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개의 억양 없는 목소리가 대신전 안에 메아리쳤다. 모두가 그 내용에 경악을 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저, 저기!”
넋이 나간 채 전언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 높이 누군가가 떠 있었다. 그들 뒤로 보이는 거대한 사자의 형상에 모두는 말을 잃었다.
그 사자의 붉은 눈이 대신전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저것의 이름이 아슬란이며, 저것은 지금 대신전을 파괴하러 왔다는 것을.
“맙소사….”
레온은 넋 나간 얼굴로 멀리 있는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대신전의 위에 있는 형상을 바라본 것이지만. 그리고 그 옆에서 라트반 역시 굳은 얼굴로 레온이 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대신전 위에 아주 작은 형체가 보였다.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그 형체가 아슬란과 리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이 놀라는 것은 아슬란과 리나 뒤에 떠 있는 거대한 마수의 형체 때문이다.
처음 마법사들의 섬을 벗어 났을 때에는 그저 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이제 완벽히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본체를 투영한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짓누를 것 같은 존재감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저게 신전을 박살 낸 아슬란의 원래 모습인가.”
마치 모래를 씹으며 말하는 것 같은 레온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대신전까지 오는 길에 보았던 파괴된 신전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처참한 광경에 라트반은 완벽한 파괴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단순히 신전의 건물들이 무너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슬란은 제 압도적인 마력을 이용해 성력이 모여 흐르는, 신전의 바닥에 있는 성소(聖所)를 완전히 오염시켰다.
모든 신전은 자연적으로 성력이 모이는 곳 위에 지어졌다. 그러니 아슬란의 마력에 오염되어 성력이 사라진 그 땅에 두 번 다시 신전이 세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트반은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대신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소란이 이곳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대신전마저 박살을 낼 참인가.’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그들이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대신전 위에 반구 형태의 푸른빛이 생겨났다.
“저건 뭐야?”
처음 보는 광경에 레온의 눈이 커지자 라트반이 대답했다.
“저도 처음 보는 것입니다만…. 대신전은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고 있습니다. 성력으로 만들어진 결계지요.”
“…젠장, 이래서 제국이 협박을 해도 대신전이 들은 척도 안 했던 거군.”
레온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라트반은 다시 대신전을 바라보며 이곳에 오기까지의 일을 떠올렸다.
헥사를 상대하는 사이 카를이 이리스를 납치해 끌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라트반은 곧바로 남은 기사들을 이끌고 대신전으로 향했다.
‘분명 리나처럼 이용하려 들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성력을 받은 이리스다. 카를이 그런 그녀를 구슬려 제 마음대로 성력을 이용할 거라 생각한 순간 치미는 분노를 누를 수가 없었다. 리나가 당했을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기분 나쁜 그림을 완성했다. 카를은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같은 그림을 그려 내려 하는 것이다. 불쾌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리스가 갖고 있는 성력은 엄연히 리나의 것이다. 그 성력은 온전히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더 이상 그녀의 성력을 다른 자가 이용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부지런히 대신전으로 향하던 중 라트반은 레온과 제국 기사단을 마주했다. 아주 잠시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곧 두 사람은 지금 서로가 싸워 보았자 서로에게 이득이 될 일이 무엇 하나 없음을 깨달았다.
아슬란을 상대하든, 카를을 상대하든 한쪽만으로는 역부족이었으니까.
서로 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친 둘은 제 휘하의 기사들을 데리고 곧바로 대신전으로 향했다. 그러다 곳곳의 신전들이 파괴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신전에서 살아 도망친 자들은 모두 똑같은 말을 했다.
“타락한 성녀가 아슬란이라는 마수를 끌고 와 모든 것을 파괴했소! 성소를! 성력의 맥을 완전히 끊어 버렸단 말이오! 이제 이 땅은 마수들의 소굴이 되겠지!”
그 말에 라트반과 레온은 이상함을 느꼈다. 성녀의 분노는 정당하나 너무 갑작스러웠다. 지난 몇 달간 봐 왔던 리나를 생각하면 이 분노는 너무도 빨리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라트반은 곧 이 적의를 언제 느꼈는지를 기억해 냈다.
성녀는 한 번 쓰러진 다음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행동했다. 라트반은 그 이전의 성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를 개처럼 엎드려 기어 다니게 한 다음 모욕을 주었던 그녀. 지금 이 적의는 그때의 그녀가 품었던 것과 같았다.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일까?’
라트반은 그 의문을 품은 채, 레온과 함께 대신전으로 달렸다. 그리하여 마주한 것이 지금의 이 풍경이었다.
라트반은 대신전을 뒤덮은 성력의 결계를 바라보았다. 과연 저것이 아슬란을 막아 낼 수 있을까?
그 의문은 라트반만 품었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성력의 결계가 모습을 완벽히 갖추자 허공에 떠 있던 아슬란의 형체가 갑자기 거센 바람 소리를 내면서 붉은 마력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곧 집채만 한 불덩어리로 변하더니 곧바로 대신전의 결계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은 아슬란과의 관계 도중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어둡게 변하며 모든 것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눈을 뜨면 다시 아슬란의 품 안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암흑 속에 서 있었다. 다시 꿈을 꾸는 동안 이벨리나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 것인가 생각했지만 곧, 내 앞에 그녀가 보는 광경들이 펼쳐졌다.
그렇게 나는 몸을 빼앗긴 채, 이벨리나가 아슬란과의 계약을 완성시킨 후 신전들을 파괴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신관들을 죽이는 것이 목표는 아니었는지 이벨리나는 아슬란에게 성소의 오염과 신전의 파괴만을 명령했을 뿐, 도망치는 사람들에게는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대신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차라리 다들 도망갈 것이지.’
그렇다면 목숨만은 구할 수 있을 것을, 대신전은 아슬란과 맞서 싸우는 방법을 선택한 것 같았다. 나는 성력으로 만들어지는 결계를 보았다. 마치 두꺼운 유리 벽처럼 생긴 투명한 그것은 모든 출입을 막고 있었다. 그렇기에 놀라 대신전을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나가기 위해서 결계의 벽을 두들겼지만 헛수고였다.
‘이대로라면….’
분명 저 결계가 아슬란의 공격을 어느 정도까지는 막아 낼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막아 낼 수 있을까?
대륙의 다른 신전들을 파괴하는 동안에 아무리 그의 마력이 약해졌다 하더라도 결국은 아슬란이 저 결계를 깨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후에 벌어질 일은 뻔하다. 나는 다시 결계 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신전은 다른 신전들보다 훨씬 더 많은 병자들을 받아들이고 치료해 주는 곳이었다. 저 안에 있던 사람들은 도망칠 기회조차 잃은 채, 이대로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제는 아득해진 예전의 삶을 떠올렸다. 하루 종일 나가지 못한 채 죽을 날을 기다리고 살았던 삶이었다. 설령 앞으로 남은 시간을 그때처럼 살아간다 하더라도 내가 품고 있는 병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 생을 끝내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나는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이벨리나!”
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도 없이 사라졌다.
“이벨리나! 사람들은 살려 줘!”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어둠 속으로 나는 다시 크게 외쳤다.
“네가 원하는 것은 카를과 신전이잖아! 저 사람들은 죄가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이 카를과 신전이라고?”
몸을 빼앗긴 후, 처음으로 이벨리나가 내 부름에 대답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감정 없는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몸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구나. 정확히는 내가 몸을 돌려받은 것이지.”
“…….”
이벨리나의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이미 내 삶은 끝났다. 내가 이벨리나의 삶을 얻었던 것은 모두 그녀가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운 좋게 얻은 행운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얻은 것이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눈물이 차오르며 목이 메어 왔다.
이기적이고 뻔뻔한 마음인 것을 안다. 빌려 쓴 것에 불과한 주제에 그것을 마치 제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계속 그녀의 삶을 살고 싶었다.
“…내가 바꿨어.”
나는 이벨리나의 끝을 알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이리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라트반, 레온, 아슬란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불타 죽게 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흐름은 틀어졌다. 성력은 이리스에게 갔을지언정 라트반과 레온과 아슬란은 나를 사랑하며 그 누구보다 나를 지키려 한다. 이벨리나의 삶의 끝이 어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제 확실한 것은 그녀는 더 이상 화형대의 불 속에서 타 죽는 끝을 맞이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바뀐 운명에 내 노력이 있었다 주장하고 싶었다.
“내가 네 미래를 바꿨어. 내가… 널 더 살게 만든 거야!”
더 살고 싶다는 마음에 악에 받친 외침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 목소리에 한참이나 조용하던 이벨리나가 다시 대답했다.
“그래,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처음 널 봤을 땐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잘도 이곳에서 버티며 아슬란과 라트반, 레온을 네 편으로 만들었지. 덕분에 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편하게 내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되었어.”
“목표? 신전을 파괴하는 게 네 목표였어? 그냥 카를만 죽여도 되는 거잖아! 왜 죄 없는…!”
“죄가 없다고?”
이벨리나가 서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신전에 그저 치료를 위해 왔던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데? 잘못은 카를이 저질렀어! 그러니 그자만 죽이면…!”
“카를 뿐이라고?”
이제 이벨리나의 목소리는 울먹이는 것 같았다.
“웃기지 마. 모두가 공범이야.”
“무슨 소리를….”
공범이라는 그녀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어 되물으려는 순간 힘없는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처음이었을까?”
나는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이 모든 일은 카를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어쩌다 올바르지 못한, 사악한 욕심을 품은 신관이 만들어 낸 일이라고. 하지만 과연 카를이 그런 마음을 품은 유일한 신관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성력을 바친 성녀가 오직 이벨리나 한 사람뿐이었을까?
모두가 공범.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성녀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신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현재도 굳건히 버티고 있다. 그 대신전 아래 얼마나 많은 성녀들이 조용히 묻혔을까.
“신전을 파괴하는 게 내 목표냐고 물었지. 그래, 나는 이 대륙의 모든 신전을 파괴할 거야. 두 번 다시 그곳에 성력이 깃들지 못하게. 이 땅에 신의 은총 따위가 머물지 못하게. 그리고….”
이벨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성녀 같은 것이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도록.”
다음 순간, 아슬란의 마력이 대신전을 향해 날카로운 기세로 날아갔다.
아슬란이 만들어 낸 화염이 대신전의 결계에 부딪치는 순간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세상이 흔들렸다. 천년이 지나도 어긋남 하나 없을 것 같던 거대한 기둥들이 흔들리며 그것이 받치고 있던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름난 화가들이 그려 넣었을 벽화가 갈라져 떨어지며 흙먼지를 날리기 시작하자 신전 안에서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그들이 본 것은 자신들을 위한 신의 기적이 아닌, 당장이라도 모두를 태워 죽일 것 같은 거대한 마력의 불덩어리뿐이었다. 마력의 불길은 그 기세를 사그라트리지 않은 채 옆으로 퍼져 나가 대신전 주변의 도시를 덮쳤다.
아슬란이 나타났을 때부터 서둘러 대피를 했던 사람들은 먼 곳에서 자신들의 집이 불타는 것을 보고 신을 찾아 울부짖었으며 대신전을 믿고 집에 남았던 자들은 타들어 가는 몸을 붙잡고 신을 찾아 울부짖었다.
한 번의 공격에 세상은 지옥이 되었다. 그것은 성녀의 처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성녀님! 살려 주십시오!”
밖을 지키던 평신관들은 이제 예법 따위는 모두 집어던진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이리스의 앞에 엎드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거대한 폭음과 함께 대신전의 하늘 위는 불길로 뒤덮였다. 눈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성력의 결계가 얇아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이 믿고 매달려야 할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성녀님, 저희를 지켜 주세요!”
“성녀님! 부디 우리를!”
이리스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애원하는 사람들을 희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를이란 대신관은 성녀는 무릇 대신전에 있어야 한다며 함께 가길 거부하는 자신을 억지로 이곳으로 끌고 왔다. 이 대신전만이 성녀를 위한 곳이며 이곳에서 그녀가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의 말대로 대신전에 온 이후 이리스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려하고 넓은 방, 호화스러운 옷, 세상의 모든 음식을 모아 놓은 것 같은 식사. 세상에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기에 꿈조차도 꿔 보지 못한 호화찬란한 것들이 그녀의 앞에 놓였다.
첫날은 얼떨떨하게 그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의 이불과 몸에 걸치는 옷들은 천사의 날개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이곳에 들어와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배부른 채 따뜻한 방 안에서 부드럽고 깨끗한 침구에 파묻혀 잠이 드는 것.
그것은 이리스의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이리스는 제가 대신전에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약 제가 진짜 성녀고, 이 성력이 전 성녀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이것들을 계속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반나절이 채 가기도 전에 사라졌다.
다른 신관들이 새로운 성녀님을 뵙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하며 카를 대신관은 이리스의 동의 없이 그들을 성녀의 처소로 불러들였다. 수십 명의 신관들이 들어와 저에게 인사를 하는 순간 이리스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모두 그녀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이리스에게 곧바로 성력을 사용해 줄 것을 원했다. 그 순간 이리스는 깨달았다.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은 신이 내려 주었다는 성력을 위한 것들이다. 만약 예전의 성녀인 이벨리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성력이 사라진다면….
그날 밤, 이리스는 배가 불러도, 좋은 옷을 입어도, 따뜻한 방의 부드러운 침구 속에 누워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낮에 보았던 신관들과 자신이 지나갈 때 엎드려 울며 빌던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가족을,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는 그저 자신들을 지켜 줄 성력이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성녀님!”
문을 부수기라도 할 듯 거칠게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다른 신관들의 모습에 이리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사이에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신전의 결계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대신관님께서 성녀님만이 저희를 구하실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어서!”
그렇게 말한 신관은 이리스의 팔을 붙잡더니 그녀를 끌고 나갔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례였으나 이제 그 누구도 신관의 그런 행동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냐는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자들도 있었다.
이리스는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중앙 광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수많은 신관들이 모여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스 역시 고개를 들어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거대한 마수의 형체와 함께 두 사람이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이진 않아도 이리스는 그중의 한 명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슬란….”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압도적이고 강렬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아슬란을 보던 이리스는 그가 끌어안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저 타락한 성녀가 감히 대신전에 마수를 끌고 들어오다니!”
“대체 무엇으로 마수를 끌어들인 건지… 더럽고 삿된 존재 같으니!”
그들은 거품을 물며 하늘을 향해 발작하듯 소리쳐 대었다. 그것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한 자들의 몸부림이었다.
카를이 그들 사이로 걸어 나와 이리스에게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였다.
“성녀님.”
“…….”
“이 결계는 성력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 오만한 마수에게 이 땅이 어떤 분의 힘으로 지켜지고 있으며 그분께 사랑받는 가장 강대한 존재가 누구인지 보여 주실 때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를 위해 당신의 힘을 보여 주십시오.”
“이벨리나 성녀….”
워낙에 먼 데다가 정신없이 부는 바람, 그리고 결계를 뒤덮은 마력의 불길 탓에 아슬란의 품에 있는 이벨리나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소란 속에서도 이리스는 오직 그것이 아쉬웠다.
제가 갖게 된 성력의 원래 주인이 이벨리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 사실만으로 이렇게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해지는 것일까?
이리스는 제가 처음 품었던 의문을 떠올렸다.
왜 이 성력은 대륙의 수많은 사람들 중, 갑자기 자신에게 온 것일까. 이것은 단지 우연일까?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이리스 네게는… 대신전… 네 언니가….”
이리스는 저를 붙드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러고는 하늘에 있는 여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언니?”
***
이벨리나는 점차 약해지고 있는 결계를 보며 다시 아슬란에게 속삭였다.
“아슬란, 어서.”
그 한마디 말만으로도 뒤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의 기운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벨리나를 제 암컷이자 반려로 삼은 이 마수는 이제 완벽히 그녀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아마 제 반려가 새끼를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제정신이 아닐 터였다. 그것이 이벨리나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러니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지.’
아슬란은 강대한 마수다. 그 강대함은 예민함과도 직결되어 있다. 지금처럼 그가 기쁨과 흥분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리나’가 아닌 것은 단번에 간파당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다시 아슬란의 마력이 결계로 날아갔다. 대신전 한쪽에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제가 평생을 살아온 공간이 파괴되고 있었지만 이벨리나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속이 시원한 것도, 그렇다 해서 슬픈 것도 아니었다.
이제 이 세상은 그녀에게 아무런 색이 없는 구겨진 그림에 불과했다.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그런 것.
무감정한 얼굴로 부서져 내리는 대신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벨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모여 있는 자들이 보였다. 성력은 다 빠져나갔지만 그래도 한때 성력을 품었던 껍질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제 안에 있을 리나가 사랑하는 자들이기에 알아차린 것일까.
이벨리나는 저와 아슬란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이 라트반과 레온임을 알았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결계에서 튕겨 나간 아슬란의 마력에 휘말려 감히 다가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아슬란의 마력은 두 사람의 앞에서 마치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막혔다.
“……!”
놀라 그곳을 바라보자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아슬란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가소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검은 개새끼는 성력을 쓰고 있는 것일 테고, 누런 개새끼는 마법사의 섬에서 흘러 나간 스크롤을 사용하고 있는 건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아슬란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때 성녀가 아슬란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 말라는 뜻을 담은 행동에 아슬란은 혀를 한 번 차더니 다시 대신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벨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라트반과 레온이 다가오는 것은 그녀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아슬란이 그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았단 말인가.
이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니다. 제 안의 ‘리나’가 한 일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스스로 그녀의 영혼을 제 육체에 밀어 넣었을 때부터 이 몸은 원래의 주인인 자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리나가 움직이는 동안 다시 이 몸을 차지하려 노력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이 이 몸의 주도권을 넘겨받는다 하더라도,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몸은 리나다. 그러니 몸의 주인이 아닌 이벨리나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완벽히 지배해, 해야 할 일을 끝마쳐야 했다.
그러는 사이 대신전의 결계가 더욱 약해졌다. 이제 푸른빛은 거의 다 사라졌다. 이벨리나는 점차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말했다.
“아슬란, 어서!”
다시 아슬란의 마력이 결계와 거대한 충돌을 일으켰다.
쩌억.
세상이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슬란은 결계의 위로 다가가 아주 가볍게 손등으로 그것을 후려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신전의 결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슬란의 품속에 있는 이벨리나는 그의 숨이 거칠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아슬란이라 해도, 대신전의 결계를 깨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둘러야 해.’
저도, 아슬란도 곧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그 전에 원하는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아슬란, 저곳이 대신전의 성소예요.”
이벨리나는 여전히 그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그의 귓가에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중앙 신전 뒤의 건물을 가리켰다. 그녀가 불타오르고 있던 제 성력을 본 그곳이 바로 대신전의 성소였다.
아슬란은 그녀의 속삭임에 허공에 떠 있던 제 형체를 그곳으로 보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붉은 사자가 거침없이 건물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두껍고 무거운 돌덩이들이 썩어 버린 나무처럼 무너지고 부서졌다.
앞발을 채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건만, 수천 년을 버텨 온 건물은 완전히 형체를 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신관들은 이제 이 대륙이 성녀가 나타나기 전, 마수들이 뒤덮었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를 느꼈다.
중앙 신전보다 더 큰 아슬란의 형체가 바닥을 긁었다. 곧, 지하에 숨어 있던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력을 가진 새로운 자가 대신전에 있기 때문일까. 그곳에는 파랗게 빛나는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슬란의 형체가 입을 벌렸다. 붉은 마력이 폭포가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이 땅에 대신전이 자리 잡은 이래 단 한 번도 마력이 닿았던 적이 없는 성소였다. 수천 년간 한 번도 꺼진 적 없이 불타오르던 성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강대한 마수에 의해 철저하게 더렵혀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성력의 불길이 아슬란의 마력에 완전히 묻힌 순간, 이벨리나는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어떠한 신전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여전히 제 옆에 떠 있는 석판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자,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을 쓰고 이 계약을 끝내라는 듯 그것이 이벨리나에게 다가왔다.
이벨리나는 황홀한 얼굴로 석판을 향해, 그리고 아슬란을 향해 말했다.
“이제 내가 원하는 마지막 소망을 말한다. 아슬란, 내 마수여.”
이벨리나는 진심으로 원하던 제 소망을 말했다.
“나를 죽여 줘.”
스무 살의 생일, 이벨리나는 카를이 돌아가고 나서 무엇이 수치이고 굴욕인지도 몰랐음에도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다음 날,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신관들은 여전히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고 평소와 똑같은 식사가 나왔다. 이벨리나는 제 다리 사이의 통증을 모른 척하며 예복을 입고 전날과 똑같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갔다.
그러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카를을 보았다. 그는 웃으며 어젯밤의 일을 모르는 사람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했다. 그래서 이벨리나도 똑같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날 밤, 이벨리나는 평생을 살아온 대신전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 그러니까 그날 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무서운 걸까.
“…죽고 싶어.”
울어야 하는 일인지조차 분별할 수 없었던 그녀의 입이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었다.
그 후로 이벨리나는 잠들기 전 매일 그 말을 입에 담았다. 그녀의 세상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를 죽여 줘.”
간절함을 담은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뱉어진 짧은 말은 너무도 매끄럽게 흘러나와 그 말을 담고 있던 주인이 수천, 수만 번을 제 속에서 되새기며 다듬고 또 다듬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평생을 연습해 온 사람처럼 완벽하게 제가 원한 것을 말한 이벨리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마지막 소원이다.”
제 모든 염원을 내뱉은 이벨리나는 석판을 향해 마침표를 찍으라 명령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판은 제가 갖고 있는 권능을 행사했다.
빈 채로 남아 있던 석판 위, 이벨리나의 자리에 다시금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문자가 새겨지자 석판은 찬란한 황금빛을 발했다.
드디어 이루어져야만 하는 거래가 완성되었다.
마수는 꿈을 꾸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아슬란은 제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너진 신전도, 제 마력을 쏟아부어 흐름을 끊어 버린 대신전의 성소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인간들도 지금 아슬란에게는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석판을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슬란은 제가 모든 걸 얻었다 생각했다. 제 반려가 저를 받아들였고, 새끼를 배었다. 그러고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를 필요로 하였다.
아슬란은 기쁜 마음으로 그녀가 속삭이는 것들을 들어주었다.
아슬란은 즐거움을 느끼며 대신전을 파괴했다. 이 대신전은 그녀를 억압하던 곳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곳을 돌아다닐 때 신을 모신다는 자들의 같잖은 꼴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녀를 붙들고 괴롭게 하던 것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이제 그녀는 자유로운 미래를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무척이나 긴 시간을 살아온 아슬란이었지만 그는 미래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수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며 본능은 현재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제 반려로 인해 본능 이상의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동안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그녀와 함께할 미래는 그에게 새로운 희열을 선사했다. 이제 그것을 누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미래는 태어나기 전에 죽음을 선고받았다.
‘이럴 리 없어.’
아슬란은 대신전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재수 없는 노란 털의 개새끼가 그녀의 환심을 사겠다며 책을 들고 온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할 것도 없는 이 대륙의 풍경을 모아 놓은 그 책에서 리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밖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고 싶어 했다. 그가 하늘을 보여 주었을 때 감격에 겨워 울먹이며 이런 하늘을 매일 볼 수 있는 그가 부럽다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순간을 모두 담겠다는 듯 반짝이는 눈은 석양이 지는 지평선 너머를 탐험하고 있었다.
더 보고 싶어 하고 더 알고 싶어 하는 그녀의 강렬한 열망에 그는 원하면 언제든지 이 하늘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고?
아슬란은 석판에 손을 뻗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넌 누구야.”
그를 향한 그녀의 시선은 세상 어느 것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미 죽어 버린 차가운 시선이다. 그렇기에 아슬란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리나가 아니었다.
이가 갈렸다. 이렇게나 확연히 다른데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들뜬 마음과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너였지?”
그의 물음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미소가 아닌 비소였다.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은 없지, 마수여.”
이벨리나의 대답에 아슬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녀는 그의 리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슬란은 그제야 모두 알 수 있었다. 왜 갑자기 그녀가 그를 더욱 원했는지, 왜 이곳에 오는 동안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지를.
이벨리나는 좌절하는 마수를 비웃으며 석판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어서, 이 계약을 완성시키도록 해.”
그 순간 석판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아슬란은 제멋대로 올라가는 제 손을 보았다. 그의 손이 한 줌도 안 될 것 같은 가는 목을 붙잡아 조르기 시작했다.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고 있던 아슬란은 놀라 황급히 그녀의 목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곧, 그의 손은 다시 그녀를 향했다. 제가, 그녀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그래, 마수여. 너는 날 죽이기 위해 선택된 거야. 석판의 권능은 네가 거부를 해도 널 굴복시켜 계약을 완성하게 만들 것이다.”
이벨리나의 말에 아슬란은 석판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이 석판 안에 잠들어 있는 고대 신의 권능이다. 신은 지금 자신의 권능으로 그가 그녀를 죽이도록 하고 있었다.
“…웃기지 마.”
아슬란은 이를 갈며 제 팔을 붙잡았다. 으드득,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부러진 팔은 여전히 그녀의 목을 붙잡으려 했다. 그의 다른 손이 다시 한번 그 팔을 붙잡았다.
마수는 신에게 대항했다. 마력과 신의 권능이 첨예한 대립을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충돌하며 주변의 땅이 갈라졌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대신전의 건물들은 이번에는 버티지 못했다. 수천 년의 역사가 힘의 폭풍에 휘말려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석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히 신을 거역하는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금색의 빛줄기를 뿜어냈다. 기다란 끈처럼 보이는 신의 권능은 제 앞에 있는 이벨리나를 휘감았다.
그녀는 마수의 새끼를 배겠다 약속했을 뿐, 낳을 것이라 약속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아슬란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진, 끝난 소원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이벨리나는 웃으며 저를 휘감는 빛줄기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는 성력을 보낸 신으로부터 사랑받는 세계였고, 자신은 누구보다도 신에게 사랑받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것은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벨리나는 제가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 답을 찾았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실 찾을 필요도 없었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는 마수가 그 답이었으니까. 거기에 마수뿐만 아니라 고대 신의 권능까지 제 죽음을 도와줄 줄이야.
이벨리나는 여전히 신의 권능에 대항하고 있는 마수를 느긋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대륙의 모든 신전을 파괴하고 이제는 대신전의 성소마저 끊어 버린 마수는 힘의 대부분을 써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신의 권능을 막지 못할 터. 그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모든 일은 끝난다.
이벨리나는 눈을 감으며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다. 빛줄기가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
아슬란은 성녀의 몸을 휘감는 빛줄기를 보며 깨달았다. 저 석판에 있는 신은 그를 이용하지 못하면 스스로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그녀를 죽일 것을.
아슬란은 손을 뻗어 그녀를 휘감은 빛의 줄기를 잡았다. 성녀의 목을 부드럽게 휘감은 빛줄기는 아슬란에게는 더없이 사납고 거칠었다. 그저 닿았을 뿐인데도 아슬란의 손바닥은 톱으로 그어 버린 것처럼 살점이 파이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두 손으로 빛줄기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거칠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그 모양새가 필사적인지, 누구라도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슬란은 자비가 없었다. 아슬란의 손이 그것을 잡아 찢어 토막을 내었다. 그가 빛줄기를 찢어발길 때마다 석판이 더욱 크게 몸을 떨었다.
성녀의 몸을 휘감은 빛줄기를 전부 다 치워 낸 아슬란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리나.”
그러고는 제 반려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 있어.”
분명 이 몸 안에 있다. 하지만 그곳은 그가 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혹시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했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아슬란은 많은 감정을 알게 되었다.
환한 웃음을 볼 때마다, 동그랗게 뜨는 눈을 볼 때마다, 저를 받아들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저 강대한 마수로 살아온 셀 수 없는 시간보다, 아슬란이라는 이름으로 그녀가 불러 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배운 감정들이 훨씬 많았고 아슬란은 그것들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두려움만은 그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세상에서 누구도 그 마지막을 모른 채, 그녀가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아슬란이 두려움에 이어 절망을 알게 되려는 순간, 그의 옷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아슬란.”
조금 전까지 무감정했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 나… 죽고 싶지 않은데….”
필사적으로 그를 붙들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석판을 바라보며 그를 붙잡았다. 그사이 석판은 다시 새로운 빛줄기를 만들어 내었다.
아슬란은 석판에 한번 새겨진 것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이것은 오직 제 권능을 그녀를 죽이는 데 사용할 것이다. 상대는 신이다. 그녀를 죽이지 못하면 이것은 세상의 법칙마저도 바꾸려 들 것이다.
물 한 모금이 인간에게 독이 되도록, 들이마시는 공기가 숨을 끊도록.
아슬란은 리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알고 있는 눈동자가 울먹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수는 그 눈을 보며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다시금 배워 나갔다. 아슬란은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하늘을 보여 주겠다고 했었지.”
그녀는 살아남아 다시 하늘을 보고 싶어 한다.
아슬란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늘을 보여 주겠다는 것은 거래도, 계약도 아닌 아무런 힘이 없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아슬란에게는 가장 소중한 약속이기도 했다.
“그대는 원하는 한 얼마든지 하늘을 볼 수 있어.”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두 팔을 뻗어 석판을 붙잡았다.
끼이이익.
세상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석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수는 하늘을 보여 주겠다는 아무것도 아닌 약속을 위해 신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금이 가는 석판 주변의 공간이 엉망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석판은 이 세상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소리를 뱉어 냈다. 아슬란은 그 소리가 신의 비명임을 알아차렸다.
석판 안에 있는 것은 신이기에 인간의 말로 그것의 상태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그것이 느끼는 감정이 당황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전지적이며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들을 신이라 부른다.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들.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고대 신은 처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도 석판은 거미줄 같은 금이 퍼졌다. 그러더니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모래로 변했다.
“……!”
사라진 건가?
하지만 아슬란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바닥에 흩날렸던 모래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모래들은 다시 금색 빛을 내며 허공에 모여들었다. 조금 전 석판에 쓰여 있던 다른 세계의 문자를 모래가 허공에 다시 그려 내었다.
아슬란은 모래로 이루어진 글자를 향해 거세게 손을 저었다. 그러나 모래는 사라지기는커녕 그런 아슬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흩어졌다 다시 글자를 만들어 냈다. 마치 절대로 그가 이 약속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모래의 글자는 더욱 강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
땅과 하늘이 비틀어지는 소리가 세상에 퍼졌다. 마치 비가 떨어지는 연못의 위처럼 하늘 여기저기에 동그란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원이 세상 곳곳에 생겨났다. 그 금색의 원 너머에서 빛의 줄기들이 폭포처럼 땅으로 쏟아졌다.
“신이시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거야!”
그 성스러운 색에 끌린 몇몇의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부르며 빛줄기로 향했다. 그들의 몸을 금색의 빛이 덮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빛으로 뒤덮인 순간, 그들은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어떤 법칙인지 모를 고대 신의 법칙에 따라 그것들은 형체와 본질을 잃고 사라진 것인다.
아마도 그들이 바뀌어 버린 순간 그들의 가족도, 친구도, 그냥 알고 지냈던 사람들도 모두 그들의 존재를 잊었으리라. 이미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기에.
신이 이 세계에 강림하고 있다. 거래에 따라 약속을 했던 그녀의 죽음을 위해서.
아슬란은 제 품에서 울고 있는 리나를 끌어안았다. 이제 저 신은 오직 그녀를 죽이기 위해 제 모든 힘을 쓸 것이다.
아슬란은 손을 들어 리나의 얼굴을 만졌다. 어차피 본체는 따로 있기에 그는 원하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수많은 모습 중에서 그동안 계속 인간의 모습을 고집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래야 그녀를 안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울고 있을 때는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으니까.
“아, 아슬란… 난 이벨리나가 아니고…. 자, 잠시 그녀의 몸을 빌려… 다른 세계에서… 이미 죽었었는데…. 나, 나는 화형당할 운명이었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 흐윽.”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우는 그녀는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힘겹게 뱉어 냈다. 아슬란은 그녀를 끌어안아 거칠게 부는 바람으로부터 보호한 뒤 달래듯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나, 난 기억을 잃었던 게 아니라… 난 그냥 살고… 더 살고 싶어서…. 그래서 그냥 이벨리나인 척….”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들썩이는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슬란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토막 난 그녀의 말을 모아 담은 아슬란은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주어진 생을 마친 존재가, 성녀 이벨리나가 붙잡은 탓에 이 세계로 왔던 것이다. 그는 왜 이제야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안았던 날, 왜 자신과의 계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행동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슬란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울고 있는 그녀의 뺨을 쓸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것이 마지막일 것을 알기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모든 자가 비명을 지르며 이 자리를 벗어나려 한다. 반면 이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이었다. 몇 번이나 그냥 죽여 버릴까 혼자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마음을 조금 드러냈을 때, 그러지 말아 달라 그녀가 부탁하며 자신을 달래는 것이 좋아 내버려 둔 놈들이기도 했다.
아슬란은 달려와 제 앞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라트반, 레온.”
“……!”
“……!”
거친 숨을 몰아쉬던 라트반과 레온은 아슬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그들을 개새끼라 부르며 하찮은 생물로 취급하던 아슬란이다. 그런 아슬란이 자신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슬란은 그런 둘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다 허리를 숙여 품 안의 리나와 시선을 맞췄다. 눈물범벅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이다니. 이 여자는 도대체 제게 몇 가지 감정을 알려 주는 것일까.
“…아슬란?”
이상한 기운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 아슬란, 뭘 하려고….”
그 질문에 아슬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피부 너머에 제 새끼의 존재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성력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제 새끼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슬란은 이제 자신에게 그럴 시간도, 힘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마수의 새끼는 성장이 빠르다.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에 불과한 그녀의 육체를 잡아 뜯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윽!”
피부 너머의 새끼가 제 아비의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아슬란은 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천천히 제 마력을 그녀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죽일까.’
그녀를 살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제 새끼를 죽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만큼은 하기 싫었다.
미친 듯이 여린 살결을 탐했다. 그때마다 남는 제 흔적에 아슬란은 만족과 실망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이렇게나 예쁘고 마음에 드는 게 왜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지. 아슬란은 매번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을 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새끼를 뱄을 때 처음으로 완전한 만족감을 느꼈다. 드디어, 그녀에게 영원히 남을 흔적이 새겨진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새끼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 윽!”
갑자기 배 안에서 퍼드덕거리는 듯한 느낌에 리나는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아슬란은 여전히 손을 떼지 않은 채 제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이제 형태를 잡아 가는 제 새끼를 느낀 아슬란은 그대로 그것의 날개를 부러트렸다. 들리지 못하는 비명을 느끼며 아슬란은 계속해서 마력을 넣었다. 그의 마력이 새끼를 뒤덮더니 모든 마력의 핵을 하나씩 짓이기기 시작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이 안의 것이 마수일 수 없도록.
살해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읏….”
아슬란은 쓰러지는 리나의 몸을 안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툭, 하고 따뜻한 물방울이 흘렀다. 그녀는 기어코 그에게 눈물마저 알려 주었다.
아슬란은 잠잠해진 그녀의 배 위를 쓸었다. 제 아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마수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는 인간의 새끼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슬란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으며 그를 기억도 하지 못할 그의 새끼가.
아슬란은 눈물을 흘리며 라트반과 레온을 보았다. 그리고 제 품에 쓰러진 그녀를 안아 그들을 불렀다.
“리나를 데려가.”
“아슬… 란….”
다가온 두 사람이 그녀를 안아 드는 순간 아슬란은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녀가 놀라 손을 뻗었지만 붉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슬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대 신이 강림하고 있는 맞은편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며 다시금 공간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균열 사이로 붉은 털을 가진 짐승의 발이 나타났다.
제 세계로 돌아가는 것, 더 이상 누군가를 안는 것을 포기한 마수는 신을 죽이기 위해 제 완전한 본체를 세상에 드러내었다.
이 세계가 만들어진 이래, 가장 거대한 울부짖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조금 전 제 새끼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고 반려를 버려야만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