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립니다.”
퍽!
라트반의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리나는 창틀에 턱을 괸 채 저택의 앞에서 붕 날아가 바닥을 구르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질 때부터 시작된 대련은 밤이 되어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윽….”
바닥에 쓰러진 트리스탄이 신음 소리를 내자 라트반이 곁으로 다가갔다.
“힘듭니까? 그럼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아닙니다, 라트반 경! 조금만 더 부탁드립니다.”
라트반이 그만하자 말하자 트리스탄은 언제 쓰러졌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라트반에게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보기보다 끈기가 있었다. 리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거기에는 안절부절못하며 밖을 보는 이리스가 서 있었다. 트리스탄이 대련이라는 이름 아래 라트반에게 맞을 때마다 이리스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흐응….”
리나는 저 두 사람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저도 라트반도 이리스에게 미움을 받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밖에 있는 라트반과 트리스탄에게 소리쳤다.
“두 사람 다 오늘은 여기까지! 자려는데 시끄러우니까요.”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밖에서 대답이 들려오자 이리스는 그제야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리나는 침대에 앉아 이리스에게 어서 앉으라는 듯 제 옆을 툭툭 쳤다. 이리스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앉자 리나가 물었다.
“왜 잘못한 사람처럼 그러고 있어요?”
“어… 리나 님께서 트리스탄을, 아, 아니 트리스탄 경을….”
“다 들켰는데 그냥 편하게 말해요.”
“트, 트리스탄을 혼내시니까….”
이리스는 어느새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되었다.
“트리스탄 경은 임무를 시작할 때 약속한 조약을 어겼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죠. 분명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호위 대상에게 그 어떠한 사적인 감정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에 따른 행동도 금지한다는 조항을 내가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도 나에게 먼저 걸린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레온에게 먼저 들켰으면 그대로 수도로 불려 간 다음에….”
리나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이리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레온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트리스탄이 아니라 제, 제가 먼저… 소, 손잡았는데….”
“손만 잡았어요?”
“…….”
이리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손만 잡지는 않았다는 소리였다.
“역시 라트반에게 한 번 더 굴리라고….”
“따, 딱 한 번! 마을 축제에 가서… 이, 입 한 번 맞춰 봤어요! 그거 말고는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이리스가 민망함으로 정말로 울기 직전이 되자 리나는 피식 웃은 다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어쩌다 트리스탄 경과 그런 사이가 되었는지 이야기 좀 해 볼래요?”
“그게… 제가 마을 축제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트리스탄이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가….”
울먹이던 이리스의 목소리가 조금씩 밝아졌다. 울 것 같던 눈동자가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하자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침대 끝에 걸터앉았던 리나와 이리스는 좀 더 편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쿠션을 끌어안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나는 진지하게 이리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가끔은 혀를 차기도 하고 가끔은 손뼉을 치기도 하고. 달이 좀 더 하늘 가운데에 떴을 때 리나는 이리스와 트리스탄의 사이에 있었던 일은 물론 1년간 이곳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이야기까지 전부 알게 되었다. 어느새 자연스레 리나의 무릎을 벤 채 쿠션을 끌어안고 누운 이리스가 중얼거렸다.
“…이럴 때는 리나 님이 진짜 우리 언니 같아요.”
“…….”
이리스의 말에 리나는 말없이 이리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 주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벨리나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리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겠지.
“…미안해요.”
리나의 말에 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이리스는 리나를 좋아할 수 없었다. 진짜 언니는 죽고 그 몸에 다른 혼이 깃든 것이라니. 이리스는 이벨리나를 그리워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남은 기억은 이마에 닿던 다정한 입맞춤과 보고 싶었다는 밝은 목소리. 그리고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 그것이 이리스가 기억하는 이벨리나의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대신전이 무너지고 나서 한동안 이리스는 리나를 피해 다녔다. 언니의 몸으로 힘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그녀를 보면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었으니까. 슬슬 카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결정되고 리나가 곧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쯤, 대신전의 어느 신관 하나가 이리스를 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리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순간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눈앞에서 쇠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습격자의 검은 라트반이 막아 냈지만, 이리스를 감싼 것은 리나였다.
“이리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맙소사, 미안해요. 다가오기 전에 좀 더 빨리 발견해야 했는데….”
저를 막아서느라 검이 눈앞까지 오는 것을 보았을 텐데도 리나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저를 살폈다. 그런 리나의 모습에 이리스는 자신이 더 이상 그녀를 미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도 갑작스레 친한 척 다가갈 수는 없었다. 결국 리나가 라트반과 함께 떠날 때, 제가 골라 놓았던 약초 꾸러미를 건네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걸로 끝이겠지.’
멀어지는 리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후 이리스는 레온의 도움을 받아 머물 곳을 찾았다. 제국 기사단 외에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이리스, 잘 지냈어요?”
제게 할 만큼 했으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리나는 이리스를 찾아왔다. 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달려가 리나를 끌어안았다. 그 후로 리나는 몇 개월에 한 번씩 이리스를 찾아왔다.
올 때마다 며칠씩 머물며 제게 남아 있는 이벨리나의 기억들을 조심스레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 때 리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벨리나의 기억은 다 말한 것 같네요. 그동안 자꾸 찾아와서 미안했어요. 이제는….”
리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리스는 그녀의 옷을 붙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다른 이야기도 해 주세요.”
“이리스….”
“이제 언니의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까… 전 리나 님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리나에게 저를 찾아올 의무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리나는 꼬박꼬박 이리스를 찾아왔었다. 그것이 죄책감에서 기인한 행동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리스는 더 이상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제 리나는 이리스에게 언니 같은 존재임과 동시에 친구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리나는 제 옷을 붙잡은 이리스의 손을 바라보더니 한참 후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내가 여행 다닌 이야기도 들어 줄래요?”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던 이리스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리나의 손길을 즐기다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그 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아덴베르 황궁으로 가시려고?”
이리스의 말에 리나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덴베르 황궁은 새롭게 지어진 제국의 2황궁이다. 제국의 수도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리스가 사는 이곳을 지나 한참이나 걸어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 일이라니?”
“어, 모르셨어요? 지금 아덴베르 황궁에….”
이리스는 얼마 전 마을에서 들은 소문을 리나에게 말해 주었다. 잠시 후, 리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라트반! 라트반! 어디 있어요? 우리 당장 아덴베르로 가야 해요!”
아덴베르 황궁.
보통 2황궁이라 불리는 이곳은 제국의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이 지어진 황궁이었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통 제국을 설명할 때는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는 나라라는 말을 써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 대륙 위에 나라라고는 오직 제국 하나뿐이었다.
“지금부터 귀찮은 것들을 빨리 치워야겠어.”
새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레온이 정복 전쟁에 몰두해 만든 결과였다. 그만큼 제국은 넓어졌고 좀 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또 하나의 수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국의 제2수도로 결정된 곳이 바로 이곳, 과거 아덴베르 왕국이 있던 자리였다.
레온은 일 년의 절반은 수도에서, 남은 절반은 이곳 아덴베르에서 보냈다. 원래의 수도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아덴베르는 제국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내해(內海)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겨울에도 무척이나 따뜻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레온은 언제나 겨울이 되면 이곳으로 와 국정을 처리했다.
그런 아덴베르 황궁의 정원을 어린 소녀가 혼자 걷고 있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려 물결치는 햇살과 같은 금발에 아덴베르 내해보다 더 짙은 푸른색의 눈, 아직 젖살이 남아 있는 통통한 뺨에 떠오른 홍조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누구라도 한 번쯤 그 뺨을 어루만지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감히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소녀는 정원을 쪼르르 달려 궁의 입구로 다가갔다. 그러자 소녀를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어디에 계시는데?”
“영광의 방에서….”
시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는 재빨리 안으로 뛰었다. 타닥거리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시종들이 급하게 소녀의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소녀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
“폐하, 아무래도 군사를 동원하심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레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덴베르에서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저 무리의 세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신하가 말하는 ‘저 무리’라는 자들을 떠올린 순간 레온의 표정이 구겨졌다.
“웃기고 있네. 언제부터 자신들이 그리 성녀를 생각했다고 난리야?”
“폐하, 저들은….”
“나도 알아. 성녀 핑계를 대고 어떻게든 사람들을 모아 같잖은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거겠지. 제국을 쓰러트리는 거대한 여정의 시발점이 되어 대륙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놈들이라는 거. 말하다 보니 다시 짜증 나네. 그렇게 성녀가 걱정되었다면 대신전이 무너지던 날 달려와서 목숨이라도 바치든가 했어야지. 정작 마수가 나타났을 때는 땅굴을 파고 기어들어 가 숨었던 놈들이 이제 와 성녀를 걱정한다고?”
숨도 쉬지 않고 길게 다다다 내뱉은 레온은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몇 달 전부터 아덴베르 주변을 중심으로 한 무리의 세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신전의 재건과 성녀의 귀환을 외치며 그 세를 불려 나갔다. 처음에는 대륙에 널리고 널린 그런 무리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생각보다 머리와 혀를 잘 놀리는 자인지 지금까지 봐 왔던 세력 중에서 가장 빠르고 단단하게 몸집을 불렸다.
그저 대신전의 재건만을 외쳤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을, 이자들은 성녀의 귀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성녀 이리스가 아닌, 성녀 이벨리나의 귀환을.
대신전의 역사상 가장 재임 기간이 짧았던 성녀 이리스는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가 정말 성녀인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녀의 기적은 대륙의 변방 지역에서 있었던 사건 몇 개가 전부였고 그 목격자 수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대신전으로 온 다음에는 그 당시 대신관이었던 카를이 성녀를 보호한다며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었다. 그 탓에 성녀 이리스를 직접 만나고 그녀의 기적을 본 사람의 숫자는 무척이나 적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대신전이 무너진 날 목숨을 잃었다.
그에 비해 성녀 이벨리나는 비록 타락했으며 끝에는 성력을 모두 잃었다고는 하나 정식으로 계승식을 거친 성녀였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대신전으로 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하면서 신의 기적을 세상에 보여 주었던가.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대신전이 무너지고 성녀가 사라진 후 대륙 여기저기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마수가 날뛰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평온했던 과거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리스는 대신전의 마지막 날 이후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벨리나는 황제와 혼인을 한 덕분에 그 거취가 확실하지 않은가.
‘그래서 말이 돌긴 했지.’
레온은 턱을 괸 채 저와 리나 사이에 돌았던 소문을 떠올려 보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대신전의 재산과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제가 강제로 성녀를 취한 다음 그녀를 죽였다는 소문이었다.
‘아니, 내가 대신전의 재산과 땅을 가진 건 맞는데….’
성녀와 혼인을 하였으니 그녀를 대신하여 그녀의 소유물들을 관리하겠다 나선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슬란이 다 파괴하지 못했던 신전과 그곳에 아직 남아 있는 유물과 땅을 죄다 제국의 것으로 만들긴 했다.
‘하지만 안 죽였다고.’
죽이긴 뭘 죽인단 말인가. 하루 종일 혹시나 그녀에게 연락이 온 건 없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신세인데.
‘그런데 정말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라트반이 있으니 걱정은 없다지만….’
레온이 그렇게 떠들어 대는 신하들의 소란을 무시하고 리나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아빠!”
“레오나!”
문을 연 소녀를 보자마자 레온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달려온 소녀를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정원에 잘 다녀왔니? 어땠어?”
“전부 그대로였어요! 정원사가 관리를 잘해 둔 것 같아요.”
“그래? 네가 이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큰 상을 내려야겠… 자네들 뭐 하나? 얼른 나가 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못마땅하게 앉아 있었던 레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신하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모두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그들의 황제는 제 딸과 함께 있을 때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신하들이 물러가자 레온은 품 안 레오나의 볼에 연신 입을 맞췄다. 정말이지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레오나. 제국의 황녀. 황제의 유일무이한 딸.
6년 전쯤, 잠시 별궁으로 내려갔던 황제가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여자아이를 데려와 제 딸이라고 했을 때는 정말로 제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결혼은 확실한 일이 아니었다.
기사단만이 보았다는 결혼식. 대신전의 몰락 이후에는 요양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성녀. 말이 좋아 요양이지 이미 오래전에 황제의 손에 살해당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딸이 있다니?
뭐라 입을 열지 못하는 신하들 앞에서 레온은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안은 것처럼 조심스레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나를 정말 꼭 닮은 것 같은데. 아, 이름은 레오나야. 예쁘지? 내 딸이라는 걸 다 알도록 그렇게 지었어.”
그렇게 말하는 레온의 앞에서 감히 ‘정말로 폐하의 딸입니까?’라고 물어볼 자는 없었다. 첫해에는 다들 레오나 황녀의 이야기로 수군거렸다. 정말로 황제의 딸인가? 아니 그것도 의문이지만 정말로 성녀의 딸일까? 다들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렸다.
레오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이 빨랐다. 덕분에 1년이 지나자 황궁의 모든 사람들은 밝은 금색의 머리카락을 예쁜 리본으로 묶은 채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레오나를 볼 수 있었다. 그런 레오나를 레온이 안아 들면 누구나 다 부녀로 볼 수밖에 없었다. 밝은 금발과 푸른 눈. 그러다 사람들은 성녀 역시 같은 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레온은 레오나를 안아 올려 테라스로 향했다. 레온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품 안의 레오나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아이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그의 마음을 풀어지게 했다. 레오나는 그런 레온의 행동에 기분 좋다는 듯 꺄르륵 웃다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성벽에 올라가 봤더니 밖에 모여 있는 자들이 있었어요.”
“아….”
조금 전 신하들이 말하던 그 무리들이었다.
“뭐라 말하고 있나 들어 봤더니 엄마를 내놓으라고 했어요.”
“…….”
레오나의 말에 레온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들은 놔둔 것은 굳이 레오나와 함께 휴양차 온 이곳에서 피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많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확 다 죽여 버릴까.’
레온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레오나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싹 다 죽여 버릴까요?”
“…….”
“아빠?”
제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했느냐는 듯 레오나는 손을 뻗어 레온의 얼굴을 잡으며 그를 불렀다. 레온은 잠시 말없이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레오나….”
조금 떨리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레오나는 살짝 긴장했다. 내가 못된 말을 한 걸까?
그 순간 레온이 예쁘고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을 지으며 레오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우리 딸은 어쩜 이렇게 아빠 마음을 잘 알까. 하지만 레오나가 직접 할 필요는 없단다. 그건 아빠가 할 일이야.”
“하지만….”
“넌 아직 어리니까 그런 건 어른에게 맡기렴.”
“그럼 제가 나중에 더 크면 죽여도 돼요?”
“그때까지 저것들이 살아 있다면 그때 가서 고민해 보도록 하자.”
황실의 교육 담당관이 들으면 거품을 물며 쓰러질 대화를 나누면서 레온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던 쿠키를 레오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레오나는 그것을 들고 레온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즐거운 표정으로 먹기 시작했다.
작은 입 안으로 순식간에 쿠키는 사라졌다. 레오나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또 다른 쿠키를 집었다. 큼지막한 호두가 박혀 있는 쿠키가 레오나의 손에서 두 개로 갈라졌다.
“음….”
레오나는 한참이나 제 손에 들린 쿠키 조각을 바라보았다. 호두 쿠키는 레오나가 제일 좋아하는 쿠키였다. 힘을 잘 조절해서 딱 절반으로 나눌 생각이었는데. 가운데 박혀 있는 호두는 안타깝게도 한쪽의 조각에 전부 달라붙어 있었다. 조금 더 고민하던 레오나는 그중에서 호두가 박혀 있는 큰 조각을 레온에게 내밀었다.
“이건 아빠 거.”
그것을 레온의 입에 물려 준 레오나는 그제야 조금 더 작은 제 쿠키 조각을 행복한 얼굴로 입에 물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쿠키를 먹던 레오나가 문득 고개를 돌려 레온을 바라보다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빠 울어?”
“…아니야,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레온의 얼굴은 감격으로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간 다음 아덴베르 황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붙잡고 ‘우리 딸이 나에게 호두 쿠키를 양보했어! 호두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는 아이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레온은 제 입에 물려 있던 쿠키에서 호두를 뜯어내 레오나의 입에 물려 주었다.
“아빠는 호두 안 좋아하니까 이건 레오나가 먹으렴.”
그 말에 레오나는 활짝 웃으며 제 입에 물린 호두를 먹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잠시 후, 손가락에 묻은 쿠키 가루를 툭툭 털어 낸 레오나는 레온의 가슴 위에 제 몸을 찰싹 붙이고는 중얼거렸다.
“…엄마 보고 싶다.”
그 말에 레온은 레오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레온이 아무 말도 없자 레오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 엄마 오라고 하면 안 돼요?”
그 말에 레온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조금 전 어리니까 안 된다고 말할 때와 전혀 다른 단호한 목소리에 레오나는 추욱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빠는 항상 이래.’
다른 일들에는 더없이 너그럽다. 하지만 엄마와 관련이 되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고 봐주는 것도 없었다.
레오나는 하늘에 둥실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아덴베르는 레오나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1황궁에 비해 더 많은 꽃들이 피고 날씨도 좋은 곳. 그리고 가끔 엄마가 이곳으로 저를 보러 오니까. 하늘을 보던 레오나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레온은 잠든 레오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조금 전 엄마에게 오라고 하면 안 되냐 물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쩐지 이번에도 1황궁에 있는 제 옷을 전부 다 들고 오겠다고 하더니….’
레오나는 아덴베르에 갈 날이 가까워 오면 하루 종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가 아끼는 것들과 좋아하는 것들을 전부 다 챙겼는지 시종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물으면서 밤에는 저에게 몇 밤을 자야 아덴베르에 가냐고 매일같이 물었다. 그 질문은 몇 밤을 자야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거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레온은 잠든 레오나를 안아 올렸다. 아이의 이런 투정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나를 이곳으로 오라 부를 생각은 없었다. 레온은 제가 끼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냥 보면 작고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로 보일 것이다. 결혼반지로도 보일 것이고.
사실 결혼반지이긴 했다. 저도 리나도 끼고 있는 반지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황궁에 있던 아무리 멀리 있어도 연락이 가능한 아티팩트였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만 부르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이런 일로는 부를 수 없다. 그러다 정말로 그녀가 필요할 때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레온은 레오나를 고쳐 안았다. 이제 인간의 나이로는 여섯 살이 되었는데 겉으로 보기에 이미 여덟 살은 훌쩍 넘어 보이는 레오나였다.
‘아무래도 조금 차이가 있는 걸까?’
인간과 마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아슬란이 마수로 태어나지 않게 했다고는 하나 완전히 인간과 똑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레오나는 마법에 능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요란한 도구나 주문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레오나에게 마법은 숨 쉬는 일 다음으로 쉬운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레온은 곧바로 황궁에서 마법을 막는 아티팩트를 찾아 레오나의 목에 걸어 주었다. 다행히 아직은 어린 탓에 레오나의 마법은 그것으로 막을 수 있었다.
‘크면 어떻게 되려나….’
그때는 아티팩트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막을 필요도 없었다.
장차 이 제국의 황제가 될 아이다. 그때쯤이면 레오나에게 감히 출생이 불분명하다며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들도 완전히 다 쓸어 버린 후일 테니까. 레온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레오나는 정말이지 리나를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레온은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았다.
“같아서 다행이지….”
리나와 같은 색의 금발에 같은 색의 푸른 눈. 레오나를 처음 봤던 순간 레온은 살면서 처음으로 제 머리색과 눈 색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색이 달랐다고 해서 레오나가 제 딸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리나는 자신의 부인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딸 역시 자신의 딸이었으니까.
레온은 레오나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눕힌 후, 마저 읽어야 할 서류를 들고 옆에 누웠다.
‘별일 없이 지나가면 좋겠는데.’
하지만 일주일 후, 그런 레온의 기대는 박살이 났다.
***
“성녀님을 돌려 달라!”
누군가 큰 소리로 선창하자 주변에 서 있던 자들이 함께 따라 외쳤다. 외침이 몇 번 반복되자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우는 자도 있었으며 욕설과 함께 성벽에 돌을 던지는 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온은 성벽 위에서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아도 그 수가 수천은 될 법한 무리였다.
“짧은 시간에 많이도 모았네. 보니까 몇몇 훈련된 자들이 보여. 어디 놈들이지?”
레온의 말에 옆에 있던 부관 한 명이 대답했다.
“그동안 모습을 감췄던 아덴베르의 셋째 왕자와 그와 함께한 왕실 근위대로 추측됩니다.”
“망국의 왕자께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 이건가.”
레온은 혀를 찼다.
“기나긴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영 아쉬워서 아덴베르라는 이름 정도는 남겨 주었거늘…. 역시 사람이 너무 아량을 베풀면 안 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은가?”
“아… 그,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레온의 질문에 그의 부관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덴베르를 정복할 때, 망설임 없이 이 왕궁으로 들어와 그대로 왕의 목을 베어 버렸던 레온이었다. 그런데 아량을 베풀었다니.
레온은 피식 웃은 다음 다시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러고는 부관에게 말했다.
“저놈들이 나에게 뭘 요구하는지 제대로 듣고 싶으니 우두머리를 보내라고 전해.”
***
무리를 대표해서 왔다는 남자는 긴장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걸었다. 그러다 레온이 있는 접견장에 들어와서는 거의 기듯이 납작 엎드렸다. 레온은 그런 남자를 보며 물었다.
“너희들이 나에게 할 말이 아주 많은 것 같던데.”
“소, 송구합니다…. 하, 하지만… 꼬, 꼭 드릴 말씀이….”
레온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말했다.
“대신전의 사제였나?”
“그걸 어떻게…!”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그건 됐고. 원하는 것이나 어서 말해.”
레온의 말에 남자는 눈을 질끈 감더니 외쳤다.
“성녀님을 돌려주십시오!”
“돌려 달라고….”
레온의 눈에 옅은 노기가 감돌았다.
“성녀를 내쫓은 자들이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나? 대신전이 직접 그녀에게 수배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 돌려 달라니?”
“아닙니다! 그건 사악한 대신관의 술수에 넘어간 자들이….”
“어찌 되었거나 성녀를 내몬 자들은 자네들이야. 나는 갈 곳을 잃은 그분을 못 본 척할 수 없어 손을 내밀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었지. 그런데 마치 내가 그녀를 강탈한 것처럼 말하다니 어이가 없군.”
레온이 답하자 엎드려 있던 남자는 고개를 들더니 정말로 용기를 내어 말한다는 듯 두 손을 꼭 쥐고는 소리쳤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뭐?”
“지금까지 다, 단 한 번도… 성녀님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이미 그분이 어딘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냐… 커억!”
남자의 몸이 허공을 붕 떠올랐다 바닥을 굴렀다. 레온이 있는 힘껏 그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구석으로 굴러 처박힌 남자의 몸에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레온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레오나가 있어서 좀 참아 보려고 했더니… 방자한 혀가 끝도 없이 나불대는군.”
옆에 서 있던 부관들과 기사들의 얼굴 역시 올 것이 왔다는 듯한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레온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까지 그가 얼마나 너른 아량을 베풀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저기 커튼 뒤에서 제 치맛자락이 보이는지도 모르고 잘 숨어 있다 생각하는 레오나 황녀만 아니었다면 저자는 이미 여러 조각이 되었을 것이다.
레온은 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그곳에는 ‘들켰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레오나가 서 있었다. 그는 곧바로 레오나의 귀를 막고 말했다.
“끌어낸 다음 성벽에서 집어 던져.”
그 말에 곁에 있던 기사 두 명이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가 질질 끌려 문밖으로 사라지자 레온은 레오나의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린 다음 말했다.
“레오나, 아빠가 일할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엄한 레온의 목소리에 레오나는 그의 눈치를 보더니 레온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 혼이 나는 게 싫어서 어리광을 부리는 레오나의 귀여운 영악함에 레온은 언제나처럼 질 수밖에 없었다. 번쩍 레오나를 들어 안은 레온은 옆에 있던 근위 대장에게 물었다.
“이번에 함께 온 병력이 얼마나 되지?”
“천오백입니다.”
“전부 무장하고 대기하라고 해.”
레오나는 그런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
며칠 후, 황궁 앞에는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성녀를 돌려 달라 외치며 한 손에는 검을 잡고 있었다. 레오나는 “이러시는 거 들키면 저는 죽어요, 황녀님!”이라 외치는 시녀의 말을 무시하고는 성벽의 틈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훈련된 자들이 보여.’
소리치는 사람들 사이사이에 움직임이 다른 자들이 보였다. 그들을 눈으로 좇던 레오나는 몸을 돌려 반대편 성벽 아래를 보았다. 그곳에는 무장한 레온이 기사단의 앞에 서 있었다. 레오나는 밖에 있던 사람들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일만오천 대 천오백.’
열 배나 되는 상대와 전투를 치러야 한다.
‘아무리 아빠라지만….’
레오나는 아빠가 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한두 군데 정도는 다칠 것이 분명했다. 그건 싫었다. 오래전, 아빠가 팔을 다쳤을 때 한동안 안아 주지 못했으니까. 레오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황녀님! 어디 가세요, 황녀님!”
따라오는 시녀의 말을 무시한 채 레오나가 달려간 곳은 레온의 방이었다. 경비병들이 황녀를 막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안으로 들어간 레오나는 레온의 침대 옆을 뒤졌다.
“어디 있지?”
아침에 무장을 하는 아빠의 손을 보았다. 언제나 끼고 있던 반지가 없었다. 분명 피가 묻는 게 싫어서 빼 두었을 게 분명하다. 아빠는 엄마와 관련된 것이라면 언제나 애지중지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반지는 나오지 않았다.
“다 나가!”
레오나는 저를 따라 들어온 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레오나는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고는 손을 올렸다.
[나와.]
힘을 실은 말을 중얼거리자 책장의 한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빨리.]
다시 레오나가 중얼거리자 책장 안쪽, 숨겨져 있던 공간에서 레온이 끼고 있던 반지가 튀어나왔다. 이 반지로 분명 엄마와 연락을 한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사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반지를 이리 보고 저리 본 다음 쓱쓱 문질러 보기까지 했지만 반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울상이 된 레오나는 반지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엄마….”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를 치려던 레오나의 눈이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동전만큼이나 커졌다. 놀라 입을 뻐끔거리던 레오나는 제 손에 들려 있던 반지를 바라보았다.
나 이거 아직 사용 안 했는데…?
드르르륵. 커다란 도르래가 감기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는 성문을 보며 레온은 생각했다.
‘만오천 중에 아덴베르의 기사들이 섞여 있어.’
열 배가 넘는 숫자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덴베르로 함께 온 기사들은 제국 기사단 중에서도 정예만 뽑은 자들이었다. 망국의 떠돌이 기사들과 신도들을 상대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레온은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미리 죽여 버릴걸.’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들 중에 선동에 능한 자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레오나와 아덴베르로 온 게 좋아 조금 게으름을 부렸더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레온은 손에 들린 검을 휘둘러 보았다. 오랜만에 잡았더니 속도도 그렇고 어쩐지 예전 느낌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아덴베르에서 수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기사들을 세워 놓고 대련을 쉬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좀 더 강한 기사가 필요한데….’
그 순간 떠오르는 사람에 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할 놈. 지금 리나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그렇게 레온이 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고 있을 때, 맞은편의 무리들이 레온을 보고 외치기 시작했다.
“살인마!”
“학살자!”
맞는 말이기에 딱히 화는 나지 않았다. 대륙을 통일하면서 좀 많이 죽이긴 했으니까.
“성녀님을 돌려줘!”
하지만 역시 이 말에는 화가 났다.
‘지금 내 옆에도 없거든? 너희들만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리나를 못 본 지 벌써 1년 가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작년에 이 아덴베르 황궁으로 왔을 때였다. 라트반과 함께 찾아왔던 그녀는 새로운 기적이 목격되었다는 말에 미안한 얼굴로 그와 레오나에게 입을 맞추고는 황궁을 떠났다. 그런 그녀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 큰 빚을 지워 놓고 사라진 붉은 털의 마수 새끼에게 짜증이 났을 뿐.
그렇지 않아도 레오나가 이곳으로 오자마자 리나가 좋아하던 정원을 보고 온 것이 안쓰러웠는데 왜 자꾸 아이에게 들릴 정도로 리나 이야기를 들먹이는지. 만약 레오나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운다면….
검을 잡은 레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땐 정말로 이 새끼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릴 것이다. 물론 지금도 대부분은 죽여 버릴 생각이지만.
그사이 한 남자가 사람들의 앞으로 나섰다.
“황제시여,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레온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계속 지껄여 봐.”
“그저 성녀님의 얼굴 한 번만 뵐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녀는 요양 중이야.”
“어디에서 요양 중이십니까?”
“내가 그걸 네놈들에게 알려 줘야 할 이유가 있나?”
레온은 계속해서 말을 질질 끄는 남자의 의도를 알았다.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제가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 하는 것이다.
‘성녀 문제를 생각보다 더 키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분명 또 다른 망해 버린 왕국의 세력과 손을 잡고 계속해서 소문을 키운 다음 출병의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더 큰 세력을 만들어 낼 계획이겠지.
“성녀님을 구하라!”
“대신전의 영광을 위해!”
지랄한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온은 한숨을 쉬며 검을 고쳐 쥐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피를 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사이 사람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져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무기를 잡았다. 그들은 성녀를 구하겠다는 자신들의 숭고한 목적에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끝나 있었다. 팽팽한 긴장이 맴돌았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 한 걸음만 움직이면 그대로 충돌이 시작될 터였다. 그때였다.
“모두 물러서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흥분된 사람들이 내지르는 아우성 사이에서도 레온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이를 들은 것은 레온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조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도 갑자기 입을 다물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레온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후드를 눌러쓴 여자가 기사들 사이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레온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레온의 앞에 선 순간 후드를 벗었다.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는, 자신과 같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환하게 빛났다.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삼키고 싶은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안녕, 레온. 이런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고 했잖아요.”
리나가 돌아왔다.
***
리나의 등장으로 전투는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들이 그토록 내놓으라 말하던 성녀가 나타났다. 그것도 무척이나 멀쩡한 모습으로. 누군가 진짜 성녀가 맞냐 소리쳤을 때, 리나는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제국 기사단 주변으로 푸른색의 보호 결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엄마, 이것도 드세요.”
리나는 제 품에 안겨서 쉴 새 없이 과일을 물려 주는 레오나의 이마에 웃으며 입을 맞췄다. 저번에 그녀가 맛있게 먹었던 과일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모양인지 레오나는 하나같이 리나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포크로 콕콕 찔러 건넸다. 고맙다고 말하며 과일을 받아먹던 리나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에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더 좋아졌군, 라트반.”
“제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쪽이야말로 그동안 편하게 지내신 모양인 것 같군요. 살도 좀 찌신 것 같고.”
“아니야, 안 쪘어!”
“우리 아빠 살 안 쪘어!”
라트반의 말에 레온과 레오나가 동시에 소리를 빽 질렀다. 리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레온과 레오나는 날이 갈수록 어쩜 이렇게 서로 닮아 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안 쪘다고 말한 주제에 레온은 슬그머니 제 허리를 더듬었다. 안 찐 것 같긴 한데 사실 그동안 전쟁이 없다 보니 덜 움직인 건 맞고….
내일부터 아주 격하게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온의 눈이 라트반을 훑었다. 원래도 기사들의 가장 이상향인 몸을 지녔던 라트반이다. 그사이 리나와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열심히 지켰는지는 몰라도 더욱더 단단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을 옷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저 역시 어디 가서 뒤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라트반과 비교하는 순간에는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레온의 얼굴이 굳어 가고 있는 것을 레오나는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레오나는 리나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쪼르르 라트반의 곁으로 가 말했다.
“경의 무례를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일어나도록 해.”
제 허리춤에도 다 오지 못하는 작은 소녀의 명령에 라트반은 순순히 일어섰다. 라트반이 일어나 서자 레오나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더니 뒤돌아 외쳤다.
“라트반 경이랑 잠깐 나갔다 올게요!”
“레오나!”
“레오나, 어딜…!”
레오나의 말에 놀란 레온과 리나가 벌떡 일어섰지만 그 순간 라트반과 레오나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레온은 원래 레오나를 위해 놔두었던 작은 의자를 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레오나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