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손도 대지 않고 그만 나가라고 할 것 같아서,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사실 나, 얼마 전에 개화했거든.”
“개화…… 말입니까.”
칼릭스가 설핏 이마를 찌푸렸다.
“맞아. 나 마법사로 각성했어.”
나는 고개를 시원스럽게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속에는 나름 이런 계산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중 얘의 호기심이라도 자극할 만한 건 이것뿐이다.’
“마법사라고요?”
작전이 통했는지, 칼릭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반응했다.
“응. 그리고 엘리야 마라케시 경에게 마법 수업을 받기로 결정되었단다.”
“……엘리야 마라케시라면 마탑주가 아닙니까?”
나는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는 남은 시간을 보며 씨익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어.’
이대로 대화를 끊기지 않게 이어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 말은 즉, 당신이 마탑주를 직접 사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게 그렇게도 되나?”
시간을 끌어 볼 요량으로 말장난을 치자, 칼릭스의 눈빛이 대번 뾰족해졌다.
아이코, 조심하자. 다 된 밥에 재 뿌릴라.
“말장난을 할 시간은……”
“없겠지. 미안, 내가 실수했어.”
빠르게 인정하고 사과하자, 칼릭스의 눈빛이 약간 누그러졌다.
나는 이쯤에서 정면으로 승부수를 던져 보기로 했다.
“어때? 너라면 자초지종을 알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초지종이라…….”
소년은 못마땅한 듯 눈을 한 번 내리깔고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로잔헤이어 혈족에게 일어난 일을 몰라서야, 제대로 된 후계자라고 할 수 없겠죠.”
‘나이스!’
나는 시간을 끌 겸 그날 있었던 일을 피크닉의 시작부터 아주 자세하게 칼릭스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피크닉에서 처음엔 비앙카 영애가…….”
……아아아주우 처음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그런데 자못 못마땅한 듯이 내 주절주절한 이야기를 듣던 칼릭스가 갑자기 “하!” 하며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시안티크 후작가는 사냥터 관리를 그딴 식으로 하면서 사람을 초대한답니까? 당신은 그걸 사과 한마디로 넘어가 주셨고요?”
막 내 장광설이 7분을 넘겨, 칼릭스의 머리 위의 숫자가 드디어 2분대로 진입했을 무렵이었다.
“아, 그건……”
내가 뭔가를 대답하기도 전에, 칼릭스가 한 번 더 짜증을 내는 게 빨랐다.
“게다가 상대가 마탑주라는 점도 석연치 않습니다.”
“응?”
“그 속을 알 수 없는 자는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지도 의심스러운 작자가 아닙니까?”
말을 하다 불편했는지, 드디어 칼릭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쨍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로잔헤이어의 사람이 그런 사람에게 수업을 받다니, 애초부터 말이 안 됩니다.”
“칼릭스 너…….”
나는 약간 놀랐다. 이런 걸 보고 부전자전이라고 하는 건가?
나는 정말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아버지와 완전히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풉.”
타는 목을 달래는지, 다시 한번 천천히 차를 마시던 칼릭스가 켈룩, 하고 기침을 했다.
“뭐라고요?”
“아니…….”
그리고 비슷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까 왠지…….
“……둘 다 설마 날 걱정해 주는 건가?”
툭 튀어나온 내 혼잣말에 흠칫, 소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지금 걱정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가늘어진 눈빛에 담긴 일말의 자비도 없는 경멸과 멸시를 마주한 나는 대번 머쓱해지고 말았다.
“뭐, 아니면 말고.”
칼릭스의 입가에 선명한 조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 조소를 기분 나빠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왜냐면 그와 동시에 1분의 벽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이게 되네?’
중간에 어떻게든 쫓겨나고야 말 줄 알았는데, 성공이 목전이라니.
그 사실에 정신이 팔린 내게 칼릭스가 날이 선 말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원래 그렇게 말을 무책임하게 던지시는 편입니까? 아니면 말고, 그런 식으로?”
“그건…… 어, 사실 내가 좀 그런 편이기는 한 것 같은데.”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며 아무 말이나 막 떠들었다.
“아버지나 너나 비슷한 소리를 하니까, 내가 뭐 그런 오해를 잠깐 했을 수도 있지만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 아닐까?”
“……후…….”
큰일 났다. 이러다가 진짜 쫓겨나겠는데?
“됐습니다. 더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습……”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
칼릭스의 머리 위에 떠오른 시간 표시가 정확히 00:00이 되었다!
미니 이벤트: ‘칼릭스와의 티타임’이 무사히 마무리됩니다!
당신을 멀리하는 동생에게 축객령을 받지 않고 10분간의 티타임을 가지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력이 10 오릅니다.
칼릭스의 호감도가 오릅니다.
그와 동시에 삐로롱, 하는 맑고 고운 소리가 들렸다.
‘호감도 오르는 소리다……!’
그와 동시에, 칼릭스가 선언했다.
“이만 나가 보시죠.”
내가 지금 호감도 오르는 소리를 들은 게 맞는 걸까, 싶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여간, 내가 이래서 얘를 별로 안 좋아했다니까.’
……라고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가 오해한 것 같네. 네 기분을 좋지 못하게 만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가 볼게.”
“…….”
칼릭스가 가늘어진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1초라도 더 버텼다간 간신히 올린 일말의 호감도마저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나는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비즈니스, 비즈니스.’
생긋 미소 짓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그를 일별한 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곧바로 속으로 외쳤다.
‘관계창!’
관계도의 맨 마지막에 자리 잡은 칼릭스의 이름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옆에 적힌 멘트가 바뀌어 있었다.
칼릭스: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그 사람 얘기.”
……음…… 뭘까…… 이 바뀐 것도 같고 바뀌지 않은 것도 같은 한마디는?
‘성과…… 있었던 거겠지?’
뭐, 일단 내용이 구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멘트가 변했다는 건 호감도가 올랐다는 증거가 맞긴 맞았다.
‘맞긴 맞는데, 영…….’
찝찝한 기분으로 관계창을 끄는데, 저쪽에서 시녀 하나가 다급하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게 아닌가?
“공녀님! 여기 계셨군요.”
“?”
모르는 얼굴인데. 무슨 일로 나를 찾지?
내 의아한 표정을 본 시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오늘 마님과 엘레니 공녀님과 함께 드레스를 맞추기로 하셨는데, 기억 안 나세요?”
“이런.”
그런 약속이 다 있었어?
제버릇 남 못 준다고 난 이 세계의 패션 사업에 대해 적잖이 흥미가 있었다.
비록 새어머니와 엘레니가 함께이긴 하지만, 이 세계 식으로 드레스를 맞춰 보는 건 나쁜 경험은 아닐 것 같았다.
내가 막 그렇게 생각한 찰나…….
“서둘러 주세요. 지금 마님과 엘레니 공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서둘러 달라고? 나는 재촉하는 시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녀님?”
“그래, 그러자꾸나. 앞장서렴.”
“네.”
나는 시녀의 안내를 순순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시녀는 나를 배려하지 않는 잰걸음으로 총총 앞섰다. 목적지는 엘레니의 드레스 룸이라고 했다.
“유리! 이제야 왔구나.”
“언니,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머니, 그리고 엘레니.”
내가 자리에 앉자, 새어머니가 다정하게 말했다.
“약속을 깜빡 잊어버린 모양이로구나. 카민스키 경을 어렵게 초청했는데, 네가 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단다.”
“큼, 크흠.”
자존심이 꽤 세 보이는 재단사가 헛기침을 했다.
“제가 여러 사람을 기다리게 했네요.”
하지만 나는 섣불리 사과하지 않았다.
‘예전에 여주인공이 이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사과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가, 공녀님이 그깟 일로 사과까지 한다며 비웃음을 샀었지.’
무난한 줄 알고 골랐던 선택지가 그렇게 지뢰 역할을 하는 건 ‘공위소’에서 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먼저 시작하셔도 괜찮았을 텐데.”
“엘레니가 너 없이 드레스를 고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뭐니? 호호, 워낙 엘레니는 너를 잘 따르니까.”
“그랬구나. 고마워, 엘레니.”
엘레니가 수줍은 듯이 볼을 붉혔다.
바로 그때였다.
경합! 엘레니와 당신의 기품 수치를 비교합니다.
……엥, 이 시점에서?
경고! 당신의 기품 수치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엘레니가 경합에서 승리합니다.
패널티 이벤트: ‘엘레니의 시녀가 저지른 무례’에 진입합니다!
엘레니로부터 시녀의 무례에 대한 사과를 받아 내야 합니다.
실패 시 당신의 기품 수치가 30 하락합니다.
뭐!
“……아차, 그러고 보니.”
나는 재빨리 나를 이곳까지 안내한 젊은 시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를 엘레니의 곁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름을 모르겠네. 가르쳐 주지 않을래?”
“저는 엘레니 공녀님의 시녀, 멜튼 자작의 딸 로아나입니다.”
“로아나. 그래.”
나는 머리를 핑핑 굴리면서, 멜튼 자작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딸을 시녀로 보낼 정도면, 본인이야 당연히 새어머니의 수족 노릇을 하고 있겠지.’
“공녀님, 그런데 제 이름은 왜……?”
뒤늦게 경계심이 든 모양이다.
“응? 별거 아니야. 로아나가 일을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아, 네…….”
“특히 내게 ‘서둘러 주세요’라고 재촉했을 때는 깜짝 놀랐지 뭐니.”
위계질서가 확실한 이 세계에서 모시는 공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엘레니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로아나, 그게 정말이야?”
“네? 아, 저, 그게…….”
나는 느긋한 척 테이블에 준비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웃는 얼굴로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엘레니의 시녀가 엘레니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어머니.”
새어머니의 웃음이 잠깐 깊어졌다.
“그래. 엘레니가 워낙에 이 아이에게 잘해 주니 그런 것 아니겠니?”
……이런.
생각보다 대처가 강경했다.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갈 모양이었다.
“네가 늦는 바람에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니 이해해 주렴.”
나는 철벽같은 새어머니에게 대답하는 대신, 엘레니 쪽을 바라보았다.
‘자, 착한 엘레니. 어떻게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