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9/48)

동굴 안에서 아슬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인간처럼 의식에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는 일 따위는 그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이쪽 세계에 없는 언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몸 주변에 붉은 마력이 맴돌더니 글자와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다. 곧이어 그것은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한참 동안이나 그것을 지켜보던 그는 몸을 일으켰다.

“회복은 끝난 것 같고….”

사실 이것은 회복이 아닌 수리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의 힘은 그대로다. 다만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자꾸만 봉인을 뚫고 새어 나오려는 힘을 눌러야 했다.

자신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힘을 아껴야 했기에 아슬란은 본체를 봉인했다. 만약 지금 힘을 마음대로 써 버리면 봉인의 유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해.’

이 세계에 갇힌 이후로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마수들에게 제가 태어난 곳은 인간들의 고향보다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진다. 아슬란의 모든 것은 제가 태어난 곳에 있다. 인간들처럼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난 곳이 제힘의 근원이다. 원래부터 강대하게 태어났다. 제 세계가 아닌 곳에서도 이 정도일진대.

‘헥사도 그걸 알고 저 난리를 치는 거겠지.’

헥사에게 있어서 이쪽 세계의 아슬란은 제 앞에 떨어진 주인 없는 보물과도 같았다. 원래의 세계에서는 감히 제가 다가가는 것도 꿈꿔 보지 못할 거대한 힘. 그런데 그것을 잘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그 건방진 놈을 역시 찢어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아슬란의 얼굴이 굳었다.

“왜 이것이….”

공간을 넘어선 힘의 진동이 느껴졌다. 아슬란이 허공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자 그곳에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가 생겨났다. 곧, 그 너머에서 둥실 떠 있는 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있었다.

“…반응하고 있어?”

공간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그가 성녀와 했던 계약이 적혀 있는 석판이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적혀 있건만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아직 비어 있는 그것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워낙에 거대한 힘을 가진 것이기에 그저 잘게 떨리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시공간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아슬란은 혀를 한 번 찬 다음에 석판을 손으로 붙잡았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석판은 떨림을 멈춘 채, 얌전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슬란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잡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석판은 두 계약자 모두에게 반응한다. 아슬란은 이미 제가 원하는 것을 적었으며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이 석판이 지금 반응한다는 것은 성녀가 비어 있는 곳을 채우기 원한다는 의미이다.

일단 몸이 회복되기도 했으니 어서 빨리 리나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은 확실했다. 석판을 다시 공간 너머로 돌려보낸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야, 인간. 지금 당장….”

뒤를 돌아본 아슬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굴 그 어디에도 이리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제 말을 무시하고 도망친 것인가?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 아슬란은 동굴 안에서 이리스의 흔적을 찾았다.

“…….”

동굴 안이 지내기 좋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사이에 며칠이 지났던 걸까. 돌을 옮겨 놓은 것이라거나 풀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보니 하루 이틀 만에 끝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슬란은 고개를 돌려 제가 누웠던 자리 옆에 놓인 것을 보았다. 나뭇잎 위에 잘 익은 나무 열매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수천 년 전에 부족 단위의 인간들이 저를 신이라 부를 때 이런 걸 받아 봤던 것 같은데. 아슬란은 좀 더 주변을 살폈다. 나무 열매도 그렇고 남아 있는 흔적을 보아 이리스가 여기를 나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주변이 정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돌아오려고 한 것 같았고. 좀 더 기다릴까, 하던 아슬란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동굴 밖으로 나섰다.

마법을 써서 찾을까, 생각하던 순간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인간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곧 아슬란의 얼굴이 굳었다.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귀찮게 되었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슬란은 집중해서 마법을 썼다. 헥사를 굳이 불러들일 이유는 없기에 그놈이 제 마력을 쉽사리 눈치챌 수 없도록 조금 손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곧, 아슬란은 공간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힘없이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아야 했다.

다른 인간들이야 어떤 놈이건 간에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대신전에서 성녀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검은 개새끼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저런 꼴로!

물어보지 않아도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났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옆에 성녀가 있고, 그녀를 지키고 있다면 칭찬이라도 해 주었을 것인데. 개새끼는 아무래도 제 주인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아슬란의 안에서 분노가 빠르게 들끓었다.

리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그의 이성은 거미줄보다도 더욱 쉽게 끊어져 버렸다.

아슬란은 곧바로 라트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단장님!”

“막아!”

옆에 있던 신전 기사들이 재빨리 검을 빼 들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갑자기 쇠사슬이 자신들의 몸을 조이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너희들은 닥치고 있어.”

서늘한 아슬란의 말에 그들은 식은땀이 흘렀다. 처음에는 그저 마법사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상대했던 그 어떤 마수들보다 더욱 강한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단지 마수에게 힘을 빌려서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이 가질 만한 힘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마력인 마수가 분명했다. 그것도 신전 기사단인 자신들을 눈빛만으로 굴복시킬 정도로 무척이나 강한.

그런 아슬란과 기사들 사이에서 이리스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벌벌 떨어야 했다. 그녀가 버티기에는 너무 강한 기운들뿐이었다.

아슬란이 이대로 전부 기사들을 죽여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공포가 이리스를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주변이 얼어붙어 있을 때, 아슬란이 입을 열었다.

“…리나는 어디에 있나? 어떻게 되었지?”

분명 평소라면 이리 쉽게 라트반을 잡아 올리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라트반은 아무런 저항 없이 아슬란의 손에 제 멱살을 내어 주고 있었다. 그것이 아슬란의 속을 더욱 뒤집었다. 이런 라트반의 모습이 마치 제 죄를 인정한다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성녀님께서는 갑자기 모든 성력을 잃으셨다. 그리고 새로운 성녀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도착했고 카를이 수를 써 대신전에서 성녀님을 해하려 했지. 그래서 그분을 모시고 대신전을 나왔다. 그리고 지금 성녀님은… 레온 황태자와 함께 계신다.”

그 말에 아슬란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라트반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나마 개새끼 중에 한 마리는 제 주인을 잘 지키고 있군.”

라트반은 입술을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슬란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아슬란은 하늘을 향해 한 손을 올렸다. 그의 손 주변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젠 더 이상 인간들의 놀이에는 못 어울려 주겠군. 참을 만큼 참았어.”

처음부터 이래야 했다. 인간들의 규칙 따위는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약속된 제 암컷을 얻고 탐하며 사랑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다.

폭발할 것 같은 거대한 마력에 저 멀리서 헥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아….”

눈을 뜬 순간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레온이 보였다.

“레온? 내가 왜….”

“기억나지 않습니까? 잠시 나갔다 온 사이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쓰러졌었다고?

레온의 말에 나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곧 돌아오겠다며 밖으로 나가는 레온의 모습이었다. 천천히 돌아와도 된다는 말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상처 받는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의사는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온은 여전히 얼굴에서 걱정을 지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책상 옆에 쓰러져 있어서 걱정했어요. 혹시나 쓰러질 때 머리를 부딪치거나 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혹시 많이 어지럽나요? 토할 것 같지는 않고? 조금이라도 어디가 안 좋은 것 같으면 바로 말해 줘요.”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최근 여러 일이 있다 보니 피로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거라 말하더군요.”

그 말에 나는 레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피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였으니까. 내 시선이 말하는 바를 알아차린 레온은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었다. 어색한 공기가 잠시 흐른 다음 레온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일단 약속하겠습니다. 황궁에 도착하는 날까지 당신을 안지 않겠어요.”

무척이나 대단한 결심을 했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하는 그의 말을 듣다 나는 중요한 것을 나중에 알아차렸다.

“잠깐, 황궁에 도착…?”

내 지적에 레온이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것처럼 보이면서도 단호함이 서려 있는 웃음이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신과 약속했던 것은 전부 지켰습니다. 3기사단의 절반은 이곳에 남아 계속해서 신전 기사단을 막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도….”

레온은 가까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잡고는 입을 맞추었다.

“완벽한 황태자비가 되어 주세요. 제국의 모든 이가 당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 어떤 자도 감히 당신에게 대신전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하지만….”

“출발은 내일입니다, 리나. 그러니 푹 자 두어요. 마차로 이동하긴 하겠지만 꽤 길이 험하니까요.”

레온의 말에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제국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것을.

그 순간, 갑자기 천막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고함 소리와 비명이 섞여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몸을 짓누르는 듯한 이 기운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레온 역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슬란?”

“아슬란?”

우리는 동시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천막 밖에는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거센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들어 보았다. 역시나.

“아슬란….”

가소롭다는 표정을 한 그는 팔짱을 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신전에서 그는 내 부탁에 제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기척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기척을 감출 이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저자는 도대체….”

주변에 있던 제국 기사단은 몸이 짓눌리는 듯한 위압감을 느끼며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아슬란이었지만 지금 그에게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거센 분노가 느껴지고 있었다.

“마법사인가?”

“말도 안 돼. 마법사라 해도 이렇게는….”

어려 보이는 기사 한 명이 몸을 떨며 아슬란을 보았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기개는 존경할 만하였으나 거기까지였다. 주둔지 여기저기에서 묶여 있던 말들이 날뛰는 소리와 주둔지의 일을 돕고 있던 일반인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슬란은 단지 나타난 것만으로도 이곳을 공포로 물들게 했다.

그사이 노련한 기사들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집어 들었다. 그들은 아직 넋을 놓고 있는 동료들에게 소리치며 공격 대형을 갖추도록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아슬란에게는 그런 공격 따위가 먹히지 않을 것을.

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아슬란을 보자 나는 새삼 내가 어떤 존재와 계약을 했고 그를 안았었는지 다시금 실감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우리를 ‘봐주고’ 있었던 것인지도.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아슬란.”

나를 따라 나온 레온이 아슬란을 향해 물었다.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레온을 향한 존경심이 생길 것 같았다. 여기에서 아슬란의 저 흉흉한 기운에 짓눌리지 않고 맞서 버티는 사람은 오직 레온뿐이니까.

“그 날카로운 기운 좀 누그러트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리나는 몸이 좋지 않으니까요.”

레온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슬란의 기세는 더욱 흉흉해질 뿐이었다.

“읏….”

피부 위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따끔거림이 느껴진다. 예전이라면 내 안에 머물렀을 성력이 어느 정도 아슬란의 마력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었겠지만, 모든 성력을 잃은 나는 그저 평범한 일반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 탓에 나는 힘을 잃은 채 휘청이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레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빠르게 내 허리를 붙들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나는 그런 레온의 팔을 붙들고서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레온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떨고 있어?’

주변의 인간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아슬란이 곧 나와 레온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와, 리나.”

그 순간 나를 끌어안은 레온의 몸이 크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레온이 떨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레온은 아슬란이 아닌, 내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아슬란은 차가운 눈으로 레온을 쏘아보았다.

“너, 내가 없는 동안 성녀를 지키고 있던 것에는 칭찬을 해 주마. 두 개새끼 중에 한 마리라도 제 임무를 하고 있었다는 게 정말 다행이군.”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아슬란은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는 나와 한 계약을 지켜야 해. 이제 나는 더 기다릴 수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이벨리나가 한 계약이었지만 그녀의 몸을 갖고 있는 이상 내가 이행해야 하는 계약이기도 했다.

나는 몸을 돌려 레온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무엇을 말할지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레온.”

“…안 됩니다, 리나.”

“마수에 홀린 가짜 성녀를 황태자비로 만들어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라트반도 나도 이미 카를의 손에 있었겠지요.”

레온이 나와 라트반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 것은 단지 제국의 기사단 하나가 아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대신전에 반기를 들었다. 그것도 새로운 성녀인 이리스가 아닌 타락한 성녀인 나를 선택하면서.

그의 선택에는 어떠한 이점도 없었다. 이제 대신전은 제국을 공식적으로 적국이라 선언할 것이며 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제국에 반기를 들 것이다. 제국 내에서도 그를 향한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이며 그의 선택은 정복되었던 나라들의 반기의 불씨를 피우게 될 것이다.

그 어떤 것 하나도 손해 보지 않는다는 교활한 황태자. 그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손해인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나는 손을 뻗어 레온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레온.”

“리나, 제발….”

굳은 채로 가만히 내 입술을 받아 내던 레온의 눈가가 붉어졌다.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는 제국의 황태자가, 겨우 여자 하나를 놓지 못해서 울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런 레온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느끼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리라.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나를 안고 있던 레온의 몸을 밀었다. 레온은 나를 붙잡지 못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아슬란에게 외쳤다.

“아슬란! 어서 날 데려가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슬란이 나에게 다가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다음 순간, 나와 아슬란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

라트반은 일어서서 어깨를 돌려 보았다. 조금 뻐근한 감각은 있었지만 특별한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 더 어깨를 확인하던 라트반은 다른 신전 기사에게 빌려 온 검을 꺼내 들었다. 곧 조용한 숲에서 빠르게 바람을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숲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두르자 달빛을 반사한 검날의 번쩍거리는 빛이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잠시 후, 멀리 떨어져 있던 썩은 나무가 미끄러지듯 두 조각으로 갈라지더니 나무의 윗부분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른 기사들이 봤다면 좌절을 느꼈을 장면이었다. 검을 휘둘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벨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그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라트반이었고.

그의 이런 기술과 힘이 마수를 상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렸던가.

‘하지만 소용없지.’

라트반은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아슬란을 떠올렸다.

리나를 찾는 아슬란의 말에 그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모두 다 제가 모자랐기에 벌어진 일이니까. 개 짖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었고, 리나가 어디에 있는지만 짧게 말하라는 아슬란의 분노에 라트반은 사실대로 모든 것을 말했다. 그러자 아슬란이 라트반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도 짜증 날 정도로 한심하기 때문임을 알아 둬라.”

아슬란은 그 말을 남긴 채,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

분명 레온에게 가, 그녀를 찾았을 것이다. 라트반은 아슬란이 그녀를 데리고 갈 만한 곳을 짐작해 보았다.

‘마법사들의 탑인가.’

그곳으로 가는 방법이라면, 라트반도 알고 있는 것이 몇 개 있었다.

그는 몇 번 더 어깨를 돌려 보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제 손을 바라보았다. 큰 상처에 독까지 퍼져 엉망이었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평생을 보아 왔던 성력의 놀라움이었건만 새삼 느끼게 된 그 힘의 위대함에 라트반은 경외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기적의 흔적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한참이나 손바닥을 보던 라트반은 뒤돌아 말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오. 밤공기가 차니 오래 앉아 있으면 힘드실 겁니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곳의 수풀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라트반이 다시 말했다.

“괜찮습니다. 처음 다가오실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말에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이리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겋게 된 얼굴로 일어선 이리스는 머리카락과 옷에 붙은 흙과 나뭇잎을 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저, 저기… 저는 그냥… 너무 멀리 가시는 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그것이 훔쳐보고 있었던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이리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저기…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네. 치료해 주신 덕분에 이제는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라트반의 대답에 이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괜찮다면… 성녀님의 이야기를 더 해 주실 수 있나요?”

이리스는 그 순간 라트반의 얼굴에 아주 조금 부드러움이 깃드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슬란이 떠난 다음, 이리스는 자연스럽게 라트반과 다른 기사들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이리스는 혹시나 라트반이 전 성녀를 따르기 때문에 자신을 적대시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그저 자신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당신의 성력은 원래 이벨리나 님의 것이기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해 달라 말했다. 그 말에 가장 기쁜 것은 이리스였다.

모두가 자신을 새로운 성녀라 부르며 제멋대로 기대를 가졌는데, 라트반은 칼같이 당신은 성녀가 아니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 주는 모습에 이리스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라트반은 성녀를 궁금해하는 이리스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성녀가 하는 일이라거나 대신전에서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에 대한 소소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두근거려.’

별것 아닌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인데도 이리스는 마냥 즐거웠다. 마치 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성녀님에 대해서 그리 궁금하십니까.”

“네! 저, 저는 정말로 성력을 가지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어요. 어떻게든 이 힘이 다시 성녀님께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이상하게도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리스는 성녀를 만나고 싶었다.

라트반은 신이 난 걸음으로 제 앞을 걸어가는 이리스를 보며 생각했다.

‘일단 리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해.’

사랑한다며,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한 주제에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 죄인은 다시 제 주인을 찾아가 용서해 달라 빌어야 했다.

***

“으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신전은 물론 내가 간 곳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 놀라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무척이나 화려하면서 또한 이국적인 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긴….”

“마법사들의 탑이지.”

아슬란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내가 누워 있던 거대한 쿠션의 옆에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슬란이 보였다.

“아슬란…?”

내 부름에 아슬란은 손을 뻗어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제부터 평생 그대가 나와 함께 지낼 곳에 온 것을 환영해.”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동그란 창으로 다가갔다. 유리가 없이 뚫린 창 너머로 이곳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낮게 깔린 구름들이 내 시야의 아래에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 구름 사이로 더 아득한 아래쪽에 집으로 보이는 것들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이없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곳임을 알았다.

대신전의 중앙 건물도 고개를 완전히 꺾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크고 웅장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웠다.

“여긴….”

이 세계로 온 다음, 대신전의 서재에 있는 책에서 이곳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대륙의 남쪽으로 배를 타고 한 달을 가야 이곳에 도착한다고 했던가.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마을 너머로는 끝이 없을 것 같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데려가 달라고 했잖아.”

어느새 다가온 아슬란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래서 데려왔어.”

당연한 일이었다는 듯 말하며 그는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좀 더 빨리 데려올 것을.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허리를 잡아 돌렸다. 마주한 아슬란의 얼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 있었다.

“그동안 당신을 위해 그 귀찮은 인간들의 규율을 지켜 주었지.”

그랬었다. 아슬란은 그가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나를 데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수로서의 자존심을 굽히고 대신전의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며 밤에만 나를 찾아왔다. 그와 함께 밤을 보냈던 언젠가, 자신이 태어난 이래 이런 양보는 처음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군. 당신이 지키려 했던 것들이 당신을 버린 것을 알고 있어.”

“…내가 성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도 알고 있나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내가 아슬란에게 제일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을 곧바로 물어보았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다.

아슬란은 분명 대신전에서의 일을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내가 성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도 들었겠지. 지금까지 나는 아슬란이 그 사실을 알면 곧바로 나를 내치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 정도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아티팩트까지 써 가면서 계약을 맺은 상대가 쓸모없는 쓰레기가 된 것을 알면 그 분노를 곧바로 풀려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언제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왜? 내가 성력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그대를 놓아 버릴 거라 생각했나?”

아슬란의 붉은 눈이 웃음을 담아 나를 보았다. 그 시선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슬란은 그런 나를 붙잡았다. 손을 들어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그는 손을 옮겨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더니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그가 말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어.”

그의 말은 마치 마법처럼 내 몸의 긴장을 녹였다.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다. 대신전의 일도. 카를의 일도. 사라진 성력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그러나 할 수 없는 숙제가 순식간에 없었던 것이 된 듯했다.

그는 나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버리지도 않는다.

아슬란은 나를 안아 들어, 조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침대로 걸어가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침대 끝에 걸터앉은 내 무릎 위에 그의 머리를 올렸다. 마치 커다란 개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행동이었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슬란의 큰 손이 복잡하게 생긴 옷자락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발목부터 천천히 쓸어 올라가며 그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것은 애교 따위가 아니었다.

손톱을 세워 천천히 긁어 올리는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간지러움과 함께 예민하고 여린 피부 아래의 감각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어느새 그의 손은 무릎 위를 넘었다.

“흐읏….”

그가 주는 감각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아슬란의 다른 손이 그러지 못하도록 다리를 붙잡았다. 무릎 위에서 맴돌던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아슬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딘지 심술궂어 보인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제 손에 힘을 주어 내 무릎을 벌렸다.

“아슬란!”

반항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강한 힘에 나는 몸을 떤 채 가만히 그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앉아 있는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그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곧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의 깊숙한 곳을 꾹 눌렀다.

“읏….”

그곳에는 여전히 선명한 자국이 있었다.

“내가 그대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아마 대신전의 기록에는 적혀 있지 않겠지만 이 섬은 오래전 이쪽 세계로 떨어진 멸망한 다른 세계의 일부분이야. 그렇기에 여기에 속해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다른 세계에 가깝지. 나중에 천천히 볼 수 있겠지만 밖에 있는 동물도, 식물도 대륙의 것과는 전혀 달라.”

아슬란의 손가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자국의 주변을 천천히 쓸었다. 마치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파고들어 뜯어내 버리고 싶다는 듯이.

“그렇기에 이 더럽고 비열한 사술은… 대륙에서처럼 힘을 쓸 수 없지. 그대도 알겠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곧 법칙이고 모든 것이야.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아슬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은 내 배 위에서 원을 덧그렸다. 마치 이제부터 그가 무엇을 할 건지 알려 주겠다는 것 같은 움직임에 나는 숨을 삼켰다.

“이제 그대가 계약의 완성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라.”

다시금 그의 눈이 가늘게 휘며 그가 내 위로 올라왔다.

***

‘어떻게 해야 하려나.’

라트반은 다른 기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바위를 내려오는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문제는 이리스였다. 그녀가 성녀의 성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라트반 스스로가 그 힘의 은혜를 누렸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스를 데리고 돌아다닐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카를이 그녀를 찾도록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기사 중 한 명을 그녀의 옆에 붙인 다음 당분간은 카를의 눈을 피해 숨어 있도록 해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 오늘 아침이었는데, 그 후로 이리스는 마치 라트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죽어라 라트반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혼자 남을까 봐 두려워하는 강아지 같아 라트반은 마음이 불편했다.

‘일단은 근처 마을에라도 잠시 머물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산속의 마을에서 약초를 캐며 산을 타고 살았다지만 언제까지고 산속에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말을 들어 보니 아슬란이 처음에는 음식을 구해 준 모양이었지만, 그가 잠든 이후로는 혼자서 나무 열매만을 먹고 지냈다 했다. 그 탓인지 이리스는 무척이나 말라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푸짐한 식사와 새로운 옷 그리고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공간이다.

다행히 기사들 중에 신전 기사단의 주둔지에서 돈을 챙겨 온 자가 있었기에 이리스를 위한 것들을 제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이리스와 함께 있으면서 상황을 살피고 이동하면 최소 몇 주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저 마을로 가는 건가요, 기사님?”

이리스는 멀리 보이는 마을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라트반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살펴본 후 크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저곳에 머물 겁니다.”

그 말에 라트반의 눈치를 보던 이리스가 다시 물었다.

“기사님도 가시는 거죠?”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수배령이 내린 데다가 이쪽으로 마수 토벌을 위해 자주 왔던 탓에 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이리스 양의 곁에 다른 기사가 함께할 것입니다.”

그 말에 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

“저 산 잘 타요. 나무 열매도 잘 알고 있고 약초들도 잘 알고 있어요.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성력도 쓸 수 있으니까….”

“이리스 양.”

라트반은 차분히 이리스를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라트반이 무슨 대답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리스 역시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지금 성녀님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 험난한 여정에 이리스 양을 끌어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를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

단호한 라트반의 목소리에 이리스는 더 말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누가 이곳에 남아 이리스를 지킬 것인지를 결정했다. 기사 중 가장 체격이 작고 젊은 자가 이리스의 오빠인 척을 하며 함께 남아 있기로 했다. 장검을 짐 사이에 숨기고 농사꾼의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앞장서자 이리스는 머뭇거리다 라트반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성녀님을 찾으시면 꼭… 만나게 해 주세요. 제가 갖고 있는 성력은 다 돌려 드릴 테니까! 전 성녀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으니까….”

“물론입니다.”

이리스는 몇 번이나 더 라트반에게 약속을 받아 낸 다음 겨우 몸을 돌려 젊은 기사를 따라갔다. 보내는 것은 젊은 기사 한 명만이 아니었다. 다른 두 명의 기사도 각각 따로 마을로 들어가 이리스와 젊은 기사의 주변에서 그들을 지킬 것이었다.

라트반은 멀찍이 서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아직 산에는 다른 기사들도 남아 있다. 이제 자신은 그들과 다시 합류해 리나를 찾으러 움직여야 했다.

‘좋든 싫든 레온 황태자부터 찾아가 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이 다시 산을 오르려 할 때, 멀리서 뽀얀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곧, 언덕 위에 드러난 자들의 모습에 라트반의 얼굴이 굳었다.

신전 기사단이었다. 멀끔한 그들의 모습에서 지금 그들이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두에는 말에 올라탄 카를의 모습이 보였다.

‘젠장.’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확히 라트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라트반이 고민하며 검을 빼낸 순간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이리스가 들어간 마을의 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마을을 바라보자, 마을 위 하늘의 부분 부분이 마치 종이가 구겨지는 것처럼 우그러지고 있었다. 마물이란 본디 세계끼리 부딪쳐 생긴 균열을 통해 넘어오는 다른 세계의 존재다.

지금도 그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공간이 일그러지며 생기는 균열 사이로 날개와 함께 거미의 다리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이쪽 세계로 넘어오고 있었다.

많은 마수를 상대했던 라트반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크기는 중급 정도. 수는 셋.

그것들은 이내 완전히 균열을 빠져나오더니 새로운 세계의 공기에 적응이라도 하듯이 징그러운 날개를 퍼덕거렸다.

라트반은 신전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마수가 나타났으니 그들은 곧바로 마수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신전 기사단의 모습에 라트반의 표정이 굳었다. 마을이 마수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자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라트반은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지금 자신은 대신전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 드는 대역죄인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도우라는 가장 기본의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니.

신전 기사단에게서 몸을 돌려 마을을 향해 달리려던 라트반의 몸이 멈췄다.

지금 자신이 마을로 가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신전 기사단은 자신을 쫓아올 것이고 그러면 마을 안으로 들어간 이리스와 그녀를 보호하는 동료 기사들이 발각될 확률이 높다.

가지 않는다면?

저 정도의 마수라면 마을에 남아 있는 동료 기사들이 저들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물러나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쫓는 저 신전 기사단은 분명 뒤를 따라올 터이니 이리스와 다른 기사들과 거리를 둘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니 어서 산으로 도주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가 산으로 가라 말하고 있음에도 라트반의 다리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신에게 맹세를 하고 신전 기사의 길을 걸은 후, 단 한 번도 사람들의 비명을 뒤로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마수와의 전투에서는 선봉에 섰다.

그때였다.

카아아아아아아!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를 잡아 찢는 것 같은 울음소리에는 듣기만 해도 서늘해지는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구름이 흔들리나 싶더니 세찬 바람과 함께 구름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헥사?”

갑작스레 나타난 마수를 보며 라트반은 놀란 얼굴로 그것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너무나 다른 크기도 크기지만 날개도, 다리도 그 수가 늘어났다. 저 마수는 이곳에서 아주 가끔 보고되는 ‘성장’을 한 것이다.

‘젠장.’

검을 잡은 라트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헥사는 마을의 종탑 위에 내려앉았다. 벽돌이 떨어지며 먼지가 피어오르던 종탑은 결국 헥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헥사의 주변에 작은 마수들이 나타나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내더니 이내 마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라트반은 알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 마을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카를과 함께 있는 신전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그들이 헥사를 보고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전열을 정비해 마을로 달려갈 것이라는 라트반의 기대는 또 한 번 무참히 깨졌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카를이 뭐라 외치며 곧바로 뒤돌아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옆에 있던 신전 기사단 역시 조금 머뭇거리다 그를 뒤따랐다.

“하….”

라트반은 허탈한 신음을 흘렸다. 지금 신전 기사단이 마수로부터 등을 돌렸단 말인가?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놔두고? 그때 돌아서는 기사단에서 몇 명이 멈추더니 몸을 돌려 라트반을 향해 달려왔다. 그 와중에 저를 잡으라는 명령이라도 내렸을까. 하지만 가까이 온 자들은 라트반을 향해 소리쳤다.

“단장님!”

라트반의 눈이 커졌다. 단장의 자리는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다. 그런 자신을 아직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은….

라트반은 곧 모습을 드러낸 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저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고지식한, 신전의 규율이 곧 세상의 모든 법이라 믿었던 기사였다. 라트반은 그가 카를을 놔둔 채 달려와 자신을 단장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카를은 대신관이며 자신은 타락한 기사일 뿐인데.

그런 라트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기사가 소리쳤다.

“저는 신전 기사단입니다. 사람들을 외면하고 마수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단장님을 따르겠습니다!”

함께 달려온 기사들이 그 외침에 동의한다는 거친 기합 소리를 내었다. 라트반은 몸을 돌렸다.

거대한 헥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그의 곁에 있는 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헥사를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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