탑으로 직접 데리고 가서 가르칠 거라는 걸 알려 주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어머, 그래. 내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당연히 칼릭스도 함께해야지.”

내 그런 내심을 전혀 모르는 새어머니가 유쾌하게 박수를 짝, 쳤다.

최근 들어 전처럼 양순하지 않았던 내가 자기 말에 동의하자, 안심한 건지 새어머니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럼 그렇지, 하는 듯한 미소였다.

“유리, 네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겠네. 고마워라.”

“천만에요.”

“그나저나 네가 카민스키 경에게 옷을 맞추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구나.”

새어머니의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날카로운 반지의 촉감이 목선을 불편하게 스치는 게 느껴졌다.

“유리, 네가 마음만 고쳐먹는다면 내가 카민스키 경을 다시 주선해 줄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이왕 분위기가 좋아진 김에, 새어머니는 내게 옷으로 망신을 주는 일을 다시 한번 시도해 보려는 눈치였다.

나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어머니. 제 생각에는 카민스키 경이 엘레니의 옷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카민스키 경이 네 옷만 만들어 주지 않겠다고 한 말이 사교계에 퍼지면, 사람들이 널 가엾게 여길지도 모르는데?”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괜찮아요.”

“유리…….”

새어머니가 안타까운 듯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끝까지 괜찮다는 말로 일관했다.

새어머니는 결국 “네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고 물러섰다. 나는 그녀가 끝까지 날 밀어붙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엘레니만 카민스키 경의 옷을 입고 주목을 받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이쯤에서 물러난 거겠지.’

나는 뒤돌아서서 가는 새어머니를 배웅하며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도 대책 없이 일만 벌인 게 아니거든.’

카민스키 경과 그의 화려한 스타일의 드레스는 사교계에서 너무 오랫동안 군림했다.

‘즉, 요는.’

물갈이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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