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48)

미친 듯이 달리기를 나흘. 군마들이 실신하기 직전이 되었을 때, 그제야 높은 산맥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리나와 라트반은 말을 산맥 아래의 마을에 맡겨 두고 그곳에 머물고 있는 정보원을 찾았다. 그는 리나와 라트반에게 레온의 인장이 박힌 편지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두 사람을 산맥 안쪽으로 안내했다.

몇 개의 산을 넘어갔을까, 갑자기 바람이 변했다.

‘서늘해.’

산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바람에는 땅의 냄새가 짙게 풍겨 왔다. 지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인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하십시오. 동굴 주변의 이끼가 무척 미끄럽습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기사 몇 명이 보였다.

“그간 혹시 변한 것이 있습니까?”

정보원이 묻자 기사가 동굴 안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특별히 변한 것은 없지만 빛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곧 소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소멸이라는 말에 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도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일단 모시겠습니다.”

기사가 앞장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들어가지 않아 벽에는 그을린 자국이 보였고 여러 가지 가재도구가 쌓여 있었다. 리나가 그것을 바라보자 기사가 재빨리 설명했다.

“원래 근처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동굴이었습니다. 산을 타고 약초를 캐거나 사냥하는 사람들이 자주 쉬었다 가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안쪽은 들어가기도 힘들뿐더러 갑자기 수직으로 꺾이는 동굴인 탓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몇 주 전 비를 피하던 마을 사람이 밤이 되자 안쪽의 수직 동굴에서 이상한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마을로 돌아와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기사의 말대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동굴이 갑자기 좁아지며 걷기 힘들어졌다. 그녀의 뒤에서 라트반이 여기저기 부딪히며 힘겹게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앞서가던 기사가 걸음을 멈췄다. 안쪽에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여기서부터는 더욱 조심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기사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램프를 들어 리나에게 안쪽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건….”

길이 끝나는 곳에 큰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내밀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편지에 적혀 있던 수직 동굴이었다. 하지만 편지에 적혀있던 빛은 보이지 않았다. 리나의 표정을 알아차린 기사가 먼저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나타날 겁니다.”

그의 말대로 리나는 가만히 동굴 속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녀의 심장이 거세게 쿵쿵거렸다.

‘정말로 아슬란일까?’

그의 마지막이 아직도 선명하다. 신과 섞였던 그의 모습이. 어쩌면 불안정한 곳에서는 현신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던 목소리. 그 말에 꼭 찾으러 가겠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일까.

잠시 후, 어둠만이 가득한 동굴의 아래쪽에서 금색의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빛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다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금색의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빛의 원이 생겨났다. 그러다 빛이 동굴 안에 가득 찬 순간. 빛의 너머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희미하던 것들이 점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다 그것들이 확실하게 보이는 순간 리나는 빛 너머로 보이는 것이 이 세계가 아님을 알았다. 나무와 비슷한 것들이 보였으나 움직이는 것들은 이 땅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마수. 이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크기와 형태의 짐승들은 빛의 너머에서 서로를 잡아먹고 있었다.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기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리나는 기사에게 물었다.

“이 빛은 한 번 나타나면 얼마나 유지되나요?”

“매번 다릅니다. 빠르면 눈 몇 번 깜박이기도 전에 사라져 버릴 때도 있고 주민들의 말을 들으면 하루 넘게 계속 나타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길게 나타났지만 사라지기까지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때, 빛 너머의 풍경에 변화가 생겼다. 서로를 물어뜯던 마수들이 갑자기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도망갔다. 마수들이 사라진 자리에 곧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슬란?”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의 컬을 가진 거대한 사자의 형상. 그것만을 보면 분명 아슬란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제가 기억하고 있던 아슬란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리나는 곧 답을 찾았다.

“…작아?”

물론 저 집채만 한 덩치를 작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두가 본 아슬란의 본체는 저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그와 비교하면 지금 보이는 모습은 크기가 절반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이나 아슬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리나가 기사에게 질문했다.

“혹시 이 너머로 접근을 한 적이 있나요?”

“주변을 지킨 이후로는 더 접근하지 않았습니다만 처음 이곳을 발견했던 주민들이 신기해서 건너편에 뭔가를 집어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주민들이 보았을 때는 들개와 늑대의 중간 정도 되는 짐승이 있길래 돌멩이를 던져 본 모양입니다. 던졌을 때 돌멩이는 건너편으로 갔고 돌멩이에 맞은 짐승이 주민들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빛이 사라지는 바람에 건너편의 것들이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그 말에 리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제가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안을 뒤적였다. 곧 그녀의 손에 얇고 긴 줄이 들려 나왔다. 야외에서 천막을 칠 때 쓰는 줄이었다. 그다음 리나는 가방 안에 있는 것들 전부를 다 바닥에 꺼내 놓은 다음 가방끈에 줄을 묶었다. 몇 번이고 단단히 묶인 것을 확인한 리나는 빛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아슬란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다람쥐와 비슷한 작은 동물이 있었다. 리나는 재빨리 가방을 빛 너머로 던졌다.

원래 이곳은 바닥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아주 깊은 동굴이었다. 그러니 그다지 길지 못한 이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야 할 텐데, 가방이 빛 너머 풍경의 땅에 떨어진 순간 끈은 더 이상 풀어지지 않았다. 건너편에서는 소리가 났던 것일까. 작은 동물은 리나가 던진 가방을 경계하는 듯하더니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빛무리가 다시 거세게 회전을 시작했다. 동시에 건너편의 모습이 흐려지면서 리나가 들고 있는 끈이 폭풍에라도 휘말린 듯 흔들렸다. 그 탓에 놀란 리나가 끈을 끌어당겼지만 던질 때와는 달리 쉽사리 끌려 오지 않았다.

“앗!”

그러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보고 있던 라트반이 재빨리 리나를 붙든 다음 손을 쳐 그녀가 끈을 놓게 만들었다.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끈의 끝이 빠르게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잠시 후, 마치 빛이 뱉어 낸 것처럼 가방이 맞은편에서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

가방을 본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멀쩡한 가방이었는데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가방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라트반은 그것을 제 앞으로 끌어와 살폈다.

“마수의 짓은 아니군요.”

처음에는 건너편 세계의 마수에게 당하기라도 한 것인가 하고 봤지만 가방에 이빨이나 발톱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왜….”

좀 더 살펴본 라트반이 가방을 조심스레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대답했다.

“이건 오래되어 삭은 겁니다.”

“무슨 소리예요? 얼마나 지났다고.”

라트반의 말에 리나와 기사는 가방을 보았다. 처음에는 라트반이 뭔가 잘못 안 게 아닌가 싶었지만 두 사람은 곧 말을 잃었다. 정말로 수십 년 어딘가 던져져 있던 것처럼 가방은 낡아 해져 있었다.

“…….”

등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이곳에서는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저쪽에서는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이다. 리나는 옆에 서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안내 고마워요. 우리는 이것을 좀 더 확인하고 갈 테니 밖에 나가 있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린 기사는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을 조심스레 피해 왔던 길을 돌아 나갔다. 그가 받은 명령은 이곳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도착하는 사람들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라는 명령이었으니까.

기사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리나는 다시 동굴 안을 보았다. 그사이 빛의 너머는 다시 낯선 곳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게 이런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혹시나 아슬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던가. 이것과 비슷한 기적은 여러 번 보았으나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

리나는 허탈함을 느꼈다. 드디어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성력을 쓸 수도 없고.’

성력은 이 세계를 안정시키는 힘이다. 그렇기에 잘못 사용했다가는 불안정함의 증거인 이것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리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빛의 건너편을 보았다.

“아….”

빛의 건너편에는 어느새 바뀐 풍경이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바뀐 풍경의 가운데 아슬란이 본체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

그러자 갑자기 빛의 줄기가 폭발이라도 하듯 솟아오르면서 동굴 안이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으로 가득 찼다.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석판 안에 갇혀 있던 고대 신이 이런 모습이었다. 빛줄기는 빠르게 리나와 라트반을 휘어 감았다. 그러더니.

“큭!”

빛줄기가 라트반의 목을 휘감아 조였다. 그는 재빨리 허리춤의 검을 꺼내 성력을 담아 빛줄기를 베어 내었다. 라트반의 손길에 힘없이 빛줄기가 후드득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막아 내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던 빛줄기는 라트반이 검을 고쳐 잡느라 손을 놓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그의 품에 있던 리나를 휘감았다.

“악!”

“리나!”

갑자기 당겨지는 느낌에 리나는 놀라 성력을 끌어모으고 빛줄기를 향해 던졌다. 그러자 그것은 괴롭다는 듯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리나를 놓지 않았다.

“젠장!”

라트반은 저를 막아서는 빛줄기들을 잘라 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를 잘라 내면 두 개로 늘어 와 그를 덮쳤다. 그사이 리나는 기적의 가까이로 끌려가고 있었다. 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빛 너머에서 아슬란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대 신과 섞였었어.’

그렇다면 지금 이 빛줄기는 아슬란일 것이다. 빛줄기는 리나를 그저 끌어당길 뿐 어떠한 위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트반을 향해서는 지독하리만큼 공격적이었다. 그 모습에 리나는 확신을 얻었다.

‘…아슬란이 확실해.’

레온도 싫어하긴 했지만 아슬란은 라트반을 더욱 경계했었다. 아마도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자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이 몸은 더욱 빛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를 데려가려는 건가.’

분명 이 너머는 위험할 것이다. 다른 세계가 부딪히면서 생기는 공간을 인간의 몸으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조금 전 가방이 떠올랐다. 만약 그렇게 되면…. 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빛이 회전하기 전에 넘어간 가방의 모습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리나는 빛을 살폈다. 또다시 회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분명 이 빛줄기는 저를 절대로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리나는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삼켰다. 잘못되면 분명 지금이 제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더 망설일 수는 없었다. 탁! 리나가 땅을 박차며 달려갔다.

“리나!”

뒤에서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빛은 이미 회전을 시작하며 흐려지고 있었으니까. 리나는 그대로 수직 동굴의 끝에서 뛰어오르며 빛 너머로 몸을 던졌다. 저를 부르는 라트반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다음 그녀를 덮친 것은 끔찍한 아득함이었다.

“읏…!”

심장이 내려앉는 낙하감에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그녀의 정신을 흩트려 놓는 것은 미친 듯이 번쩍이는 빛이었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 눈앞이 무서운 속도로 깜빡였다. 수천, 수만 번의 깜빡임이 지나가자 갑자기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을 본 순간 리나는 알 수 있었다.

떨어지고 있어!

제가 떨어질 곳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아래로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대한 섬도.

이대로 떨어지면 죽음뿐이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미친 듯이 온몸을 때리는 바람 속에서 리나는 정신을 붙잡고 성력을 끌어모았다. 푸른빛이 빠르게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그사이 땅은 무섭도록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꺼운 푸른빛이 완전히 그녀의 몸을 감싼 순간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와드득. 우지끈, 뿌드득. 쾅.

꺾이고 부러지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몸이 정신없이 튀어 올랐다. 마치 고무공처럼 몸이 통통 튀어 올라 숲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는 탓에 시야가 정신없이 뒤집혔다.

다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리나는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한참 후에야 흔들림이 멈췄다. 대신 그녀 때문에 놀라 달아나는 산짐승과 새 떼의 울음소리만이 숲을 가득 채웠다.

“으으….”

리나는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몸을 더듬어 다친 곳이나 이상한 곳이 있나 살폈지만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나는 손을 뻗어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었다. 다행히 평범한 나뭇가지였다.

“이거 본 적이 있는데….”

대륙의 남쪽을 돌아다닐 때 보았던 것과 같은 나뭇잎이었다. 게다가 주변을 뛰어다니는 산짐승을 보니 전부 제가 아는 동물들이었다.

“적어도 내가 있던 세계인 건 맞는 것 같네.”

안도의 숨이 저절로 나왔다. 기적들 중에 자주 있는 현상은 대륙의 북쪽 끝에 있는 기적 속으로 빠졌더니 대륙의 남쪽으로 나왔다거나 하는 공간 이동이었다. 아마도 같은 현상이리라.

‘일단 그러면 마을을 찾아 황궁으로 연락을 해야할까.’

라트반이 지금쯤 제정신이 아니겠다 생각하며 리나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

그녀가 아주 잘 아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들의 탑…?”

예전에 아슬란이 그녀를 데리고 왔던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떨어질 때 망망대해의 섬으로 떨어졌었다. 그렇다면 여기가 마법사들의 섬인 것 같은데….

“…왜 탑이 절반밖에 없어?”

리나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마법사들의 탑을 바라보았다. 벌써 한 시간째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처음에는 탑이 부서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아슬란이 대신전을 파괴하기 위해 떠났을 때, 그는 마법사들의 탑을 부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그 후 혼란을 틈타 마법사들이 저곳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한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마법사들의 탑을 바라본 리나는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마법사들의 탑은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아직 짓고 있는 중이야.”

파괴된 것이라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건만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마법사들의 탑은 척 보아도 이제 한창 짓는 중이었다. 리나는 대신전에 있었을 때 아슬란에 대해 알아보다 마법사들의 섬과 탑에 대해서 보았던 기록이 생각났다.

“분명 천오백 년 전에 이미 다 완성되었을 텐데….”

순간 제가 이곳으로 떨어질 때의 일이 생각났다. 미친 듯이 빛이 깜빡였었다. 그때는 그게 차원을 넘어오면서 생기는 현상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설마….”

만약 그것이 낮과 밤의 하늘이었다면? 그 깜빡임 한 번이 하루였다면?

“세상에….”

리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기적이 나타난 자리에서 공간 이동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 보고되는 것이 시간의 이상 현상이었다. 길을 걷다 갑자기 생겨난 기적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몇십 년이 흘렀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제가 집어 던졌던 가방도 아마 그런 현상과 비슷한 일이었을 것이다.

‘난 거슬러 올라온 건가.’

그때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거대한 형체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

리나는 소리치려던 제 입을 막았다. 하늘에는 아슬란이 있었다. 다른 세계의 모습보다는 훨씬 큰, 하지만 대신전 파괴 당시에 보았던 것보다는 작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법사들의 탑 위에 오가던 사람들이 황급히 뭐라 소리 지르며 몸을 숨기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아슬란은 그런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더 높은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곧 하늘의 한쪽에 거대한 빛무리가 생겨났다. 그러자 아슬란은 갑자기 속력을 높여 그 빛무리에 제 몸을 부딪쳤다.

콰과광!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리나는 귀를 막고 땅에 엎드렸다. 어찌나 큰 소리인지 땅이 흔들려 나뭇잎이 떨어질 정도였다. 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콰광! 콰과광! 연달아 공격하는 굉음에 리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슬란….”

붉은 마수는 제가 부딪힌 차원의 상처를 발로 찢어발기고 있었다.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하늘이 찢어진 것 같은 형태로 빛나고 있던 것은 아슬란의 행동에 하늘에 나타난 빛의 상처는 조금 그 크기가 커진 것 같았다. 그러자 아슬란은 그 너머로 제 몸을 집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빛이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결국 아슬란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허망하게 빛은 사라지고 푸른 하늘만 보일 뿐이었다. 세계가 다시 안정을 찾은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그러자 아슬란이 울부짖었다. 조금 전의 굉음보다 더 큰 소리가 몸을 찢는 것 같았다. 하늘에 떠 있는 아슬란의 몸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조금 전 하늘을 찢으려다 다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이고 하늘을 바라보다 몸을 움직였다.

“떨어지… 나?”

처음에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슬란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마법사들의 탑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는 것 같더니 거대한 불덩어리가 아슬란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리나는 이곳이 어딘지를 깨달았다.

기록에 따르면 마법사들의 섬은 무법천지였다. 이곳은 힘의 강함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땅이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마법사들의 탑을 짓고 있는 자들 역시 마법사들이다. 그들에게 강대한 마력의 덩어리인 마수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땅으로 떨어지는 아슬란의 몸에 불덩이가 다가와 부딪히자 그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쿵! 멀리서 아슬란이 땅과 부딪히며 거대한 먼지바람이 일어났다. 리나는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면서 그가 떨어진 곳으로 뛰었다. 어찌 되었건 지금은 아슬란에게 가야 했다.

***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한참을 뛴 다음에야 리나는 아슬란의 근처로 다가갈 수 있었다. 땅에 쓰러진 마수는 그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숨을 헐떡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예전에 아슬란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왜 새끼가 필요한 건데요?”

“나 혼자서는 내가 넘어갈 만큼 차원을 찢는 게 힘들어. 그러니 내 힘을 이어받아 나만큼의 힘이 있는 마수가 더 필요하지.”

그는 언제나 그가 있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필사적이었어.’

가슴이 아렸다. 이 세계에서 긴 시간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제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도와줄 새끼를 가졌었는데 그는 스스로 제 희망을 죽였던 것이다. 이토록 원하던 일이었는데.

리나는 조심스럽게 아슬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감겨 있던 아슬란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핏빛의 큰 눈동자가 리나를 바라보았다.

“…….”

식은땀이 흘렀다. 아슬란의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그가 당장에 입을 벌리지 않는 것은 제가 잡아 죽이기 너무 쉬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지나가는 개미에 신경을 쓰지 않듯이 말이다. 한동안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리나는 알아차렸다.

‘…나를 몰라.’

하긴, 알았다면 이렇게 누워 있을 아슬란이 아니다. 그때 아슬란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누워 있던 자리는 벌써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리나를 향해 다가왔다. 몸이 저절로 굳었다. 저를 모르는 아슬란은 그저 난폭한 마수일 뿐이다. 여차하면 성력으로 그를 제압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킁킁.

아슬란이 제 코를 가까이 가져오더니 리나의 냄새를 맡았다.

“……?”

아슬란은 몇 번이고 냄새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리나의 머릿속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내 냄새가. 너에게.’

“……!”

그의 말에 리나는 몸을 움찔했다.

‘아직도 나에게 아슬란의 냄새가 남아 있었던 건가?’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제 흔적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리나가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던 중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들이야!’

약해진 아슬란을 노리고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나타난 순간 리나는 몸을 돌렸다. 이런 상태의 아슬란이라면 저들에게….

콰콰쾅!

그 순간 주변에 붉은빛이 퍼져 나가더니 하늘에서 번개와 불덩어리가 나타나 바닥에 내리꽂혔다. 주변에 있던 나무들은 번개를 맞는 순간 폭발하듯 산산조각이 나 터져 버렸고 그 위를 끔찍한 열기가 뒤덮었다. 그를 향해 다가오던 마법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숯이 되었다.

“…당할 리가 없지.”

그가 다치는 모습과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작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가 약자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리나는 제 엄청난 착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대답하라.’

리나가 가만히 있자 아슬란이 대답을 재촉했다. 리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당신과 내가 미래에서 만난 사이인데 어쩌다 보니 아이도 있다고? 그리고 당신은 나를 살리려고 반신이 되었다고?

리나는 제가 생각해도 너무나 허무맹랑한 소리임을 알고는 고민에 빠졌다.

‘어서!’

그사이를 참지 못하겠는지 아슬란이 재촉했다. 한 번도 아슬란은 그녀에게 소리를 지른 적이 없었기에 리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말했다.

“귀 아파요, 아슬란!”

그러자 아슬란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내 이름. 어떻게?’

“…….”

‘누구도. 모른다.’

“…….”

실수했다. 날카로워진 아슬란의 시선을 느끼며 리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아슬란이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리나를 물었다. 비명을 지르려 하던 리나는 그가 마치 어미 개가 새끼를 옮기듯 제 뒷덜미의 옷을 물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아슬란이 다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당장 성력으로 그를 후려칠까 고민하던 리나는 일단은 가만히 있어 보기로 했다. 얼마나 날았을까. 섬의 끝자락으로 온 아슬란이 땅에 내려앉았다. 날아오는 길에 본 섬의 가운데에는 깊은 절벽이 있고, 그 사이에는 마수들이 둥지를 튼 상태였다. 아슬란이 내린 곳은 그 절벽 너머였다.

‘여기가 아슬란의 영토인 것 같은데.’

집이나 길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마수들이 사는 절벽을 넘어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슬란은 물고 있던 리나를 내려놓았다. 그로서는 나름대로 조심한 행동일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힘 조절이 안 되었는지 리나는 바닥을 뒹굴었다.

아슬란은 고개를 숙여 그런 리나의 몸을 킁킁거리며 다시 냄새를 맡았다.

‘기분 나쁜 냄새. 다른. 수컷..’

아슬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살기가 느껴졌다. 그런 아슬란의 모습에 리나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은 이 세계로 떨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아슬란이다. 그렇기에 그의 감정은 순수한 마수의 것 그대로였다.

‘역시 죽인다.’

아슬란의 말은 진심이었다. 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력을 사용하면 잠깐 동안은 아슬란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시뿐이다. 좀 더 확실하게 그를 제압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바닥을 기던 리나는 제 옷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목걸이!’

레오나가 준 목걸이를 소중히 보관하기 위해 안쪽의 깊은 주머니에 넣어 뒀었다. 리나는 서둘러 그것을 꺼냈다.

‘마력을 제압하는 아티팩트였지.’

그래서 평소에는 레오나의 마력을 눌러두기 위해서 쓰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누를 수 있냐 물어봤을 때 레온은 이걸로 아직까지 제압하지 못한 자가 없어서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자신도 모르겠다 했었다. 리나는 그것을 강하게 쥐었다. 그 한계를 지금 실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목에 걸어야 하는 건 아니니.’

닿기만 해도 이 아티팩트는 효과를 보인다고 했다.

리나는 몸을 일으켰다. 저렇게 경계하고 있는 아슬란이 순순히 제 손에 닿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리나의 손끝에 빠르게 푸른빛이 모여들었다. 다행히 그녀의 성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슬란은 갑작스러운 리나의 변화에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성력이 저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리나는 제 성력을 있는 대로 전부 끌어모으면서 외쳤다.

“미안해요, 아슬란!”

리나는 있는 힘껏 제 성력을 아슬란을 향해 휘둘렀다.

퍽!

섬 전체에 뭔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리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아름답네….”

리나는 절벽의 끝에 있는 바위에 앉아 해가 저물어 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드러누운 다음 영원히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제 뒤에서 벌거벗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슬란을 보면 그럴 생각이 싹 가시고 만다.

잠시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피했던 리나는 몸을 돌려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아슬란. 혹시 마법으로 옷 만들어 낼 수 있어요?”

“크르르.”

그녀의 질문에 아슬란의 이를 드러내었다. 리나는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성력을 끌어모아 그를 후려친 다음 그가 빈틈을 보인 순간 목걸이를 그의 발톱에 걸었다. 레온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아슬란의 마력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점점 아슬란의 몸이 줄어든다 싶더니 어느새 그는 그녀가 기억하던 인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머리카락은 산발에 여기저기 상처가 많은 데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는 것이지만.

리나는 재빨리 목걸이를 그의 목에 건 다음 성력을 이용해 그것을 그의 목에 고정시켰다.

‘라트반과 함께 야외 노숙을 하면서 성력을 이리저리 편하게 이용할 방법을 연구했던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어쨌거나 아슬란은 그렇게 제압되었다. 운이 좋았다. 그는 다쳤었고 아티팩트는 생각보다 강했으며 성력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리나는 팔짱을 낀 채 저를 노려보는 아슬란의 모습에 심란해졌다. 예전에 그가 좀 헐벗은 복장을 하고 다닌다 생각했는데 지금처럼 완벽한 나신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그가 그동안 정말로 노력해 껴입고 다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자주 상상을 했었다. 반가운 마음에 울지 않을까 했었는데 정작 만나니 그를 개 패듯 두들겨 팬 다음 벌거벗은 몸을 심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게 될 줄이야.

‘하긴, 내가 만난 아슬란은 아니니….’

아슬란은 맞지만 그녀가 찾던 아슬란은 아니다. 숨길 수 없는 실망이 리나의 얼굴에 떠올랐다.

‘일단 확실한 건 여기가 과거의 대륙이라는 건데 지금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한다?’

일단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모두 난리가 났겠네….’

저를 부르던 라트반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지금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지 생각하니 누가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뒤따라 들어온 건 아니겠지?’

가방이 그리되는 꼴을 보았으니 위험하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들어온다 해서 자신과 같은 곳으로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면 라트반은 좀 더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을 한 다음에야 움직일 것이다.

계속해서 리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곳에서도 기적들을 찾아서 원래의 시간으로 건너가야 하나? 하지만 원래의 세계에서처럼 레온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찾기 힘들 텐데 혼자서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저쪽에서는 아직도 동굴 안에 있는 기적이 나타나고 있을까? 시간이 저쪽의 세계와 이쪽의 세계가 똑같이 흐르고 있는 것이긴 할까? 이러다 돌아갔는데 설마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지? 그것보다 레오나에게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건 어쩐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머리가 아파 왔다. 게다가 성력을 있는 대로 끌어 쓴 탓에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일단 쉴 곳과 먹을 것이 필요했다. 리나는 근처를 뒤져 봐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갑자기 시야가 빙글 돌았다. 휘청이던 몸이 힘없이 풀밭 위로 쓰러졌다.

‘맙소사.’

아무래도 제 생각보다 성력의 소진이 더욱 심했던 모양이었다. 리나는 스르르 감겨 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벌거벗은 채 서 있던 아슬란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이런 곳에서 저런 아슬란에게 죽게 되는 걸까.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리나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이상한 인간이야.’

아슬란은 쓰러진 여자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한숨을 푹푹 쉬며 저를 바라보던 눈은 굳게 감겼고 입은 가는 숨을 쌕쌕 내쉴 뿐이다. 땀을 흘리며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니 추위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슬란은 손을 뻗어 여자를 만져 보았다. 긴 손가락이 여자의 팔에 닿는 순간 그는 제 손에 놀라 황급히 손을 떼었다.

‘인간의 모습이라니.’

지금까지 이 세계에 떨어진 다음 인간의 모습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슬란은 어색한 제 몸을 만지다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았다. 그는 다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킁킁거렸다. 모습은 인간이었지만 다행히 후각은 마수의 것이었기에 그는 여자에게서 나는 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본 적 없는 인간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제 냄새가 난단 말인가. 그것만이라면 좋은데 제 냄새보다 훨씬 더 강한 다른 냄새도 묻어 있는 여자였다. 아슬란은 그 사실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내 냄새만 나면 좋겠어.’

처음에는 죽일까 했었는데 어느새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아슬란은 여자를 물어 들려다가 인간의 몸으로 무리인 것을 알고는 잡아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그는 한 손으로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만졌다. 이 아티팩트가 제 마력을 억누르긴 했지만….

‘곧 한계가 올 것 같은데.’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감히 제가 삼킬 수 없는 것을 욕심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알아서 곧 바스라질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아슬란은 불편하긴 하나 일단 목걸이에 대한 짜증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그보다 더 그의 신경을 붙잡는 것은 쓰러진 이 여자였다.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집이라는 것을 짓고 비와 바람을 피하려 하는 약한 존재인 것은 알고 있다. 안 그러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아 죽는 것들이니까. 아슬란은 곧 산등성이에 있던 짐승들의 보금자리를 기억해 냈다. 제가 온 후에 다 잡아먹었으니 그곳은 텅텅 비어 있을 터였다. 아슬란은 여자를 들고 그곳으로 빠르게 달렸다.

여자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무척이나 좋은 냄새가 났다. 게다가 저에게 닿은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어쩐지 기분도 좋고. 달려가면서 아슬란은 제가 뭘 하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이 여자에게 제 냄새를 더욱 묻히고 싶었다.

***

천천히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리나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덥다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느낀 것은 간지럽다는 것이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피로감이 몸을 눌렀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피곤에 젖은 머리가 쉽사리 쓰러지기 전의 일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무엇인가가 그녀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읏….”

따뜻하지만 축축한 것. 혀가 분명했다. 그것은 그녀의 목 위에서 지분거리더니 곧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쇄골 위에서도 한참이나 머물며 비벼 대던 그것은 좀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가슴 위를 문질렀다.

“흐읏….”

피곤에 절은 몸이 자극에 반응했다. 그러자 거친 숨이 가슴 위로 쏟아졌다. 곧 까슬한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그 위로 다시 뜨거운 혀가 움직였다.

“읏, 하, 하지 마….”

애처로운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상대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기세를 올려 그녀의 가슴을 빨아 대었다. 손은 가슴을 제 것인 양 주물러 대고 입은 주변의 피부를 빨아들이며 잘근잘근 씹어 댔다. 강약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극에 리나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긴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리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슬… 란….”

제 이름이 불리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핏빛의 눈동자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한참이나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던 아슬란은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그러더니 다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핥기 시작했다. 그제야 리나는 제 옷이 거의 벗겨져 있으며 그가 열심히 제 가슴을 핥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넌 뭐야.”

“……?”

“이름. 뭐야.”

“…리나.”

리나가 제 이름을 말하자 아슬란은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인간의 모습으로 움직이는 게 아직 어색한 모양인지 발음도 미묘하게 확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계속 연습을 하던 그는 이내 처음 불렀을 때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리나, 리나.”

그사이 리나는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바위가 보였지만 동굴은 아니었다. 큰 바위의 밑인 것 같았다. 제 아래에는 푹신할 정도의 낙엽이 깔려 있었고 옅게 짐승의 냄새가 났다. 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툭. 반쯤 찢긴 옷과 속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봐도 뻔했다. 벗기려다 안 벗겨지니 찢은 모양이다. 힘도 제대로 조절이 안 되는 모양인지 몸 여기저기에 손자국과 손톱자국도 잔뜩이었다.

‘한 대 더 때릴까…?’

하지만 모든 성력을 끌어모아 써 버린 탓에 다시 성력이 모이기는커녕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 정도였다. 리나는 몸을 웅크리고 아픈 머리를 눌렀다. 어찌 되었건 다행인 것은 아슬란이 저를 당장 죽이려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아슬란은 아직 마수의 성격이 너무도 강한 데다가 제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마음을 바꾸어 공격을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리나는 일단 찢긴 옷을 어떻게든 수습해 가슴을 가렸다. 그러자 아슬란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서는 겨우 다시 입은 옷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잡아 뜯었다.

“하지, 마.”

“…….”

아니 이게 무슨 제 것인 줄 아는 건가. 아슬란은 잡아 뜯은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뜯어낸 옷을 손과 입으로 갈기갈기 찢었다. 바닥에 갈가리 찢겨 흩뿌려진 천 조각을 보면서 리나는 다시 아파 오는 머리를 눌렀다. 이 무슨 개도 아니고.

그사이 아슬란은 그녀의 바지에 손을 뻗었다. 리나는 이것만은 지키겠다는 의지로 옷을 붙잡은 다음 그에게 말했다.

“추워요. 당신은 상관없겠지만 난 인간이라 추우면 힘들다구요.”

그 말에 아슬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땅에 끌릴 정도의 긴 붉은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그녀의 등허리로 쏟아져 내리며 그녀의 몸을 덮었다. 허리를 잡은 팔에 힘을 주어 제 몸으로 더욱 달라붙게 한 아슬란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는 한참이나 숨을 들이마시더니 물었다.

“따뜻해?”

“…….”

따뜻하긴 한데 이런 방식으로 추위를 해결해 달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하고 아슬란을 떼어 놓아야 하나 그녀가 고민하던 사이 맞닿아 있는 아래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어….”

놀란 리나가 아래를 바라보려 할 때 아슬란이 제 아래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번식기 아닌데, 왜?”

이상하다.

아슬란은 제 아래에서 꺼덕거리고 있는 것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인간의 모습이지만 이게 뭔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언제 이것이 이렇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슬란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마수다. 마수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저를 받아 낼 준비가 된 암컷이 있지 않는 이상 자신은 발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아슬란은 제 품 안에 있는 리나의 목덜미에 다시 얼굴을 박았다. 향기로웠다. 꽃이 가득 피었던 들판의 향기보다 더욱더. 아니, 그보다 훨씬 아찔하다. 맡은 것만으로도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돌고 심장이 고동친다. 아슬란은 손을 움직여 리나의 가슴을 강하게 쥐었다.

“아슬란! 아, 아파…!”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에도 향기가 밴 것 같았다.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 아슬란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제 손안의 말캉거리는 살덩이가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리나가 잠들었을 때 좋은 향기가 올라와 실컷 핥아 대었던 곳이다. 처음에는 손톱으로 긁었다가 피가 배어 나오는 바람에 핥았더니 리나는 잠들어 있음에도 신음 소리를 내었다. 게다가 분홍색의 돌기는 점점 더 짙은 색으로 변하며 단단하게 일어섰다.

‘다른 짐승이나 인간에게도 붙어 있는데.’

하지만 예뻐 보이는 건 이것뿐이다. 아슬란은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듣고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신음은 멈추고 달뜬 숨만 남았다.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아슬란은 식욕을 느꼈다. 지금 이 인간을 통째로 삼키고 싶었다. 머리카락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삼켜 버리면 평생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는 고개를 들어 리나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인간의 표정을 섬세하게 읽어 낼 수는 없기에 눈빛으로 그녀의 감정을 읽어야 했다.

‘왜…?’

제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인간이다. 게다가 이렇게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는데 이 인간의 눈빛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리나는 제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아무도 모를 것이 분명한 제 이름을. 그때 리나가 손을 올려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아슬란은 생소함을 느꼈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부모란 것이 없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연적으로 태어난 마수였다. 그 어떤 존재도 그의 곁에 있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접촉이라는 것은 낮에 저를 공격했던 마법사들처럼 저를 해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지금 리나의 손길처럼 마치 저를 안쓰럽다는 듯, 마치 돌보아 주어야 할 어린 것처럼 취급하는 손길은 그가 처음으로 겪어 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다 귀를 매만졌다. 아슬란은 저도 모르게 몸 전체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귀를 만지고. 뺨을 어루만지고. 그러다 목을 더듬거리고. 목걸이 탓에 마력이 눌린 상태라면 지나가는 날벌레 하나에도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이상하게도 리나의 손길에는 모든 긴장이 스르르 풀려 버리고 만다. 다시 그녀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리며 아슬란은 확신했다.

‘리나는 나를 알고 있어.’

아슬란은 이 세계로 와 지금까지 제가 만났던 인간들의 얼굴을 전부 떠올려 보았다. 거기에 리나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분명 그녀에게서는 연하지만 제 냄새가 났다.

아슬란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몸을 숙여 다시 그녀를 낙엽 위에 내려놓았다. 제가 벗겨 놓은 하얀 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슬란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아슬란?”

제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를 즐기며 그는 리나의 다리를 벌렸다.

“뭘 하려고… 읏!”

아슬란은 거침없이 다리 사이에 제 얼굴을 묻었다. 리나의 몸 어느 곳이나 저를 흥분하게 하는 향기가 났지만 조금 전부터 유독 이곳에서 그 향이 짙어지고 있었다. 마수의 후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슬란은 버둥거리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더욱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손이 그녀를 가리고 있는 옷을 붙잡았다.

“아슬란, 찢으면 가만 안 둘 거예요!”

그의 행동에 리나가 소리쳤다. 위협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지만 아슬란은 움직임을 멈췄다. 만약 지금 제가 조금 전처럼 이것을 찢으면….

‘싫어하겠지.’

싫어한다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감정 중 하나였다. 알고는 있지만 별로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감정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아슬란은 슬쩍 고개를 들어 리나의 얼굴을 살폈다. 입술까지 꽉 깨물고 저를 노려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찔 얼굴을 뒤로 물렸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리나가 저를 싫어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아슬란은 조심스레 그녀의 하의를 붙잡았다. 이리 당겨 보고 저리 당겼더니 그것이 아래로 조금 내려와 그녀의 배 아래가 드러났다. 마수가 ‘벗긴다’라는 개념을 이해한 순간이었다.

그다음부터 아슬란의 손이 주저 없이 움직였다. 찢어지지 않게, 피부가 다치지 않게 천을 잡아 내리는 것. 꾸물꾸물 손을 움직이는 아슬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차라리 차원의 틈을 찢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그의 마음이 다급했기 때문이다. 잘 내려오지 않는 바지를 잡아당기면서 아슬란은 제 아래를 보았다.

이미 잔뜩 흥분한 그의 성기 끝이 흘러내린 액으로 번들거렸다. 아주 진한 제 냄새가 느껴졌다. 이걸 지금 리나의 아래에 문지르면….

‘다른 냄새들은 다 지워질 거야.’

그녀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다른 기분 나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슬란은 그것이 다른 수컷들의 냄새임을 알았다. 지금 이 냄새의 주인들이 제 앞에 있었다면 그대로 머리를 날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그녀에게 제 냄새를 더 많이 묻히는 일이 중요했다.

아슬란은 리나의 하의를 벗겨 냈다. 하지만 그는 곧 짜증 섞인 얼굴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노려보았다.

“왜, 또 있어?”

왜 인간들은 이런 천 쪼가리를 여러 개나 제 몸에 감고 있는 건지. 슬슬 참기 힘들어진 욕구 탓에 아슬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나는 온전히 벗겨 내었으니 이건 찢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일까. 리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손이 아래를 가리던 천의 끈을 매만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것은 쉽게 풀려 떨어졌다.

아슬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천 조각이 사라졌다는 것보다 저를 위해 그녀가 움직였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슬란은 곧바로 제 것을 그녀의 아래에 대었다. 아주 잔뜩, 제 냄새를 묻힐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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