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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182)

8화

“……죄송해요, 언니. 제 시녀의 무례니까 대신 사과드릴게요.”

엘레니의 사과를 받아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패널티 이벤트를 무사히 통과합니다.

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기품 수치가 개방도 전에 마이너스가 될 뻔했어.’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새어머니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나를 조용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나는 여유로운 척 웃으며 말했다.

“엘레니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오늘 일은 내가 잊을게.”

“가, 감사합니다, 유리 공녀님.”

“자, 자.”

새어머니가 박수를 쳤다.

“이제 그만 된 거지? 우리, 카민스키 경을 너무 기다리게 한 것 같구나.”

카민스키 경은 말없이 헛기침만 했다.

‘그럴 수밖에.’

이 세계에서 카민스키 경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재단사였다.

카민스키 경에게 옷을 맞추기 위해 상점으로 직접 찾아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귀부인들이 수두룩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인기와 수요가 있으니, 목이 뻣뻣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저희 의상실의 신작 견본 의상들을 먼저 선보여 드리겠습니다.”

카민스키 경은 ‘특별히 새 옷이 급한 고객들을 위해 제작한 견본 의상’은 가봉 작업 직전의 반쯤 만들어진 옷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디자인은 세상에 딱 하나뿐인 옷입니다.”

카민스키 경의 조수들이 상자와 가방을 열어 꺼낸 드레스들은 태양처럼 밝고 산뜻한 노란색, 혹은 녹색, 아니면 흰색 드레스뿐이었다.

“어떠니, 유리야?”

“글쎄요.”

나는 일단은 새어머니가 원하는 답을 선선히 내주었다.

“노란색과 녹색은 엘레니의 머리카락, 눈 색깔과 비슷하니 엘레니에게 어울릴 것 같고, 흰색 드레스 역시 올해 데뷔하는 엘레니가 입으면 좋을 것 같네요.”

“네가 봐도 그럴 것 같니?”

새어머니가 엘레니 쪽을 향해 손짓했다.

“뭐 하니, 엘레니? 언니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얼른 옷을 입어 봐야지.”

“네에, 어머니.”

나는 엘레니가 일어나서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반쯤 만들어진 옷들을 입어 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엘레니, 너무 예쁘구나!”

예상대로 드레스의 개나리색은 엘레니에게 찰떡처럼 어울렸다.

“음…….”

엘레니가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서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생긋, 엘레니가 웃었다.

“……하지만 이 드레스, 색은 저한테 어울리지만, 제가 보기에 색만 바꾸면 언니에게도 어울릴 것 같아요.”

……응? 나?

“저어, 카민스키 경. 혹시 이 드레스의 디자인을 비슷하게 해서 다른 색으로 옷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가만히 듣고 있던 새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머, 엘레니. 그것 참 멋진 생각이로구나!”

“!”

예상 밖의 말이었다.

“유리야, 네 생각은 어떠니? 내가 볼 땐 그렇게 하면 너희 둘, 정말로 보기 좋은 자매지간으로 보일 것 같구나.”

아하…….

‘일이 이렇게 된 거였군?’

그제야 나는 원작에서 있었던 이벤트를 하나 떠올렸다.

‘초중반부쯤이었나?’

유리가 엘레니의 드레스를 따라 입는다는 소문이 퍼진 에피소드가 있었다.

소문의 근거는 당연히 엘레니와 비슷한 유리의 드레스, 그 자체였다.

‘이후 전개가 망신을 당한 유리에게 황태자가 새로운 재단사를 소개해 주는 거였지.’

망신을 주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비슷한 드레스를 맞추고, 서로 입는 시기를 겹치게 하고, 뒤에서 소문을 흘린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 엘레니와 유리의 드레스가 비슷한 이유는 자세히 나오지 않고 그저 ‘한 재단사의 작품’이라 그렇다고만 설명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엘레니의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일을 적극 추진하려고 하는 새어머니의 의도는 아주 명확해 보였다.

‘흐음.’

어떻게 할까?

“유리? 보렴. 여기 리본 장식을 조금만 고치면 아주 색다르게 보일 것 같구나. 카민스키 경, 어때요?”

“디자인적 관점에서 조언을 구하시는 거라면, 제 생각도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 비슷한 드레스를 맞추고, 원작 전개대로 흘러가게 두면 황태자 호감도 이벤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그런 답답한 전개는 사양이야.’

아무리 황태자의 호감도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망신당하는 건 사양이다.

“어떠니, 유리?”

“글쎄요…….”

여기서 드레스를 맞추고 입지 않으면 왜 입지 않느냐는 압박이 들어올 거다.

최선은 아예 드레스를 안 맞추는 것.

“제가 볼 땐, 이 드레스는 엘레니가 입어서 사랑스럽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어머나…… 유리, 왜 그런 생각을 하니? 이 어미가 볼 땐 네게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언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에는 아니에요. 그리고 카민스키 경의 드레스는 사랑스럽지만, 저한테 어울리는 디자인은 없는 것 같아요.”

“!”

모두가 내 말에 깜짝 놀랐다.

태연한 얼굴로 싱글거리는 내게, 가장 먼저 발끈한 건 당사자인 카민스키 경이었다.

“그 말씀은 즉, 제가 공녀님의 고매하신 안목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카민스키 경, 우리 유리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닙니다, 공작 부인. 유리 공녀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는 공녀님께 제 드레스를 팔지 않겠습니다.”

“!”

카민스키 경의 드레스를 살 수 없다.

사교계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선언이었지만…….

“아쉽네요, 카민스키 경. 제 동생의 드레스는 최선을 다해 만들어 주시리라 믿어요.”

내가 말만 그렇지 전혀 아쉽지 않다는 투로 여유를 드러내자, 카민스키는 상한 자존심을 숨기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새어머니라는 뒷배를 등에 업었다고 해도, 공녀인 내게 이 이상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

“……공녀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수를 다짐하고 물러섰다.

“언니, 저기……”

엘레니가 내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바로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주인공은 바로 집사였다.

“마님, 그리고 공녀님들.”

꾸벅 인사를 하는 그는 편지를 올린 은쟁반을 손에 들고 있었다.

새어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뻗었다.

“초대장이로군요. 이리로……”

“아닙니다, 마님. 이건 초대장이 아닙니다.”

“……초대장이 아니라고?”

“예. 이건 유리 공녀님 앞으로 도착한 편지입니다.”

“편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은쟁반을 공손히 받쳐 올렸다.

“유리 공녀님, 마탑주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

마탑주의 편지라는 말에 드레스 룸의 모든 사람들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탑주 엘리야 마라케시는 수려한 외모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춰 제국에서 손꼽히는 신랑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탑주라면 엘리야 마라케시? 그 사람이 유리 네게 왜……?”

나는 새어머니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아주 느긋하게 편지를 꺼내 보았다.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궁금한 게 역력한 눈치였다. 특히나 새어머니의 눈은 못으로 박은 것처럼 편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엘리야의 편지에는 딱 한 줄, 아주 간단한 용건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내일 오후 3시, 첫 수업을 시작할 예정이니 준비하고 있도록 하세요.

‘그럼 그렇지.’

나는 간단하게 편지를 확인한 후, 느린 손놀림으로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언니, 마탑주님과 친분이 있으셨어요?”

엘레니의 물음에 나는 너그러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글쎄. 앞으로 생길 예정이라고 해야 정확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말이니, 유리야?”

“앞으로 제가 마탑주님께 가르침을 받게 되었거든요.”

“가르침을…… 말이니?”

“네.”

나는 새어머니를 향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 마법사로 개화(開花)했거든요.”

“…….”

“그럼, 수업받을 준비를 해야 하니…… 전 이쯤에서 물러나 볼게요, 어머니.”

* * *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리가 물러난 후.

“……저, 마님?”

“…….”

레티샤 공작 부인은 한동안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었다.

“커흠, 공작 부인,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카민스키 경.”

그제야 레티샤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유리의 드레스는 아쉽게 됐지만, 우리 엘레니의 드레스는 최선을 다해 만들어 줄 수 있죠?”

“반드시, 온 사교계가 엘레니 공녀님만 바라볼 정도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카민스키 경이 정중하게 엘레니와 레티샤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돌아간 후.

“모두 잠시 물러나도록 하렴. 엘레니와 내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단다.”

“네, 마님.”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엘레니의 드레스 룸에서 물러났다.

달칵, 문이 닫히자 레티샤가 사르르, 엘레니를 향해 돌아섰다.

“내 사랑하는 딸, 엘레니.”

“……네, 어머니.”

손톱 끝까지 아름답게 치장한 레티샤의 손이 엘레니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졌다.

말과 달리 엘레니의 크림 같은 뺨과 사랑스러운 입술,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냉엄하기 그지없었다.

“엘레니, 나는 안단다. 너는 내가 낳을 수 있는 딸아이 중에서 최선 그 자체라는 걸 말이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뻐요, 어머니.”

“나는 네게 최고가 될 자질을 물려주었단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최선을 다해 너를 돕고 있건만…….”

“…….”

“가끔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네 하나뿐인 언니 유리 엘로즈, 그 아이를 이기기엔 네가 역부족인 걸까? 넌 어떻게 생각하니, 엘레니?”

“어머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레티샤의 입술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엘레니, 너는 아직 시작 단계에 서 있을 뿐이지. 그렇지? 이제 막 데뷔한 데뷔탕트일 뿐이잖니.”

“…….”

“아까 네 언니를 좀 보렴. 그 눈빛, 그 표정……. 자기가 이뤄 낸 성과를 보란 듯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지.”

근래 들어 제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의붓딸을 떠올리자, 레티샤의 두 눈에 선명한 증오가 떠올랐다.

“나는 그 여자의 딸이 그렇게 행복한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엘레니의 뺨을 쓰다듬는 레티샤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딸아이의 얼굴을 상처 입히는 일은 결코 없었다.

딸아이의 얼굴은 소중한 자원이자, 상품이기 때문이었다.

“엘레니. 내 딸. 잘할 수 있지?”

답을 재촉하듯 뺨을 압박하는 손길에, 엘레니는 순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요, 어머니. 심려하지 마세요.”

“아아, 그래. 역시 내 사랑스런 딸이로구나.”

레티샤가 손에 힘을 풀고, 팔을 뻗어 딸아이를 가슴에 품었다.

“…….”

엘레니는 조용히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를 하고, 제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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