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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182)

4화

됐다!

“살려…… 살려 주세요!”

곧장 말을 달려 어느 정도 그와 가까워지자마자…….

“……!”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고삐를 스스로 놓았다.

‘설마 이대로 내가 죽는 걸 방관하진 않겠지, 제발……!’

남주인공님, 제발!

다행히 바로 다음 순간, 허공에서 누군가 내 허리를 힘 있게 잡아챘다.

‘살았구나!’

허억,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이게 무슨…….”

머리꼭지 위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살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꾸엑! 꾸에에엑!”

멧돼지가 소리를 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으득, 하고 남주인공이 이를 갈았다.

“하찮은 미물 주제에……!”

뒤의 말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내 연구를 방해했다 이거지.’

연구를 방해받아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마탑주는 나를 안은 채로 멧돼지를 향해 시동어를 외쳤다.

“파이어 볼!”

‘윽!’

순간, 뜨거운 열풍이 불어 머리가 화악, 하고 뒤로 날렸다!

‘이런, 맙소사…….’

내 눈앞에는 보고도 못 믿을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초원 전체를 태울 것만 같은 불이 화르륵 넘실거리며 멧돼지에게 달려들었다!

“꾸에에에엑!”

하지만 불은, 초원은 하나도 그슬리지 않고 정확히 멧돼지만 불태웠다.

그것도 순식간에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새카맣게 재가 될 정도로.

‘마, 말도 안 돼.’

파이어 볼이 원래 이렇게 센 마법이었어?

‘그냥 개나 소나 마법 배우면 다 쓰는 거 아니었나……?’

반성한다. 게임 속에서 마탑주가 파이어 볼 외칠 때 솔직히 멋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거 다 취소합니다.

‘멋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이건 완전 인간 병기잖아!’

소름이 끼쳤다.

“후우.”

멧돼지 한 마리를 통구이도 아니고 재로 만들어 놓은 인간 병기…… 아니, 남주인공 2번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균열’이 감지됩니다!

‘균열’의 흐름이 거세집니다!

“이런, 균열이……!”

그리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균열’이 열립니다.

세상이 뒤집혔다.

* * *

잠시 후, 부스스 정신이 들었다.

“……정신 차렸습니까?”

“으, 으음…….”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 여긴……?”

“시공의 틈 속입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내 질문에 답했다.

사위를 둘러보니 주변 풍경이 마치 물속에서 물 바깥을 바라보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어지러운 느낌에 나는 끙, 하고 머리를 짚었다. 그러자 상대가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러나 여전히 짜증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개화하지 못한 마법사였습니까?”

빙고.

나는 속으로만 쾌재를 불렀다. 성질 급한 마탑주는 그 잠시도 참지 못하고 재차 내게 물었다.

“어렸을 적에, 마력 소질을 탐지하는 테스트를 받지 않았습니까?”

“막 태어났을 때…… 받았다고 들었어요.”

“역시나…….”

마탑주가 혀를 끌끌 찼다.

순간, 지독한 두통이 엄습했다. 나는 원작처럼 비틀거리는 대신 지독한 두통을 참으려 눈을 감은 채 간신히 물었다.

“우린, 왜 여기 있는 거죠?”

“하.”

내 침착한 질문에 마탑주가 뾰족하게 숨을 토했다.

그가 하늘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되물었다.

“지금 몰라서 묻는 겁니까?”

“당연히 몰라서 묻고 있어……요.”

잘못 대답했다가는 시작도 전에 호감도부터 깎일 각이라, 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여주인공과 달리 두통을 참고 꿋꿋하게 버틴 덕인지, 마탑주는 원작에서처럼 심하게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미간을 한 차례 찌푸린 다음, 잘 들으란 듯이 한 음절 한 음절을 짓씹어 말할 뿐이었다.

“내 마법의 영향으로 인해 당신 마력이 개화한 순간, 그 여파로 시공의 균열이 벌어져 여기 갇힌 거 아닙니까.”

“아하…….”

두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자, 마탑주가 ‘분홍 장밋빛’으로 묘사되는 눈동자로 나를 분명하게 쏘아보았다.

우와, 예상은 했지만 정말 숨 막히게 잘생겼다.

남자답게 선이 굵직했던 에스테반 후작과 달리, 선이 날렵하고 고운 얼굴.

하지만 신장은 후작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웬만큼 한다 싶은 모델은 숱하게 봐 왔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를 이길 만한 사람은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하’라고 했습니까? 지금 제 연구를 방해해 놓고, 그렇게 태평한 소리가 나옵니까?”

‘시작했다.’

자. 여기부터 잘 대답해야 한다.

남주인공과 ‘조우’했다는 건 그의 호감도 수치가 개방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게임은 호감도 관리가 까다로워서…….’

초반에 난이도를 만만하게 보고 대충 예쁜 말을 골랐다가, 공략 실패가 뜨고 그대로 게임이 종료된 적도 많았다.

‘그리고 이 사람, 마탑주의 취향은…….’

딱, 어떻다고 쉽게 정의 내릴 순 없지만, 기죽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선택지를 고르면 평타는 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원작의 선택지가 고스란히 기억난다면 좋았겠지만, 내게 그런 기억력은 없으니.

‘대충 어땠다는 감에 의존해서 내 스타일대로 해 보는 수밖에.’

“그야…… 보시다시피 어쩔 수 없었잖아요.”

나는 조금 눈썹을 내리며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구해 주신 건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여기서 나갈 수는 없나요?”

뻔뻔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투에 덤으로 말똥말똥한 눈빛을 얹어 그를 바라봐 주자, 마탑주가 이것 봐라? 하면서 픽 코웃음을 쳤다.

“고삐를 스스로 놓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당신, 정말 어처구니없는 여자로군요.”

그와 동시에 내 귓가에 호감도가 오를 때 들리는 삐로롱, 소리가 들렸다.

‘됐다. 성공했다!’

“큼. 아무튼 쓸데없는 걱정은 마십시오. 당신하고 나 정도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니까.”

말하면서 새삼 골치가 아파졌는지, 그가 인상을 쓰며 덧붙였다.

“비록 내 연구는 엉망이 되었지만.”

“연구를 방해하게 된 건 유감이에요.”

시공의 균열, 어느 순간부터 제국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발생한 이현상.

이 이현상은 마물의 출현과도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필경 중요한 연구였으리라. 그런 연구를 내 마력 개화하자고 망쳐 버린 셈이라, 미안한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내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자, 마탑주가 못마땅한 듯 헛기침을 하면서도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뭐. 골치 아픈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두죠. 일단은 여기서 나가도록 합시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네, 좋아요. 찬성이에요.”

“말은 정말 잘하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마탑주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와 복잡한 마법진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원작대로 되겠지?’

나는 일단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잠시 기다리자, 물속처럼 어른거렸던 풍경이 마치 안개처럼 사라지고, 다시 또렷하게 세상이 맑아졌다.

“정말로 돌아왔네?”

눈앞에서 벌어진 그 신기한 현상에, 나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 내고 말았다.

“당신 마법, 정말 대단하네요.”

그 순간, 반가운 삐로롱 소리가 짧게 울렸다.

“……크흠. 이제 와서 칭찬해 봤자 나오는 건 없습니다만.”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해 봤자 나는 다 알고 있지롱. 순수하게 튀어나온 칭찬이 당신의 방심한 순간을 비수처럼 파고들었다는 걸.

“어머나. 진심이었는데요.”

내가 마탑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순간.

엘리야의 영향으로 숨겨진 재능, ‘마나’와 ‘지력’이 발현합니다!

>마나 회로가 개방됩니다!

>당신의 진명이 오픈됩니다.

>칭호, ‘어린 마법사’가 부여됩니다.

칭호의 효과: 마나 +30, 마법사들의 호감을 약간 얻을 수 있음.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상태 메시지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앞에 조그만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름: 유리 엘로즈>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얼른 둘러보니 능력치 쪽에 ‘마나: 30/1000’, ‘지력: 0/1000’이라는 항목이 하나 추가된 게 보였다.

‘됐다, 무사히 개화했어!’

남몰래 쾌재를 부른 순간.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듯, 상태 메시지가 하나 더 떠올랐다.

관계도가 일정 조건을 충족합니다.

‘히든 에피소드: 마탑주의 제자’로 진입합니다!

……얼레리?

마탑주의 제자?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처음 보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마탑주 쪽에서 당황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저……”

“잠깐만,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그는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하더니.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앗.”

내 이마 위로 손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 손에서 따뜻한 빛이 난다 싶더니, 곧이어 그가 한숨을 토하며 탄식했다.

“……하, 어떻게 이런 일이…….”

“왜 그러시죠?”

“그러니까…… 그게.”

그는 착잡한 태도로 설명했다.

“아무래도 아까 시공의 틈을 열면서, 당신의 마나 회로와 제 회로가 같이 꼬여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회로를 분리하려면 당신의 협조가 필요한데…….”

“…….”

“당신은 이제 막 개화한 어린 마법사죠.”

그러면서 그는 대단히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리 짜증이 났어도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아니, 뭐…….”

전혀 예상치 못한 히든 에피소드의 등장에 내가 당황하는 사이, 마탑주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일단 공녀가 마법을 배워 어느 정도 조력이 가능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회로가 꼬인 채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회로가 꼬인 채로 다른 사람에게 마법을 배우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단 겁니다.”

마탑주가 골치가 아프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제가 당신에게 마법을 가르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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