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48)

“아, 으…흐, 흐읏!”

벌려진 양다리가 그가 밀고 들어오는 순간 바르르 떨렸다. 퍽퍽.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쉴 새 없이 그녀의 아래에서 들려왔다. 아슬란이 움직일 때마다 리나의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퍽. 다시 치고 들어오는 그를 느끼며 리나는 제 아래 낙엽을 그러쥐었다. 마른 낙엽이 힘없이 부스러졌다. 리나는 지금 제 정신도 낙엽처럼 부스러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슬란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이댈 때부터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더 흥분시키느니 차라리 일찍 달래어 보자, 라는 생각으로 허락한 것이었는데.

‘실수했어.’

이미 해가 한참 전에 졌는데도 아슬란은 몇 시간째 그녀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는 더 기세를 높였다.

“아, 아아….”

몇 시간 사이에 그에게 익숙해진 몸이 그와 함께 다가올 절정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더욱 강하게 저를 조여 오는 그녀의 몸에 아슬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더욱 짙어진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 안에 저를 묻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그가 있는 힘껏 박은 순간 두 사람의 몸이 함께 떨렸다.

“아….”

리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슬란은 그런 그녀의 입에 제 입을 맞췄다. 탐욕스러운 혀가 그녀의 입 안을 훑었다. 위도 아래도 모두 그를 가득 문 그녀의 몸은 움찔거리며 절정을 느꼈다. 한참 후, 단단히 결합된 곳의 사이로 탁한 액이 흘러나왔다. 이미 몇 번이고 뱉어 내었던 것이었다.

“내 거.”

주변에 가득한 그녀와 저의 냄새에 아슬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좋다. 이 여자도 좋고 이 여자와 함께하는 이 일도 너무 좋았다.

아슬란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처음으로 분노에 차지 않은 밤을 보냈다.

***

리나는 풀숲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조금은 엉성하게 만들어진 통나무집이 보였다. 마법사들의 섬에는 원하는 시약의 재료를 얻기 위해 산 안쪽에 거처를 만들어 놓고 지내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집임이 분명했다. 이리저리 살피던 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있다!’

역시나. 날씨가 좋으니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통나무집 앞에는 긴 줄에 널린 옷이 있었다.

“아무도 없다.”

그런 리나의 뒤에서 아슬란이 말했다. 그 말에 리나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재빨리 걸려 있는 옷 쪽으로 다가가 그것들을 살폈다.

“다행이야….”

대충 봐도 그녀가 입기에 문제없는 것들이었다. 리나는 재빨리 옷가지를 훔쳐 입었다. 아슬란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요.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도둑질을 하고 있는 건데.”

“입지 마. 더 냄새 좋다. 만지기 좋다.”

“…그래서 입는 거예요.”

아슬란은 며칠 사이에 말이 늘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기어이 모든 옷을 조각내기도 했다. 그 탓에 이렇게 다 벗은 민망한 꼴로 옷을 훔쳐야 했다.

‘마법을 쓰면 되겠지만….’

성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슬란의 마법이라면 옷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의 목걸이를 풀어 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가 그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아 하고 있다는 것이며 가끔은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라는 것이었다.

“아슬란, 이거 입어요.”

“나도?”

리나는 다른 옷도 집은 다음 아슬란에게 내밀었다. 좀 작아 보이긴 하지만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아래는 가려야겠어.’

워낙에 흉악스러운 것이 눈앞에서 흔들리다 보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그의 것은 툭하면 욕망대로 움직였으니까. 아슬란은 리나가 건네준 것을 떨떠름한 얼굴로 받더니 끙끙거리며 입었다. 리나는 통나무집으로 다가가 문 앞에 작은 귀걸이를 내려놓았다. 대신전에서 흘러 나간 아티팩트들을 추적하다가 얻은 물건이었다. 어느 정도 마력을 막아 내는 힘이 있는 것이니 옷값으로는 모자라지 않을 것이었다.

옷을 구한 다음에 리나는 다시 아슬란과 함께 그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바다가 보이는 풀밭에 앉자 아슬란 역시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 그녀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한 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니 잠시 잊고 있던 아슬란의 말버릇이 생각났다.

‘라트반하고 레온을 계속 개새끼라 불러 댔었지.’

그때도 느꼈지만 가장 개 같은 것은 아슬란이었다. 이런 모습뿐만이 아니라 밤에 들러붙는 모습까지 포함해서 전부 다.

리나는 바다와 맞닿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간 아슬란과 뒹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사이에 주변도 살펴보고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도 했다. 문제라면 아직도 답을 딱히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게 진짜 과거인지도 모르겠고….’

일단 확실한 것은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슬란이 덥석 그녀의 팔을 잡더니 말했다.

“가지 마.”

“……!”

생각이 얼굴에 쓰이기라도 한 것일까. 갑작스러운 아슬란의 말에 리나는 놀라며 몸을 움찔 떨었다. 그때였다.

쿵!

무엇인가가 후려치는 듯한 굉음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쿵! 쿵!

소리는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거인이 망치로 하늘을 두드려 대는 것 같은 소리에 땅이 울리고 숲이 흔들렸다. 아슬란은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고 하늘을 보았다. 숲에 있던 새들이 놀라 날아오르고 수면에 반짝이던 물고기들은 허둥지둥 깊은 물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짐승들은 물론 마수들까지 갑작스러운 일에 긴장하며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하늘이….”

깨지고 있다. 그것 외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마치 조각이 난 거울처럼 하늘 여기저기에 금이 가고 풍경이 일그러졌다. 맑은 하늘이었는데 한쪽의 조각에는 흰 구름이 가득했고 다른 곳에는 비가 쏟아졌다. 밤의 하늘이 있었고 붉게 물든 석양의 하늘도 있었다. 거기에 기괴한 것이 떠다니는 하늘까지.

그 모습에 리나는 하늘 위쪽에서 다른 세계와 시간들이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적이 아니야….”

기적이라는 것은 이토록 시끄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세계의 약한 부분이 잠시 상처 입었다 다시 낫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은 분명히….

“…누가 강제로 만들어 낸 거야.”

그것을 깨닫자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누가 저런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아슬란조차 제가 넘어갈 만큼의 상처를 만들어 내지 못해서 계속 이 세계에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넘어오는 것은 아슬란보다 더 강한 존재였다.

크르르.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리나는 놀라 옆을 보았다.

“아슬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냄새가 난다.”

“냄새요? 무슨 냄새?”

“너에게 묻어 있던 냄새.”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로 손을 뻗었다. 투둑. 지금까지 얌전히 걸려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그의 손길에 힘없이 끊어졌다.

“맙소사.”

그 모습에 리나는 지금까지 그가 목걸이를 충분히 끊어 낼 수 있음에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슬란은 목걸이를 바닥에 팽개친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변에 붉은 마력이 넘실거린 순간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허공에는 거대한 붉은 마수가 떠 있었다.

‘여기에서 기다려라. 죽이고 온다.’

아슬란은 곧바로 하늘에 생긴 거대한 균열을 향해 날아갔다.

쾅! 쾅!

그사이에도 소리는 계속되었고 하늘은 깨져 갔다. 리나는 일단 제 성력을 끌어모아 보호 결계를 친 다음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을 팔로 가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동안 보았던 기록에는 이런 현상은 적혀 있지 않았었다. 만약 누군가 이 세계로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리나는 조금 전 아슬란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묻어 있던 냄새가 난다며 그는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슬란이 언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리나는 알고 있었다. 대신전에 있을 때 아슬란이 언제나 인상을 찌푸리며 보던 것은….

“…라트반?”

분명 그였다.

***

아슬란은 빠르게 하늘로 날아갔다. 그사이 하늘에는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길이 생긴 것이다.

‘어떤 놈이지?’

저조차도 이렇게까지 거대한 상처를 만들어 내기란 불가능한데, 도대체 건너편에서 넘어오려는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기분 나쁜 냄새가 점점 강해졌다. 리나에게 묻어 있던 수컷의 냄새였다.

‘찾으러 온 건가.’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리나를 끼고 있던 수컷이 제 짝을 찾아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아슬란은 조금 눌러두었던 제 마력을 모조리 개방했다. 어떤 놈이든지 상관없었다.

‘죽여 버려야지.’

그러면 리나는 제 것이다. 아슬란은 이를 갈며 구멍을 노려보았다. 기이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극에 달한 순간, 이 구멍을 만들어 낸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

물론 냄새를 맡았을 때 인간의 것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들이 얼마나 약한 생명체인지 수없이 보아 오지 않았던가. 이 세계에서도 다른 세계에서도 인간이란 약한 존재들이었다.

아슬란은 눈앞에 나타난 인간 남자를 살펴보았다. 다 비슷비슷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은 꽤 나이가 든 남자였다. 게다가 어디를 어떻게 지나왔는지는 몰라도 몸과 입고 있는 갑옷, 들고 있는 검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넌 누구냐.’

아슬란은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아슬란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그녀를 붙잡고 있었군, 아슬란.”

이상한 일이다. 리나도, 이 남자도 저를 무척이나 잘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됐고, 리나는 어디에 있지?”

그 질문에 아슬란은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라트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폭풍과 번개가 몰아쳤다. 바다는 집채만 한 파도가 넘실거렸고 마법사들의 섬 여기저기는 목표를 맞히지 못한 힘에 의해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다. 거대한 힘의 충돌이 만들어 내는 것들이었다.

워낙에 먼 곳에서 싸워 대는 통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슬란을 상대하는 자가 라트반임을 짐작했다.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라트반이 강하긴 하다. 대신전이 무너지던 날에는 아슬란과 함께 고대 신에 맞서 싸우기까지 한 그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과거의 좀 더 약한 아슬란을 상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줄이야.

게다가 도대체 어떻게 세계를 넘어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리나는 지금 아슬란을 제압하고 있는 자가 제가 알고 있는 라트반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아슬란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끝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라트반이 이긴 싸움이었다. 곧 아슬란의 몸이 섬으로 떨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리나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늘에 떠 있던 라트반이 그녀를 향해 내려왔다.

“라트반…?”

드디어 마주한 라트반의 모습에 리나의 눈이 커졌다. 분명 라트반이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라트반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군요, 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더욱 낮아져 있었다. 달라진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리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새카맣던 머리카락 사이에 흰색의 머리카락들이 보였고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파여 있었다.

“라트반, 왜 이렇게….”

혼자서 수십 년을 나이 들어 버린 것 같은 라트반의 모습에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군요. 그 수직 동굴에서 떨어진 이후로 지금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그 말에 리나는 지금 제게 말하고 있는 라트반이 그때 자신과 함께 있었던 라트반임을 알았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 사흘 정도… 다, 당신은… 얼마나….”

그녀의 물음에 라트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30년간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30년. 그 말에 리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자신에게는 그저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에게는 30년이 흘렀다고?

“계속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많은 세계를 돌아다녔지요. 죽지는 않았을 거라 믿었습니다. 힘들었던 것은 당신을 보지 못한 날들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라트반은 미소 지었다. 정말로 그녀를 만났으니 이제 자신은 괜찮다는 그런 웃음이었다. 리나는 울컥 목이 메었다. 30년. 30년이라고. 그 시간을 혼자 돌아다니며 자신을 찾아다녔다고.

그 정도면 포기했어야 한다. 하지만 라트반은 기어이 이 세계까지 찾아와 자신을 찾아냈다. 그는 휘청이는 리나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손가락 하나까지 그리움이 잔뜩 배어있는 동작이었다. 라트반의 입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리나의 이마 위에 닿았다. 그녀가 무사했으면 모든게 괜찮다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 시간을… 나를 찾아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리나의 등을 쓸어내리며 라트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헛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강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렇게 당신을 찾았으니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라트반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 묻어나왔다. 리나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끔찍하고 힘든 시간을 지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뒤에서 아슬란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리나를 놔.’

라트반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슬란의 앞발에 피가 튀어 올랐다. 마수는 신음을 삼키며 비틀거렸다.

“라트반!”

“괜찮습니다. 어차피 모두 헛것입니다.”

“…헛것?”

“제가 돌아다니면서 알게 되었던 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세계는 아슬란이 보았던 세계입니다. 그가 스쳐 갔던 모든 세계의 모든 시간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공간이지요. 이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아슬란의 기억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냐 말하려던 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신이 되었던 아슬란이다. 그 말은 제 상식을 벗어난 어떠한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의미를 잃고 인간은 감히 알 수 없는 것들에 의해 세계가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가 보았던 기적 너머의 풍경에서 언제나 아슬란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라트반은 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거나…긴 추적이 드디어 끝을 맞이했군요. 이제 우리의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가능해요?”

라트반은 대답 대신 주먹을 쥔 왼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리나는 깨달았다. 아슬란과 싸우고 있는 도중에도 라트반은 왼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었다. 내려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천천히 주먹을 펼쳤다.

“이건….”

라트반이 쥐고 있던 것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나는 조개껍질. 분명히 아덴베르 황궁에서 레오나가 저에게 주려고 모아 놓았던 것 중 하나였다.

“이건 레오나가….”

“맞습니다. 황녀님께서 저에게 쥐여 주신 것입니다. 손 하나 가득 차게 쥐여 주었지만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군요. 그사이… 여기저기에서 떨어트렸습니다.”

“왜 레오나가 이걸 준 거죠? 그리고 이걸로 무엇을 한다고?”

“이게 있는 한, 우리는 황녀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도 보이는 이정표와 같은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이게 없다면…?”

“…돌아가기 힘들 겁니다.”

리나는 다시 라트반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것에 찔린 상처가 가득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이 조개껍질들을 소중히 갖고 있었을지.

“처음에는 옷에 넣어 두었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었지요. 바닥을 구를 때, 공격을 당했을 때… 그러다 결국 사라지지 않도록 쥐고 있는 것이 제일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꽉 쥐고 있으면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라트반은 복잡한 눈빛으로 제 손에 남아 있는 마지막 조개껍질을 보았다. 공격을 당하는 순간에도, 자는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것이 있어야 리나와 함께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을 잃기 전에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리나.”

그 말에 리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 시간 그 혼자 돌아다니며 입은 상처의 흔적이 느껴졌다.

‘돌아가야 해.’

리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자신의 세계가 아님을 알고 있다. 자신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리나는 이것을 라트반에게 건넨 레오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리나가 라트반의 손을 붙잡은 순간 아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마.’

리나는 몸을 돌려 아슬란을 보았다. 그는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힘이 약해져서가 아니었다. 그런 제 모습이 리나에게 더 익숙하게 느껴질 것을 알고 있는 본능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그의 몸에는 라트반에게 입었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피가 흘러내렸다.

“아슬란.”

“가지 마.”

아슬란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가 원하는 것이 오직 하나임을 더 애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리나는 망설이며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다. 돌아가야 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를 찾아 오랜 시간을 보낸 라트반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피를 흘리며 자신에게 애원하고 있는 아슬란의 모습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오래전 그와 약속했었다. 찾으러 가겠다고. 그래서 찾았는데….

리나는 라트반의 손을 잡은 채 아슬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요.”

“…….”

아슬란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나는 오래전에 당신과 약속했어요. 꼭 찾으러 가겠다고… 당신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래전에 약속했다니. 분명 처음 만났는데 언제 자신과 약속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리나의 말에 아슬란은 제 가슴 한쪽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통증이었다. 다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런 통증을 느끼는 걸까.

처음부터 이상한 인간이었다. 저를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익숙하다는 듯이 구는 인간. 그러면서 저에게 미칠 듯한 갈급함을 느끼게 하는 인간. 안고 있으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한순간에 지워 버리는 인간. 그래서 계속 곁에 있고 싶고, 품고 싶은….

“…….”

아슬란은 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처음 겪는 것들이다. 하지만 점점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오래전에 겪었던 것처럼.

아슬란은 저에게 내밀어진 손을 보았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제가 이 손을 기다려 왔다는 사실을. 그는 손을 뻗어 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리나.”

그래, 마지막 순간에 나를 찾으러 오겠다고 말한 내 반려.

겪은 적이 없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변하는 아슬란의 눈빛에 라트반은 그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아슬란. 이 모든 세계는 곧 너다. 어찌 보면 꿈과 비슷할 수도 있지. 이 모든 것이 네가 만들어 낸 세계라는 것을 알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너는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현실을 찾아갈 수 있다.”

그 말에 아슬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라트반이라는 자가 하는 말들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아슬란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리나의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세 사람의 주변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계가 갈라졌다. 다른 세계가 그 틈으로 밀려들어 왔다. 격렬한 섞임 속에 세 사람의 몸이 휩쓸렸다. 세계가 뒤집히며 그들의 몸이 조금 전까지 하늘이었던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풍경이 섞였다. 이곳에 떨어졌을 때처럼 하늘이 정신없이 반짝였다.

리나는 힘겹게 몸을 돌려 마법사들의 섬을 바라보았다. 짓고 있던 마탑이 빠르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리나는 저를 붙잡고 있는 라트반과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라트반의 상처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에게 남았던 시간의 흐름 역시 사라지고 있었다.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리나는 아슬란을 돌아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고 신기해하던 반짝임 대신에 아주 오랜 시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리움이 담겼다. 호기심이 아닌 애정이, 서투름이 아닌 능숙함이, 격렬한 욕정 위에 짙은 사랑이. 그 시선에 리나는 알 수 있었다.

제가 아는 아슬란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이제 반짝이는 빛은 사라졌다. 대신 칠흑 같은 어둠이 셋을 감쌌다. 어딘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곳에서 라트반은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 있던 조개껍질이 여러 가지 색으로 반짝였다.

그때 아주 멀리서 빛이 반짝였다. 너무도 까마득한 곳에서 아주 잠시 반짝인 빛이었지만 리나는 그 빛이 지금 아슬란의 손에 들려 있는 것과 같은 빛임을 알 수 있었다. 저곳에 라트반에게 조개껍질을 다 건네주고 마지막 하나를 들고 있는 레오나가 서 있을 것이다.

아이는 제가 좋아한다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을 하나하나 모아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갖고 있던 모든 순간 아이는 계속 언젠가 돌아올 엄마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돌아가는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어느새 아슬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 역시 산발이 아닌 예전처럼 정리되어 있었으며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인간스러움이 묻어났다. 아주 오랜 시간을 인간으로 살아왔던 것처럼.

먼 곳에서 반짝이던 빛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슬란은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암흑투성이였던 공간에 수천, 수만 가지의 풍경이 어지럽게 섞였다. 그가 이제 이곳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아슬란의 몸이 은은한 금색과 붉은색의 빛에 뒤덮여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이기도 했다.

“아슬란.”

그녀의 부름에 그가 미소 지었다. 오만한 마수의 미소를 본 순간, 리나는 자신의 아슬란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세 사람을 눈부신 빛이 휘감았다.

***

“쿨럭.”

레오나의 기침 소리에 레온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아주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와 레오나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옷이 얼굴과 몸에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었고 몸 전체에 피곤이 배어 있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두 사람은 앞에 있는 빛을 노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이었지만 밑에는 금색의 빛이 빠르게 회전하며 사방으로 그 빛을 흩뿌렸다. 계속 조용하던 그 빛무리가 거센 소리를 내며 빠르게 회전했다. 몇 번이나 이런 움직임을 보였었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레온은 헐떡이는 레오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레오나, 괜찮니?”

“응.”

레온의 질문에 아이는 힘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힘들다. 아프다. 잠이 온다. 목이 마르고. 배도 고프고. 당장이라도 이대로 누워서 잠들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아늑했던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돼.’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흔들며 제 손에 있는 것을 강하게 쥐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나는 조개껍질이었다.

‘내가 여기 있어야지 엄마가 돌아올 수 있어.’

라트반과 리나가 떠난 다음 레온과 레오나는 하루 차이를 두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황궁을 나오기 전 레오나는 짐을 꾸리면서 무엇을 가져갈까 고민했다. 진짜 여행을 떠나는 거라고 했기에 아덴베르 황궁에 올 때처럼 모든 것을 들고 갈 수는 없었다. 제가 멜 수 있는 가방 하나. 그러니 아빠는 정말로 가져가고 싶은 것만을 넣으라고 했다.

엄마가 짐을 꾸렸던 것을 떠올리면서 제 옷을 챙겨 넣던 레오나의 시선이 장식장 안에 있는 유리병을 향했다. 거기에는 아빠를 졸라 갔었던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질들이 들어 있었다. 껍질만 남아도 저 혼자서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신기한 것들. 그것이 유독 평소보다 강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엄마가 있을 때 반짝일 것이지.’

정작 엄마가 있을 때는 약한 빛만 보였던 것이 왜 이제야 예쁘게 반짝인담. 레오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장식장에서 유리병을 꺼내 가방 밑에 슬쩍 넣었다.

‘며칠만 더 반짝이면 좋겠다.’

그러면 엄마에게 자랑한 다음에 절반은 엄마를 주고 나머지 절반은 제가 가져야지. 예쁜 것이니까 엄마도 항상 이것을 갖고 다닐 것이다. 그러면 볼 때마다 제 생각을 하겠지.

너무나 완벽한 제 계획에 감탄하며 레오나는 신나서 짐을 마저 꾸렸다.

하지만 며칠 후, 맞닥뜨린 상황은 레오나의 생각처럼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사라졌다. 레오나는 동굴 앞에 앉아 바닥에 일렁이는 빛을 노려보았다.

며칠 전에 제가 느꼈던 이상한 감정이 다시 물밀 듯이 밀려왔다. 끝없는 공포와 두려움인데 도망갈 수는 없는. 그리움과 익숙함이 섞인, 아이가 깨닫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너머에 엄마가 있다. 그리고 엄마만큼이나 익숙한 존재가 있고. 레오나는 빛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로 들어가야 해. 그런데 그냥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어. 이것에게 먹힐 거야.”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지만 레오나는 알 수 있었다. 레오나의 말에 라트반과 레온의 얼굴이 마치 사형 선고를 들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잠시 후 라트반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돌아올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레오나는 한참이나 생각했다. 한 번도 마법을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었다.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레오나에게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모든 것은 아이의 깊숙한 곳에 있는 본능이 알려 주었다. 레오나는 바닥에 엎드려 동굴 아래에 있는 빛을 보았다.

한참이나 빛을 노려보던 레오나는 잠시 후 일어나 제가 메고 왔던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뒤적였다.

“여기다 넣어 뒀는데….”

한참이나 뒤적거린 레오나는 가방의 밑에서 옷에 감긴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안에 담겨 있는 조개껍질은 집어넣었을 때보다 더 반짝거렸다.

“라트반 경, 손 내밀어.”

라트반은 레오나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레오나는 그의 손 위에 우르르 조개껍질을 쏟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아이의 목소리답지 않게 레오나의 목소리는 무겁고 진지했다.

“이것을 갖고 들어가. 그러면 나는 그대를 찾을 수 있으며 그대 또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것들을 전부 잃어버리면 그대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어. 그대뿐만이 아니야. 엄마도 돌아오지 못해. 내 말 알아듣겠어?”

“…알겠습니다, 황녀님.”

라트반은 레오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어떻게, 무슨 이유로 길잡이가 되어 준다는 것인지, 그 말이 정말인지를 따져 물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내가 여기서 기다릴 거야. 당신과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말한 레오나는 다시 회전을 시작하며 빛의 앞에 섰다. 라트반은 그런 레오나의 옆을 지나 그대로 기적의 너머로 뛰어들었다. ‘잘 있어라’, ‘다녀오겠다’ 같은 인사 따위는 없이 그녀의 기사는 그를 찾으러 떠났다.

그것이 3주 전의 일이었다. 3주간 레오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근처에 제국 기사단을 주둔시킨 채 그는 그들에게 아무도 이곳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지키라 명령을 내렸다.

그는 레오나를 끌어안았다. 아이가 약해지려 할 때마다 그는 힘들어하는 레오나를 옆에서 안아 주며 응원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레온은 미친 듯이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레오나를 그만두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3주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희망이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레오나라도 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아이의 앞에서 제가 먼저 포기하라 할 수는 없었다.

‘만약에 리나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레온은 기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그녀를 찾아 이 안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지금도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레오나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동굴 전체가 흔들리더니 바닥에서 회전을 하고 있던 빛이 폭발하듯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 어?”

세상 전체가 흔들렸다. 그 진동의 진원이 이곳임은 틀림이 없었다. 레온은 휘청이는 레오나를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까지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레온의 품에서 아래를 바라보던 레오나가 말했다.

“오고 있어….”

엄마가 오고 있다. 라트반도 함께. 그리고 그 옆에 느껴지는 또 다른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빛이 세상을 덮었다. 레온과 레오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저 찬란한 빛만이 두 사람의 시야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진 순간, 레오나와 레온은 자신들의 앞에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엄마….”

레온의 품 안에서 레오나가 팔을 뻗으며 버둥거렸다. 동굴 안에 리나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라트반이, 반대쪽에는… 아슬란이.

“하, 하하….”

레온의 입에서 웃음이 흘렀다. 이 기적이 보고되었을 때부터 이번에야말로 리나가 정말로 아슬란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맙소사.’

자신의 아내는 기어이 신이 되어 버린 자를 이 세계에 현신시킨 것이다. 차원을 떠돌아다니는 신을 기어코 제 옆으로 데려오다니. 불가능을 가능케 한 그녀의 ‘기적’에 레온은 그저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리나의 옆에 서 있던 아슬란이 입을 열었다.

“이 자식, 미쳤나?”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밉살스러운 목소리에 레온은 손을 뻗었다. 기사들이 놓고 갔던 바구니에 남아 있던 빵을 집은 레온은 그것을 있는 힘껏 아슬란의 얼굴에 던졌다.

퍽!

빠르게 시간을 거쳐 와 현신한 탓에 아직 감각을 다 되찾지 못한 아슬란의 얼굴에 그대로 빵이 부딪혔다.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과거의 복수를 끝마친 레온이 아슬란에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개새끼야.”

진심으로 아슬란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돌아오면 리나가 가진 마음의 빚은 사라질 테니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아슬란을 찾아 헤매지 않을 것이다.

‘레오나도 내 편이고.’

그렇다면 이제부터 다시 한번 싸워 볼 만하다.

속이 후련한 듯한 레온의 웃음소리가 동굴 안에 울렸다.

퍼벙! 펑!

아덴베르 황궁 위에 수많은 불꽃이 어둠 위를 수놓았다. 도시의 사람들은 무슨 이유인지는 발표하지 않은 채 갑작스레 축제를 시작한 황제의 이름을 술잔을 들며 외쳤다. 모두 축복의 말이었다. 제국령의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일주일간 원하는 만큼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까.

리나는 의자에 반쯤 기대어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품 안에서 레오나가 신이 난 얼굴로 하늘을 향해 손을 저었다.

퍼버버벙!

그러자 조금 전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불꽃이 하늘 위에서 터졌다. 하늘을 밝히는 모든 불꽃은 레오나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엄마, 저거 예쁘지!”

레오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모습이 이리저리 변하는 불꽃이 있었다. 저러면 누군가 레오나의 마법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리나는 손뼉을 쳤다. 예쁘긴 예뻤으니까. 레오나는 슬쩍 제 얼굴을 리나에게 내밀었다. 어서 뽀뽀해 달라는 소리였다.

리나가 가볍게 입을 맞추자 레오나는 신이 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붙든 채 그녀의 가슴에 제 얼굴을 묻었다. 그때 갑자기 눈이 멀 정도로 강한 빛이 번쩍이더니 폭음이 들려왔다.

퍼버버벙! 퍼버버버벙!

놀라 하늘을 바라보니 불꽃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빛이 어찌나 강한지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탓에 레오나가 만든 불꽃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리나는 한숨을 쉬며 옆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저에게도 해 달라는 듯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레오나는 저보다 훨씬 더 큰 불꽃을 만들어 낸 아슬란을 노려보더니 외쳤다.

“가! 저리 가! 너 싫어!”

레오나는 그런 아슬란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진심이 가득 담긴 발길질이었다. 물론 아슬란은 조금도 그런 레오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제 발길질이 아슬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 레오나는 전략을 바꿨다.

아슬란을 공격하는 대신 리나에게 매달리기로 한 것이다. 더욱 리나의 품을 파고들며 리나의 볼에 쪽쪽 입을 맞춰 대자 리나는 웃으며 레오나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는 아슬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오나의 승리였다.

아슬란의 반대편에서 레온은 그 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사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아슬란이 돌아온 다음 레오나가 본능적으로 아슬란을 따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니 확실해졌다. 레오나에게 아빠는 자신뿐이다. 그것이 레온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그는 리나의 옆에 앉아 있는 라트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30년이라.’

모두가 돌아온 다음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30년이라니. 저와 레오나에게는 3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사실 그 3주도 지독하게 길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버티지 않았던가. 몸의 피로도 피로였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더욱 그를 힘들게 했다.

만약 잘못되면 리나는 돌아올 수 없다.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바싹 마르며 심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이었다. 리나가 곁에 없는 날이 더 많은 저도 그러할진대 라트반은 어떤 기분이겠는가. 알 수 없는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계속해서 혼자 리나를 찾고 또 찾아다녔을 라트반의 심정을 레온은 짐작하기를 포기했다.

돌아온 그가 지친 얼굴로 제 손에 쥐고 있던 조개껍질을 레오나에게 돌려주었을 때, 그것에 묻어 있던 피와 깨진 흔적들이 그가 보냈을 시간을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레오나와 아슬란의 옥신각신을 보고 있던 리나는 스르르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라트반이 재빨리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근처에 있던 큰 쿠션을 그녀의 뒤에 대어 주었다.

“고마워요.”

리나가 그것에 몸을 기대자 라트반은 레오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나가 피곤하니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게 이제 그만 내려오라는 뜻이었다. 평소라면 싫다고 손을 쳐 냈을 레오나였지만 리나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순순히 라트반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그러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라트반 경, 경이 보고 왔다는 그 마수들 이야기 좀 더 해 줘.”

이곳으로 돌아온 후 라트반이 제가 겪었던 일들을 잠시 이야기했을 때 그가 겪고 본 것들이 무척이나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저번에 들으셨던 마수 이야기부터 할까요?”

“응!”

레오나가 진지하게 들을 준비를 하자 레온이 어느새 다가와 레오나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아슬란도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라트반의 이야기를 들었다. 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

이건 꿈일까. 서 있는 곳은 이벨리나의 집무실이었다. 이미 대신전이 무너졌기에 이제는 세상에 없는 풍경이기도 했다.

‘나’는 몸을 돌렸다. 책상 앞에는 이벨리나가 앉아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있을 제 스무 살 생일에 관련된 서류였지만 그 외에도 많은 성녀의 의무로 지친 그녀는 별다른 감흥 없는 얼굴로 그것을 읽고는 서명한 다음, 옆에 두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벨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요.”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긴장했다. 설마 카를이 들어오는 건가?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알릭이었다. 키가 크고 말수가 적은, 이제 막 서임을 받은 젊은 신관. 그는 품 안 가득히 서류를 든 채 이벨리나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피곤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얼굴에 상쾌한 웃음이 걸렸다.

“고마워요, 알릭.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네요.”

“고생이라니요. 성녀님에 비하면 전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은 다음 집무실 안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우물거렸지만 그 누구도 먼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살짝 홍조가 도는 뺨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목이 메어 왔다. 이 이후에 일어날 일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짓밟히는지를.

그렇게 침묵이 이어져 갈 때, 먼 곳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이 보였다. 대신전 밖에 있는 마을에서는 벌써부터 곧 다가올 성녀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소리와 불빛에 이벨리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알릭, 저기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요? 함께 나가서 구경할래요?”

그 말에 나는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삼켰다. 이벨리나의 기억을 보고 언제나 생각했었다.

너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너는 어떻게 해야….

성녀로서의 긍지를 갖고 있었기에 마지막에는 그 긍지마저 제 손으로 죽이려고 했던 이벨리나였다. 제가 당했던 일들, 그리고 제 앞의 누군가가 당했을지도 모르는 아픔을 이다음의 누군가는 겪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그녀.

모든 것은 이벨리나가 원하는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벨리나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다시 펼쳐질 비극에 절망하려던 나는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이벨리나가 알릭에게 함께 나가는 것을 제안했던 것은, 이미 카를이 그녀를 갉아먹기 시작한 이후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그녀는 카를의 검은손이 뻗어 오기 전에 알릭을 만나 그에게 함께 밖으로 나가 보지 않겠냐고 묻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 다른 사실에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건 꿈일 것이다. 이벨리나를 안타까워하던 내가 꾸는 꿈.

그렇다면…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창밖 멀리 불꽃이 터졌다. 이벨리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녀라는 이름이 짊어지는 너무 거대한 것들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모두가 보러 가는 불꽃놀이 한 번을 보러 가지 못하는 삶을 살았을 정도로.

그때, 알릭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나가 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안내하겠습니다.”

“……!”

그의 대답에 이벨리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언제나처럼 점잖은 말로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감히 성녀님을 저런 속된 자리에 모실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았다. 감히 제가 닿을 수 없는 존재와 함께하기 버거우니 농담처럼 흘려 넘기고 돌아간다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저, 정말 같이 갈 거예요?”

그 말에 알릭은 얼굴을 붉혔다.

“…제가 자주 가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성녀님께서 보시기에는 무척이나 초라한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맛은 있….”

“갈래요! 지금 갈래요! 꼭 가고 싶어요!”

이벨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까 옷을… 잠행용 옷이 어디 있더라? 그냥 나가면 분명히 카를이나 대신관이 뭐라 할 테니까 비밀 통로로… 앗! 알릭 귀 막아요! 이건 대신전의 비밀이니… 아니, 어차피 당신도 같이 가는데 비밀이라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죠? 그보다 뭐가 필요하나요? 돈? 얼마나 필요하죠?”

흥분으로 들뜬 그녀는 평소의 점잖음은 전부 집어던진 채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기대되어 어쩔 줄 모르는, 열아홉 살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서고에서 이어지는 복도를 걸었다. 두 사람 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깊이 후드를 쓴 상태였다. 한참을 걸어 가장 끝에 있는 방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손이 단단하게 얽혔다. 두 사람은 문을 열고 푸른빛의 너머로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리의 안쪽에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 카를이 남겨 놓았던 낙인이 있던 자리였다.

대신전이 무너지고 그가 영원히 불 속에서 고통받아도 이 낙인은 희미해졌을 뿐,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었다. 라트반이나 레온이나 그것을 무척이나 불쾌해했고 또한 마음 아파했다. 아마도 카를이 계속해서 제 흔적을 남겨 두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옷을 올려 다리를 확인했다.

“아….”

그토록 지우려고 해도 남아 있던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나는 고개를 들어 이제 빛의 너머로 사라지는 이벨리나와 알릭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꿈꾸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성녀의 처소는 주인을 기다리다 먼지가 쌓일 것이며 드높은 대신전의 이름과 기세는 서서히 몰락해 갈 것이다.

하지만… 이벨리나는 행복할 것이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서서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멀리서 들려오던 불꽃놀이의 소리가 점차 커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에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라트반의, 레온의, 아슬란의, 레오나의.

나는 눈물을 닦고 하늘을 보았다. 큰 불꽃이 밤하늘 위에서 아름답게 터졌다. 누군가의 끝을, 또 누군가의 시작을 축복한다는 듯이.

나는 눈을 감았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녀가 행복해지는 것만큼, 나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모두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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