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칼릭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이기 전에, 내게는 먼저 할 일이 따로 있었다.
“보좌관, 공작 각하께선 지금 뭘 하고 계시지?”
“공녀님, 오셨군요. 마침 공작 각하께서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고 계십니다.”
바로 이 몸의 아버지를 찾아가, 마법사로서 개화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공작 각하,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사이는 불편하다고 되어 있지만 딸의 방문을 거절할 정도는 아닌 듯,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열리는 문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섰다.
칼릭스에게 물려준 검은 머리를 가진 중년 남성이 인기척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서늘하고 감정을 쉬이 표출하지 않는 푸른 눈동자였다.
“아버지, 쉬고 계시는데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음.”
공작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내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나는 일단 공작이 권한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잠시 후, 공작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으로 나를 찾아왔지?”
부녀 사이가 얼마나 처참할 정도로 서먹한지 설명해 주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나는 바로 용건을 말하는 대신, 종을 흔들어 대기 중인 시녀를 불렀다.
“일단 제가 차를 좀 준비해 왔어요. 마시면서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네가 차를?”
공작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미리 준비한 왜건을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캐모마일 차를 따라 주었다.
“드셔 보시겠어요, 아버지?”
오늘 내가 준비한 건 언젠가 유리가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차’로 언급했던 차였다.
‘공작이 오래전에 죽은 전처이자 유리의 생모에게 좋은 감정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약간의 향수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다행히 공작은 가타부타 언급하는 대신 내 앞자리에 앉아 주었다.
“차까지 준비하다니, 하려는 이야기가 꽤 어려운 내용인 모양이로군.”
“그렇지는 않아요.”
나는 차를 홀짝, 맛보면서 말했다.
“그저 이렇게 아버지를 대면하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준비해 보았을 뿐이에요.”
“…….”
공작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시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정도 처세술로는 어림도 없나?’
쳇. 원단 상가 사장님들은 그래도 커피 한 잔이면 마음을 잘 풀어 주시는 편이었는데.
속으로만 혀를 차는데, 공작이 말했다.
“……하려는 말을 해 보거라.”
“아, 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시안티크 후작가의 피크닉에 참석했다가, 마탑주님을 만나 뵈었어요.”
나는 그 말로 시작해서 그날 있었던 일을 대략 설명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던 공작이 이상한 부분에서 반응을 하는 게 아닌가?
“……잠깐, 방금 산책길에 멧돼지를 만났다고 했느냐?”
“네, 하지만 마탑주님께서 금방 저를 도와주셔서…….”
공작이 쯧 하고 혀를 커다랗게 찼다.
“시안티크 후작가는 사냥터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모양이로군. 공식적으로 그쪽에 항의 서한을 보내길 원하느냐?”
“……네?”
얘기가 왜 거기로 튀는 거지?
“아뇨, 그게 아니라요.”
나는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결과적으로 무사했기 때문에 시안티크 후작 부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부터 서둘러 털어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내 해명에도 공작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사과 한 번으로 일을 무마해 주다니…….”
엥? 이 반응은 뭐지?
‘아무래도 공작은 내 처사가 마음에 안 드나 봐.’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제게 일어났거든요.”
“중요한 일?”
“네, 아버지.”
나는 찻잔을 부러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마법사로 개화(開花)했대요.”
“뭐라고?”
뜻밖의 소식에 공작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마나 감응 자질이 있는 아이의 경우 이 세계에서는 열 살 이전에 개화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마탑주와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이 로잔헤이어의 마법사 혈맥이 끊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네가…….”
설명을 다 듣고도 공작은 복잡한 기색이었다.
그는 문득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네 어머니도 마법사의 자질을 가졌었지.”
“어머니께서요?”
“그래. 끝내 개화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놀라지는 않았다. 부모의 능력이 자식에게 유전되는 경우야 빈번하지 않은가?
나만 해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직업이 미술 선생님이었다.
‘그랬구나, 싶은 정도?’
하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는 나와 달리, 공작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나를 아주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회인가?’
나는 살짝 눈치를 보다 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몇 살 때쯤 처음 만나셨나요?”
“지금 네 나이 정도 되었을 때였지.”
공작이 “그러고 보니” 하며 말했다.
“너도 슬슬 결혼에 관심을 갖고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네?”
아니, 왜 갑자기 여기서 주제가 그리로 튀는 거람?
“저, 저는 아직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요. 아직 데뷔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요.”
“음…….”
공작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아무래도 내 생각에 공작은 서먹한 딸과 관계를 개선하느니, 차라리 시집을 보내 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차라리 칼릭스와 관계를 개선하는 게 더 쉽겠는데?’
나는 불길한 화제인 결혼으로부터 공작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말했다.
“어쨌든, 제가 어머니와 같은 재능을 가졌다니 기쁘네요.”
“글쎄.”
공작이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며 말했다.
“마탑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곳이다. 마탑주 엘리야 마라케시 역시 소속이 불분명한 자다. 그가 원래 제국인이기에 형식상으로나마 기사 작위를 가지고는 있지만…….”
“……?”
“아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지금 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일단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맞는 것 같구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공작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네 진명은 나밖에 모른다.”
“…….”
사실이었다.
이 세계에서 진명은 마법사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설정이 있었다.
그래서 태어날 때 마법사로서의 소질이 나타난 아이들은 모두 진명을 숨기며 살아가게 된다.
지금 나처럼, 언젠가 개화할지도 모르는 재능 때문에 말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마탑주에게 실수로라도 네 진명을 누설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아버지.”
“너는 용봉공(龍封公)이신 초대 로잔헤이어 공작 각하의 피를 이은 혈손이다. 그 위명에 누가 될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하자, 공작은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그가 곧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만 가 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나는 일단 축객령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서는 공작과 나눴던 대화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후일을 위해선 칼릭스와의 관계 개선이 중요하지만, 그게 공작과의 관계를 등한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냐.’
어쨌든 지금 로잔헤이어 가문의 가주는 바로 그였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칼릭스보다 더 시급하게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일단 초대 로잔헤이어 공작 각하의 위명에 누를 끼치지 말라고 강조한 걸 보면,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인 건 확실한데…….’
하지만 추측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 원래 공략 캐릭터도 아니었던 사람인지라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게다가 얼굴을 보자마자 결혼 이야기부터 나오는 걸 보면, 저쪽에서 나와의 관계 개선을 딱히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차라리 공략 대상인 칼릭스부터 천천히 시작해 보는 게 낫겠어.’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 * *
다음 날.
나는 일찍부터 시녀들을 재촉해 티타임 준비를 하게 했다.
달콤한 디저트와 조그마한 샌드위치까지 야무지게 챙긴 내가 향한 곳은 바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십니까?”
칼릭스가 짜증이 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 같은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나는 기죽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되물었다.
“날씨가 참 좋지 않니?”
“하…….”
칼릭스는 대답 대신 마른세수를 했다.
“그게 지금 제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계신 이유인 겁니까?”
미니 이벤트 발생!
‘칼릭스와의 티타임’이 시작됩니다!
10분 동안 쫓겨나지 않을 시 이벤트 성공.
내가 무어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시스템 메시지가 먼저 떠올라 내 대답을 막았다.
‘미니 이벤트!’
좀 친해져 볼까 하고 시작해 본 건데, 미니 이벤트가 발생하다니.
하지만 좋아하기엔 아직 일렀다.
이벤트 성공 시 칼릭스와의 관계가 개선됩니다.
실패할 시 칼릭스와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뭐?’
실패할 시 관계가 여기서 더 악화한다고?
‘……절대 실패할 수 없어!’
그 순간 칼릭스의 머리 위로 10:00라는 숫자가 떠오르더니, 천천히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나는 10분 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방에 남아 있을 거라고 결심한 후, 칼릭스에게 이렇게 권했다.
“너도 이리 와서 차 한잔 마시지 그러니?”
“대체 왜 제가 당신과 차를 마셔야 합니까?”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칼릭스는 아직 날 쫓아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톡톡 내 옆자리를 두드렸다.
‘제대로 공략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경험상,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밀어붙이는 행동에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뻔뻔하게 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가는 오히려 ‘그만하고 나가시라’는 축객령을 들을 수도 있다. 다 경험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칼릭스가 한숨을 쉬면서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내 앞자리에 앉았다.
“이런 황당한 짓을 벌일 정도로 여유로우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나는 시녀를 시켜 차를 따르게 하면서 대답했다.
“아직은 그렇지.”
“아직은?”
자기 앞에 놓인 차를 바라보는 칼릭스의 눈빛이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