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48)

하시아스 산맥 아래쪽의 마을은 주말을 맞이해 아침부터 장이 열렸다. 빵 가게 주인은 서둘러 나무로 된 좌판을 펼치고 새벽까지 열심히 구워 낸 빵을 좌판 위에 가득 쌓았다. 슬슬 가져온 빵을 다 쌓아 갈 때 갈색 머리의 여자가 빵을 보더니 말했다.

“여기 동그란 검은 빵 열 개, 긴 흰 빵 열 개랑 말린 과일을 넣은 빵 세 덩이 주세요.”

그 말에 주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첫 개시부터 이렇게 많이 사 가는 손님이라니, 아무래도 오늘은 시작이 좋다. 그는 낡은 천으로 된 자루를 하나 꺼내어 주문한 빵들을 하나씩 넣으며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가족이 많으신가 봅니다? 이렇게 잔뜩 사 가고.”

“아니요. 많은 건 아닌데 산맥을 넘어가는 동안에 마을이 없다고 들어서요.”

그 말에 주인은 펄쩍 뛰어오를 듯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무슨 소리야. 하시아스 산맥을 넘겠다니요? 저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몰라서 그럽니까? 여자 혼자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산맥이에요.”

“혼자는 아니고 동행이 있어요.”

“동행?”

주인이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대 치면 부러질 것처럼 생긴 희멀건 한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를 본 주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지금 둘이서 하시아스 산맥을 넘으려 한다는 겁니까? 이쪽 소식도 못 들었어요? 예전에야 건너편 평야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었지만 3년 전부터 마수가 나타나 하시아스에 둥지를 튼 이후로는 저 산맥을 넘어가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었어요. 산맥을 넘지 않고 돌아가는 길도 위험해요. 가끔 마수의 새끼들이 산 아래까지 내려오거든. 산맥 넘을 생각일랑 말고 정 가야겠다면 산을 돌아가는 사람들을 찾아 함께 움직이도록 해요.”

그렇게 말한 주인은 약하게 생긴 젊은 남자를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좀 더 챙겨 먹는 게 좋을 것 같은 청년이니 내 덤으로 잼이 들어간 빵도 몇 개 넣었어요. 원, 허리에 찬 검을 무거워서 들 수나 있을지 걱정이네. 여하튼 조심해서 가요.”

주인에게 자루를 건네받은 여자는 그 말에 웃음 짓더니 돈을 내고는 감사하다 말하고 몸을 돌렸다.

“아니,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이쪽에 마수가 산다는 걸 몰라?”

주인은 높은 산을 바라보며 오늘 제가 두 목숨을 살렸다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그러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제 눈을 의심해야 했다.

“응…?”

분명 조금 전 자신에게 빵을 사 간 사람은 갈색 머리의 여자와 무척이나 왜소해 보이는 남자였다. 하지만 저 멀리 제가 조금 전 빵을 넣었던 자루를 들고 가는 사람들은 금발의 여자와 무척이나 큰 체격의 남자였다. 주인은 놀라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조금 전에 보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처음 빵을 사 갔던 여자와 남자가 보였다.

“내가 잘못 봤나?”

저 정도로 차이 나는 사람을 잘못 볼 리는 없으니 아무래도 자루를 착각한 모양이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주인은 새로이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며 첫 번째 손님에 대한 의문을 잊어 갔다.

***

“매번 쓸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죠.”

리나는 제 손목에 감겨 있는 것을 보았다. 얼핏 보면 천을 손목에 묶어 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수의 가죽이었다. 작년에 잡은 마수는 무척이나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제 모습을 매번 다르게 보이게 하는 능력이었다.

시선을 잠시 떼면 곰으로, 뱀으로, 나뭇가지로도 보이는 탓에 잡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덕분에 진짜 모습은 죽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마수를 잡고 나서 라트반은 잠시 이리저리 살피더니 사체를 묻기 전에 가죽의 일부분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제 손에 감았다. 그 순간 리나는 들고 있던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제 눈앞에 있던 라트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있었으니까. 놀란 그녀의 모습에 아이는 손에 감겨 있던 가죽을 풀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다시 라트반이 서 있었다.

“대신전에 있었던 아티팩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실험해 본 건데 다행히 잘 먹히는 것 같군요.”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잠깐 다른 데를 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기도 하고 가끔은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도 변했으니까. 하지만 이리저리 고친 덕분에 다행히 이것은 점점 더 안정된 성능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이 더 오지 않는 산길로 들어서고 나서야 리나는 그것을 풀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라트반도 원래의 모습으로 보였다.

“빵은 많이 샀으니 산을 넘어갈 때까지는 충분할 것 같아요. 라트반, 버터는요?”

“여기 있습니다.”

근처 풀밭에 앉은 리나는 자신과 라트반이 장에서 사 온 것을 풀어 놓고 다시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건 내 가방에….”

“아닙니다. 저에게 주십시오.”

“그럼 이걸 내 가방으로….”

“그것도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잠시 후, 리나는 턱을 괴고 제 앞에 놓인 두 가방을 보았다. 라트반의 큰 가방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빵빵하게 가득 차 있는 반면에 작은 제 가방은 물건이 들어있긴 하나 싶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라트반이 달라는 대로 주었더니 또 이런 꼴이다.

“하아….”

길게 한숨을 쉬고 라트반의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려 했더니 라트반이 냉큼 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공평하게 잘 나눠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만 출발하지요.”

“공평…?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단어의 뜻이 변하기라도 했나요?”

“많이 들 수 있는 사람이 더 드는 것이 저는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정도가 있지. 누가 보면 난 놀러 나온 사람인 줄 알겠다구요.”

그 말에 라트반은 말없이 잔잔한 웃음을 띨 뿐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리나는 다시 길게 한숨을 쉬며 짐을 더 가져오려던 것을 포기했다. 라트반이 넘겨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라트반은 이렇다. 제가 아무런 부담 없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것을 그가 짊어져 버린다.

‘싫은 건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가끔은 섭섭하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약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가방을 고쳐 메는 라트반을 보던 리나는 슬쩍 손에 성력을 모아 보았다. 순식간에 푸른빛이 그녀의 손끝에 모여들었다.

대신전이 무너진 날 이후, 성력은 돌아왔다. 원래 이벨리나가 갖고 있던 성력에 비하면 약했지만 리나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성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만큼의 성력은 이리스의 몸에 머물렀다.

‘이벨리나의 뜻이었을까.’

제가 죽고 나면 홀로 남을 동생을 위해 그녀에게 남겨 둔 것이 아닐까 리나는 짐작했다.

어쨌거나 성력은 돌아왔고 라트반과 함께 다닌 이후로 그녀는 매일같이 성력을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연구했다. 다행히 리나에게는 라트반이라는 선생님이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매우 빨리 실전에서 성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게다가 라트반이 가르쳐 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리나는 제 허리춤에 찬 검을 보았다. 단검과 장검의 중간 형태인 검은 그녀가 사용하는 데 문제없을 만큼 가벼웠다. 이동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라트반은 그녀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오래전 대신전에 있었을 때 한 약속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검술 연습으로 끝나지 않아서 문제이긴 한데….’

리나는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식혔다.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

평원을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던 마수를 라트반과 함께 쓰러트렸다. 위험한 마수는 아니었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마수였기에 꽤나 고전을 했다. 성력 덕분에 방어 결계를 칠 수 있어서 다치는 일은 없었다지만 그래도 마수가 몇 번 허점을 노리고 덤벼들 때는 아찔함을 느꼈다.

마수를 잡고 나서 근처 마을의 숙소에 머물렀을 때, 리나는 라트반의 몸 여기저기에 쓸린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라트반 혼자였으면 이런 자국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녀가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신경을 쓴 탓에 당한 자국들이 분명했다. 그 상처들을 치료한 리나는 라트반에게 말했다.

“라트반, 연습 좀 하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리나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순순히 그녀의 뜻에 따랐다. 대륙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마수들을 상대했기에 실력이 늘긴 했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라트반에 비하면 갓난아기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 와서 배워 봤자 대단히 늘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수와 대치 중일 때 제가 조금이라도 더 여유를 갖고 마수와 맞선다면 라트반이 다치는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검을 잡고 계실 때 다른 생각은 모두 지우십시오.”

“…….”

역시나. 라트반은 곧바로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다음 조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지난번 그가 가르쳐 준 자세를 취했다.

“아침에 마수를 잡을 때 보니 기습을 당하면 검 손잡이 부분을 올려 들며 검신으로 방어하려는 습관이 있으시더군요.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몸쪽으로 밀린 검날에 다칠 가능성이 높아질뿐더러 손목에도 무리가 갑니다. 그러니….”

진지한 라트반의 가르침에 리나의 표정도 함께 진지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

“허억… 허억….”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거칠어지며 자세가 흐트러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천천히 움직이기에 힘들지 않아 보일지는 몰라도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했으며 가끔 시험이라도 해 보려는 듯 라트반이 힘을 주어 그녀의 검을 막기도 했다. 그 탓에 두 시간쯤 지나고 나자 땀이 비 오듯 흐르며 몸 여기저기가 당겨 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조금만 더….”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라트반은 리나의 손에서 부드럽게 검을 잡더니 재빨리 검집 안으로 넣었다. 그다음에는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몸을 안아 들더니 조심스레 침대 위에 엎드려 눕혔다. 리나가 일어나려 하자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아래쪽 허리를 꾹 눌렀다.

“윽….”

근육이 뭉쳤던 걸까. 신음이 절로 나오는 통증이 느껴진 탓에 리나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라트반. 아, 아파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지금 풀지 않으면 내일은 더 아플 테니까요.”

평소 라트반은 그녀의 말에 잘도 따르면서 이럴 때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라트반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리나의 입에서는 끅끅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다 그의 손이 가장 뭉쳐 있는 곳을 세게 문질렀을 때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렸다.

“라트반! 진짜 아프다고 했…!”

리나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제 가슴 위에 라트반의 손이 있었다.

“어….”

“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에 두 사람은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낸 채 그대로 굳고 말았다. 먼저 움직인 쪽은 라트반이었다. 그는 제 손이 세상에서 제일 삿된 것처럼 기겁을 한 채 바라보더니 후다닥 몸을 뒤로 물렸다. 당연하게도 이미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라트반.”

리나는 그런 라트반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라트반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저는 정말로… 갑자기 몸을 돌리니까… 그러려던 게 아니고….”

시뻘게진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누가 그를 대륙 최강의 기사라 생각할 수 있을는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나는 정말이지 이런 라트반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함께 다닌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무너진 대신전을 떠나 그녀와 그는 대륙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잠시 레온에게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곧 다시 황궁을 나와 라트반과 함께 대륙을 여행했다.

대륙에서 가장 신기하다는 곳, 아름답다는 곳, 기이하다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중에는 거꾸로 흐르는 강, 하루 사이에 싹을 틔워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자라다 밤이 되면 그 수명을 다해 부스러지는 나무가 자라는 숲, 하루에 그 색을 여러 번 바꾸는 바다도 있었다. 그런 리나의 옆에는 언제나 라트반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 그녀와 걸음을 함께했다.

그 모든 날을 함께하며 셀 수 없는 낮과 셀 수 없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들은 자주 서로를 원하곤 했다. 낮에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 기사로 사는 그가 밤이 되면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는 모습에 리나는 매번 아찔함을 느꼈다.

음란한 말 한마디 없이 라트반은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함이 사람을 죽을 만큼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을 리나는 알게 되었다.

라트반은 그렇게 밤을 보낸 주제에 아침이 되면 간밤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밤에는 그녀의 가슴을 마치 제 것인 것처럼 만지고 물었던 주제에 지금은 닿은 것만으로도 죽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리나는 그런 라트반이 어이없었다. 동시에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장난기가 쓱 고개를 내밀었다.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두 사람이 있는 침대 시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밤의 라트반은 사람을 애원하게 만든다. 그럼 낮이라면 반대의 입장이 되어 볼 수 있을까?

침대의 헤드 쪽으로 물러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라트반을 본 리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밤에는 그가 그녀를 울렸다. 그럼 낮에는 그녀가 그를 울려야 공평하다.

“땀 흘렸더니 덥네요?”

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셔츠 아래를 붙잡고는 천천히 팔을 올렸다.

“뭐, 뭘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몰라요? 옷 벗고 있잖아요.”

“…….”

당당한 리나의 말에 라트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표정이 재미있어 리나는 일부러 느리게 옷을 벗었다. 셔츠가 올라가고 속옷이 드러나자 라트반이 차마 볼 수 없다는 듯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런 라트반의 모습에 리나의 마음속 어딘가에 불이 붙었다. 어디 오늘 한번 끝까지 해 봐야겠어.

리나는 속옷만을 입은 채, 무릎으로 걸어 라트반에게 다가갔다.

“라트반도 덥지 않아요?”

“자, 잠깐… 지금 뭘 하려고….”

“벗는 거 도와주려고 이러는 거죠. 얼굴 붉어진 것 보니 그런 것 같은데.”

“아니 이건 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

“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이러는데요?”

리나는 라트반의 다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손으로 그의 두꺼운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근육이 꿈틀거리며 그의 몸이 단단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 위에서 올라가던 손바닥이 위로 올라가다 무엇인가에 걸려 멈춰 섰다.

“…….”

리나는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역시나. 누가 보아도 ‘그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 그의 흰 바지 아래에서 그 육중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리나는 모르는 척 엄지손가락 끝의 손톱을 세워 그것의 끝부분을 간지럽히듯 천 위로 긁었다.

“흣!”

라트반의 몸이 작살에 찔린 물고기처럼 크게 펄떡 튀어 올랐다. 하마터면 그의 위에서 떨어질 뻔한 몸을 바로 세우며 리나는 짓궂게 물었다.

“왜 그래요?”

“리나….”

이제야 그는 그녀가 작정을 하고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라트반의 입술 사이로 들뜬 숨이 흘러나왔다.

“그만… 제발 하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나는 그 사이에 숨겨진 흥분을 놓치지 않았다. 리나는 눈을 빛내며 그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살짝 벌린 옷 틈새로 그의 가슴이 드러났다. 벗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잘 그을린 듯한 피부에 단단해 보이는 가슴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리나는 슬쩍 손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손이 미끄러졌네요.”

그런 것치고 너무도 대놓고 더듬거리는 손이었다. 그녀의 손은 탄탄한 근육 위를 쿡쿡 찔렀다가 슬쩍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흡…!”

리나의 손가락이 그의 유두를 붙잡은 순간 라트반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

리나는 그런 라트반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저를 제압하고도 남을 것 같은 산만 한 사내가 지금 제 아래에 깔려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붉힌 채 몸을 떨고 있다.

‘이거… 어쩐지….’

…위험해.

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라트반의 눈가가 발갛게 변해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어이 그의 눈에서 눈물을 봐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이 들었다. 리나는 가슴을 더듬던 손을 옷에서 빼낸 다음 그의 단추를 마저 풀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침대 위에서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낮은 신음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녀의 손이 닿을 때마다 라트반은 불에 닿은 사람처럼 움찔거렸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라트반이 애원할수록 리나의 손놀림은 짓궂어졌다. 그의 상의를 다 벗긴 손은 보기 좋게 갈라져 꽉 잡혀 있는 복근을 더듬다 좀 더 아래로 향했다. 그의 허벅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것은 그사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천을 찢고 튀어 오를 것 같은 그것을 리나는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맙소사, 신이시여….”

대신전이 무너지는 날에도 이런 소리는 내지 않았던 사람인데. 라트반은 맹수에게 쫓긴 어린 양이 낭떠러지의 끝에서 지을 것 같은,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어쩔 줄 모르는 것은 그의 아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의 손 아래 눌린 것이 마치 다른 자아를 가진 생명체처럼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리나는 살짝 힘을 주어 그것을 쥐었다. 한 손에 다 쥐어지지 않는 길고 두툼한 것이 그녀의 손안에서 점점 더 딱딱해졌다. 리나가 손을 떼자 라트반의 입에서 안심한 것인지 아쉬워하는 것인지 모를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리나는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앉았다. 잔뜩 성이 나 솟아올랐던 것이 그녀의 엉덩이 아래 깔렸다. 이제 라트반은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그를 안쓰러워해야 하는데 왜 더 몰아붙이고 싶은 건지.

“라트반, 땀을 많이 흘리네요? 혹시 어디 아픈가요?”

조금 전 검술을 가르칠 때는 그리도 태연한 모습이더니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으려나. 이제는 재미를 넘어서 오기가 생겼다. 리나는 끌어안았던 손을 푼 다음 제 속옷의 매듭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라트반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다시 그의 턱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왜 눈을 돌려요?”

“…….”

“보기 싫어요?”

그 말에 라트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똑바로 바라봐요.”

리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참고로 이건 명령이에요.”

라트반의 시선을 저에게 고정한 다음 리나는 가슴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속옷을 내렸다. 밝은 햇살 아래 눈부시게 흰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정점에 솟아오른 분홍색의 돌기도. 라트반의 손이 아래에 있는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밤에는 모든 것이 불분명했는데 지금은 지독하리만큼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속눈썹이라거나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이라거나, 제가 움직일 때마다 긴장해서 꿈틀거리는 근육, 아래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머리를 들어 올리는 기둥까지.

야해.

리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대신전이 무너져도, 신전의 계율을 어겼어도, 몇 번이나 몸을 섞고 탐욕스러운 밤을 보냈어도 다음 날이 되면 라트반은 언제나 단정하고 올곧았다. 마치 지난밤이 그에게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처럼. 그런 라트반을 보면서 리나는 가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점점 더 그에게 익숙해지고 있는데 그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무너트려 봐야겠어.’

밤에 그녀가 그에게 젖어 드는 것만큼, 그가 낮에 그녀에게 젖어 들 수 있는지.

상의를 전부 벗은 리나는 헐떡이는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 어떤 마수에도 물러서는 법이 없던 그의 몸이 리나의 가벼운 손길 한 번에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리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땀에 젖은 피부가 붙었다 떨어지며 야한 소리를 내었다.

“제발… 제발….”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라트반은 마치 줄에 묶인 짐승처럼 몸을 뒤틀었다. 리나는 얼굴을 들어 라트반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리나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 미간을, 코를 따라 내려왔던 입술은 조개처럼 꽉 다물린 그의 입술과 마주했다.

“라트반.”

리나는 애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입 벌려요.”

마치 오래된 동화에서 순진한 소녀를 꼬드기는 늑대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뭘 하는지 의심하지 못하도록 가녀리고 다정하게 그를 부른다. 그러면 결국 그는 제 부탁을 들어줄 것을 아니까.

리나는 인내심을 갖고 계속해서 라트반을 불렀다. 밤에 정사를 나눌 때는 내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하는 밤에는 언제나 여유가 없었다. 잡아먹을 듯이 몸을 붙여 오는 라트반 때문에 그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한 채 절정을 맞이한 것이 몇 번이던가.

“어서.”

그가 했던 말들을 그대로 돌려주며 리나는 손을 움직였다. 굳은 그의 근육을 어루만지고 더듬고 살짝 꼬집어 비틀며 희롱했다. 결국 참지 못한 라트반이 참았던 숨과 신음을 토해 내기 위해 입을 벌렸다. 리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이마가 닿고 코가 부딪히고 입술이 짓눌러졌다. 리나는 거침없이 그의 안을 휘저었다. 언제나 그가 먼저 했던 것을 제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혀가 섞이고 타액이 흘러내렸다. 땀에 젖은 피부만큼이나 야살스러운 소리가 맞닿은 입술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라트반에게 입을 맞추던 리나는 잠시 후 입술을 떼었다.

“하아….”

꽤나 긴 입맞춤이었다. 라트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침대 위에 여전히 누워 있는 채였다. 한 팔로 제 눈을 가리고 거친 숨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 리나는 정복의 쾌감이 지금 제가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좋아, 다음은….’

리나는 몸을 일으킨 다음 고개를 돌렸다. 굳이 옷을 벗겨 확인해 보지 않아도 그의 아래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의 성기로 그녀가 손을 뻗으려 하자 라트반이 입을 열었다.

“하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확실한 경고의 뜻이 담겨 있었다.

“싫어요? 불쾌한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하지 말라고 해요?”

라트반은 제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발갛게 달아올라 촉촉해진 눈동자가 리나를 향했다.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그 말에 리나는 멈췄던 손을 뻗었다.

“헉!”

딱딱해진 그의 것을 붙잡은 리나는 그에게 명령했다.

“참지 말아요.”

그리고 원하는 것을 말했다.

“나와 같이 빛 아래에서 엉망진창이 되어 줘요.”

그 순간 라트반이 몸을 일으켰다. 저를 옭아매고 있던 줄을 끊어 낸 짐승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같이 엉망진창이 되어 달라고.

라트반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에 흠뻑 젖은 그의 성기가 벌어진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윽!”

라트반의 몸이 안으로 들어가자 리나는 고개를 젖힌 채 몸을 떨었다. 라트반은 손을 뻗어 새하얀 등허리 위에서 어지럽게 널려 있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희고 동그란 엉덩이가 그의 배에 빈틈없이 맞닿았다. 동시에 그의 것이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닿았다. 하지만 라트반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좀 더. 더 깊이.

그가 허리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자 그의 성기가 뿌리까지 완벽히 그녀의 몸 안에 잠겼다. 제 것을 감싸는 따뜻한 안쪽이 그의 머릿속에 불을 질렀다. 라트반은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안았던 몸이건만 그녀는 매번 새로운 감각을 그에게 선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 것이 자리 잡았을 그녀의 배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자 그녀의 몸이 더욱 강하게 조여들어 왔다.

“아, 아….”

가녀린 몸이 벌벌 떨리며 쾌감을 느끼고 있다. 이 정도로 벌써 이렇게나 힘들어하다니. 라트반은 잠시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 다음 배를 어루만지던 손에 힘을 주었다. 자비 없이 꾹 누르는 손바닥의 압력에 리나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흐윽! 으, 읏! 아, 아읏!”

정리해 준 보람도 없이 다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밝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그 눈부심에 라트반은 잠시 넋을 놓은 채 그 빛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미치도록 아름답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전부 삼켜 버리고 싶을 만큼.

‘곤란해.’

대신전이 무너지고 그녀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난 후로 그에게는 매일매일이 고행의 순간이었다. 자신의 옆에서 함께 걷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내딛는 모든 걸음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러다 밤이 되어 그녀가 제 몸에 기대어 잠이 들면 라트반은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라트반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더없이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두 욕망은 분명 제 안에 함께 존재했다.

때때로 어두운 욕망이 그를 잠식할 때가 있었다. 참으로 시도 때도 없는 욕망이었다.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는 그녀의 목덜미를 볼 때라던가, 아니면 시장에서 과일을 산 다음 제 입에 물려 주고 활짝 웃는 얼굴을 볼 때라던가, 그녀가 모닥불 앞에서 그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을 때라거나.

라트반은 필사적으로 그 욕망을 눌렀다. 하지만 결국 그도 더 이상 그것을 억누르지 못하는 때가 찾아왔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달래서 아주 가끔, 은밀한 시간에만 그것이 고개를 들도록 했는데 도대체 왜 그녀가 먼저 나서서 제 욕망을 깨운단 말인가.

라트반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의 손길에 긴장을 한 것일까, 기대를 한 것일까. 그녀는 몸을 떨었다. 라트반은 그대로 그녀의 몸을 돌렸다.

“아, 앗!”

그의 것을 문 채 몸이 빙글 돌아간 탓에 깊숙하게 들어간 그의 기둥이 사정없이 내벽을 긁었다.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자극에 리나는 당장이라도 실신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밤에는 어둠이 그의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어느 정도 가려 주었다. 하지만 어둠이 없는 지금은 모든 것이 지독하리만큼 선명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머리카락,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연신 숨을 뱉어 내는 붉은 입술.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 누군가 지금 저를 본다면 시선조차도 게걸스러울 것이라 할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라트반은 손을 뻗어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고 이마에 맺힌 그녀의 땀을 닦아 주었다. 행위가 시작된 순간부터 난폭한 움직임을 계속하는 하반신과는 무척이나 다른 손길이었다. 아무래도 제 안에 있던 상반된 두 마음이 각기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뭐, 뭘….”

“왜 저를 자극하셨느냐는 말입니다.”

그러자 리나의 표정이 흐려지는 듯하더니 그녀의 시선에 원망이 담겼다.

“하, 항상… 읏! 라트반만… 멀쩡하… 아앗!”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거야 당신이 계속 움직… 아, 으, 으읏! 읏!”

밀고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몸이 저절로 들릴 정도로 그가 박아 대기 시작하자 그녀는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물어봐 놓고 대답은 듣기 싫다는 건지 뭔지.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얄밉도록 멀쩡했다. 결국 원망이 눈물로 바뀌었다.

“나, 나만 변하는 것 같잖아요!”

“……?”

그녀가 빽 소리를 내지르자 그제야 라트반의 움직임이 멈췄다. 리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말했다.

“나는 더… 원하게 되고 더욱 흐트러지는데… 당신은 왜 처음과 똑같이… 변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라트반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 사랑이 더 커지는 것 같지 않아 불안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제가 돌려 말했던 것을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라트반에게 리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것을 원하셨다면 포기하십시오.”

“왜….”

그는 당치도 않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처럼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리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 그가 뭐라고 한 거지? 굳어 버린 그녀와 달리 라트반은 미소 지었다.

“제 사랑은 더 커질 수 없습니다.”

냉정한 말을 하는 주제에 목소리는 다정했다. 라트반은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굳은살이 박인 큰 손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풍만한 가슴이 그의 가슴에 눌려 뭉개졌다. 리나는 몸을 뒤틀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조금 전 라트반의 대답이 그녀로 하여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은 점점 더 많이 그를 좋아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니. 억울함에 목이 메어 왔다.

“놔요….”

이젠 억울함을 넘어 슬퍼졌다. 조금 전에는 힘없이 쓰러지던 그의 몸이 있는 힘껏 밀어내는 지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라트반은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치 온몸으로 그녀를 느끼고 싶은 사람처럼.

“제가 밉습니까?”

“…….”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라트반은 손으로 고개를 숙인 그녀의 턱을 조심스레 붙잡아 들어 리나가 저를 보게 만들었다. 정말로 미운 것인지 어느새 눈물이 당장이라도 흐를 듯 글썽이고 있었다. 라트반은 그런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맺혀 있던 눈물이 그의 입술 속으로 사라졌다.

“저는 당신이 밉습니다.”

“왜….”

“계속해서 마음이 더 커진다는 것은 아직 당신께 남아 있는 마음의 공간이 많다는 말이겠지요. 저는…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습니다.”

대신전에서 그녀가 그를 구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라트반은 제 안에 어떠한 여백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라는 세계 안에서 그녀는 태양이고 달이었다. 오롯이 존재하며 세상을 완전히 저로 물들이는 그런 존재.

자신은 처음부터 그녀라는 존재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느긋하게 그 호숫가에 앉아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함께 망가지자는 말로 그를 더욱 깊은 곳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함께 엉망진창이 되자고 하셨던가요.”

“라트반….”

라트반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침대로 쓰러졌다.

그 후 며칠 동안 라트반은 그녀의 남아 있는 마음의 공간을 저로 가득 채웠다.

***

“조심하십시오.”

“……!”

갑자기 저를 붙잡는 라트반의 손에 리나는 정신을 차렸다. 앞을 바라보니 집채만 한 바위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깊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걸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걸어가려고 했는지.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가방 저에게 주십시오.”

라트반은 바위를 보고 멋쩍은 듯 웃는 리나의 가방을 빼앗듯이 가져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방을 빼앗겨 버린 리나는 뭐라 말하려다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웃고 계시나 해서요.”

“내, 내, 내가 언제 웃었다고 그래요? 빠, 빨리 산이나 넘어가죠.”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을 더듬는 리나의 모습에 라트반은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어이 답을 듣기 위해 조를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낮에 한 번 풀려났던 짐승이 다시 그녀를 덮치게 될 것 같으니.

***

한참을 걷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의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빵 가게 주인 말로는 마수가 나타난 이후로 여길 넘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기다… 같이 가시지요.”

라트반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벌써 검을 쥐고 있는 리나의 모습에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한 다음 그녀의 옆에 섰다.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는 좀 더 확실하게 들렸다.

“그러니 믿고 나를 따르시오! 신의 가호를 여러분께 보여 드리겠소!”

사람들의 앞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수가 서식한다는 곳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건 그냥 지나갈 마수도 불러들이는 꼴이다.

“이 목걸이만 있으면 어떤 마수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앞에 있는 사람들은 보았을 것이오! 여러분이 약속을 지키면 이 힘으로 내가 꼭 여러분께 마을을 되찾아 드리리다!”

그 말에 리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대신전의 몰락 이후 대신전에 있던 많은 물건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많은 예술품과 보석은 물론, 신기한 힘을 가진 아티팩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신전의 아티팩트는 마수의 사체에서 얻어 낸 것들이 많았고 그만큼 마수를 상대로 위력을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소리를 치고 있는 사람은 그 힘을 이용해 원래 이 산에 살던 사람들에게 마을을 되찾아 주겠다 한 모양이었다.

“정말 마을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

“글쎄…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나.”

“그래도 저자의 요구가 너무 과해. 요구한 돈을 다 주고 나면 우리 마을은 뭘 먹고 살아야 하는지…. 게다가 자꾸 어린 여자애들에게 추근거리는 것도 기분 나쁘다고.”

뒤쪽에서 수군대는 사람들의 말에 라트반과 리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역시나, 좋은 마음으로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황을 보고 마수를 잡은 다음 아티팩트는 회수하도록 하지요.”

마수의 시체에서 얻어 낸 아티팩트들은 대신전 안에서 성력으로 다스리며 보관할 때는 안전하지만 일반인들이 쓰기에는 위험한 것이다. 가끔 같은 종의 마수를 만나면 역으로 마수가 더욱 흥분하여 달려드는 일도 많았고.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아티팩트를 좋게 쓸 자도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어쩐지 이 목소리….”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누구지? 아는 사람인가? 그때 아티팩트를 지닌 남자가 다시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 카루스, 성녀 이리스 님의 신실한 종. 대신전의 이름을 걸고 마수를 물리쳐 드리겠소. 여러분께서 나와 약속한 돈은 전부 그분을 다시 대신전으로 모시기 위한 성스러운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카루스…?”

기억났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갔을 때 남자를 바칠 터이니 대신관의 자리를 약속해 달라고 했던 상급 신관!

“라트반, 저자를… 알아서 하세요.”

저자를 당장 잡아 오라고 하려던 리나는 라트반의 손이 이미 검을 빼내는 것을 보고 더 말하지 않았다. 제가 뭐라 하지 않아도 라트반이 아주 잘 잡아 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리나는 카루스의 말을 곱씹다 반가운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리스.”

그러고 보니 한동안 그녀에게 찾아가지 못했다.

“만나러 가야겠네.”

리나는 웃으며 자신의 검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카루스의 목소리를 듣고 이곳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달려오는 중일 것이었다. 리나는 제 검을 빼 들었다. 일단 카루스에게서 아티팩트를 빼앗고 그를 제압해 마을 사람들을 지키면서 마수도 쓰러트려야 했다.

아무래도 아주 바쁜 오후가 될 것 같았다.

리나는 언덕에 서서 발아래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택이라고 해도 아주 큰 곳은 아니었다. 대신 딸린 땅은 꽤 넓은 편이었지만. 라트반과 함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점점 더 저택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창문이나 문의 형태가 이미 오래전 유행을 따른 것들이라 지은 지 꽤나 시간이 흐른 것을 알 수 있는 저택이었다. 하지만 벽은 깨끗하게 새로 회칠이 되어 있었고 열린 창문에는 새하얀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철로 된 정문으로 다가가자 저택 앞 화단에 색색이 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누구십니까?”

안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리나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트리스탄? 아직 이곳에 있었군요?”

리나가 놀란 목소리로 말하자 곧 문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얼핏 보면 정원사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나 움직임, 그리고 일반인과 다른 체격은 그가 훈련받은 기사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리나는 반가운 마음에 눌러썼던 후드를 벗었다. 뒤에 서 있던 라트반도 트리스탄이라는 이름에 후드를 벗었다.

“오, 맙소사. 이벨리나 님! 라트반 님!”

경계 가득했던 트리스탄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 찼고 그는 들고 있던 풀 더미를 집어 던진 채 급히 문을 열었다.

“오신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

“그냥 이리스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이리스는 잘 있나요?”

“물론입니다. 이리스 님께 바로 모시겠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리나와 라트반이 안으로 들어오자 트리스탄은 주변을 한번 둘러본 다음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문을 닫았다. 안으로 들어온 리나는 밖에서 보이지 않는 담벼락 안쪽의 공간에 여러 가지 무기가 잘 관리된 것을 보니 침입자에 대한 대비는 게을리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트리스탄이 서둘러 앞서 걸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뵙는 것 같군요.”

“그러네요. 이번에는 좀 멀리 다녀왔으니까요. 그보다 트리스탄, 황궁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요.”

트리스탄을 따라 열려 있는 저택의 현관으로 들어가자 그늘의 서늘함과 함께 잘 말린 상쾌한 허브의 향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벽을 보니 촘촘히 말린 허브 다발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계절에 맞춰 커튼과 장식이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저택은 집에 돌아온 듯한 포근함을 주었다.

‘잘 지내고 있었구나.’

이곳은 레온이 이리스를 위해 준비한 저택이었다.

대신전이 무너진 후에 리나의 신변만큼이나 이리스의 신변 문제도 중요했다. 그녀를 되찾아 대신전을 재건하려는 세력들이 있었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이리스를 찾아 대었다. 반대로 황후가 된 이벨리나를 주축으로 이를 모의하던 자들은 이리스를 가짜 성녀라 부르며 그녀를 찾아 해하려 했다. 당연히 이리스는 그 어느 쪽하고도 손을 잡을 마음이 없었다.

“이리스의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 살게 해 줄 것이며 제국 기사단을 보내 지키게 할 테니까.”

리나가 걱정하자 레온은 걱정하지 말라며 어차피 그녀는 제국에서 관리해야 할 사람이라 말하고는 이리스의 신변을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그 후 이리스는 몇 번 거처를 옮기더니 이곳에 최종적으로 머물기를 선택했다.

그동안 레온이 보낸 제국 기사단의 기사들이 이리스를 지켰다.

이리스의 거처는 제국 기사단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밀에 속하는 정보이다. 그렇기에 이곳으로 온 기사들은 그만큼 신뢰를 받고 있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도록 적은 수로 이리스를 호위해야 하는 탓에 그 실력 또한 출중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1년간 이곳에서 이리스를 호위하고 그 임무가 끝나면 수도로 돌아가 황실 근위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보통은 돌아가려고 하는데….’

리나는 앞서 걸어가는 트리스탄을 보았다. 꽤나 훤칠한 기사로 다른 기사에 비해 싹싹한 성격이었던 것이 기억났다. 작년에 만났을 때는 꽤 수도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길래 이미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 있다니.

그때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트리스탄? 벌써 풀 다 벤 거예요?”

이리스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빨리할 필요 없다니까 왜 무리해요? 어서 들어와요. 당신이 좋아하는 간식을 만들어 놨으니까.”

밝게 통통 튀는 듯한 목소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리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 수 있었다. 리나가 팔짱을 끼고 트리스탄을 바라보자 그는 당황하며 이리스에게 말했다.

“어, 저… 이리스 님….”

“왜 갑자기 이리스 님이라고 해요?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느새 그냥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이거군. 설명을 요구하는 리나의 눈빛에 트리스탄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이리스를 불렀다.

“저기… 이벨리나 님과 라트반 님이 오셨는데요.”

그 순간 안에서 분주하게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뚝 멎었다.

리나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케이크 한 조각을 든 채 얼어붙어 있는 이리스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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