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게임 속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공녀님을 위한 소네트>, 일명 ‘공위소’.
이 게임은,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주인공들과 알콩달콩 연애를 즐길 수 있는 로맨스 판타지풍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생동감 넘치는 일러스트에 화려한 성우진, 탄탄한 스토리.
여러모로 꽤 공들여 만든 수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평점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스토리에 문제가 있나? 아니다. 캐릭터의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뭐, 간혹.’
악역인 새어머니와 여동생 캐릭터가 너무 짜증 난다는 사람은 있었지만, 평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정성 들여 만들다가 난이도 조절에서 삐끗했다는 평도 있긴 했는데, 그것조차도 가장 큰 문제점은 아니었다.
이 게임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다름 아닌 엔딩 후 후일담이었다.
어떤 남주인공을 골라 엔딩을 맞든, 후일담에서는 최종 보스가 일어나 제국을 쓸어버리면서 여주인공이 살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력 215년, 평화로웠던 제국은 로엔 대공의 침략으로 전화에 휩싸였고, 유리 엘로즈 — 여주인공이다 — 는 그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라는 짤막한 후일담이 얼마나 수많은 게이머들을 뒷목 잡게 했는지 모른다.
‘나 역시도 그중 한 명이었고.’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다른 남주인공도 공략해 봤지만, 결과는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말해 이 게임은, 무슨 엔딩을 봐도 마지막에는 최종 보스에게 살해당하도록 정해져 있는 미친 게임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엘로즈 공녀, 몸 상태가 안 좋으십니까?”
‘에피소드 1 : 첫 만남’에 진입합니다!
‘세드릭 에스테반’과 조우합니다!
튜토리얼 팁: 세드릭과 춤을 출 시,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딩동, 하는 효과음과 함께 떠오르는 글씨는 물론.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미남의 얼굴은 질릴 정도로 보았던 섬세한 일러스트가 그대로 현실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미쳤다. 아무래도 망했다.’
여기, 아무래도 그 게임 속인가 봐…….
당장이라도 와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곳은 무도회장 한가운데.
내 눈앞에는 공략 대상 중 한 명이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죄송합니다, 에스테반 후작 각하. 춤은 다음으로 미루어도 괜찮을까요?”
“그러십니까?”
에스테반 후작이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불편하시다면 제가 휴게실까지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게임의 첫 장면이니만큼, 에스테반 후작은 이쯤에서 미련 없이 손을 거둬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네, 감사합니다.”
세드릭과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세드릭의 호감도를 올리는 데 실패했습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게임 중에 골라서 이 게임이라니!
‘무슨 엔딩을 봐도 결말은 살해당하는 거잖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삼킨 순간.
“얘, 유리야! 너 괜찮니?”
뒤를 돌아보니 여주인공의 고모인 일라이자 백작 부인이 서 있었다.
“세상에, 시작부터 에스테반 후작의 춤 신청을 거절하다니! 유리, 너 정말 독수공방이라도 할 작정인 거니?”
“고모님, 그게 아니라요…….”
현기증이 났다고 대충 해명을 하자, 고모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구나. 그래, 이만 일어나자.”
“네, 고모님…….”
얌전히 대답하면서, 나는 속으로 일라이자 고모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를 되씹었다.
‘……독수공방?’
그 순간, 퍼뜩하고 번개같이 생각이 났다.
‘있었어!’
이 미친 게임의 말도 안 되는 후일담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 * *
남주인공 네 명 중 누구와 엔딩을 봐도 사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위소’는 꽤 마니아층이 있는 편이었다.
‘미친 난이도와 후일담만 흐린 눈으로 넘어가면, 그럭저럭 괜찮은 게임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후일담을 흐린 눈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전방에 저승길로 직진…….’
아니, 아니다. 저승길이라니!
불길한 소리는 속으로도 하지 말자. 실제로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순신 장군님께는 열두 척의 배가 있었고 나에게는 한 가지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다.
‘바로…… 배드 엔딩.’
이 게임에서는 배드 엔딩도 딱 한 가지만 존재했다.
다른 모든 엔딩도 실제적으로는 다 배드 엔딩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애써 무시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이 게임 속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배드 엔딩은 딱 하나였다.
‘독수공방 엔딩!’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일명 ‘독수공방 엔딩’으로 불리는 이 엔딩에서는, 여주가 아무하고도 이어지지 않은 채 최종적으로 제3국으로 이민을 가서 내전을 피해 살아남는다.
‘지금 내게 남은 유일한 살아남을 길이기도 해.’
하지만 다른 게임이 일반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배드 엔딩이 발생하는 것과 달리, 이 게임에서는 배드 엔딩을 발동시키는 조건이 까다로웠다.
일단 남주인공들과의 호감도가 고루 높되 연애 상태는 아니어야 하며, 더불어 여주의 능력치도 높아야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엔딩이었다.
그 때문에 비공식적으로는 ‘우정 엔딩’으로도 불렸다.
당연히 나도, 유일하게 후일담이 없는 엔딩이란 점에 끌려 공략을 해 본 적이 있었다.
하나만으로도 힘들었던 남주인공들 호감도를 네 명이나 돌아가면서 올리느라고 고생깨나 했다.
그렇게 고생 고생하면서도 정작 엔딩은 못 봤다. 어처구니없게도 능력치 하나가 좀 부족하단 이유였다.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혈압이…….’
보시다시피 이 게임에서 가장 어려운 엔딩이 바로 이 독수공방 엔딩이었다.
다른 엔딩은 1년 동안 느긋하게 한 사람만 공략하면 가능하지만, 배드 엔딩은 같은 기간 내에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했으니까.
이 엔딩을 달성하면 ‘조화와 균형의 수호자’라는 웃기지도 않는 업적까지 해금될 정도였다.
‘아니, 아니야. 너무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게다가 한국에서 누렸던 평범한 이유리 — 그랬다, 난 이 게임 여주인공과 이름이 같았다 — 의 삶에 그다지 큰 미련이 있지도 않았다.
가족이 있다면 모를까, 우리 엄마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내겐 별다른 친척조차 없었다.
내가 이뤄낸 거라곤 햇수로 5년 째 다니고 있는 직장과 청약에 성공해 얻어낸 자그마한 아파트 뿐…….
‘……아니 잠깐.’
나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생각하니까 좀 미련이 남는 것 같은데.’
많이 양보해 대기업인 직장은 그렇다 쳐도 아파트는 어쩔 거야, 내 아파트는?!
‘눈 딱 감았다가 뜨면 한국이면 좋겠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나는 눈앞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며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이미 매일같이 보아 온 내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달빛을 받은 순은처럼 빛나는 은발, 도자기처럼 새하얀 얼굴에 호수처럼 박힌 푸른 눈.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왜냐면 일주일 내내 붙잡고 씨름했던 게임 속 일러스트를 똑 닮았거든.’
천사표 여주인공답게 청순하고 선한 인상의 미인.
어느 모로 보나 게임 ‘공위소’의 여주인공이 현실로 나타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난.
‘하아.’
나는 일단 지금의 내 상태를 점검해 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태창!’
속으로 가만히 외쳐 보자, 역시나. 게임을 시작할 때 보았던 상태창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상태창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상태창>
<이름: 유리 엘로즈>
이렇게 여주인공의 이름과 함께.
명성: 0
……딸랑 간단한 명성 수치 하나만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태창에서 왼쪽 화살표를 눌러 보았다. 그러자 게임에서와 똑같이 <관계창>이 나타났다.
관계창 역시 심플했다. 세드릭의 이름과 함께 그 옆에는 ‘잘 모르겠군.’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 게임은 호감도 수치를 직관적으로 그대로 알려 주는 대신에, 이렇게 모호한 말로 상태를 설명해 주곤 했다.
‘시시각각 멘트가 변하는 게 재미있어서 관계창을 자주 들락거리기도 했지.’
나는 관계 탭에서 다시 상태 탭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는 유리 엘로즈의 이름 밑에 있는 화살표를 누르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글씨가 나타났다.
재능: ???(미발현)
물음표 처리된 부분을 보며 나는 가느다랗게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게임 속에는 네 명의 남주인공이 존재한다.
다정하고 온화한 황태자.
무뚝뚝한 기사단장.
신경질적인 마탑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까칠한 남동생까지.
(물론, 남동생과는 연애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행복하게 지내는 훈훈한 엔딩을 보게 된다.)
어쨌든 이 미발현 재능이란 부분은 네 명의 남주인공들과 관련이 있었다.
이 게임은 초기 상태에서는 유리의 능력치가 봉인되어 있다.
그런 상태에서 남주인공들을 만나면서, 특정 에피소드를 겪어 재능을 발현하면…….
하나씩 하나씩 능력치가 늘어나는 설정이었다.
‘화술, 지력, 마나…… 또 뭐가 있었지? 아무튼.’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현하는 능력치가 바로 마나와 지력이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유리 엘로즈가 마탑주와 함께 우연한 사고에 휘말리면서 마법사로서 ‘개화’하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이고 사람을 싫어하는 마탑주와 여주인공이 서로 마법을 매개로 가까워진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는 이제 내 알 바 아니지만.’
중요한 건 능력치를 올리려면 재능 발현이 필수적이란 거고.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발현하려면 마탑주를 만나야만 한다는 거였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 엘로즈가 사교 모임차 교외로 피크닉을 나가게 된다.
마탑주와의 첫 만남은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순간.
똑똑, 하고 단정한 노크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