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카를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두 손 가득히 대신전의 집기를 들고 달리던 누군가를 카를을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밀어 버린 것이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뒤따라 달려오는 자들 역시 손에는 성물이나 그림이 들려 있다. 심지어는 수가 놓인 커튼을 뜯어가는 자들도 보였다.
촤르륵!
그들 중 한 명이 달려가다 넘어지며 주머니에 있던 것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헌금함을 털기라도 한 것일까. 반짝이는 금화가 땅 위를 정신없이 굴렀다.
“안 돼!”
넘어진 남자는 굴러가는 금화를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다 그 금화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더 밝은 금색의 빛이 금화를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금색 빛이 남자를 뒤덮었다. 인간이었던 것은 신의 일부가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를은 희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리스가 입을 틀어막은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푸른빛에 휩싸인 그녀의 뒤로 도망가지 못한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이 울며 서로를 붙들었다. 그들의 위로 조금 전 남자를 뒤덮었던 빛이 쏟아졌지만 마치 거울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이 금색의 빛은 튕겨 나가고 말았다.
‘성력이…!’
카를은 입술을 씹었다. 상급 신관들의 성력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저 빛이다. 성력이 미약한 그는 처음부터 막아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하지만 이리스는 스스로를 지킬 뿐만 아니라 그녀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까지 지키고 있었다.
“망할 계집….”
저리 성력을 쓸 수 있으면서 왜 계속 쓰지 못한다고 울어 댄 건지. 카를은 이리스의 뒤에서 아무것도 못 한 채 훌쩍이고 있는 자들을 보았다. 저 귀한 성력을 저런 쓰레기들을 위해 쓰고 있다는 것이 카를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저것은 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쓰여야 하는 것이다.
이벨리나가 온전히 그에게만 성력을 쓰던 때를 떠올리며 카를은 이리스에게 다가갔다. 절뚝이며 걸어가는 그의 옷은 이미 흙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대신관의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리스는 두려운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다 카를을 알아차리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이리스의 주변을 감싼 푸른빛이 카를까지도 덮는 순간, 카를 위로 쏟아지던 금색의 빛이 사라졌다.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음에도 카를의 얼굴에 기쁨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에게 물었다.
“대신관님! 호, 혹시 성녀님… 성녀님이 대신전에 오시기 전에 어디에 계셨나요!”
“……?”
뜬금없는 이리스의 질문에 카를은 도대체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리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카를에게 계속 말했다.
“성녀님이 우리 언니일지 몰라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대신전에 언니가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서, 성력이 증거일지도 몰라요! 혹시 성녀님이 제 언니라서, 그래서 성력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저에게 온 것일지도….”
“이베트? 한스? 시메인 왕국에 살던…?”
“맞아요!”
카를의 입에서 제 부모의 이름이 나오자 이리스의 눈이 커졌다. 게다가 카를은 과거 부모님이 살았다던 왕국의 이름까지 정확히 말했다.
이리스가 놀라는 것 이상으로 카를 역시 놀랐다. 이벨리나를 데려온 다음, 그녀가 온전히 대신전에만 마음을 둘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벨리나에게는 부모가 돈을 바라며 그녀를 팔았다고 돌려 말했다. 반대로 부모에게는 이벨리나가 그들을 부끄러이 여겨 더 이상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챙겨 주는 척 돈을 쥐어 주었음에도 부모는 그것들을 다 물리더니 이벨리나를 만나게 해 달라 빌었었다. 그래서 결국 죽이기로 카를이 마음먹었을 때, 눈치라도 챈 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로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 여기서 이벨리나의 가족이 나타날 줄이야.
카를은 어릴 적, 처음 대신전에 왔을 때의 이벨리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신관들 품에서도 부모를 찾으며 울었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그녀가 읽는 신전의 문서에서 다른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문제가 나오면 읽는 속도가 느려졌던 것도.
“…당신의 부모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마수에게, 어머니는 병으로… 악!”
이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를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리스는 비명만을 지른 채, 카를을 밀어내지 못했다.
‘이 계집이 성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게 이 순간 도움이 될 줄이야.’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음에도 그리워하던 그녀의 가족이 여기에 있다.
그가 이벨리나에게 내밀 수 있는 패가 생긴 것이다.
“아슬란!”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은 허공을 저었을 뿐이다. 멀리 떨어진 아슬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 어디로 간 거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고대 신이 황금빛 빛줄기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소리는 없었다. 다만 금빛 궤적에 있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똑같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신전 건물들의 윗부분이 모두 금색으로 변해 모래처럼 흘러내렸다.
“리나 님!”
“리나!”
나를 붙잡는 손과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라트반과 레온이 엉망이 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사함을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을 붙들고 애원했다.
“아슬란이…! 아슬란이…!”
죽으려 하고 있다. 그 말이 목에 걸린 듯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아슬란을 막을 수 있지? 초조함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자 하늘에는 거대한 일그러짐과 함께 지금껏 본 적 없는 크기의 마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붉은 털에 사자와 같은 형상을 한 마수.
“아슬란….”
이 아수라장에서 내 목소리를 들었을 리도 없는데 마수는 고개를 돌렸다. 핏빛 붉은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그 순간, 고대 신의 빛줄기가 내가 있는 곳을 향했다.
콰과광!
큰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던 나는 모래알 하나 나에게 닿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푸른 성력이 돔처럼 내 주변을 덮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라트반?”
다급히 나를 끌어안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빛의 줄기는 라트반이 만들어 낸 성력의 결계를 살펴보듯이 몇 번 움직이더니 다시 거세게 위를 내려쳤다. 그러자 라트반은 나를 안았던 손을 풀고는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런 라트반에게 다가가려 하자 레온이 나를 붙들었다.
“리나, 물러서요!”
라트반은 고개를 돌려 레온이 나를 붙잡는 것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결계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빛의 줄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
내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 라트반의 검이 빛줄기를 잘라 내었다. 투툭. 끊어진 빛줄기가 땅으로 떨어지더니 허리가 잘린 뱀처럼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튀어 오르다 근처에 있는 건물의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히익!”
그 건물 아래에서 떨고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빛줄기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몸을 뒤틀 때마다 제가 흡수했던 것들을 뱉어 내었다. 건물의 일부, 나뭇가지, 그림의 절반. 그리고 사람의 절반.
“레온, 놔줘요! 라트반이…!”
“라트반 경이 위험할 것 같습니까? 헥사도 잡은 저 사람이?”
레온은 나를 붙든 채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냉정한 레온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라트반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라트반은 다가오는 빛줄기를 가볍게 잘라 내었다. 그의 검에 푸른빛이 도는 것을 보니 성력을 이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옆을 돌아보자 라트반과 함께 온 듯한 성기사들 역시 성력이 어린 검으로 빛줄기를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막아 내고 있을 뿐, 공격을 해 쓰러트리는 것은 라트반뿐이었다.
그는 다른 기사들 쪽으로 향하는 빛줄기는 물론 나와 레온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것들 또한 잘라 낸 다음 곧바로 고대 신의 본체로 향했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빛줄기가 여기저기서 모여들더니 하나로 합쳐져 라트반을 향해 제 몸을 휘둘렀다. 라트반이 서 있던 자리를 빛줄기가 내려친 순간 땅이 갈라지며 주변이 죄다 금색으로 변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빛줄기가 닿기 전 이미 라트반이 그것을 피해 고대 신의 몸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가 뛰어오르자 푸른빛의 궤적이 생겼다. 반원의 형태를 띤 성력이 그대로 날아가더니 고대 신의 몸에 부딪혔다. 거대한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라트반의 성력이 닿았던 부분이 마치 칼로 자른 듯 갈라지며 그 주변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고대 신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봤나요? 지금 우리는 라트반 경을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그렇게 소리친 레온은 고개를 들었다. 나 역시 고개를 들어 레온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
어느새 하늘에는 고대 신에게 가까이 다가간 아슬란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사자가 크게 입을 벌리나 싶더니 그대로 고대 신의 몸을 물어뜯었다.
“아슬란!”
이러다 아슬란도 그대로 신의 일부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아슬란은 물들지 않았다. 대신 아슬란은 고대 신의 몸을 문 채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워낙에 거대한 형체들이었기에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언뜻 보기에는 무척이나 느려 보였다. 하지만 아슬란과 고대 신의 몸이 땅에 부딪히는 순간 충격과 함께 대신전의 땅이 흔들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아직 다 도망치지 못했던 신관들과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으니 나와 레온 역시 무사할 리 없었다. 아무리 라트반이 만들어 준 결계라 할지라도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떨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레온과 내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
놀라 돌아보자 레온이 웃으며 말했다.
“마법 스크롤입니다. 그 외에 다른 아티팩트도 있구요. 가진 게 돈과 권력이라 이런 건 마음껏 쓸 수 있는 게 다행이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내던졌다. 종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펄럭이며 허공에 떠올랐다.
전쟁을 하는 나라들이 마법사들을 동원해 일반인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물건들을 만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보게 될 줄이야.
레온은 나를 안고 날아오르더니 한참이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제야 나는 아슬란과 고대 신 그리고 라트반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뒤엉킨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뒤늦게 분노를 느꼈다.
“이벨리나!”
내 외침에 레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순간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다. 예전이라면 당혹스러움을 느껴야 하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대단하네.”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이벨리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이 몸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이벨리나가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이리라.
완전한 암흑이었던 이곳은 깨어진 유리처럼 모든 곳에 금이 가 있었다. 이제 이벨리나는 더 이상 이 몸 안에서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 주듯이.
“…너.”
나는 이벨리나에게 다가가 멱살을 붙잡았다. 피할 생각도 없다는 듯 그녀는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내 손에 끌려왔다.
“마수가 너를 살리려고 스스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짝! 소리와 함께 이벨리나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녀는 제가 뺨을 맞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뺨을 만지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멱살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꼭 한 번 널 이렇게 때리고 싶었어.”
이벨리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벨리나의 복수에 내가 무어라 입을 열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녀가 견뎌야 했을 두려움의 시간은 겪어 보지 않은 내가 함부로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아슬란은 그녀의 복수와 조금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아슬란에게 내 수컷이라 말하며 그를 달랬던 것이 생각났다. 그 말에 곧바로 기분 좋다는 듯이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리며 기대 오는 그가 부담스럽긴 해도 싫지는 않았다. 그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내가 돌려주지 못할 애정을 나에게 주고 있었으니까.
거래 때문이라고 해도 그는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다. 물론 툭하면 그냥 다 죽이면 안 되냐는 말을 해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는 내가 하지 말아 달라 부탁한 것들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그의 원래 모습을 바라보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에게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부탁하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내가 그에게 부탁한 것은 석판에 적은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새끼를 배게 하기 위해서는 그저 끌고 가 그가 원하는 대로 취했으면 될 일이었는데. 원래의 그의 모습을 보면 지금까지 그가 나를 위해 해 주었던 행동들은 구차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이었다.
너무 강대한 존재가 너무 약한 것을 사랑했다. 기꺼이 제가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여 엎드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이제는 미물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려 든다.
“넌 이제 절대로 나를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해.”
나는 이벨리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인 척 살아왔던 주제에.”
이벨리나의 차가운 말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이제는 네가 나인 척 살게 되었지.”
그 순간 몸의 주인이 결정된 것이었다.
내가 이벨리나인 척하며 살아갔을 때, 이 몸은 이벨리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벨리나가 나인 척 행동한 순간, 이 몸은 내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이벨리나의 행세를 하며 살아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나는 내 뜻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너는 두 번 다시 나를 휘두를 수 없어.”
내 말에 이벨리나의 의식이 붕괴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암흑이 가득했던 공간에 빛이 쏟아졌다. 나는 이벨리나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녀의 모습이 흐려지고 있었다. 몸은 죽지 않았지만, 이제 이벨리나의 혼에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제 육신에 미련이 없던 그녀였다. 아슬란을 이용해 제 계획을 완성하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자 그나마 육신을 붙잡고 있던 미련도 완전히 놓아 버린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이 몸을 더 필요로 할 일이 뭐가 있겠니.”
그 말과 함께 힘없이 웃는 이벨리나는 더 볼일이 없다는 듯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언니!”
언니?
현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깜빡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붙잡고 있는 레온이 보였다.
“리나? 정신이 들어요?”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누가…!”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갈라진 땅 너머에 내가 잘 아는 자가 있었다.
“이벨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웃지 못한 채, 악귀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목에 칼을 가져다 댄 채 붙잡고 있는 마른 여자.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리스.”
신음과도 같은 내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이리스가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언니! 언니!”
“…언니?”
왜 이리스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내 의문에 답을 해 주겠다는 듯이 카를이 소리쳤다.
“인사는 해 주지 그래? 네 어미가 도망칠 때 품고 있었던 네 동생인데.”
“무슨 소리….”
이리스가 이벨리나의 동생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쩐지… 성력이 그냥 아무의 몸에나 들어갔을 리가 없지. 자매가 사이좋게 신의 선택을 받았군!”
카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계속해서 소리쳤다.
“네가 대신전만을 믿고 의지하도록 일부러 네 부모가 돈만 요구하고 너를 버렸다 말했지!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어. 나중에 귀찮게 성녀의 부모입네, 하고 나타날 게 짜증 나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눈치채고 도망쳤으니 말이야!”
그 말에 이리스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계속 신전에 못 가게 한 것도… 신전이 없는 곳에서만 사신 것도 설마….”
예전에 읽었던 그녀의 가족에 대한 기록이 떠올랐다. 그녀의 부모는 신전에 성녀의 부모랍시고 돈을 뜯어내다가 아주 많은 돈을 받고 나서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카를이 죽이려 해 도망을 쳤단 말인가?
그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리스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널 버린 것은 사실이지. 지금까지….”
“아니야!”
카를의 손에 잡혀 있던 이리스가 크게 소리쳤다.
“아니야! 부모님은 매일 기도하셨어! 신전에 안 가도 매일 언니를 위해 기도했었다고! 마수에게 쫓겨 살던 곳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을 때도! 그래서 산속에서 잠이 들어야 했을 때도 아침저녁으로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기도했었단 말이야!”
몸부림치는 탓에 이리스의 목에 겨눠졌던 칼이 그녀의 목에 상처를 내어 피가 흘렀다. 그 모습에 나는 이리스가 제대로 성력을 쓰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와 같은 상태인 건가.’
처음 내가 이벨리나의 몸속에 들어왔을 때, 성력을 갖고 있음에도 나는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 탓에 시델을 막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리스도 그와 같은 상황일 것이다. 성력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저 칼 정도는 충분히 막았을 터이니.
“이건 무슨….”
당황해하는 레온의 목소리만큼이나 나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죽기 전 읽었던 책이 생각났다. 그 책 어디에서도 이런 내용은 없었다.
“…동생?”
그때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형편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동생이 있었어…?”
이벨리나의 의식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면서 나는 그녀가 그동안 감추고 있었던 그녀의 기억을 전부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짧은 시간에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린 이벨리나가 신전에 처음 오고 나서 하루 종일 부모를 찾아 울던 모습.
제 생일이 정말로 태어난 날이 아닌 대신전에 오게 된 날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실망을 감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모습.
제 딸을 살려 달라 비는 여자를 보고 다른 신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 죽어 가던 아이를 살려 준 다음 다행이라고 울며 기뻐하는 여자를 멍하니 보던 모습까지.
그러는 사이에도 카를의 모습이 여러 번 나타났었다. 그는 이벨리나가 어릴 적부터 그녀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정한 목소리로 차가운 거짓을 말했다. 당신을 버린 그런 부모 따위는 이제 잊으라고. 당신에게 가족은 없다고.
“…다 거짓말이었군.”
경악에 찬 내 목소리에 카를은 웃었다.
“당연하지. 그래야 네가 나를 더 따르고 내게 매달릴 터였으니.”
의식 속에서 이벨리나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알게 된 진실에 울지조차 못한 채, 억울함과 분노를 토해 내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콰쾅!
귀가 얼얼할 정도의 굉음과 함께 내 옆에 있던 건물 위로 아슬란의 몸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고대 신의 빛줄기가 아슬란을 휘감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붉은색 마력이 그 빛줄기를 막아 내려 하고 있었지만 아슬란의 몸 곳곳이 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라트반이 필사적으로 고대 신의 빛줄기를 잘라 내며 아슬란을 돕고 있었지만, 고대 신은 아슬란을 먼저 끝장내겠다는 듯 제 몸이 잘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아슬란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악!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슬란이 제 다리를 붙잡은 빛줄기에 몸부림쳤다.
건물이 육중한 그의 몸을 버텨 내지 못하고 부서졌다. 아슬란과 고대 신의 힘이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꽂히자 다시 지진처럼 땅이 흔들리고 갈라졌다. 그 탓에 서 있던 모두의 몸이 흔들렸다. 레온이 재빨리 나를 끌어안고 스크롤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곧바로 땅을 굴렀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넘어지며 무너졌다. 그것은 카를과 이리스도 다를 바 없었다.
주저앉은 땅 아래로 두 사람의 몸이 굴렀다.
“이리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카를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다시 이리스의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당기며 나에게 소리쳤다.
“동생을 살아서 만나고 싶으면 당장 황태자가 갖고 있는 스크롤을 던져!”
“……!”
그 말에 나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리나.”
그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 스크롤은 한 장뿐입니다. 더 위험해지기 전에 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야 해요. 그게 아슬란과 라트반 경을 위한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것일까. 카를이 다시 소리쳤다.
“더욱 잘된 일이군! 어서 던지지 못해!”
카를의 칼끝이 이리스의 목을 파고들었다. 조금 전보다 더 많은 피가 이리스의 목을 타고 흘렀다. 이리스는 저를 붙잡은 카를을 노려보더니 소리쳤다.
“안 돼! 어서 피해요! 어서 도망가!”
“……!”
이리스의 말에 내 손이 조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벨리나…?’
이미 이 몸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잃었음에도 이벨리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다.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레온의 손에 들려 있는 스크롤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머릿속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리스를 살려 달라 하고 싶겠지. 하지만 조금 전, 그녀는 제 몸을 포기하며 나에게 말했었다. 자신이 이 몸을 더 필요로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이벨리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리스를 살려 달라고 하는 순간, 내가 그녀를 외면하고 이 자리를 뜰 것을.
“어서 내놔!”
카를은 가만히 있는 나를 보며 초조한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트반과 아슬란은 목숨을 걸고 나를 위해 싸우고 있다. 레온 역시 마찬가지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하러 이곳에 왔고. 세 사람의 노력을 생각하면 나는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옳았다.
‘이리스는….’
지금까지 그녀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얼마나 두려워했었는지가 생각났다. 나에게 이리스는 죽음과 같은 의미였다. 그녀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원래의 흐름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안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아닌 이벨리나의 동생이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리스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자 카를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윽!”
이리스가 그대로 몸을 돌리더니 카를의 다리를 걷어찬 것이다.
“놔!”
이리스는 제 목에 칼끝이 스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성력을 언니에게 돌려줘야 한단 말이야! 내 것도 아닌데! 진짜 성녀는 언니인데!”
신음 소리와 함께 카를의 몸이 크게 비틀거리며 이리스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리스의 몸이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게!”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카를이 단검을 든 손을 높게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손을 뻗어 레온의 손에 들려 있던 스크롤을 빼앗듯이 잡아챘다.
“리나!”
레온이 소리쳤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카를에게 외쳤다.
“여기! 네가 원하는 게 있어! 그러니 이리스를 놔줘!”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카를은 내가 흔드는 스크롤을 보며 웃더니 넘어진 이리스의 등을 발로 밟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어서 그걸 던져!”
그 말에 나는 있는 힘껏 카를을 향해 스크롤을 던졌다. 구겨진 종이가 그의 옆으로 떨어지자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레온과 내 몸은 다시 땅 위에 섰다. 마법의 시간이 다 끝난 것이다. 카를은 그런 나와 레온을 확인하더니 “이게 마지막이랬지?”라며 웃었다.
“어서 이리스에게서 비켜!”
“물론 그래야지. 성력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성녀 따위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까.”
카를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로 된 스크롤을 찢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법이 제대로 발동된 것을 확인한 카를이 미소 지었다.
“카를!”
내가 외친 순간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이리스의 등을 그대로 걷어찼다.
“꺄아아아악!”
이리스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균열 아래로 떨어졌다.
“이리스…!”
떨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몸 역시 어두운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웃고 있는 카를의 모습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고 어둠 저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이리스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죽는다. 바닥에 닿는 순간, 그녀도 나도 죽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고자 발버둥 친 노력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 모든 것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하지만.
모든 성력을 가져가 버린, 나를 죽음으로 이끌 운명이었던, 이벨리나의 동생인, 이벨리나와 똑같이 카를에게 이용당한, 제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처음 만난 언니를 걱정하는, 제 것이 아닌 것들을 돌려주고 싶다 외치는.
나는 그런 이리스를 구하고 싶었다.
나는 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는 이리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거대한 푸른빛이 어둠 속에서 폭발했다.
카를은 허공에 떠올라 끝이 보이지 않는 균열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한 비열한 웃음이 떠 있었다.
‘하나만 처리해도 잘된 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둘 다 한 번에 치울 수 있을 줄이야.’
이제 이리스는 죽든지 말든지 그에게 알 바 아니었다. 성력을 갖고 있는 주제에 쓰지 못한다면 어차피 쓸모없는 계집이다. 게다가 그에게 적의를 갖고 있다면 죽어 주는 쪽이 편하다. 모자란 것이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된 성녀라면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모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벨리나까지 함께 치우게 될 줄이야.’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떨어지는 사람을 붙잡으려 들 줄은 몰랐다.
‘하긴, 아닌 척하면서도 계속해서 가족을 그리워했으니.’
대신전 내 치료소에서도 딸을 데리고 온 부모들에게 유독 더 신경을 쓰던 이벨리나였다. 그 속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벨리나가 그렇게 흔들릴 때마다 카를은 일부러 그녀의 부모에 대해서 거짓을 말했으니까. 그렇게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저에게 향하게 만들었기에 카를이 조금이라도 얼굴이 굳거나 쌀쌀하게 대하면 이벨리나는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가족을 그리워하던 마음이 이런 순간에 도움이 될 줄이야.
이제 어서 이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카를은 아래를 보았다. 비명 소리와 어딘가 부딪혀 터져 버리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 좋겠다, 생각하면서.
하지만 밑에서 나타난 것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건…!”
놀라움에 소리를 미처 다 내뱉기도 전에 아래에서 시작된 푸른빛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세상을 다 뒤덮어 버릴 것 같은 격렬한 성력의 폭발은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타올랐다. 대신전을 덮었던 성력의 결계는 지금 이 폭발하는 성력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에 불과해 보일 정도였다.
도망가던 사람들도, 고대 신을 상대로 맞서던 기사들도, 그것을 베어 내던 라트반도, 심지어 엉킨 채로 세상을 부수고 있던 아슬란과 고대 신마저도 성력의 폭발에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 뭐야….”
모두가 그 빛에 안락함을 느꼈지만 카를은 그렇지 못했다. 이 성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저 멀리 균열의 바닥에서 천천히 떠오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이리스를 끌어안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은 이벨리나였다.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에 카를은 본능적으로 지금 당장 그녀에게서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녀가 성력을 되찾은 것이다.
황급히 몸을 돌려 남은 마법으로 멀리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 카를은 갑작스럽게 제 등을 덮친 뜨거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고개를 돌려보자 발아래에서 레온 황태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황태자의 손에는 찢어진 마법 스크롤이 들려 있었다.
“부, 분명 나에게 준 게 마지막이라고…!”
“거짓말인 게 당연하잖아.”
카를은 레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끔찍한 통증이 그의 등을 날카롭게 헤집었다. 발버둥 치는 카를에게 다가간 레온은 주변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어 망설임 없이 그의 손등을 내려찍었다.
“크아악!”
마수와 다를 바 없는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뱉은 카를은 극심한 고통에 버둥거리지도 못한 채 가파르게 숨만 쉴 뿐이었다. 레온은 발로 검을 밟아 더욱더 카를이 움직일 수 없도록 한 다음 리나를 기다렸다. 곧 이리스를 안은 그녀가 균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불길에 휩싸여 평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레온은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곳에 성녀가 있었다.
***
이리스를 붙잡은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나는 눈을 감으며 더욱 이리스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동시에 내 안으로 거대한 힘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언제 받았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성력을 전부 잃고 중앙 신전 뒤, 지하의 성소를 찾아갔을 때 밑에서 올라오던 성력을 붙잡은 적이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성력은 내 손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잠시 느꼈던 따스함이 생각났다.
지금 내 안으로 몰려 들어오는 것은 작은 온기가 아닌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뜨겁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잠시 갈 곳을 잃어 헤매던 것이 원래의 자리를 찾아 돌아오려는 것이다.
성력이 돌아오는 순간, 나는 내 안에서 이벨리나가 제가 덮어 버린 기억들을 전부 풀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순간에 나는 흘러넘치는 이 힘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끝없이 떨어지던 나와 이리스의 몸이 허공의 어딘가에 멈췄다. 땅속을 뒤덮은 힘은 균열을 전부 채우고도 남아 넓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나는 가만히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곧, 다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떠오른 내 앞에는 한쪽 손이 검에 의해 땅이 박힌 채 꿈틀거리고 있는 카를이 보였다.
나는 안고 있던 이리스를 레온에게 부탁한 다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세상 모든 곳에서 넘실거리던 성력이 아슬란과 고대 신의 주변에 거대한 결계를 만들었다. 그다음 나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카를에게 다가가 그의 손등에 박혀 있던 검을 거칠게 뽑아내자 신음 소리와 함께 카를이 몸을 뒤틀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손을 감싸 쥐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왜? 죽이고 싶어서?”
내 손에 검이 들려 있음에도 카를은 두려운 표정 하나 없이 비웃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이미 했겠지. 갑자기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이벨리나? 너는 성녀야. 너는 아무도 죽일 수 없어.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저 황태자의 손을 빌렸어야지.”
나는 그런 카를에게 다가가 검을 든 손을 올렸다. 카를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벨리나, 넌 나를 죽일 수 없어.”
그 순간 내 손에 들린 검이 정확히 카를의 목을 찔렀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카를의 눈이 커졌다. 그의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아올랐다. 바들거리는 카를의 손이 더듬거리며 제 목에 꽂힌 검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나는 그런 카를에게 말했다.
“난 이벨리나가 아니야.”
“……!”
그 말에 카를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목에 박혔던 검을 빼낸 다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짙은 푸른빛이 그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했다. 흐른 피만 남아 있을 뿐, 카를의 목은 긁힌 상처 하나 없이 태어났을 때와 같은 말끔한 피부로 되돌아와 있었다.
“왜… 컥!”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묻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배를 찌른 검을 바라본 다음 그것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엉망이 된 대신관의 예복이 피로 물들었다.
검을 빼내자 조금 전 목이 찔렸을 때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다시 카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력이 그를 감싸자 그의 배에 났던 상처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상처가 사라졌다 해서 그 고통마저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 찔렸던 고통을 아직도 느끼고 있는지 카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카를은 놀라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 쳤지만 뒤틀린 그의 다리는 제대로 땅을 디디지 못하고 휘청이더니 바닥을 굴렀다.
나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카를의 다리를 망설임 없이 걷어찼다.
“크아악!”
그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네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짓은 이벨리나가 상상했던 것들이다. 그의 아래에서 짓밟힐 때마다 이벨리나는 제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상상했다. 그녀가 성녀가 아니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던 이 쉬운 일들을.
나는 의식 속, 이벨리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그저 울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그녀가 얼마나 바랐던 일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깔려 신음 한 번을 낼 때마다 이벨리나는 그녀의 상상 속에서 카를을 죽였다. 감히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나는 그녀가 상상했던 그대로 카를을 찔렀다. 단번에 죽어서는 안 된다. 이벨리나가 그를 죽인 횟수만큼 그는 죽어야 하니까.
나는 주변에 일렁이고 있는 성력을 바라보았다. 이리스를 구한 순간, 이벨리나는 성력을 다루는 법을 나에게 전부 알려 주었다. 동시에 이벨리나가 끝까지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기억들도 함께 나에게 흘러들어 왔다. 그녀가 이 대신전에서 두려움에 떨며 지냈던 모든 시간들의 기억이.
“너… 이벨리나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
내 손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이제야 인지한 것일까. 카를의 얼굴에 드디어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카를에게 다가가 그의 다리에 검을 대었다. 비틀리지 않은 멀쩡한 다리에.
“하, 하지 마!”
그가 애원함과 동시에 나는 검을 그의 다리에 박아 넣고 비틀었다.
“크아아아악!”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카를이 몸부림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이 좋았던 것일까. 그의 다리는 뼈까지 잘려 너덜거렸다. 나는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카를의 다리가 그의 옆을 뒹굴었다.
“내, 내 다리! 내 다리!”
성력을 사용했기에 그는 죽기는커녕 기절할 수도 없었다. 나는 검을 집어 던진 다음 몸을 돌려 레온의 품에 있는 이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때 내 안에서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울음에 묻혀 제대로 알아먹기조차 힘든 목소리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울음과 한숨을 동시에 토해 내는 이리스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제 이벨리나는 내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한 번만.”
이벨리나는 나에게 애원했다.
“한 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