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48)

나는 그녀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나 대신 몸을 사용하는 이벨리나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이리스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그 덕분일까, 이리스가 신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이리스가 이벨리나를 보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벨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 말에 이리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벨리나는 그런 이리스의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아주 그리운 이를 만난 것처럼.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안녕.”

그것이 이벨리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벨리나가 죽었다.

그토록 죽기를 바랐던 이벨리나는 육신과 기억을 남겨 둔 채, 영혼만이 이 세상을 떠났다. 나를 싫어했던, 내가 싫어했던 그녀가 사라졌음에 나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녀가 떠나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고. 언제나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삶의 끝에서 이벨리나는 웃고 있었다.

“언니…?”

이리스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당신이 아니야… 내 언니는….”

한 번 성력이 깃들었던 몸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매이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일까. 이벨리나 대신에 내가 그녀에게 언니인 척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헛된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으며 나는 이리스에게 말했다.

“…이벨리나는 떠났어요.”

내 말에 이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조금 전 제가 들었던 안녕이라는 말이 이별의 말이었음을 이제 알아차린 것이다.

“그게 무슨….”

“이리스,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이 많아요.”

이벨리나가 남기고 간 기억. 그녀가 얼마나 부모를 원망하면서 또한 그리워했는지. 삶의 끝에서 만난 제 동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벨리나가 다 하지 못했던 말을 나는 그녀에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이리스를 안고 있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입을 열었다.

“이벨리나가 아니라는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계속 사랑하던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리나.”

그의 말에 나 역시 그와 똑같은 미소로 답했다.

“…고마워요, 레온. 모든 일이 끝나면 당신에게도 전부 말할게요.”

그러자 레온이 이리스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고는 바닥에서 신음하는 카를을 향해 다가가 그의 허리를 밟았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더럽고 추악한 것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약해져 가는 결계가 있었다. 저것이 깨지면 고대 신은 이 육신을 죽이기 위해 덤벼들겠지.

‘죽고 싶지 않아.’

이 세계에서 가졌던 내 유일한 소망.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죽고 싶지 않다. 아니, 살아가고 싶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보고 싶고, 알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순간, 성력의 결계가 깨지며 고대 신의 황금빛이 하늘을 덮었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

아슬란은 저를 둘러싼 결계를 인지한 순간 웃음 지었다. 그래 보았자 본체의 모습이었기에 그의 웃음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력이 그녀에게 돌아갔군.’

마수였기에 그는 언제나 성력이 싫었다. 저와 맞지 않는 힘. 저를 해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리라. 수천 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한 번도 반가운 적이 없던 이 힘이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러워졌을까.

아슬란은 결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강한 성력이라 할지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고대 신의 움직임에 이제 결계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빛의 채찍이 계속해서 푸른빛을 두드렸다. 조금 전만 해도 굳건했던 푸른빛은 서서히 금색으로 변해 갔다.

아슬란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인내심은 오직 그의 반려만을 위한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그 반려를 해하려 하는 것. 기다렸다 공격할 이유가 없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가 물러서는 순간 이것은 ‘계약’대로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구할 수 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아슬란은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슬란은 하늘로 뛰어올라 결계를 깨려는 고대 신의 몸을 물었다. 그러자 고대 신의 몸의 일부가 아슬란의 목을 휘감았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흐려지려는 순간, 밑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기운이 고대 신의 몸을 베어 냈다. 아슬란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아래를 보았다.

‘라트반.’

검은 머리의 개새끼가 쉴 새 없이 고대 신을 향해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기사단장은 이제 다른 차원의 신마저도 상대하고 있었다. 아슬란은 그런 라트반을 보며 짜증을 느낌과 동시에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존재와 함께 적을 상대하는 것은 아슬란의 삶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이 될 터였다.

애초에 신을 상대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깝다. 저들은 권능이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존재들이 아닌가.

‘알 게 뭐야.’

아슬란은 입에 물고 있던 신의 잔해를 뱉으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다 알아차렸다. 뱉어 낸 신의 일부분이 한 방향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슬란은 다시 뛰어올라 신의 몸 일부를 물어뜯은 다음, 일부러 저 멀리 내던졌다. 그러자 그것은 조금 전과 같이 흡수했던 것들을 내뱉더니 다시 신의 본체로 기어 돌아갔다.

“아슬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라트반이 소리쳤다. 아슬란 역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빛 덩어리에 가까운 고대 신의 모습에 도대체 이것의 약점이 어디인지 어느 부분을 잘라 낸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것의 몸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이 있음을 두 사람은 간파한 것이다.

라트반과 아슬란은 동시에 신의 잘려 나간 조각이 돌아가려고 했던 방향을 향해 공격했다.

아슬란의 이가 빛을 잡아 찢었다. 라트반의 검이 빛을 베었다. 갈라진 황금빛 사이에 집채만 한 금색의 구(球)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의 위에 아주 작은 상처가 생긴 순간.

“……!”

소리가 아닌 머릿속으로 들리는 비명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찾았어!’

라트반은 다시 검을 고쳐 잡으며 신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물을 베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고대 신의 움직임을 조금 막는 것 외에는 타격을 주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신은 의미 있는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순간, 물컹거리는 덩어리 같았던 고대 신이 부르르 떠는 것 같더니 제 몸을 키웠다.

“……!”

갑작스럽게 형체를 바꾸는 고대 신의 모습에 라트반은 하늘을 보았다. 고대 신은 빠르게 결계를 허물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몸을 뻗었을 때, 라트반은 그것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았다.

리나의 죽음.

고대 신은 저를 막아서는 것들을 상대하기 보다 목표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하늘 전체를 덮을 것처럼 몸을 펼치는 고대 신의 황금빛을 보며 라트반은 이를 갈았다. 그때였다.

“검은 개새끼.”

이름을 불러 주는 것 같더니 다시 개새끼인가. 라트반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저것의 약점을 봤지.”

그 말에 라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구가 바로 약점이었다.

“네가 베어라.”

아슬란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히 말했다. 물론 제 눈앞에 있으면 벨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하늘을 뒤덮은 저 신의 핵에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라트반이 놀라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설마…!”

다음 순간, 아슬란이 그대로 제 입을 벌려 라트반을 삼켰다. 그러고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슬란이 제 핵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린 고대 신은 뻗었던 제 몸을 급히 끌어당겨 곧바로 저를 향해 돌진해 오는 아슬란을 덮었다.

“……!”

지금까지 피하려 했던 것과 달리 마수는 신의 공격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붉은 눈이, 붉은 털이, 거대한 발이, 짐승의 몸이 빠르게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인간의 언어로 신의 기분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금 고대 신이 느끼는 것은 기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드디어 끈질기게 제 권능을 막아섰던 존재가 자신의 일부가 되려는 것이다. 고대 신은 기꺼운 듯이 마수의 몸을 끌어안듯 뒤덮었다. 그래서 마수의 입이 제 핵의 가까이에 다가가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녹아내린다. 뼈와 근육이 빠르게 고대 신의 일부가 되어 갔다. 하지만 아슬란에게 아직 이성은 남아 있었다. 오직 감각에만 의존한 채 그는 모든 힘을 다해, 신의 몸속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구가 있는 곳에 왔음을 안 순간, 제 몸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입을 크게 벌렸다.

라트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슬란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제 앞에 있는 황금색의 구를 베었다. 이 땅을 지키고 있던 신의 힘인 푸른 성력이 다른 세계의 신을 그대로 베었다.

거대한 힘의 폭발이 일어났다.

고대 신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세상을 뒤덮었던 금색의 빛은 조각조각 갈라져 모래처럼 땅으로 떨어지다 닿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라트반은 녹아내리는 짐승의 거대한 머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땅에 부딪히기 직전 성력을 이용해 몸을 보호했지만 그렇다 해도 충격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육체의 고통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급히 아슬란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가 살아 남으리라는 희망은 조금도 가질 수 없었다.

꼴 보기 싫은 마수였다. 대신전에서 그를 향해 보였던 살의는 언제나 진심이었던 마수. 리나를 제 것인 양 품었던 마수.

라트반이 아슬란에게 호의를 품을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라트반은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아슬란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급히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잘려 나간 신의 핵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주변의 것들을 저와 같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날 저것 가까이로… 가져가.”

“왜…?”

“저대로라면… 회복한다…. 그렇다면… 저걸 신이 아니게… 만들어야….”

리나를 위해서임을 안 라트반은 잠시 머뭇거리다 아슬란의 몸을 잡아끌었다.

녹아내린 몸을 신의 핵 가까이로 끌어다 놓자 아슬란의 마력을 느낀 고대 신은 재빨리 몸을 뻗었다. 순식간에 아슬란의 몸이 금색으로 뒤덮였다. 그 옆에서 라트반은 검을 빼 들고 성력을 모았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대로 베어야 하니까.

“아슬란! 라트반!”

그때 멀리서 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친 듯이 라트반과 아슬란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지금 저것을 아슬란이라 부를 수 있을까? 몸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나마 남은 머리마저 반쯤 녹아 버린 것 같은 저 마수를? 하지만 내가 소리쳤을 때, 나는 아슬란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분명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라트반이 앞을 막아섰다.

“비켜요! 아슬란! 아슬란!”

나는 그런 라트반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조금도 비켜서지 않은 채 나를 붙잡았다. 나는 라트반에게 원망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아슬란을 저것에게 끌고 간 거예요? 아슬란!”

그를 향해 성력을 쓰려는 순간, 그에게 내 성력은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좌절했다. 성력은 마력을 가진 것을 치유할 수 없으니까. 결계 역시 만들어 보았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가 원한 일입니다.”

“뭐라고요?”

“그가 저것을 신이 아니게 만들어야 한다며…!”

라트반이 말하는 순간 뒤에서 눈부신 빛이 터졌다. 나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아슬란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금색의 빛이 땅을 뒤덮었다. 하지만 완전한 금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 빛은 빠르게 퍼지더니 나를 붙잡았다.

“리나 님!”

라트반이 급히 주저앉은 내 손을 타고 올라오는 빛을 베어 내려고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이 빛은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 빛은….

“…아슬란?”

팔을 부드럽게 쓸어 만지는 것 같은 이 감각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내가 중얼거리자 내 앞에 빛이 모여들더니 천천히 익숙한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아슬란.”

어느새 내 앞에는 아슬란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듯이 투명했다.

“이, 이게 어떻게….”

“신과 섞인 거야. 핵이 부서진 탓에 다시 강한 힘으로 불완전함을 메우려는 것이 날 먹은 거지.”

덤덤하게 말하는 아슬란이었지만 그 말의 뜻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런….”

“이건 신이야. 죽일 수 없는 존재지. 이대로 놔두면 언젠가 다시 제 힘을 되찾아 그대를 죽이려 들 것이 분명해. 그걸 막으려면 이것이 신이 아니게 만들어야 했는데 기껏 생각해 낸 방법이 이런 것뿐이었어.”

아슬란은 빛으로 이루어진 제 모습이 조금 신기하다는 듯 시선을 내려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이제 이것과 계속해서 함께하겠지. 이것이 그대를 죽이려 드는 모든 순간, 그것을 막을 수 있어.”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성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인간이다. 내가 아무리 이벨리나의 몸을 얻었다 한들 기껏해야 수십 년을 더 살고 사라질 존재였다. 무한히 살아갈 아슬란에게는 찰나에 가까울 그 시간을 위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버렸다.

아슬란의 모습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가 신과 함께 잠들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가고 싶은 곳에 가. 그대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내가 지키고 있음을 잊지 말고.”

“아슬란….”

차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흐려졌다. 아슬란은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분명 환영에 불과한 그의 모습일 텐데도 그의 입술이 내 눈물을 삼켰다.

“죽는 게 아니니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이제는 반신(半神)이니 아주 가끔… 이 대륙에서 힘이 뒤틀려 불안정한 곳이 있다면 현신하는 것은 가능할 거야. 그러면….”

아슬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대답했다.

“찾으러 갈게요.”

이벨리나의 기억이 알려준 지식 덕분에 그가 말하는 현신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들. 그곳은 이 세계를 유지하는 힘이 약해져 다른 세계와 섞이는 일이 일어나는 곳들이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는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이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나 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제 아슬란을 볼 수 있는 곳은 그런 곳뿐임을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당신을 찾으러 갈게요. 그러니 꼭….”

내 말에 아슬란이 미소 지었다.

“기다리고 있지, 내 반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슬란은 마지막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붉은색을 띠는 고대 신의 빛이 천천히 땅 아래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것이 끝나 폐허가 된 자리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맑은 하늘이 햇살을 뿌리고 있었다.

에필로그

돌무더기 가득한 광장에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췌하고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인 곳은 예전에 대신전이라 불렸던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 하나 성한 것이 남아 있지 않은 폐허에 불과했다.

천년이 넘게 이곳에 쌓여 오던 아름다운 예술품들은 대신전이 무너지던 날 대부분 그 아래 깔려 사라졌다. 운이 좋게 그런 운명을 피한 것들은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 그 원래의 값어치를 잃어버린 채 장물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대신전의 복구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용도 비용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아무도 대신전을 복구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전이 무너지던 날 이곳에 있던 많은 신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대신전은 신관들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대신전은 신의 사랑을 받는 한 사람, 성녀를 위한 곳.

그러나 이제 성녀는 없다.

“끌고 와!”

“태워 죽여!”

중앙 광장이었던 곳에는 장작이 높게 쌓여 있었다. 주변에 널브러진 건물 잔해에서 나온 나무 조각 하나까지 아낌없이 모아 쌓은 화형대는 오늘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사람들의 뒤쪽에서 밧줄에 묶인 채 질질 끌려 나오는 형체가 있었다. 그것을 보자 사람들은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제 아래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밧줄을 끌고 오는 이가 외쳤다.

“타락한 대신관이 왔소! 성녀를 마수에게 팔아넘긴 자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일까. 밧줄에 묶인 형체가 몸에 걸고 있는 넝마에는 대신관임을 증명하는 자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은 제 손에 든 것을 던지며 외쳤다.

“죽여!”

“대신관을 죽여!”

“성녀님을 돌려줘!”

“네놈이 마수를 불러 왔다지!”

퍽! 퍽! 사람들의 고함과 함께 돌멩이들은 조금의 자비도 없이 ‘그것’을 향해 날아갔다. 부모의 손을 잡고 따라와 무리의 앞에 선 아이는 ‘그것’을 보자마자 징그러움에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밧줄에 묶여 끌려오고 있는 것은 사람이라 부르기 힘든 것이었다. 얼핏 보면 마을의 축제 때, 여기저기서 굽고 있는 짐승의 구이처럼 보였지만 분명 머리와 팔다리는 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다리의 한쪽은 보이지 않았으며 남은 다리 하나는 작고 짧은 데다가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뒤쪽에 서 있는 자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구경하려 발끝을 세우다 포기하고는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저게 정말 대신관이래?”

“확실하다니까. 저기 한쪽만 남은 다리를 봐. 뒤틀린 걸 보면 카를 대신관이 틀림없어. 대신전이 무너지기 전에 내가 본 적이 있거든.”

“…그런데 정말 대신관이 마수를 불러 왔대?”

“그렇대. 그것뿐만 아니라 마지막 성녀님을 마수에게 팔아넘겼다더군.”

“나도 들었어. 변경 지역에 나타났던 성녀님을 강제로 대신전으로 끌고 갔대. 그때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성녀님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하셨다더군. 그래서 대신전에서도 울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대. 어쨌거나 그래서 대신관이 신의 노여움을 사 죽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다고 하던데?”

대신전이 무너진 날부터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소문이 돌았다. ‘선행을 베풀고 인망이 두터웠던 대신관이 사실은….’으로 시작되는 소문은 제국군이 와 구호물자를 나눠 주는 곳에서 더욱 빠르게 퍼져 나갔다.

모든 신전이 무너지면서 대륙 여기저기에서 마수들은 더욱 자주 출몰하게 되었다. 예전이라면 그것들을 상대했을 신전 기사단 역시 해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기에 마수는 거침없이 대륙의 깊숙한 곳에도 모습을 나타내었다. 과거 마수로부터 안전했던 땅에도 피해가 생겨나자 사람들의 불안은 빠르게 몸을 불렸다.

그런 상황에 어느 날 갑자기, 대신전의 폐허에 이것이 나타났다. 혀가 없어 말을 못 하며, 모든 힘줄이 잘려 기어가는 것밖에 못 하는 이것이. 몸에 남아 있는 상처들을 보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상처가 생기면 그것은 금세 아물었다.

예전이라면 신의 기적이라 불리었을 그것은 끔찍한 몰골 탓인지 저주받은 것으로 불렸고 사람들은 곧 그것에게서 예전 카를 대신관의 흔적을 찾았다.

동시에 대신관이 이 모든 재앙을 불러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드디어 사람들의 불안이 먹이를 찾은 것이다.

카를이 장작더미 위로 개처럼 끌려 올라간 다음 나무 기둥에 묶였다.

“읍! 으읍!”

제가 무엇을 당하게 될지 인지한 듯 카를은 몸을 비틀며 도망가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괴물이 내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사람들이 재갈을 물렸기에 새어 나오는 것은 신음 소리뿐이었다.

카를이 묶이자 여기저기서 불을 든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다.

“죽여라!”

“어서 죽여!”

“저 괴물이 타 죽는 순간이 신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순간이다!”

그 말에 카를의 눈이 커졌다. 그는 죽지 못한다. 하지만 고통은 남는다. 그렇다면….

그는 계속해서 불길 속에서 고통받을 것이다.

“으으읍! 으읍!”

누군가를 저주하는 말이 카를의 입에서 새어 나왔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대신전의 중앙 광장에서 한때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던 대신관 카를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반쯤 무너진 대신전의 성벽 위에서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몸을 떠는 것을 본 라트반이 다가와 그가 걸치고 있던 망토를 둘러 주었다.

“…고마워요.”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걸친 나는 다시 높게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내 옆에 서 있던 레온은 그 불길에서 시선을 돌리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간교한 혀를 자르니 누구 하나 편들어 주는 이가 없군요.”

당연하다는 듯, 레온이 말했다. 그럴 것이다. 카를의 세뇌는 대부분 그의 말로 시작되었으니. 게다가 이 모습에 아직 그의 세뇌가 남아 있을 자들도 완전히 벗어날 것이라 레온은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제 떠날 겁니까?”

“…….”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물어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귀찮은 일만 다 맡겨 두고 떠나는군요.”

내 말에 레온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그 귀찮은 일이 내 즐거움이라는 걸 모르는군요.”

“그래도….”

나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황태자비 문제로 많이 시끄러울 텐데….”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내가 레온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신전이 무너진 다음 레온은 제국으로 가더니 그 사실을 완전히 공표하고 문서로 남겼다. 나는 본 적이 없으나 황가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회랑에는 황태자비라는 소개와 함께 내 초상화도 걸렸다고 한다.

“괜찮습니다. 그들은 황태자비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황태자가 대신전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추후 남은 세력에 대해서 권한을 행사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한 거짓 결혼이라 소문날 테니까요. 사실은 내가 빌고 빌어서 한 건데 말입니다.”

“…….”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날 당신의 도구로 써 달라 내가 빌었던 것을 전부 잊었나요?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제일 잘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손해 보는 건 없어요.”

레온은 대신전이 무너진 후, 제국군을 동원해 주변을 정리하고 사람들을 치료하며 난민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했다. 덕분에 제국의 명성은 드높아졌고 신전 기사단은 물론 남아 있는 신관들과 대신전에 머물던 사람들까지 전부 자연스럽게 제국에 흡수되었다.

‘왜 그가 타락한 성녀와 결혼을 했다 주장하는 건가?’ 하는 사람들의 의문은 제국이 발표한 공식 문서로 인해 모두가 납득했다.

마지막 성녀라 주장하는 이리스는 정식으로 계승식을 치르지 않았기에 성녀라 인정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마지막 성녀였던 이벨리나에게 아직 대신전의 모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남편으로서 아내의 권한을 대행한다는 핑계 아래 나머지 신전들의 모든 자산과 권리를 획득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레온이 이미 나를 죽여 없앴고 살아 있는 척 꾸며 신전을 집어삼킨다는 비난이 들려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 소문도 레온이 내었으니까.

“잘 다녀오십시오. 라트반 경이 있으니 신변의 안전은 걱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레온의 시선이 내 배를 향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제국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대신전이 무너진 날로부터 일 년이 지났지만 아직 내 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안에 아슬란의 아이가 있음은 알고 있다. 그가 더 이상 이 아이를 마수가 아니게 만들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인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1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 태어날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알겠어요.”

이제 정말 헤어질 때가 되었음을 알았는지 레온은 더 말하지 않고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내 이마 위에 닿았다. 그대로 몸을 뗄 것이라 생각했는데, 레온은 내 뒤를 바라보더니 조금 심술궂은 표정이 되어 다시 얼굴을 내렸다.

“읍…!”

입술 사이를 뜨거운 혀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기억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의 혀가 내 입 안을 빠짐없이 훑었다. 잠시 후 몸을 뗀 레온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멀리 떠나는 아내에게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지금 라트반에게 하는 말이죠?”

그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물러섰다. 돌아보니 역시나, 라트반의 차가운 시선이 레온을 향해 있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레온에게 작게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라트반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붙잡은 채, 나는 무너진 대신전의 성벽을 내려왔다. 묶여 있던 말로 다가가자 그곳에는 이리스가 서 있었다.

“리나 님.”

그녀는 나를 언니라 부르지 않는다. 그녀는 제 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몸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도.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동안 그녀는 내게 웃어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 사실에 섭섭함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잘 있어요, 이리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레온에게 부탁하고.”

“네. 저기….”

머뭇거리던 이리스는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멀리 떠나시는 길에 필요한 약들이에요. 지혈제부터 진통 효과가 있는 것들까지. 무, 물론 더 좋은 것을 갖고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내민 주머니를 받아 들고는 그녀를 안았다. 움찔거리며 놀라긴 했지만 그녀는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

“무사히 돌아올게요. 나는 아직 당신에게 이벨리나의 일들을 다 이야기해 주지 못했으니까요.”

그 말에 이리스가 훌쩍이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이리스를 찾아가 내 안에 남아 있는 이벨리나의 기억들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이리스는 조용히 앉아 제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에게 말해 줄 이벨리나의 기억은 가득 남아 있었다.

손을 흔드는 그녀를 뒤로하고 나와 라트반은 말을 몰았다. 깊이 후드를 눌러쓴 우리를, 제국 기사단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처럼 길을 열어 주고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달린 다음, 숲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주 멀리서 무너진 대신전과 검은 연기를 내뿜는 불길이 높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런 나에게 라트반이 다가왔다.

“원래 저곳에서 불타 죽었을 사람은 나였어요.”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 저곳은 가짜 성녀 이벨리나가 최후를 맞이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라트반, 레온, 아슬란이 이리스와 함께 바라보았을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미소 지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절대로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끌고 가 이리스의 앞에 꿇렸어야 할 라트반은 이제 내 손을 잡고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레온도, 아슬란도. 그리고 이리스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벨리나가 아니니까. 나는 지난 모든 성녀들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성녀들을 생각하며 죽기 위해 노력한 진짜 성녀가 아니니까.

나는 라트반의 손을 잡은 채, 몸을 돌렸다.

이벨리나의 모습으로 살았음에도 이벨리나가 아니었던 가짜 성녀는, 이제 제가 보았던 이야기에서 퇴장을 할 때였다.

“가요, 라트반.”

책이 아닌, 그 너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본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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