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0/48)

“하, 으, 으읏! 응!”

아슬란은 제 아래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눈을 감았다. 마치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는 것 같은 만족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느긋해 보이는 그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하반신은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가 크게 허리를 움직이자 흉악스러울 만큼 큰 검붉은 성기가 여린 그녀의 아래를 자비 없이 파고들었다.

“아, 으, 으응! 처, 천천히!”

울먹이며 애원하는 소리는 누구라도 동정심을 갖게 할 만했지만 아슬란은 못 들은 척 더욱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아, 아아!”

그가 움직일수록 교성이 높아졌다. 아슬란은 이런 그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좋았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린 채, 오직 자신만을 느끼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리나를 데려온 다음 며칠이 지났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저 계속해서 그녀와 몸을 섞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인 탓에 이제는 몇 번이나 절정에 다다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혼절하듯 쓰러지면 아슬란은 그때마다 그녀를 돌보며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면 몸을 섞었다. 아주 잠시 숨을 돌릴 때 그녀가 “짐승 같아….”라고 중얼거리던 목소리에 그는 미소 지었다.

맞다, 자신은 짐승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과 함께해 줄 짐승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신없이 아래를 드나들던 그가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꿈틀거리면서 커지는 그의 것에 그녀는 다시 절정의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몸이 본능을 따라 침입자를 조여 왔다. 미칠 것 같은 사정감을 느낀 순간.

“헉…!”

아슬란은 제 모든 인내심을 끌어내어 천국으로부터 제 몸을 빼내었다. 구멍을 빠져나온 성기가 힘차게 정액을 뿌려 대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배와 가슴 그리고 얼굴을 그의 씨물이 뒤덮었다.

거칠던 리나의 숨소리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깍지를 끼었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아슬란은 다시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천천히 사그라드는 자신의 것을 그녀의 음부 위에 올린 아슬란의 눈에 고민이 스쳤다. 아직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대로 정신을 잃은 그녀를 한 번 더 안을까? 그러다 보면 다시 눈을 뜰 것이다. 원망을 담아 노려보겠지. 하지만 그 눈빛은 또다시 쾌락으로 물들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한숨을 쉬고는 몸을 물렸다. 그러고는 엉망이 된 그녀를 제 품에 안았다. 그의 손이 얼굴에 튄 제 정액을 닦아 내자 그녀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던 아슬란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 난잡하고 격렬한 정사를 나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섞이는 숨에 리나가 조금 얼굴을 찌푸리자 아슬란이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아직 그녀의 가슴과 배에 남아 있는 제 흔적으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곧 말라붙을 것이다. 닦아 내기 위해 손을 뻗던 아슬란은 엉망이 된 침대의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차며 리나를 안고 일어섰다.

그가 가는 길마다 마치 하인들이 있는 것처럼 저절로 문이 열렸다. 그가 욕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완벽하게 씻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욕실이라고는 하지만 거대한 탕이 준비된 곳이다. 각기 다른 푸른색의 타일이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며 탕의 바닥에 촘촘히 박혀 있고, 천장과 벽에도 흰색과 금색의 섬세한 장식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화려함으로 따지자면 대륙에서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곳.

이쪽 세계에서 보내야 하는 오랜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조금 신경을 써 보았던 것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아슬란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넓은 탕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딱 기분 좋을 만큼 따뜻한 물이 몸을 감싸자 리나의 입에서 느른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슬란은 따뜻한 물을 손바닥으로 떠 올려 가슴에 남은 제 흔적 위에 부었다. 몇 번을 반복하자 말라 가던 그것이 물에 씻겨 사라졌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는 그가 물고 빨았던 붉은 꽃들이 드러났다.

그렇게 한참이나 리나를 씻기던 아슬란은 그녀를 끌어안고 앉아 천천히 그녀를 살폈다.

‘좀 더 준비해 둘 걸 그랬나.’

그가 원한 적은 없었지만 마법사들의 섬에 사는 이들은 아슬란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많은 물건들을 공물로 탑에 보냈다. 어차피 인간들이 하는 짓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었는데. 그때 받았던 물건들을 리나에게 쓰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아슬란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공간이 일렁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곧 그 너머에서 수백 개의 장신구들이 쏟아져 내렸다. 첨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물 아래로 가라앉는 것들 중, 아슬란은 가장 화려하고 커다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들어 리나의 목에 걸었다.

핏빛의 붉은 보석이 새하얀 피부 위에서 반짝였다. 그것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보던 아슬란은 또 다른 것을 집었다. 점점 그녀의 몸에 걸쳐진 것들이 많아졌다. 목에, 팔에, 다리에, 허리에.

예전에는 인간들이 왜 이런 것을 만들고 걸치나 싶었는데 이제야 그 기분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그의 손가락이 목에 걸려 있던 큰 보석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 밑에 있던 붉은 흔적이 다시 보였다. 아슬란은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이런 보석들을 걸고 있는 그녀도 아름답지만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게 가장 아름답다.

입을 맞추고 가슴을 빨아올리자 다시금 그의 아래가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쯧.”

그것을 알아챈 아슬란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아무리 몸을 섞어도 충족되지 않는 이유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절정에 도달해도 그는 리나의 몸 안에 제 정액을 쏟아 내지 않았다.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 그녀는 성력을 잃은 상태다. 만약 이대로 제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녀의 태 안에 자리 잡은 마수가 얼마나 빨리 자라나 그녀의 생명을 위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리나의 몸을 걱정하던 아슬란은 스스로의 행동에 의아함을 품었다.

그녀는 제 암컷이다. 제 새끼를 배기 위한 암컷. 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에게 제 새끼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아슬란은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 암컷이 아니라면 자신은 그녀를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톡. 톡. 젖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 소리만 욕실 안에 조용히 울렸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아슬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암컷이 아니다. 그녀는….

“…내 반려.”

마수에게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그녀는 조용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마수에게 있어 새끼를 낳아 주는 암컷은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다.

마수들은 제 새끼를 얻는 것을 무척이나 바란다. 새끼라고는 해도 사실상 자신의 분신에 가까우며 그 수가 많을수록 제힘도 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력이 강하더라도 암컷은 새끼를 품다 죽는 일이 많았기에 새끼를 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만약 제 새끼를 낳아 주겠다 하는 상대가 있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또한 가져다주었다.

수컷은 제 암컷이 새끼를 배고 낳을 때까지 모든 열과 성을 다해 보살핀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새끼가 태어나고 나면 관계는 거기서 끝이 났다. 암컷은 소중하나 거래를 하는 관계다. 그러니 거래가 끝나면 상대에게 더 이상 용무란 존재하지 않았다.

‘싫어.’

언젠가 리나가 저와의 거래를 끝내고 더 이상 마주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 순간, 아슬란은 깊은 불쾌감을 느꼈다.

새끼가 태어난 후에도 아슬란은 그녀가 제 곁에 머물러 주길 원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끊임없이 많은 것을 요구해 주기를. 그러면 그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 줄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을 때,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을 그는 흩날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그녀다. 그렇다면 그녀의 숨이 다할 때까지, 그녀가 내딛는 마지막 걸음까지 안전할 수 있도록 지키고 싶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거래가 아닌, 그녀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내주고 싶은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아슬란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아슬란은 제가 새끼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라는 것은 새끼가 아닌, 그녀의 마음이다.

아슬란은 젖은 그녀를 안고 일어나 큰 수건으로 감싼 뒤 침실로 걸어갔다. 그는 침대에 앉아 제 품 안의 몸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 둔 장신구들이 여린 피부에 상처를 낼까 걱정되는 탓에 그의 손길은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만지는 것보다 더욱 조심스러웠다.

손 가득 쥐어지는 풍만한 가슴을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감싸자 잔뜩 물리고 빨린 가슴 끝이 아팠는지 그녀가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안쓰러우면서도 어쩐지 더욱 괴롭히고 싶은 가학심이 생겨났다. 괴롭히는 그 순간에는 그녀가 오직 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슬란은 리나의 몸을 모두 닦은 뒤, 춥지 않도록 부드러운 천으로 된 옷을 입히고 침대 위에 눕혔다. 솔직히 이제 계약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저 이대로 이곳에서 영원히 그녀와 함께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아니, 바라는 것이 하나 더 있긴 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뜨면 저를 향해 웃어 주면 좋겠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며, 자신만을 원한다고 말하면 좋겠다. 그러면 그 어떤 일이든지 그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슬란이 생각한 순간이었다.

“읏….”

한참이나 더 감겨 있을 것 같았던 리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힘겨운 듯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에 놀란 아슬란이 그녀에게 다가간 순간, 번쩍 그녀가 눈을 떴다.

짙어진 푸른 눈동자가 조용히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는 듯했다. 또한 철저하게 무감정한 시선이기도 했다.

“리나…?”

분명히 그녀인데 마치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는 시선에 아슬란은 놀라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리나, 왜….”

“아슬란.”

그녀는 아슬란을 끌어안은 채, 귓가에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아슬란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데는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목을 끌어안은 손이 굵은 그의 목을 쓸어내렸다.

잘 잡힌 근육이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치는 자리마다 꿈틀거렸다. 어깨선을 타고 내려오던 손가락은 아슬란이 입은 복잡한 옷 속으로 사라졌다. 세운 손톱의 끝이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긁어내렸다.

아슬란은 숨이 턱 막혔다. 예상하지 못했던 리나의 행동에 그의 몸에서 순식간에 정염의 불꽃이 일어났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그가 먼저 그녀를 향해 욕정했다. 그가 탐하고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그녀가 먼저 그를 원하고 있었다. 꿀꺽. 목울대가 형체 없는 거대한 욕망을 삼키느라 크게 움직였다.

그의 등을 긁어내리던 손은 어느새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하나씩 천천히 그의 옷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강대한 마수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드는 것은 강력한 마법도 아니고, 날카로운 검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동안 그의 몸을 감쌌던 천들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러다 리나의 손이 이미 솟아오른 아래에 닿는 순간 아슬란은 숨을 삼켰다.

“흣!”

그러자 웃는 듯,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조금 전 보았던 그녀의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아슬란은 다시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을 원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슬란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려 할 때, 그녀는 손을 움직여 그의 하의를 끌어 내리더니 빳빳하게 머리를 세우며 튕겨 나온 그의 성기로 제 얼굴을 내렸다.

“읏!”

뇌가 타들어 간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아슬란은 세상이 녹아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감각과 생각이 경계 없이 섞여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신에게 쏟아지는 연약한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뿐.

우뚝 솟은 선단의 끝에 부드러운 붉은 입술이 비벼진다. 그러다 작은 손이 검붉은 기둥을 붙잡았다. 손은 느릿하게 그 기둥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하… 흣….”

그녀를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갑자기 왜 이러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아직 남아 있는 한 조각의 이성이 그에게 말했지만 이미 아슬란의 몸은 완벽하게 침략자에게 굴복한 후였다. 악문 잇새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는 그녀의 머리가 움직일수록 거칠어졌다. 그의 것이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흘러내리는 타액에 번들거렸다. 그러다 그녀가 그의 것을 깊게 물고 빨아들인 순간, 아슬란은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제 씨물을 그대로 토해 냈다.

“리나, 당장 뱉…!”

여전히 그의 것을 물고 고개를 숙인 그녀를 황급히 잡아 일으키려는 순간 그녀는 제 입 안에 넘쳐 흐르는 그의 것을 삼켜 버렸다.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충족되는 정복욕이 아슬란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었다.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희고 풍만한 가슴으로 그의 얼굴을 살짝 누른 채 조르듯 말했다.

“아슬란, 날 안아요.”

그가 볼 수 없는 그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벨리나는 리나의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날 원하는 만큼.”

***

퍽!

라트반의 검에 마수 하나가 그대로 절반으로 쪼개졌다. 너무도 깔끔하게 썰려 버린 탓에 마수는 잠시 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갸웃거리다 떨어진 제 반쪽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 마수가 세상에서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아악!”

얼굴에 쏟아진 마수의 피를 닦아 낼 틈도 없이 뒤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라트반이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막 입을 크게 벌리고 갓난아이를 씹으려 하는 마수가 있었다. 라트반은 망설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집어던졌다. 두꺼운 가죽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마수의 팔이 아이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던 아기의 엄마가 미친 듯이 기어가 제 아이를 품에 안았다. 제 손이 잘린 것보다 입에 들어갈 먹이를 잃어버린 것에 더욱 분노한 마수가 남은 한 팔을 어미와 아이에게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가까이 가기도 전에 라트반의 거친 발길질에 채여 허공을 날았다.

어미는 아이를 안고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도망갔다. 라트반은 그녀가 가는 쪽에 마수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들어 마수의 목을 베었다.

“단장님!”

마수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찾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장 쪽은!”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라트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날개를 퍼덕이며 마을 위를 날고 있는 헥사가 라트반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를 쓰고 있군.’

저 마수는 이대로 그를 상대할 경우 크게 다치거나 밀릴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라트반이 제 검을 성력으로 휘감자 헥사는 거친 울음소리를 내며 다시 작은 마수들을 불러내었다.

헥사는 제 휘하의 약한 마수들을 이용해 신전 기사단의 힘을 빼놓은 다음 그들을 덮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라트반은 다가온 기사에게 물었다.

“이리스 양은?”

“데반과 함께 마을 회관에 있습니다!”

그 말에 라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들이 지켜 내고 있는 곳이 마을 회관이었다. 도망갈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마을을 빠져나갔지만 가족을 잃어버린 자들이나 다친 자들은 쉽사리 마을을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수들이 굶주린 독수리가 쥐를 채듯 낚아 갈 것이 분명하기에 기사들은 그런 사람들을 마을 회관 안으로 보냈다.

“주변을 지켜. 소모전이 되기 전에 헥사를 친다.”

“네, 단장님!”

서늘하게 가라앉는 라트반의 눈에 기사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커져 버린 헥사를 보고도 라트반은 두려움 따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슬란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헥사에게 ‘그래서 내가 저 검은 개새끼를 싫어해.’라고 중얼거릴지도 몰랐다.

라트반은 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체력이 떨어지기 전, 헥사를 잡아야 했다.

‘그렇다면….’

실패 없이 한 번에, 헥사를 잡아야 했다. 그가 쥐고 있는 검에 푸른 성력이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괜찮은 걸까?’

신음 소리를 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밖을 바라보았다. 깨어진 유리창 너머로 마수, 그리고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산속에서 있을 때는 그저 덩치가 큰,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들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검을 들고 마수를 상대하는 것을 보니 이리스는 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하긴… 내가 살던 곳에서는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사람들이었지.’

기사가 되겠노라 검을 들고 설치던 촌장의 아들이 생각났다. 검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이리스였지만 촌장의 아들은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기사가 될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이리스는 멍하니 창문에 붙어 밖을 보았다. 왜 자신이 기사들을, 라트반을 따라가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섭지 않아.’

저들과 함께 있으면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슬란도 그랬다. 처음에는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잠든 그의 옆에 있다 보니 어느 순간 점점 그가 깨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이리스는 제 그림자를 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이 먼 땅으로 왔을 때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던 두려움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며 더욱 선명해졌다. 홀로 산을 돌아다닐 때마다, 촌장의 아들이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점점 덩치를 불리던 두려움에 언제나 이리스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 줬던 게 누구지? 아, 부모님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병에 걸렸던 어머니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이리스의 손을 붙잡고 울었었다.

“이리스, 네게… 네게는….”

어머니는 끝내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리스가 떠오르는 슬픈 기억과 함께 제 손을 보고 있을 때, 회관의 문이 열렸다.

“모두 비켜요! 기사님이 다쳤어!”

그 말에 이리스는 놀라 달려갔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숲에서 그녀가 건넨 나무 열매를 받아 들고 고맙다 인사한 젊은 기사였다.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것이 깊이 할퀴고 간 큰 상처가 보였다.

“기사님!”

놀란 이리스가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팟!

거센 바람과 함께 이리스의 손에 푸른색의 성력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그 빛은 그대로 기사의 몸을 감쌌다. 기사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상처가 낫고 있어….”

“성력이야!”

사람들의 목소리에 이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찌 통제해야 할지 모르는 힘이 다시 제멋대로 나타나 버린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이리스는 주춤주춤 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탁!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이리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놀란 이리스가 뒤를 돌아보자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희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이리스의 눈에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보였다. 화려한 금실로 수 놓인 새하얀 신관의 옷.

척 보기에도 한쪽 다리가 심하게 휘어진 남자는 웃으며 이리스를 향해 말했다.

“여기에 계셨군요, 성녀님. 당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라트반을 쫓아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하필 이때 마수가 나타날 줄이야. 평온했던 마을에 마수가 나타나자 카를의 주변에 있던 신전 기사들이 그를 향해 외쳤다.

“대신관님! 출동 허가를 내려 주십시오!”

그 말에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신전 기사단이 마을을 지키러 가 버리면 그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카를 역시 변방의 신전에서 마수를 보며 지냈었다. 그렇기에 이곳으로 날아드는 마수가 중급 정도라는 것과 저것들은 어느 정도 배를 채우면 다시 제 세계로 돌아가 버릴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쓸모없는 마을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중요한 기사단의 인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 게다가 당장 잡아야 할 라트반이 앞에 있지 않은가.

“아직 안 됩니다. 기다리십시오.”

보아하니 라트반 역시 고민에 빠진 모양이었다. 이대로 산으로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그가 평생을 믿고 따른 신의 가르침대로 약자를 돕기 위해 마을로 달려갈 것인가.

어느 쪽이나 상관없긴 했다. 마을로 달려가면 그 뒤를 따라가 라트반이 마수를 상대하기를 기다린 후, 힘이 빠진 그를 잡으면 되니까. 산으로 도망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 아직까지 기사단 내에 남아 있는 라트반에 대한 믿음을 깨트리기에 더없이 좋을 장면이 될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도주하는 전 기사단장이라니.

라트반이 어느 쪽을 선택할까 궁금해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더 큰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카를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건….”

이곳에 나타났던 마수 헥사였다. 문제라면 그것이 카를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흉측스럽다는 것이다. 헥사가 앉으려 하던 마을의 종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카를은 정신을 차렸다.

저것은 함부로 덤벼들 마수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라트반이 없는 데다가 그를 따르던 최정예의 기사들마저 빠져나간 신전 기사단이다. 결국 수는 많지만 쭉정이나 다름없는 기사단이라는 소리다. 레온 황태자의 제국 3기사단은 그들을 막을 뿐이지 공격을 하지는 않았기에 그간 허술함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마수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단장이 없는 기사단이 헥사의 공격을 얼마나 버텨 낼까. 그러는 사이 헥사가 다시 날아올랐다. 마수의 눈이 신전 기사단을 향했다. 기사단이 저를 공격할지 아닐지 가늠해 보는 눈빛에 카를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전군, 퇴각!”

그 말에 옆에 있던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마수를 두고 싸우기도 전에 신전 기사단이 퇴각을 하다니. 신전 기사단이 마수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부상당한 동료를 살리기 위할 때뿐이다. 그런데 퇴각?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의 명예가 바닥에 널린 돌멩이보다 더욱 하잘것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기사들을 본 카를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 머리를 돌렸다. 만약 헥사가 마을이 아닌 자신들을 목표로 삼으면 이곳에서 전멸이다. 카를은 제가 입고 있는 대신관의 예복을 소중히 그러쥐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다. 그는 대신전 그리고 새로운 성녀와 함께 숨이 다하는 날까지 영광 속에서 살고 싶었다.

한참을 달리다 카를은 뒤를 돌아보았다.

‘젠장!’

퇴각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불복한 채, 마을을 향해 달리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라트반에게 달려간 뒤, 그와 함께 마을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를은 모두를 멈춰 세운 뒤 상황을 살폈다.

‘라트반이 도망가지 않고 헥사와 싸운다면….’

잘된 일이다. 그가 헥사와 싸워 쓰러져도 좋고, 쓰러지지 않더라도 힘이 빠졌을 때 잡으면 될 터이니.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멀리서 보고 있던 카를은 헥사가 점점 초조해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잘하면 이대로 라트반이 저 마수를 몰아낼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했다. 그렇게 되면 마을에 있는 자들이 라트반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카를은 그제야 기사단을 움직였다. 마을로 들어간 신전 기사단은 이미 큰 타격을 입어 죽어 가는 마수들을 손쉽게 베었다.

아직 라트반은 헥사와 대적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던 카를은 사람들이 다친 기사를 들쳐 메고 어느 건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저 안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양이군.’

라트반이 헥사를 처리하고 돌아오기 전에 사람들부터 현혹시켜야 했다. 마치 이 모든 기사들을 보낸 것이 자신인 것처럼. 그렇게 들어간 곳에서 카를은 폭발하듯 솟구친 성력이 순식간에 기사를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성녀의 성력이다.

오랜 시간 그가 누려 왔던 것이기에 카를은 더욱 쉽게 알 수 있었다. 카를은 성력이 시작되는 곳을 보았다. 이벨리나에 비해서 무척이나 볼품없고 깡마른, 초췌한 여자가 있었다.

이 여자가 새로운 성녀다.

“성녀님.”

카를은 여자를 잡아끌었다.

“대신관 카를, 드디어 성녀님을 뵙습니다.”

“노, 놓아주세요!”

여자는 잡힌 손목을 빼려 했다. 그녀 덕분에 회복한 기사가 카를을 보더니 얼굴을 굳히며 검을 잡았다.

“이리스 양!”

“저자를 막으십시오!”

카를의 명령에 그를 따라온 신전 기사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더욱 희게 질린 이리스를 바라보며 카를은 말했다.

“대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 성녀님.”

당신이 세상 모든 위험한 것과 닿지 않도록.

나를 위해서.

***

아슬란은 몇 번의 낮과 몇 번의 밤이 지났는지 헤아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에게 이제 시간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아슬란은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리나를 보았다. 흰 피부에 그의 자국이 남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몸에는 울혈이 가득했다. 손자국과 입맞춤의 자국도 모자라 잇자국까지. 아슬란은 제가 그녀에게 남긴 모든 흔적의 순간들을 기억했다.

침대에서만 안은 것이 아니었다. 책상 위에서, 긴 소파의 위에서, 바닥에서, 몇 번은 벽에 기댄 채로 그녀와 아슬란은 쉴 새 없이 몸을 섞었다.

그는 짐승이다. 그렇기에 수치를 모르고 정도란 것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마저도 지금은 망설임을 느끼고 있었다.

아슬란이 엎드린 그녀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안쪽에 있는 자국이 눈에 거슬렸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여린 꽃잎이 그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울컥 물을 흘린다.

“으응….”

그런 아슬란의 손길에 그녀는 작은 교성을 흘리며 허리를 흔들었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무엇 하냐는 재촉과도 같은 움직임에 아슬란은 또다시 제 것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원하는 만큼 안으라고.’

그러면 이 세상에 해도, 달도 없어질 때까지 안아야 할 텐데. 그때까지 당신이 버틸 수 있을까? 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은 인간이라 언젠가는 부스러져 흙으로 돌아가는 당신이 나를 품을 수 있을까?

아슬란은 활짝 벌린 다리 사이에 입을 맞췄다. 역시 인간은 너무 연약하다. 그가 원하는 만큼 안았다가는 부서져 버릴 것이 분명하다.

아슬란은 그녀를 돌려 눕혔다. 한때 침대 위에 물결처럼 퍼졌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 길이로 짧아져 있다. 도망치는 도중에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아무렇게나 잘랐을 머리카락은 험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반짝이며 찰랑거렸다.

아슬란은 눈을 감은 그녀를 보다 다시 일어서려는 제 것을 그녀의 음부 위에 올렸다. 턱, 하고 무거운 살덩어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뜨거운 그녀의 아래가 맞닿은 그의 기둥 아래를 오물오물 물었다.

“하….”

느린 숨을 내뱉은 아슬란은 얼룩덜룩해진 그녀의 긴 다리를 들어 올려 한 손으로 두 발목을 감싸 쥐었다. 부드러운 허벅지의 살이 그의 것을 압박했다. 아슬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벅지 사이에 끼인 기둥은 붓이 되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액을 물감 삼아 여린 살결에 음란한 그림을 그려 나갔다.

다시금 희뿌연 액체가 그녀의 배와 가슴 위로 뿌려졌다. 붉은 자국 위에 뿌려진 정액은 꽃에 쌓인 눈처럼 보여 아슬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보다 그녀의 손이 더 빨랐다.

마치 보라는 듯 제 손을 배에 올린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제 위에 뿌려진 정액을 손바닥으로 펴 발랐다. 마치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라는 듯이.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아슬란은 아찔함을 느꼈다.

“아슬란.”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슬란은 세상에서 가장 독한 술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런 걸 마신 기억은 없는데. 그가 마신 것은 그녀가 위아래로 흘려 대는 물뿐이다. 아마도 그것이 그에게는 술과 같으리라. 마시면 마실수록 가슴 깊은 곳에 불이 일어난다. 더 내놓으라 들러붙게 된다. 그래서 울렸다. 또 흐르게 만들었다.

“…아슬란, 어서.”

아득해지던 정신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날카롭게 깨어난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가 눌러놓고 있는 마수의 본능을 자극했다.

참을 이유가 있을까. 제 반려가 자신을 원하고 있는데?

아슬란은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몸을 섞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다시 흥분케 만들었다.

“난 당신의 새끼를….”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준비도 없이 그의 것이 그녀의 아래를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이었지만 그녀의 몸은 문제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더, 더….”

답지 않게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에 뇌에서 시작된 거센 불길이 제 눈꺼풀 아래를 긁었다. 다시 이 몸 안에 들끓는 것을 토해 내야 했다. 다시금 절정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제 것을 빼내려 아슬란이 허리를 물리려는 순간 그녀의 다리가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멀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몸을 제 쪽으로 더욱 갖다 붙였다. 그의 성기가 가장 깊은 곳을 헤집는다.

“흣…!”

마수인 그조차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쾌감이 온몸을 전율하게 했다. 안 된다. 그녀에게 지금 제 씨를 뿌릴 수는 없다. 아직 그녀는 성력을 되찾지 못했다. 이런 몸으로 혹시라도 제 새끼를 배게 된다면 위험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머리의 다른 쪽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다.

분명 성력은 되찾을 수 있을 테니, 어서 안에 씨를 심으라는 목소리가. 그 목소리는 그래야 네가 완전히 그녀를 가질 수 있을 거라 말한다.

갈등하는 그의 귓가에 그녀가 입술을 가져다 대어 속삭였다.

“어서, 내 안에 해 줘요.”

그 말이 남아 있던 아슬란의 이성을 끊어 버렸다.

“아, 아아, 흐, 읏!”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친 움직임이 그녀의 숨을 잘랐다. 그러다 그의 것이 크게 부풀며 그녀의 안에 망설임 없이 제 것을 쏟아 내었다. 계속해서 쏟아지다 안을 가득 채우고 넘친 정액이 단단하게 맞물린 살 틈 사이로 흘러내렸다. 둘 다 그저 거친 숨소리만을 낸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쿵. 쿵. 쿵.

아슬란의 귀에 리나의 심장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심장 역시 크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슬란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태에 제 씨가 자리를 잡았다.

그토록 바랐던 것이 이루어진 탓일까, 아슬란이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공간이 일그러졌다. 곧 허공에서 석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슬란은 왜 그것이 나타났는지 알아차렸다. 계약은 완성되길 원하고 있다. 절반은 이루어졌으니 나머지 절반 역시 이루어져야 했다.

그때 그녀가 석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요구할까. 아슬란은 제가 복종해야 할 명령을 기다렸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것을 말했다.

“아슬란, 가장 강대한 마수여. 나는 약속대로 그대의 새끼를 배었다. 그러니 그대는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할 터. 나는 그대에게 명한다.”

이상하게도 지독하게 낯선 눈빛을 한 그녀가 희열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명령했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신전을 파괴하라. 두 번 다시 세우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이벨리나의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에 떠오른 석판이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비어 있던 그녀의 자리에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으나 그 뜻만은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임이 분명했다.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아슬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떨리는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드디어 제가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수의 새끼는 인간의 새끼와는 다르다. 그것은 수태된 순간부터 미약하지만 제 의지를 가지고 제일 먼저 저와 교감을 할 상대를 찾았다. 그 부름에 대답하면서 아슬란은 스스로가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신의 새끼이다. 하지만 정작 기뻐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냥 새끼가 아니다. 자신과 리나의 사이에 생긴 새끼. 그것이 아슬란을 기쁘게 만들었다. 아슬란은 이제 막 수태된 것에 제 뜻을 흘려보냈다.

[너를 품은 모체는 연약하다. 그러니 성장을 멈추고 기다려라.]

감히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강대한 존재임을 알아차렸는지, 태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크기를 키워 나가려 했던 새끼는 그 움직임을 멈췄다.

[기다려라. 너는 태어날 수 있을 터이니.]

다시 아슬란이 뜻을 흘려보내자 아주 연약하고 가느다란 울음이 그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그의 뜻에 복종하며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아슬란은 리나를 끌어안았다. 이전에도 그녀는 제게 소중했지만 더욱더 소중해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슬란은 고개를 돌려 석판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옆에서 떠오른 채 빛나고 있는 석판은 빠른 실행을 요구하는 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신전을 파괴해 달라고.’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 정도라면 이런 석판 따위가 없어도 그게에 다정하게 속삭여 부탁했다면 얼마든지 그가 들어주었을 것이다. 신전은 그 역시 혐오하는 것이니까.

아슬란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날아올랐다. 허공으로 그가 떠오른 순간, 그동안 그가 누르고 있었던 본체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허공에는 그와 그녀뿐이었지만 발아래의 바다에는 거대한 네 장의 날개를 가진 붉은 털의 사자와 닮은 짐승이 비치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섬에 살고 있는 모든 자는 섬의 주인이 수천 년 만에 드러내는 본체의 기운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렸다. 이 세계에 머무는 가장 강대한 존재가 받아 마땅한 숭배였다.

바다 위에 비치는 거대한 형체가 머리를 돌렸다. 그 방향의 끝에는 대륙이 있을 터였다. 지금부터 그가 파괴해야 할 곳이기도 했다.

이벨리나는 저를 끌어안고 대륙으로 향하는 마수의 품에서 웃음 지었다. 그녀의 의식 안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벨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가 불러왔던 다른 세계의 영혼이었다. 애타는 부름에도 이벨리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오래전, 이벨리나는 책 한 권을 읽었었다. 어떻게 가져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책이었다. 아마도 대신전의 서재에서 분함을 참지 못하고 책장을 밀어 버렸을 때, 그 안에서 떨어진 책 중에 한 권이었던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들고 침소로 돌아왔다. 그 다음 그것을 침대 옆 협탁 위에 던져두고는 존재를 잊었었다.

그러다 손목을 그었다. 몇 번째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자해였다.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벨리나는 침대 옆 협탁에 굴러다니는 책을 집었다. 어차피 오늘도 똑같을 것이다. 천천히 모든 힘이 빠질 것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로 가겠지. 하지만 성녀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안온한 흐름에 몸을 맡기지 못한 채, 다시 현실로 쫓겨날 것이다.

이벨리나는 죽어 가면서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은 무척이나 하잘것없었다. 어릴 때부터 약했던 여자가 병원으로 들어간 후, 길지 않은 생을 보내다 죽는다는 이야기였다.

이벨리나는 조금의 공감도 하지 못한 채 책을 읽어 갔다. 삶이 뭐라고 저렇게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는 걸까.

도대체 이런 책이 왜 대신전의 서고에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였다.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할 때, 이벨리나는 책의 마지막을 읽었다. 성의 없이 문장을 훑던 눈이 커진 것은 책의 끝부분에서였다.

“……!”

책 속의 여자도 죽기 전에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벨리나는 책 속의 책에 쓰인 것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점점 힘이 빠지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렇게 이벨리나는 또다시 익숙한 죽음을 맞이했다.

눈을 뜬 것은 몇 번이고 보았던 어둠 속에서였다.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감은 채, 잠든 것처럼 흘러가는 영혼들이 보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 죽음일 터였다. 저 흐름에 몇 번이고 함께하려 했으나 이벨리나는 매번 섞이지 못한 채, 다시 삶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벨리나는 제가 다시 깨어나면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

이벨리나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결국 버티다 못한 자신이 언젠가 정신을 놓고 모든 것을 없었던 일이라 믿게 되는 것이었다.

옆에 카를을 두고 성실히 성녀의 임무를 다하는,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가끔씩 정신을 놓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잠깐이라도 좋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깊이 잠들 수 있다면. 제 끔찍한 삶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복수를 향한 마음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이벨리나는 영혼들이 흘러가는 강으로 눈을 돌렸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 사이에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었다. 몸이 무척 말랐다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징도 없는, 죽은 여자.

“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다. 자신이 죽기 전에 읽었던, 죽음을 두려워하며 마지막까지 살려고 발버둥을 쳤던 그 여자!

이벨리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 그 여자를 붙잡았다. 분명히 다른 영혼들처럼 자신을 튕겨 내리라 생각했었는데 그 영혼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길을 따라 강의 흐름을 벗어났다. 그 순간 이벨리나는 직감했다. 다른 존재임에도 거부하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하나의 영혼이었던 것처럼.

“…넌 살고 싶어 했지.”

지치고 더 이상 살고 싶은 욕망이 없는 자신과 달리 이 여자는 살아남으려 했다. 그렇다면….

이벨리나는 그 여자를 끌어안았다.

“…나를 대신해 살아 보렴.”

오래전 일을 떠올리던 이벨리나는 어느새 보이기 시작한 대륙의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배로 한 달이나 걸리는 거리를 이 마수는 순식간에 날아왔다. 바다 위에 일렁이는 아슬란의 본체가 붉은 마력을 휘감기 시작했다. 대륙의 끝, 절벽에 있는 신전은 갑자기 바다에서 다가온 거대한 마력에 놀란 자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 신전의 위에 거대한 불덩어리들이 생겨났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신전을 벗어난 순간 불덩어리들은 망설임 없이 신전을 향해 쏟아졌다.

건물이 무너지고 영원할 것 같던 돌기둥조차 불길에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아슬란의 마력이 신전에 어린 성력의 근원을 찾아 파헤쳐 나갔다. 가느다란 성력의 흐름이 폭풍 같은 마력에 짓눌려 사라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벨리나는 웃었다. 석판은 여전히 두 사람의 옆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녀가 아슬란에게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이벨리나는 진정으로 제가 바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가 어렸다. 이벨리나는 제 안에서 소리치는 리나에게 진심으로 속삭였다.

고마워, 리나.

나는 네 덕분에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구나.

***

“성녀님께서는 여전하십니까?”

카를은 필사적으로 짜증을 감추며 성녀의 처소 앞 신관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신관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아직 대신전이 익숙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틀어박혀 울어 댈 것이냐 소리치려던 카를은 필사적으로 화를 누르며 신관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분의 부름이 있다면 곧바로 알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카를은 성녀의 처소에서 돌아 나왔다. 절뚝이며 복도를 걷던 그는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젠장할….”

이리스. 그가 강제로 끌고 온 새로운 성녀. 라트반이 헥사를 상대하는 사이 카를과 그를 따르는 신전 기사단은 이리스를 끌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러는 사이에 도저히 더 이상은 카를을 따를 수 없다며 라트반에게 가 버린 기사들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제 카를에게 그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울며 놓아 달라는 성녀를 보며 카를은 이번 성녀도 무척이나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성력의 사용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성녀라니. 이벨리나를 가르쳤듯이 그가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치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골머리를 앓게 만들 줄이야.’

이리스는 대신전에 온 후, 자신은 성녀가 아니라며 하루 종일 울어 대었다. 무엇을 하려 해도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계속해서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이리스를 데리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그 탓에 새로운 성녀를 맞이하는 의식도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었다.

‘곤란해.’

카를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그가 대신전으로 돌아온 직후, 라트반이 헥사를 쓰러트렸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뒤이어 그가 그곳에 남았던 신전 기사단을 재정비하여 대신전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도.

그곳의 사람들이 라트반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두고 등을 돌린 대신관과 신전 기사단을 향해 어떠한 욕을 하고 있을지도 짐작이 갔다.

그 소문이 대륙 전체로 퍼지기 전에 어서 새로운 성녀를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런 꼴이라니. 울기만 하는 주제에 이상하게 고집이 센 이리스를 욕하며 카를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중앙 신전으로 향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신관들이 있었다.

“카를 대신관님!”

“무슨 일입니까?”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달려온 신관들이 소리쳤다.

“어서 중앙 광장으로 가셔야 합니다!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한두 개가 아닙니다!”

“전언이?”

최근 들어서 전언은 헥사의 출현 때 외에는 도착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카를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중앙 광장이 보인 순간 그는 말을 잃었다.

“저게 전부 다 전언…?”

여러 개가 와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광장에 도착해 빛나고 있는 전언은 족히 수십 개가 넘어 보였다. 도대체 다른 신전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이렇게 동시에 전언이 도착한단 말인가?

“대신관님!”

전언 주변에 서 있던 신관들이 애타게 카를을 불렀다. 어서 전언을 열어 보라는 소리였다. 카를은 서둘러 전언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빛나는 공처럼 생긴 전언 하나에 그가 손을 얹는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전언들이 동시에 같은 소리를 내었다.

“마수 아슬란. 신전 파괴.”

“마수 아슬란. 신전 파괴.”

“마수 아슬란. 신전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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