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82)

2. 본격적인 시작

다음 날.

나는 환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으음.’

간만에 잠을 푹 자서인지, 나른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깜빡거리면서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늦었…… 아, 아니지. 이 세계의 귀족 영애로서는 일반적인 기상 시각이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나는 침대 위로 늘어진 설렁줄을 가볍게 당겼다.

“부르셨습니까, 공녀님.”

재빠르게 시녀들이 다가왔다.

“아침 단장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딱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시녀들은 알아서 따뜻한 물을 가져오고, 내가 세수를 하는 것을 도왔다.

세수를 하자마자 기초적인 피부 관리가 이어졌고, 밤사이 굳었을 거라며 어깨를 주물러 주기까지 했다.

‘이거, 이거…….’

좋은데?

게임 속으로 들어와서 하는 것이라곤 머리 터지게 배드 엔딩을 공략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누려 보는 공녀로서의 생활은 무척 사치스럽고, 편안했다.

‘이 정도면…… 공녀, 할 만한 일일지도?’

두고 온 아파트도 지금 내가 살고있는 호화찬란한 방을 보면 좀 덜 아까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잊지 말자. 이 집은 내 명의가 아니다.’

페르가나로 가기 전에 능력치 뿐만 아니라 최소한 내 명의의 작은 건물 하나 정도 장만할 수 있는 자금력도 준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곧 치장이 끝났다.

“모두 고마워.”

“아닙니다, 공녀님. 피크닉,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응.”

나는 시녀가 쥐여 주는 양산을 들고,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푹신한 마차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디링, 하는 효과음이 기분 좋게 울렸다.

‘에피소드 2: 특별한 시작’에 진입합니다.

좋아.

예정대로 마탑주를 만나는 이벤트가 시작되었다는 알림에,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 * *

마탑주를 만나게 되는 피크닉 장소, 근교 초원까지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역시, 성격 나쁜 마탑주답게 외진 곳에 있다니까.’

이곳에서 그는 갑자기 벌어진 시공간의 균열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물론, 우리가 피크닉을 즐기는 초원하고 마탑주가 연구를 하는 장소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거리를 극복하고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게 바로 이벤트 아니겠는가?

“유리 공녀, 오셨군요!”

“비앙카 영애. 만나서 반가워요.”

갈색 머리카락에 개암색 눈망울을 한 비앙카 백작 영애는 게임 속에서 조연을 담당하는 아가씨였다.

정보 수집부터 놀라는 역할, 축하해 주는 역할, 같이 분노하는 역할 등등.

그래서 나도 안면이 꽤 있는 상태였다.

‘일러스트에서는 약간 평범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귀엽네.’

실제로 만난 비앙카 영애는 햄스터처럼 작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게임 속 일러스트도 그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더 상향 평준화되었나 봐.’

비앙카 영애가 나를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이끌었다. 게임 속 묘사에서와 똑같이, 피크닉의 시작은 평범했다.

돗자리를 군데군데 펼치고 차양을 친 채 음식을 차려 두고.

한쪽에서는 영식들이 공을 가지고 알 수 없는 경기를 하는 중이었으며.

저쪽에서 영애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연을 날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유리 공녀.”

“네, 비앙카 영애?”

“날씨도 너무 좋은데, 여기에만 있기는 너무 아깝지 않나요?”

기다리던 말에 나는 씨익, 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비앙카 영애, 제 마음을 알아주셨군요?”

이중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비앙카는 그저 까르르 웃을 뿐이었다.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시냇물이 굽이치는 계곡이 나온대요. 그 근방에 꽃나무들이 아주 흐드러지게 피었다나 봐요.”

“어머나.”

“우리, 그쪽으로 말을 타고 한번 가 보면 어떨까요?”

나야 거절할 리가 없었다.

“찬성이에요.”

그렇게 비앙카 영애를 비롯한 몇몇 영애들과 함께 나는 말 위에 올랐다.

이 근방의 지리는 다들 잘 알고 있었고, 피크닉을 하기 전에 야생 동물들도 처리한 터라 시종들은 우리를 보내며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알았어, 알았어. 우리가 여길 한두 번 와 보니?”

비앙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만 씩 미소를 지었다.

한두 번 와 본 게 아니더라도, 사고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법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검은 꿍꿍이속을 숨기며, 영애들과 함께 오솔길 쪽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유리 엘로즈로서 몸의 기억이 남아 있는 탓인지, 나는 능숙하게 말을 몰 수 있었다.

‘어젯밤에 식기를 사용하면서 확인한 건데, 다행이야.’

나는 자신 있게 말고삐를 당기며 제안했다.

“제가 앞장설게요.”

“좋아요, 유리 공녀!”

이윽고, 우리가 일행과 멀어져 어느 정도 한적한 곳으로 접어들었을 때.

“어머, 세상에!”

딱 맞춘 것처럼, 멧돼지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푸르륵, 푸르륵.

그것도 잔뜩 성이 난 듯, 머리를 털면서 땅을 긁고 있는 거대한 멧돼지였다.

‘멧돼지’가 출몰합니다!

‘이,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위압감이 대단한데?

내가 그렇게 잠시 얼어붙어 있는데…….

“꺄아악!”

때마침 뒤에 서 있던 영애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 주었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다들, 뒤쪽으로 달려요!”

내 말을 듣자마자 다들 신호라도 맞춘 듯이 앞다투어 영애들이 사방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나도 단단히 고삐를 틀어쥐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해!’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말고삐를 홱, 하고 당겼다.

고삐를 당기자 말이 히히힝, 하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멧돼지가 잠시 기세에 눌려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이다!’

허리를 숙여 말등에 바짝 붙어 자세를 낮추고,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랴!”

“히히힝!”

그러자 말이 순식간에 멧돼지 옆을 지나쳐 힘차게 달음질을 시작했다.

그 서슬에 잠깐 멈춰 섰던 멧돼지가 푸르륵, 하고 기세를 재정비하고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달려, 달려!’

나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점점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마탑주……!’

따라잡힐 듯 따라잡히지 않는 추격전이 얼마간 이어진 끝에…….

‘저기, 저기 있다!’

눈물 나도록 반가운, 게임 속에서 보았던 남색 망토를 입은 실루엣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디링, 하고 반가운 효과음이 들렸다.

‘엘리야 마라케시’와 조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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