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48)

“괜찮을까요?”

리나는 창가에 턱을 괸 채 먼 곳에 있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런 리나의 표정에 레온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라트반 경과 함께 갔으니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건 저 산맥에 사는 마수들이에요.”

“부정할 수 없네요….”

라트반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일단 레오나가 다칠 염려는 없었다. 게다가 낮에 라트반과 함께 사라져 버린 모습을 보니 그사이에 마법을 쓰는 것에 더욱 능숙해진 모양이었다. 최강의 기사와 아직 최강은 아니어도 곧 최강이 될 마법사가 함께 있다. 거기에 아마 황제도 될 것 같고.

“사실 오자마자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이제야 말하게 됐네요.”

“뭔가요?”

레온은 소파에 올린 리나의 손끝에 제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얼핏 보면 쓰다듬어 달라는 강아지 같은 행동이었지만 움직임과 눈빛은 영락없는 맹수의 것이었다.

리나는 먼 곳의 산맥을 보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그녀가 저를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 레온이 있었다. 리나가 물었다.

“왜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이리스에게 상황을 듣고 급하게 달려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오늘 자신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분명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레온은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리나의 질문에 레온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급한 일이 아니니까요. 정확히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리나, 나는… 아니,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원하고 있지요.”

‘우리’라는 말에 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레온이 말하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 모두가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싶어 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아요.”

“…….”

그의 말에 리나의 표정이 흐려졌다. 레온은 일어나 그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리고 난 두려워요.”

“무엇이….”

“내가 부르면 당신은 와 주겠지요. 그것이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그러다 보면 나는 욕심이 생길 겁니다. 좀 더 있어 주면 좋겠다. 매일 곁에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당신이 떠나지 않기를 강렬하게 원하게 될 겁니다. …강제로 당신을 붙잡아 둘 만큼.”

“…….”

“그래서 참고 있는 거예요. 내가 당신의 자유를 망가트리지 않도록.”

레온의 말에 리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제국의 황제다. 그런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라트반이 그리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지만 세상 전체가 두 사람을 쫓아온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리나는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가 레온의 뺨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레온.”

“…….”

“정말로… 언제나 당신에게는 고마워요.”

진심이었다. 레온은 너무 많은 것들을 도와주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리스도, 라트반도, 거기에 레오나까지. 많은 일들이 레온이 있었기에 손쉽게 해결되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을까.

레온은 제 뺨에 쏟아지는 자잘한 입맞춤을 기분 좋은 얼굴로 느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내 사랑하는 황후를 위해서 말입니다.”

황후. 그 말에 리나는 눈을 감았다.

“이 제국의 가장 고귀한 사람. 오늘은 부디….”

레온은 제가 원하는 것을 속삭였다.

“내 아내로 있어 줘요.”

레온은 침대 위에 리나를 눕혔다.

황제 부부를 위해 만들어진 침실이었건만 레온은 대부분 혼자 이곳에서 잠들어야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의 곁에 새로운 여자를 넣기 위해 노력했던가. 하지만 레온은 이제 그의 옆에 그녀 외에 그 어떤 여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멋대로인 황후다. 세상의 모든 신기한 것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남편을 놔둔 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대륙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황후. 하지만 레온은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었다. 그녀의 앞길에 어떠한 거슬리는 것이 없도록.

레온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리나의 표정에 미안함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랑이 아닌 동정을 받고 사는 삶은 불쌍하다고.

‘멍청한 소리.’

물론 사랑을 받고 싶다. 하지만 레온은 잘 알고 있었다. 제게 배당된 사랑의 크기는 그가 원하는 만큼 크지 못하다는 사실을.

‘나만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제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만큼 라트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남은 한 조각까지 죄다 삼키려 하는 탐욕스러운 자. 신실한 기사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그의 속에 저에게 뒤지지 않을 시커먼 욕망이 있음을 레온은 잘 알고 있었다.

리나가 선택한 그를 정면 승부로 그를 이길 자신은 없다. 하지만 질 생각도 없었기에 레온은 사랑이 아닌 것이라도 주워 삼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레온은 모든 힘을 다해 리나를 도왔다. 그녀는 제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그녀를 돕고 있다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녀를 돕는 일 하나하나에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도움들은 보이지 않는 사슬이 되어서 그녀를 붙들어 매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사실에 묶인 그녀가 제 품으로 떨어지는 날이었다.

“리나, 날 봐요.”

레온은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안함을 가득 담은 표정이었다. 순진한 사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이렇게 당신을 얻기 위함인 줄도 모르고 나를 동정하고 있다니.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이제는 있었던 흔적조차 없는 양심이 아프려고 하니까.

레온은 리나에게 입을 맞췄다. 그가 조르듯 매달리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허락의 증거에 레온은 기쁘게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상쾌한 향과 달콤한 맛이 그의 입 안에 퍼졌다. 지난 1년간 미치도록 그리워한 그녀의 맛이었다. 다시금 레온은 깨달아야 했다. 역시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라는 것을. 닿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정말 닿으니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다. 레온은 사막에서 물을 찾은 사람처럼 그녀를 탐하고 또 탐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넓은 침대 위에 눈부시게 새하얀 나신이 있었다. 레온은 유리잔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아주 잠시 리나와 계속 함께하는 라트반이 떠오르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레온은 재빨리 그 생각을 털어 내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녀는 황후며 제 아내다.

1분, 1초가 레온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니 싫어하는 놈 따위 떠올리며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니 말이다.

레온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왔다. 곧게 뻗은 목에 자잘한 붉은 자국을 남기던 그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자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들썩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레온은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라트반과 함께 있을 때의 리나를 알고 있다. 리나는 라트반의 품 안에서는 이렇게 긴장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긴장한다는 것은… 리나가 제대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은 라트반이 아닌 자신을 보고 있으며, 자신을 느끼고 있다. 또한 받아들여 주고 있고.

레온은 아플 정도로 바짝 일어선 제 아래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당장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레온은 제가 더욱 큰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1년 중 며칠 안 되는 소중한 시간이니만큼 그는 최대한의 행복을 맛보고 싶었다.

서둘러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레온은 제 얼굴을 그녀의 가슴에 묻었다.

“으, 응….”

그의 손이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레온은 손가락 사이에 그녀의 솟아오른 유두를 끼운 채, 손으로 둥글게 문지르듯 원을 그렸다. 잔뜩 긴장을 한 그녀의 몸이 그의 손길에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리나.”

레온이 입을 열자 더운 입김이 그녀의 가슴 끝을 스쳤다. 걸친 것 하나도 없는 몸이 서늘한 공기에 잠겨 있다 갑자기 닿은 숨결에 놀라 파르르 떨렸다. 레온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의 정점을 만족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동안 어디를 다녀왔나요?”

“여기저기… 이리스에게도… 다녀왔고….”

레온이 입을 열 때마다 리나는 참기 힘들다는 듯 몸을 뒤틀었다. 강하게 붙잡는 손길보다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숨결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여기저기라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좀 더….”

레온은 웃으며 그녀의 한쪽 가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살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레온은 아무것도 모른 척 계속해서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자세히 보고 싶기도 하고. 레온은 실수인 척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가슴을 긁었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실리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리나의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크게 펄떡였다.

“저번에… 당신이 책에서 보여 주었던… 그 강에도 다녀왔… 으응!”

제가 다녀온 곳을 떠올리며 그녀가 설명하려고 할 때 레온의 입이 슬쩍 그녀의 가슴을 물었다. 욕심껏 그녀를 입에 담은 레온은 혀로 솟아난 돌기의 주변을 문지르다 혀끝으로 유두를 꾹 눌렀다.

“레온!”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레온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가슴에서 입을 떼었다.

“잘 듣고 있어요. 계속 말해 줘요.”

“물이 거꾸로 흐르는… 하읏… 그 강에… 가, 가서… 아!”

리나가 다시 말을 시작하자 레온 역시 그녀의 가슴을 가득 물었다. 리나가 말려 보려고 그의 머리를 붙잡았으나 그런 미약한 손짓에 물러날 레온이 아니었다. 그는 손을 움직여 가슴을 모아 쥐었다. 계속되는 자극에 단단해진 가슴 끝이 그의 입 안에서 사정없이 비벼졌다.

“레온, 아, 읏…!”

가슴에서 시작되는 저릿한 쾌감에 발끝이 저절로 곱아들었다. 라트반이 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쾌감에 리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을 뒤틀었다. 한참 후, 결국 참지 못한 교성을 뱉으며 축 늘어지고 만 그녀의 위로 레온이 올라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부푼 그의 아래가 꺼덕이며 오랜만에 자신에게 돌아온 아내의 몸을 원하고 있었다. 레온의 손이 길고 흰 다리의 사이로 들어왔다. 곧 그녀의 몸이 활짝 열렸다. 그가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단단하게 부푼 남성의 끝이 애액을 흘리는 입구에 닿았다.

그의 것이 살짝 안을 파고들자 리나의 손이 시트를 쥐었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은 그녀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얽히며 단단하게 두 손이 상대를 붙잡았다. 완벽한 결합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레온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제 아내를 사랑할 시간이었다.

***

“아빠!”

레오나는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황궁 안까지 라트반에게 목말을 태워 달라 해서 들어왔으면서 레온을 보자마자 이제 너는 필요 없다는 듯 톡 뛰어내렸다. 쪼르르 레온에게 달려가 품에 안겨 웃는 레오나의 모습에 리나는 웃어 버리고 말았고 라트반은 별 상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잘 다녀왔니? 재미있었어?”

“응, 라트반 경이랑 마물 잡고 왔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아빠는 엄마랑 재미있게 놀았어요?”

그 질문에 레온은 대답 대신 레오나의 몸을 높이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까르륵 아이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한참이나 사랑스러운 딸과 놀던 레온이 조심스레 레오나를 다시 품에 안았을 때, 레오나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기회를 봐서 라트반 경을 죽여 볼까 했는데 너무 강해요. 매번 들켰어요.”

“괜찮아. 좀 더 크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다 들립니다.”

라트반이 말했지만 부녀는 알게 뭐냐는 듯 라트반의 말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사이 서로 뭘 하고 지냈는지 신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라트반은 한숨을 쉬며 두 사람에게서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리나에게 다가갔다.

“그간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괜찮아요. 잘 지냈어요.”

“다행입니다.”

라트반은 리나에게 더 묻지 않았다. 제가 없던 며칠간 그녀가 이곳에서 레온과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이를 기르며 그녀의 남편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레온이 제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겠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라트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온이 리나에게 강제로 요구한 것이 아니면 되었다.

‘교활한 놈.’

레온은 모든 것을 베푸는 척하며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닻을 내려놓았다. 레오나와 이리스를 핑계 대며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그녀를 원했다. 라트반은 앉아 있던 리나의 머리를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레온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니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뭘 보고 있었습니까?”

라트반은 리나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보았다. 그림과 함께 빽빽하게 글이 쓰여 있는 종이였다.

“그동안 제국에서 목격된 기이한 현상들에 대한 보고서예요.”

“…….”

“…….”

리나의 대답에 다시 라트반과 레온의 시선이 부딪혔다.

아슬란.

그 이름이 두 사람의 입 안을 맴돌았다.

아슬란은 석판에 담겨 있던 고대 신을 쓰러트리기 위해 스스로 신이 되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과연 그를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대함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불멸에 가까운 존재들에게 지금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짧은 순간에 불과할 것이며 자신들이 서 있는 이 세계는 끝없는 광활한 대지 위의 아주 작은 돌멩이에 불과한 크기일지도 모른다.

그 광대한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적이 과연 존재할까.

황궁에 머무는 동안 리나는 대륙 여기저기에서 보고되는 특이한 현상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대신전의 기록도 기억에 남아 있었기에 알 수 있었지만 그런 현상들은 대부분 다른 세계와 이쪽의 세계가 겹쳐지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었다.

세계가 부딪히면서 경계는 흐려진다. 그런 곳을 통해서 주로 마수들이 넘어왔다. 하지만 그런 곳에 나타나는 것은 마수뿐만이 아니었다.

혼돈에서 흔들리며 아무런 의지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들. 그들 역시 약해진 세계의 틈에 나타나는 일이 잦았다. 아슬란이 갖고 있던 석판 역시 그런 식으로 이 세계에 떨어진 신이 아니었던가.

기록을 살펴보던 리나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에 라트반과 레온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떠날 준비를 도와주었다. 예전부터 세상을 직접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그 때문이라기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음은 분명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는데도 딱히 소득은 없었다. 하지만 라트반도 레온도 그녀가 포기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 나랑 놀아요.”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레온의 품에서 벗어난 레오나가 리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리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레오나를 안아 들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다. 자신과 아슬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슬란이 마수로서의 성질을 전부 지웠다고는 해도 가끔 타고난 본성을 드러내는 아이이기도 했다. 리나는 레오나를 안고 테라스로 나갔다. 환한 햇살 아래 반짝이던 레오나의 푸른 눈에 아주 짧은 순간 붉은빛이 스쳐 지나갔다.

“…….”

리나는 연신 제 뺨에 입을 맞추는 레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황녀라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제국은 레오나의 손에 마지막을 맞이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레오나의 손에 다 쥐여 주는 것이 낫겠지. 레오나를 안은 채 뒤를 돌아보자 아빠에게도 뽀뽀해 달라며 팔을 뻗고 있는 레온과 그런 레온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라트반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피식 웃음 짓고 있을 때 갑자기 레오나가 그녀의 품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

그러더니 레오나는 먼 곳을 응시했다. 그저 밝게 웃기만 했던 아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이답지 않은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이었다. 두려움과 긴장, 반가움과 분노. 아이의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들을 읽어 나가던 리나가 물었다.

“레오나? 왜 그러니?”

그러자 레오나는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

세 사람은 레오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멀리 험한 산맥이 보였다. 레오나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돌아왔어요.”

며칠 후, 아덴베르 황궁으로 급하게 말을 몰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깊은 산맥의 가운데에 며칠 전부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오늘 아침, 급하게 말을 타고 지방에서 온 전령이 있었다. 그가 들고 온 편지는 몇 번의 확인을 거친 다음 곧바로 레온에게 왔다.

“반란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리나가 돌아온 다음 성녀를 내세워 일을 꾸미려던 자들이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그것이 잠시뿐이라는 것을 레온은 잘 알고 있었다. 아덴베르에 머무르는 동안 그것들을 죄다 쓸어버리겠다고 다짐했지만 리나와 함께하는 시간에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것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면 정말로 사지를 잘라 돼지 밥으로 던져 주겠다 다짐하면서 레온은 봉투를 열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차라리 반란이나 날 것이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는 편지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았다.

…주민의 신고에 받고 산맥 안에 있는 수직 동굴을 확인해 본 결과 주민들의 말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는 마치 다른 곳과 연결된 것처럼 이 세계가 아닌 생소하고 기이한 곳의 풍경이 비칩니다.

하나 가끔은 대륙 내의 모습도 비치는 것으로 보아 ‘기적’의 발생에 따른 차원의 붕괴 현상인 것으로 보입니다. 비치는 풍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붉은색 털을 갖고 있는 거대한 사자 형상의 마수입니다.

과거 대신전의 붕괴를 목격했던 자를 동반하여 확인한 결과 그 당시의 마수가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주변에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으며….

“아슬란….”

레온은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강대한 마수. 반신. 그리고 리나에게 거대한 빚을 지우고 떠났기에 그녀가 매달리고 있는 자.

“아슬란입니까.”

“……!”

갑작스레 들려온 라트반의 목소리에 레온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라트반이 근처에 서 있었다. 그의 모습에 레온은 소름이 돋았다. 저 역시 어디 가서 뒤떨어지는 기사는 아니었다.

적어도 제국 기사단의 사단장이 되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실력은 갖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주변의 기척을 읽어 내는 데는 익숙했는데, 지금은 라트반이 옆에 있다는 것을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 조금도 눈치챌 수 없었다.

‘더 강해진 건가.’

좋은 일인데 짜증이 났다. 더 이상 신전 기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라트반은 항상 마물과 맞섰다. 리나를 지키기 위한 것과 동시에 예전보다 더 자주 출몰하는 마수로부터 사람들을 구해 주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 경험들이 그렇지 않아도 강한 대륙 최강의 기사를 괴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라트반도 반신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자 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괴물이다. 제국의 황제라는 조건이 어디 가서 밀린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상대가 너무 나쁘다.

레온은 짜증스러운 손길로 들려 있던 편지를 라트반에게 건넸다. 역시나, 편지를 읽어 가던 라트반도 레온처럼 표정이 굳었다.

“정말로 나타난 것 같은데.”

“…….”

레온은 이죽거리며 라트반에게 물었다.

“그 편지, 태우면 잘 탈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레온의 질문에 라트반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편지를 바라보았다. 이것을 이대로 태워 버리면… 리나는 아슬란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이번 생에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존재가 나타난 기적. 기적이 두 번 일어나는 행운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슬란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라트반은 고개를 들어 레온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 역시 자신과 같은 결정을 할 것이 뻔한데 이렇게 떠보는 소리나 하다니. 재미없는 장난이다. 라트반은 몸을 돌렸다. 어서 빨리 이것을 리나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문을 열며 라트반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레온에게 말했다.

“그렇게 아슬란에게 이길 자신이 없어서야.”

그답지 않은 놀림을 가득 담은 말이었다. 그래서 레온은 라트반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자신을 비웃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자신 없다고 그래!”

레온이 소리쳤지만 라트반은 이미 멀어진 후였다.

***

“싫어, 가지 마!”

레오나가 리나의 옷을 붙들고 소리쳤다. 어느새 눈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가지 마. 엄마 가지 마아아아!”

옷을 잡아당겨도 리나가 자리에 앉지 않자 이제 레오나는 리나의 옷을 잡고 매달렸다. 아침에 묶어 준 리본은 워낙에 레오나가 머리를 흔들어 대며 우는 통에 다 풀렸고 리나에게 보여 주겠다며 가져왔던 예쁜 옷은 바닥에 뒹군 탓에 주름이 졌다. 이미 구석으로 날아간 레오나의 신발을 보면서 리나는 레오나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막막해졌다.

“레오나, 울지 말고. 뚝.”

“싫어! 싫어! 으허어엉!”

울지 말라고 했더니 레오나는 더 크게 입을 벌리고 꺽꺽거리며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의 모습에 리나는 가슴이 아팠다. 레오나가 저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어젯밤 레오나와 함께 자면서 잘 알 수 있었다.

라트반과 함께 마수를 잡고 돌아온 아이는 반나절을 내리 자고 나더니 눈을 뜨자마자 시녀들을 졸라 어딘가로 사라졌었다. 한참 후 레오나가 돌아왔을 때, 리나는 아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씻고 온 건지 땀과 먼지가 묻어 있던 머리카락은 곱게 땋아 색색의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보자마자 미소가 절로 지어질 귀여운 옷과 인형까지 들고 나타났다. 리나가 웃으며 팔을 벌리자 레오나는 달려와 까르르 웃었다. 품에 안기는 아이의 몸은 따뜻했고 기분 좋은 아이들 특유의 향기가 가득했다.

리나가 정말 예쁘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자 레오나는 리나의 손을 잡아끌고 어느 방으로 향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순간 리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산더미 같은 옷이었다.

“예쁜 옷으로만 다 가져왔어요!”

예쁜 옷만 골라 왔다는 게 큰 방 네 개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양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옷들까지 가져왔다간 어지간한 저택 하나가 되었을 것이었다. 옷 다음에는 신발, 신발 다음에는 인형. 족히 몇백 개가 넘을 것들을 한 번에 본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때 레오나는 다시 리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엄마, 눈 감아야 해요.”

“왜?”

“빨리이!”

레오나의 재촉에 리나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눈까지 감으라고 하는 건지. 이번에는 무언가를 천 개쯤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리나는 눈을 감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레오나의 따뜻한 작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 감촉이 기분 좋아 리나는 웃으며 레오나를 따라 들어갔다.

“이제 눈 떠도 돼요!”

그 말에 리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것들을 본 순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레오나….”

고개를 돌려 제 손을 잡고 있는 레오나를 바라보자 레오나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거 전부 가져왔어요!”

레오나가 리나를 끌고 온 방은 수백 가지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큰 보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 숲과 호수를 그린 그림, 50년에 한 번 핀다는 희귀한 꽃, 색이 변하는 조개껍질….

레오나에게 이야기를 할 때 지나가듯이 ‘엄마는 이게 예쁜데’라고 말했던 모든 것들이 이 방에 있었다. 레오나는 그녀가 했던 말들을 전부 기억한 다음 비슷한 것들이 있으면 죄다 모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돌아오면 선물하고 싶어서.

리나가 목이 메어 레오나를 끌어안자 레오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엄마 울어?”

“…안 울어.”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레오나는 속지 않았다.

“아빠아아아아! 엄마 울어!”

레오나가 밖을 향해 외치자 곧 우다다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왜? 아….”

방은 본 레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온 라트반은 방 안의 물건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전부 리나가 좋아하는 것들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라트반이 꽃 가까이로 다가가자 레오나가 리나의 품 안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라트반에게 달려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라트반 경은 저리 가! 다 엄마 거야! 엄마만 줄 거야! 만지지 마아!”

그러자 레온이 자신 있는 얼굴로 물었다.

“아빠는?”

“아빠도 안 돼!”

리나는 그대로 얼어 버린 레온에게 물었다.

“세상에, 이걸 다 가져오게 허락해 준 거예요?”

“가져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가져가라 해야지.”

그 대답에 리나는 레온의 교육 방침이 과연 옳은 것인가 고민을 시작했다.

“이건 전부 다 엄마 거야.”

라트반의 앞을 막으며 말하는 레오나의 모습에 리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제가 없는 동안 이것들을 하나씩 모으면서 저를 다시 만날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 걸까. 그날 밤, 저와 더 놀고 싶어 하는 레오나에게 내일도 모레도 놀자고 달래며 함께 잠이 들었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다.

‘기대하고 있었겠지.’

리나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레오나를 보자 손끝이 저려 왔다. 이번에는 멀리 다녀온 탓에 일 년이나 있다가 돌아오게 되었지만 원래 레오나를 레온에게 맡긴 이후로 될 수 있는 한 자주 레오나를 보기 위해 황궁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한 번 돌아올 때마다 꽤 긴 시간을 레오나와 함께했었으니 이번에도 적어도 몇 주는 머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를 보았다. 라트반이 가져온 것은 이곳에서 꽤 떨어진 어느 산맥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한 보고였다. 그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리나는 곧바로 짐을 쌌다. 아슬란이다. 아슬란이 틀림없다.

‘기적은 얼마 있지 않아 사라질 거야.’

기적이란 다른 세계들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상처와도 같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낫듯 기적 또한 사라지고 만다. 이 세계가 회복하기 전에 어서 빨리 그곳에 있는 아슬란을 만나야 했다.

“레오나, 미안해. 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올게.”

“거짓말! 한참 있다 올 거면서!”

그렇게 말한 레오나는 바닥에 엎드려 팔다리를 버둥거리더니 외쳤다.

“그거 만나러 가는 거잖아! 산맥에 있는 그거!”

“……!”

리나는 놀라 레온을 바라보았다. 레온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벙긋거렸다.

말한 적 없어요.

“…….”

하긴, 레온이 저 편지를 레오나에게 보여 주었을 리가 없다. 순간 리나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레오나가 갑자기 먼 곳을 응시하며 ‘돌아왔어요’라고 말했던 것을.

‘설마….’

레오나는 아슬란의 기척을 느낀 것일까. 그때 레오나가 다시 소리쳤다.

“가지 마! 그거 위험하단 말이야!”

위험하다. 그 말에 리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분명 레오나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둘러보니 자신뿐만 아니라 레온도, 라트반도 굳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사이 엎드린 레오나는 더욱 서럽게 꺼이꺼이 울었다. 결국 레온이 나섰다.

“일어서, 레오나.”

“…….”

평소의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느새 레온은 황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싸늘해진 목소리에 레오나는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았다.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제 아버지가 이런 얼굴과 목소리를 할 때는 절대로 제 투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옆으로 오거라.”

레오나는 코를 훌쩍이며 일어섰다. 엉망이 된 아이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지만 레온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데 레온까지 이러니 레오나는 더 펑펑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혼날 거야.’

제게 모든 것을 다 주는 다정한 아빠지만 엄마와 관계된 일에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레오나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레온의 옆에 섰다.

“지금 방으로 돌아가고 싶니? 아니면 인사를 하고 돌아가고 싶니?”

“…….”

“대답하렴.”

“…인사를… 하고… 갈래요.”

레오나는 끅끅거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레온은 레오나를 달래 주지 않은 채 리나에게 말했다.

“서둘러요. 말은 이미 준비해 놨어요.”

“…고마워요, 레온.”

리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레오나를 보며 머뭇거리다 곧 안쪽으로 들어갔다. 라트반이 그 뒤를 따랐다.

짐을 챙기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입을 옷과 언제나 들고 다니던 물건들. 그리고 돈. 그것이면 충분했다. 여행할 때 입는 후드를 눌러쓰고 아래로 내려가자 레온이 미리 일러둔 사람들이 말을 끌고 와 리나와 라트반을 기다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튼튼해 보이는 군마였다. 군마는 강한 만큼이나 그 성격도 강해 다루기 힘들다. 제가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등에 오르지 못하게 하니까.

리나는 다가가 말의 눈을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의 기척에 푸르릉거리며 머리를 흔들던 말이 조금 지나자 얌전해졌다. 옆을 바라보니 라트반도 이미 그가 탈 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거친 군마를 단숨에 길들인 두 사람은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고개를 돌리자 입구에 레온과 레오나가 나와 있었다.

그사이에 얼굴을 씻고 나왔는지 레오나의 얼굴은 조금 부어 있었지만 눈물 자국은 없었다. 레오나는 리나에게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조금 튀어나온 입으로 말에게 명령했다.

“꿇어.”

그러자 말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더니 앞다리로 무릎을 꿇어 몸을 숙였다. 레오나는 작은 손을 내밀었다.

“엄마, 이거 가져가요.”

“이건….”

레오나가 그녀의 손에 쥐여 준 것은 레오나가 언제나 하고 다니던 목걸이였다. 마력을 눌러 주는 아티팩트.

“왜 이걸 주는 거니?”

“몰라. 그런데 엄마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그 말에 리나는 조금 전 레오나가 위험하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이가 건넨 것을 소중하게 받아 가장 깊숙한 품 안의 주머니에 넣었다.

“레오나.”

“…….”

다시 울먹이는 레오나를 본 리나는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린 다음 아이를 끌어안았다.

“약속할게. 이번에 돌아오면 정말로 오래 네 옆에 있을게.”

“…얼마나?”

“레오나가 원하는 만큼.”

“그건 안 돼. 그러면 엄마는 평생 내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여행 못 다니잖아.”

여행이라. 물론 오랫동안 염원하던 삶을 위해 돌아다닌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슬란을 찾기 위함이었다. 리나는 레오나의 뺨에 제 뺨을 비비며 말했다.

“그러면 레오나와 함께 가면 되겠다. 그렇지?”

“…나도 데려갈 거야? 정말? 나도 라트반 경처럼 엄마랑 같이 돌아다녀도 돼?”

“물론이야. 그렇죠, 레온?”

리나가 묻자 레온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황녀인데 그건 좀….’이라고 말할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리나는 레오나의 이마에, 눈에, 뺨에, 입술에 한 번씩 입을 맞춘 다음 다시 말 위에 올랐다. 그러자 레오나는 말에게 다시 명령했다.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알겠지?”

그 말에 군마는 알겠다는 듯이 레오나에게 머리를 숙였다.

채찍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군마가 힘차게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리나와 라트반의 모습이 멀어졌다.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손으로 내젓던 레온은 레오나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러자 레오나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빠, 우리는 언제 가?”

“곧바로 따라가면 라트반이 눈치챌 거야. 그러니 저녁에 출발하자. 하루 정도는 떨어져서 따라가야 알아채지 못할 테니까.”

레온의 대답에 레오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비밀 작전이야!’

아이에게는 비밀이라는 단어도 작전이라는 단어도 세상에서 제일 매혹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두 개가 함께 있다니. 레오나는 제가 책 속에 나오는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은 기사가 된 것 같았다.

“그러니 어서 가서 꼭 가져가고 싶은 것만 가방에 담으렴.”

“응!”

레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오나는 쏜살같이 제 방으로 달려갔다. 그는 제 곁으로 다가온 기사단장에게 명령했다.

“근위대를 준비시켜. 열 명 정도만. 마법사 한 명과 스크롤은 따로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레온은 몸을 돌려 리나가 떠난 자리를 보았다. 어느새 흙먼지는 사라져 있었다.

‘뭔가 있어.’

리나가 짐을 준비하러 들어갔을 때, 그는 레오나에게 물었다. 위험한 게 무엇이냐고.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느냐고. 하지만 레오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숨기려 한다기보다는 제 스스로도 어떻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게 분명해.’

그 일에 저와 레오나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

황궁을 벗어난 리나와 라트반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하루 종일 달리자 튼튼한 군마라 해도 흰 거품을 물며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쉴 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해는 져 버렸고 근처에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노숙을 선택한 두 사람은 깨끗한 개울가를 찾아 말들에게 물과 먹을 만한 풀을 준 다음 가방에 있던 사과를 꺼내 주었다.

그사이 라트반은 빠르게 모닥불을 피우고 리나가 잘 자리를 마련했다. 베게는 없었다. 그의 다리가 그것을 대신할 터였으니. 말들이 잘 쉬는지를 확인한 리나가 개울에서 간단히 씻은 다음 라트반이 준비한 자리에 누웠다.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잠자리였다.

“라트반.”

하루 종일 달렸으니 지쳐 잠들어야 할 텐데도 한참이나 꼼지락거리던 리나가 그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레오나가 말한 위험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위험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리나는 주머니 안에 있는 목걸이를 만졌다. 레오나의 마력이 만만치 않을 터인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억눌러 주는 목걸이였다. 오래전, 황궁에서 마법사들을 제압하는 데 쓴 아티팩트라고 했었는데 어쩌면 이것 역시 아슬란이 갖고 있던 석판처럼 신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걸 줬다는 것은… 마력에 관련된 문제일 텐데….’

리나는 슬쩍 제 손끝에 성력을 모아 다시 목걸이를 만져 보았다.

팅!

그러자 쇠가 부딪히는 것 같은 맑은 소리와 함께 손가락 끝이 얼얼했다. 리나가 놀라 몸을 움츠리니 라트반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문질렀다. 얼얼했던 통증이 천천히 그의 손의 온기에 녹아 사라졌다.

“고민은 그만하고 어서 주무십시오. 도착하면 싫어도 알게 되겠지요.”

“으응….”

그의 말에 리나는 모포를 목 끝까지 올리고 눈을 감았다. 곧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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