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네?”
완전히 처음 듣는 소리에, 나는 부쩍 당황하고 말았다.
“정말 그것밖에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가요?”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아, 설마.
‘혹시 아까 칭찬으로 오른 호감도 때문에 히든 에피소드가 개방된 걸까?’
그 타이밍에 호감도가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관계도가 일정 조건을 충족했다는 게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 막 개화한 어린 마법사의 인생을 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게다가 마탑주는 내 예상보다 더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래도 괜찮을까?
원작에서도 마탑주와는 마법을 계기로 가까워지긴 한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제자가 되어 버리면,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금방 호감도가 쌓일지도 모른다.
‘물론 호감도야 쌓긴 쌓아야 하지만…….’
배드 엔딩을 위해서는 마주치는 횟수를 균등 분배하고, 특정한 한 사람만 자주 만나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다른 남주들보다 빨리 호감도가 쌓이면, 자칫 마탑주 단독 엔딩 분기로 진입할 수도 있어.’
게다가 난 업계 특성상 도제식 교육에 알러지 비슷한 게 있는 사람인지라…….
내가 낭패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마탑주도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그렇게까지 난처해할 일입니까, 이게?”
“그게…….”
“제 신원이라면 확실히 보증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건 알아요. 엘리야 마라케시 경.”
“……알고 있었군요?”
“이 제국 사람이라면 마탑주의 인상착의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하아, 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이 사람에게 마법을 배우지 못하면, 기한 내에 능력치를 충분히 쌓지 못할 수도 있다.
하필 마법 관련 능력치 ― 지력, 마나 ― 는 페르가나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가 되는 데 아주 중요한 능력치였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좋아요, 어쩔 수 없죠. 당신의 제자가 되겠어요.”
“어쩔 수 없다……, 라.”
“아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예요.”
“임시…….”
엘리야 마라케시가 허, 하고 헛웃음을 토했다.
‘마탑주의 임시 제자’가 되었습니다.
칭호 ‘마탑주의 임시 제자’가 부여됩니다. 효과 마나 +50, 지력 +30. 간헐적으로 마법사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음.
마지막에 덧붙은 문구가 어쩐지 수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된 이상 별수 없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마라케시 경.”
“……그렇게나 내키지 않아 하신 것치곤, 상황 판단이 무척 빠르시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엘리야 마라케시가 하늘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보통 내 제자가 된다면 이런 반응은 아닐 텐데…….”
“제가 보통이 아닌가 보죠.”
“좋습니다, 보통이 아니신 내 제자님.”
엘리야 마라케시가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받아쳤다.
“실례지만 이쯤 됐으니 통성명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유리 엘로즈라고 해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유리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진분홍 장미 같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엘리야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유리 공녀. 그쪽도 절 엘리야 경으로 불러 주셔도 됩니다.”
* * *
피크닉에서 멧돼지가 출몰했던 일은, 내가 마탑주와 함께 나타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피크닉의 주최자인 시안티크 후작 부인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나를 몹시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 몸은 무사하신가요, 공녀? 아아, 제가 주최한 모임에서 이런 사고가 나다니! 정말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마탑주께서 구해 주신 덕에 무사한걸요.”
어차피 이 사고는 내가 자발적으로 뛰어든 이벤트였기 때문에, 나는 시안티크 후작가에 공식적으로 항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양심이 있지.’
하여간 그뿐이었는데도 시안티크 후작 부인은 몹시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어떻게 이렇게 이해심이 많으실 수가……. 공녀, 내 공녀께서 오늘 보여 주신 이해심에 대해서는 언젠가 꼭 보답을 하겠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나는 난처한 듯 웃으면서도 사양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살롱을 여는 사람에게 신세를 지워 놔서 나쁠 건 없었다.
‘그나저나 마탑주의 제자가 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골치가 아팠지만…….
‘그래도 마탑주의 제자라면 마나와 지력 능력치가 통상보다 빠르게 오르긴…… 하겠지?’
문제는 이 시스템이 내가 게임으로 경험했을 때처럼 단순하게 돌아가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뜬금없이 히든 루트가 개척되질 않나…….’
집에 오는 길,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관계창을 다시 한번 켜 보았다.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 마탑주의 이름이 반짝거리며 떠올라 있었고, 옆에는 ‘골치 아픈 임시 사제 관계’라고 적혀 있었다.
‘어쨌든 이 정도면 첫출발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 어라?’
하지만 관계창의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로잔헤이어 공작: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군.”
이전까지 관계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공작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뭐지?’
게임 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작의 이름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원작과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어머니와의 미니 이벤트나, 마탑주와의 히든 에피소드도 그렇고…….
생각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알고 있는 게임이라고 너무 쉽게 봤어.’
지금 내게 적용되고 있는 건 이전의 단순한 게임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런 범주를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아니, 이걸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마치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게임 시스템만 적용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깊어지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일단 앞으로는 쉽게만 생각하지 말고 판단을 잘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예상치 못하게 마탑주의 ‘임시’ 제자가 되면서, 나에게는 당면한 과제가 생겨 버렸다.
‘최대한 빨리 다른 남주인공들을 만나야 해.’
만약 이대로 마탑주와의 호감도가 필요 이상으로 깊어졌다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호로록, 하고 마탑주 엔딩 분기를 타 버릴 수도 있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선, 일단 다른 남주인공들의 호감도도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칼릭스와 조우한 상태고, 집 안에서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지만…….’
칼릭스는 초반 공략 난이도가 좀 더 하드한 편이라, 쉽사리 범접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략을 안 할 순 없지만.’
바로 그때였다.
“공녀님!”
누군가 해서 뒤를 돌아보니, 집사였다.
“집사, 무슨 일이야?”
“저, 에스테반 후작 각하께서 공녀님께 꽃을 보내셨습니다.”
“응?”
에스테반 후작이라면, 처음 만났던 그 남주인공 1번?
‘춤은커녕 대화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았는데, 웬 꽃?’
나는 얼떨결에 집사가 심부름꾼에게서 받아 건네주는 커다란 꽃다발을 받았다.
라넌쿨루스, 장미, 작약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꽃송이들까지.
정원 한구석을 고대로 옮겨 온 듯한 향기로운 꽃다발이었다.
“공녀님, 그쪽에 메시지 카드가 있어요!”
나보다 더 흥분한 것 같은 시녀들의 말에 보니, 진짜로 한쪽에 메시지 카드가 꽂혀 있었다.
나는 일단 카드를 꺼내 펼쳐 보았다.
깔끔한 필치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건강하시길 바라며,
세드릭 에스테반.
“아하…….”
여태까지 튜토리얼에서 세드릭의 호감도를 올리는 데 실패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실패할 시 나중에 이렇게 꽃다발을 보내 주는 모양이었다.
시녀들이 옆에서 슬쩍 물었다.
“공녀님, 그 카드는……?”
“응? 별거 아니야. 그날 내가 아팠던 걸 후작님께서 기억하신 모양이야.”
“아아…….”
시녀들은 약간 실망한 것 같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꽃다발을 든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
저쪽에서 나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나와 똑같이 푸른 눈을 한 싸늘한 인상의 소년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칼릭스.”
여전히 날 바라보는 시선이 탐탁잖아 보였지만, 그래도 얼굴이 잘생겨서 봐 줄 만했다.
인상을 찌푸린 칼릭스의 첫마디는 이랬다.
“……그 꽃다발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인상부터 찌푸리며 꽃다발을 언급하는 태도가 나빴지만, 공략 대상인 고로 나는 지적 대신 친절히 답해 주었다.
“선물로 받았단다.”
그 말에 칼릭스의 얼굴에 하, 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이 번졌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으시군요.”
“응? 그럼. 꽃 선물을 받고 기분이 나빠질 이유는 없잖니?”
“…….”
내 말에 오래 침묵하던 칼릭스가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했을 땐…… 그러지 않았으면서.”
“……?”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렸다.
“방금 뭐라고……”
“아니. 시답잖은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칼릭스는 두 번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전 이만.”
싸늘한 일별과 함께 멀어지려는 소년에게, 나는 개의치 않고 웃어 주었다.
“그래. 오늘 하루 잘 보내렴.”
“…….”
친절하게 응대해 줬을 뿐인데, 칼릭스는 마치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쏘아보았다.
뭔가 억울한 듯도 한 시선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려는 찰나, 칼릭스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게 더 빨랐다.
‘흐음.’
남겨진 나는 혹시나 해서 관계창을 다시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칼릭스: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데, 그 사람.”
칼릭스의 본심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아앗…….’
뭐, 그래. 그럼 그렇지.
이맘때의 칼릭스는 새어머니의 이간질과 몇 가지 오해 때문에 나를 굉장히 꺼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 나눴다고 관계도에 무슨 변화가 있길 바라는 건 사치지.’
무엇보다 호감도가 오를 때만 들리는 그 기분 좋은 삐로롱 소리도 안 들렸고…….
나는 꽃다발 속에 코를 조금 묻으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돼.’
저 소년, 칼릭스 로잔헤이어는 이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였다.
지금은 아버지인 공작이 젊고 강건하긴 하지만, 언젠가 저 아이가 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될 것이다.
관계가 안 좋은 선대 공작의 딸, 그것도 배다른 누나를 그가 굳이 따로 챙기려고 할까?
‘어림도 없지.’
흠, 곤란한데.
아무리 향후 제3국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해도, 뒷배는 필요했다.
이 세상은 안타깝게도 아직 여자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았다.
즉, 칼릭스는 공략 대상인 건 둘째 치더라도, 향후를 위해서 관리할 필요가 있는 중요 인물이었다.
‘일단 이 관계는 내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